김천인민위원회
[ 金泉人民委員會 ]
목차정의해방 이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 조직되었던 민간 자치 담당 기구. 개설김천인민위원회는 1945년 9월 무렵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가 변경되어 발족한 것이며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김천 지역의 자치를 담당한 민간 기구이다. 변천1945년 9월 초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가 김천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천인민위원회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임종업이 위원장을 맡았고 같은 위원회의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임종업은 일제 강점기 김천 지방에서 청년 운동과 신간회 운동, 그리고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김천그룹의 주요 인물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1945년 11월 김천인민위원회 청년자살자동맹 맹원들이 50명의 한국인 관리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김천인민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공고를 공공장소에 부착하였다. ① 현직에 있는 모든 경찰은 임시직이며, 멀지 않아 인민위원회가 아놀드 소장의 포고에 의하여 정규 경찰을 임명할 것이다. ② 앞으로 자산 계급, 일제 하의 경찰과 관리, 일본 군대에 참여한 자, 일제의 비밀정보원, 8·15 이후 조선의 복구 작업을 방해한 자 등은 선거권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천인민위원회 [金泉人民委員會]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경상북도 남서부에 위치한 시. 개설
명칭 유래김천이란 지명은 문헌상으로는 역참 제도의 김천역으로 나타나고 행정상 지명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김천면으로 나타난다. 역은 487년(신라 소지왕 9)부터 설치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전국에 547역이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초기에 538역이 있었는데 김천역은 고려 시대 어느 때부터인지 분명치가 않다. 행정상 명칭으로서는 『세종지리지』에 김산군 관하 15면의 하나로 김천면이 나타난다. 변천삼한 시대에 감문국과 주조마국이 있던 자리였고 삼국 시대 신라가 감문국과 주조마국을 병합하여 감문주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신라 때는 김산군에 속하는 산간 촌락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에 역마 제도가 생긴 이후 인근 주민들의 물물 교환 및 주변 지역과의 교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고, 1905년 경부선 철도의 개통으로 농축산물의 집산지로 성장했다. 자연환경1. 면적 및 위치 [네이버 지식백과] 김천시 [金泉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옛 지명. 내용신라시대에는 풍무현(風茂縣)이라 하였으며, 감문군(甘文郡)의 영현이었다. 1018년(현종 9) 경산부(京山府)에 이속시키고, 공양왕 때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정종이 황악산(黃嶽山)에 어태(御胎: 임금의 태)가 봉안되었다고 하여 김산군으로 승격시켰다.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 때에는 대구부 관할의 김산군이 되었고, 그 이듬해 13도제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의 3등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이웃의 지례(知禮)ㆍ개령(開寧)의 두 군과 성주군의 신곡면(薪谷面)을 합쳐 새로 김천군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옛 김산군의 영역은 김천시 조마ㆍ대항ㆍ금릉ㆍ봉산ㆍ어모ㆍ감문ㆍ감천면 등으로 재편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산 [金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천이여송이 마신 샘 [ 金泉 ] 경북의 김천시는 금지천(金之泉)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임진왜란 당시 지원군으로 출동했던 명나라의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을 지나다가 남산의 샘물을 마시고, 그 ‘맛이 중국의 과하천(過夏泉)과 같다’고 찬양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덕산과 우두령(牛頭嶺)에서 발원하여 김천 시가지를 관류하는 감천(甘川)도 물이 단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일대의 지명은 양호한 수질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천 [金泉] - 이여송이 마신 샘 (땅 이름 점의 미학, 2008. 5. 15., 오홍석)
1894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건 정부의 수탈과 탐학에 반대하고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일으킨 운동. [역사적 배경] 김천 지방에 동학이 전파된 때는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시기였다. 1890년 11월 최시형은 경상북도 김천군 구성면 용호동 김창섭의 집에 머물면서 내수통문을 각 읍에 포고하였다. 김천에서 농민군이 조직된 시기는 대체로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장악한 이후일 것으로 보이며, 1894년 8월 무렵 김천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김천의 동학 조직은 김천장터를 비롯하여 대항면, 조마면, 구성면, 봉산면 등에 퍼져 있었다. 또한 김천군의 동학 주요 인물 가운데는 양반 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과] 동학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폐정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탐관오리 및 횡포한 부호에 대한 엄정, 불량한 양반과 유림에 대한 징벌, 노비 문서 소각, 칠반천인의 대우 개선, 백정의 평양립(平壤笠) 철폐, 청춘과부의 재혼 허용, 무명잡세 허용, 각종 공사채 무효, 인재 위주의 관리 채용, 토지 평균 분작 등이었다. 