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김천편)

편집인 | 입력 : 2022/05/07 [20:38] | 조회수: 246

 

 

 

 

김천인민위원회

 

[ ]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출처 디지털김천문화대전-김천인민위원회

정의

해방 이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 조직되었던 민간 자치 담당 기구.

개설

김천인민위원회는 1945년 9월 무렵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가 변경되어 발족한 것이며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김천 지역의 자치를 담당한 민간 기구이다.

변천

1945년 9월 초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가 김천인민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김천인민위원회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김천지방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임종업이 위원장을 맡았고 같은 위원회의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임종업은 일제 강점기 김천 지방에서 청년 운동과 신간회 운동, 그리고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김천그룹의 주요 인물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김천인민위원회는 1945년 9월 김천경찰서, 김천군청, 김천세무서, 김천읍사무소 등 김천의 주요 관공서를 차례로 장악하고 김천군의 자치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미군 진주 후 미군이 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군정을 선언함으로써 인민위원회의 활동도 차츰 힘을 잃어갔다. 김천인민위원회의 김천군 장악력도 미군정청 일행이 김천에 들어오면서 크게 약화되었고 김천 지방 관공서는 모두 미군정청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후 김천인민위원회는 1945년 11월에 열릴 전국인민위원회대표자회의에 보낼 대표로 임종업, 권상집, 이영희 등을 선출하였다. 한편 김천에서는 김천인민위원회와 정치적 목표를 같이하는 김천농민조합이 결성되었다. 김천농민조합은 1945년 12월에 열릴 전농 결성 대회에 참석할 대표로 김인수, 나정운, 조경환 등 3명을 선출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45년 11월 김천인민위원회 청년자살자동맹 맹원들이 50명의 한국인 관리를 공격하였다. 그리고 김천인민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공고를 공공장소에 부착하였다. ① 현직에 있는 모든 경찰은 임시직이며, 멀지 않아 인민위원회가 아놀드 소장의 포고에 의하여 정규 경찰을 임명할 것이다. ② 앞으로 자산 계급, 일제 하의 경찰과 관리, 일본 군대에 참여한 자, 일제의 비밀정보원, 8·15 이후 조선의 복구 작업을 방해한 자 등은 선거권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한편 일제 강점기 김천에서 활동했던 황태성은 1945년 12월 당시 경북인민위원회의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46년 이후 김천인민위원회는 미군정과 여러 차례 충돌했으나 미군정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힘이 약화되었다. 그로 인해 대구에서 10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김천군의 항쟁은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천인민위원회 [金泉人民委員會]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경상북도 남서부에 위치한 시.

개설



김천시 동쪽에는 금오산()[977m]이 솟아 있고, 서쪽에는 황악산()[1111m] 또는 황학산()이 추풍령과 이어져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며, 남서 방향으로 소백산맥의 일맥이 험준한 산악 지대를 이룬다. 특히 삼도봉()[1176m]은 충청북도·전라북도·경상북도의 3도 경계점이다.

대덕산()[1290m]에 이어지는 험준한 산지는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국사봉·수도산·단지봉에 이어지는 산지는 경상남도와 경계를 이룬다. 남동부에서는 성주군과의 경계에 형제봉()[1022m]·염속산·백마산·염암산이 이어져 금오산에 이르고, 북으로는 광덕산·백운산·국수봉 등이 구릉 지대를 이루며, 추풍령·면목령·주치령·우두령 등의 고개는 주요 교통로가 된다.

하천은 대덕산과 우두령과 삼도봉에서 각각 발원하여 김천시 지례면에서 합류하여 북류하는 감천이 황악산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직지천과 합류하여 북동쪽으로 김천시 농소면·개령면·감문면·아포읍을 거쳐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 하천의 감천 유역에는 개령평야가, 직지천 유역에는 금릉평야 등이 기름진 평야를 이룬다.

기후는 내륙 지방인 탓에 대체로 기온의 연교차가 크며, 겨울에는 소백산맥이 북서풍을 막아 추위가 덜하고 여름에는 매우 덥다. 연평균 기온 12.8℃, 1월 평균 기온 -2.7℃, 8월 평균 기온 24.5℃이며 연강수량 1273.3㎜이다.

명칭 유래

김천이란 지명은 문헌상으로는 역참 제도의 김천역으로 나타나고 행정상 지명으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김천면으로 나타난다. 역은 487년(신라 소지왕 9)부터 설치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전국에 547역이 있었고 조선 시대에는 초기에 538역이 있었는데 김천역은 고려 시대 어느 때부터인지 분명치가 않다. 행정상 명칭으로서는 『세종지리지』에 김산군 관하 15면의 하나로 김천면이 나타난다.

김산()이란 지명은 신라 경덕왕 이전까지는 향찰·이두 문자로 표기하던 것을 한자식으로 고치며 동잠()이던 지명을 김산으로 바꾸고, 지품천()은 지례()로, 감물()[]은 어모()로 했다. 즉 김천은 김산현에 속한 한 면()의 이름으로 김천면 내에 역이 있어 김천역이라 했고, 지례현·김산현·어모현은 개령군의 속현으로 고려 말까지 내려왔다. 조선 초기에 와서 김산현은 어모현을 합하여 김산군으로 되었다.

김천의 유래는 『금릉승람()』[1718, 여이명()]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즉 “옛날 금이 나는 샘이 있어 김천이란 이름이 생겼다. 그 샘물의 물로 술을 빚으면 맛이 그렇게 좋고 향기가 높아 그 샘물을 주천이라 했다. 그러나 그곳 주민들이 금을 샘에서 캐어 바치는 부역이 두려워 그 샘을 묻어 버려서 지금은 그곳을 알지 못한다. 과하주는 여산주[여산에서 나던 술-지금의 익산]·호산춘[문경에서 나던 술]과 더불어 국내에서 이름난 명주이다. 타지 사람이 김천 사람에게서 술 빚는 방법을 배워서 배운 대로 빚어도 이곳 술과 같지 않다. 아마도 샘물이 다르기 때문이리라”고 했다.

변천

삼한 시대에 감문국과 주조마국이 있던 자리였고 삼국 시대 신라가 감문국과 주