김천군의 지주들은 동학 농민군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다. 당시 승지였던 봉계의 조시영, 구성면 광명리 기동의 여영필, 여위룡, 배헌 등이 그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여위룡과 그의 아들 여영조가 가장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들 여씨 집안의 토지는 기동과 그 주변에 많이 분포해 있었는데, 이들은 소작농에 대한 탐학이 심했을 뿐 아니라 소작인들을 무시하는 태도 또한 심했기에 소작들인에게 인심을 많이 잃었다. 1894년 9월에는 김산과 지례에서도 일부 지주에 대한 동학 농민군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특히 김산의 여영조가 공격을 받았다. 1894년 9월 교주 최시형이 김산의 도집강 편보언(片甫彦)에게 기군령을 내리자, 편보언은 농민군을 이끌고 상주와 선산을 공략하였고, 선산군 해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또 편보언은 각처 접주들에게 기군령을 전달하였다. 이에 강주연은 죽정, 배재연(裵宰演)은 신하, 김정문은 기동, 강기선(姜基善)은 하기동, 권봉제(權鳳濟)는 장암, 조순재(曺舜在)는 봉계, 장기원은 공자동에서 농민군을 무장시키고 대기하였다. [결과] 김천 지방의 동학 농민군은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가 보낸 남영병에 의해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남영병은 9월 26일 선산에서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10월 5일 개령을 거쳐 김산에 들어왔다. 10월 6일 농민군 강기선은 남영병에 붙잡혀 곤장을 맞은 뒤 총살당하였다. 10월 7일에는 공자동에 있던 농민군의 근거지가 초토화되었으며, 10월 8일에는 지례에서 농민군 4명이 처형당하였다. 이로 인해 김천 일대의 동학 농민군은 패퇴하였고, 기존의 질서가 복구되었다. [의의 및 평가] 동학농민운동은 반제·반봉건 투쟁의 최고봉에 위치하였다. 위로는 갑오개혁의 추진력으로 작용하였고, 아래로는 반일 의병 투쟁으로 계승되었다.
교회연합 시위
[ 敎會聯合示威 ]
정의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경상북도 김천시의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이 벌인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한 지배 정책과 식민지 수탈을 기조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제창되었다. 이런 국내외적 정세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필요성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에 따라 1919년에 접어들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3월 1일을 기해 전 민족적인 만세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경과김천군 황금동[현 김천시 황금동] 황금동교회의 시위가 적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은 만세 독립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이들 종교인들은 3월 20일 밤 대항면 운수리에 있는 황악산에서 피어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결과시내에는 일제 관헌의 경비가 삼엄하여 한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종교인들은 시내 곳곳에서 일본 경찰의 탄압을 피하며 밤늦도록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탄압받은 사람은 없었다. 의의와 평가김천군 종교인들의 교회연합 시위는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확인케 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만세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회연합 시위 [敎會聯合示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경상북도 김천시의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이 벌인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한 지배 정책과 식민지 수탈을 기조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제창되었다. 이런 국내외적 정세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필요성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에 따라 1919년에 접어들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3월 1일을 기해 전 민족적인 만세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김천은 일제의 한국 침략의 상징이 된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만들어진 신흥 도시로 경북 내륙의 주요 산물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대구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파이프 역할을 하는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이용하여 만세 독립운동이 발발하는 주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경과] 김천군 황금동[현 김천시 황금동] 황금동교회의 시위가 적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은 만세 독립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이들 종교인들은 3월 20일 밤 대항면 운수리에 있는 황악산에서 피어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결과] 시내에는 일제 관헌의 경비가 삼엄하여 한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종교인들은 시내 곳곳에서 일본 경찰의 탄압을 피하며 밤늦도록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탄압받은 사람은 없었다. [의의와 평가] 김천군 종교인들의 교회연합 시위는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확인케 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만세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독립운동
[ 獨立運動 ]
정의일제 강점기 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전개된 민족 독립 운동. 개설일제 강점기 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도 일제의 침탈에 맞서 민족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개항 이후부터 한일 병합 조약에 이르는 시기에는 국권 수호와 회복을 위한 운동으로 의병 전쟁과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910년 국권 피탈 이후로 이러한 국권 회복 운동은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1919년의 3·1운동과 1920년대의 국내외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여 근대적인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 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로는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정책을 반대하고 조국 광복과 자주적 근대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항일 독립 운동의 전개로 이어졌다. 구한말 국권 회복 운동국권 회복 운동은 의병 전쟁과 계몽 운동, 그리고 구국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김천 지역의 경우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1896년 김산장의군(金山杖義軍)이 일어나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고 지역의 유림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지역 출신으로 김산장의군에 참여한 여중룡은 『남은유고(南隱遺稿)』에서 관련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1908년 지례군 거물리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일제 관헌 기록에 따르면 그 외에도 김천 지역에서는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지속적으로 일제의 침탈에 맞선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1910년대 독립운동과 3·1 운동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무단 폭압 정치 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 운동이 대한독립의군부,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결사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리고 1919년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내외 정세 변화를 계기로 민족 독립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3·1운동으로 나타났다. 1920년대 독립운동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은 국내외에서 무장 투쟁과 폭탄 테러 등의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여 근대적인 국민 국가 수립하겠다는 민족 운동으로 승화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임정 군자금 모집 및 군정서 모병 운동, 대한독립후원 의용단 등이 일어났다. 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독립 운동도 이념적으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930년대 독립운동1930년대 이후 항일 독립 운동은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수행을 반대하고 나아가 조국 광복을 목표로 국내외에서 전개되었다. 이 시기 김천의 대표적인 운동은 비밀리에 결성된 조공재건그룹 김천협의회의 활동이었다. 이는 1920년대의 지역 사회 민족 운동의 역량을 바탕으로 하여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전쟁 정책에 반대하면서 민족 독립을 위해 전개한 운동이었다. 의의와 평가김천 지역의 독립 운동은 유교적 전통이 기반이 되고 있었다. 개항 이후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유교적 가치와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위정척사운동이 나타났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유교적 전통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비밀 결사 운동이 펼쳐졌고 파리 장서 사건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또 일제 강점기 대표적 독립 운동인 3·1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독립운동 [獨立運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 김천지역 김천지역의 교회는 선교사 부해리(H. M. Bruen)에 의해 시작되었다.
1901년 3월15일 부해리(H. M. Bruen)가 김천지역 최초의 교회인 송천교회를 송천4리 하송마을 139번지(현재의 주소는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 하송마을)에 위치한 이사윤의 사랑방에서 설립하게 된다.
이후 송천교회에서 황금동교회가 분리되었는데 황금동교회는 김천시내에서는 최초의 교회로 설립되게 된다. 이때 황금동 교회의 설립자는 박상순으로서 황금동 183번지의 주택을 매입하여 황금동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부해리(H. M. Bruen) 선교사가 첫 당회장이었다.
김천지역의 이러한 교회의 설립과 분리의 역사(1901~1957)는 부해리(H. M. Bruen)가 직접 설립한 교회(송천교회, 광기교회, 복전교회, 송곡교회, 신암교회, 황계동교회, 신곡교회, 대신교회)와 부해리(H. M. Bruen)가 설립자를 도와서 설립한 교회(월명교회, 관기교회, 대양교회, 중감교회)가 있다. 그리고 현지인들만으로 설립된교회(류성교회, 지좌교회, 인의동교회, 하강교회, 작내리교회)와 기존교회에서 분립된교회(황금동교회, 능치교회, 평화동교회, 김천제일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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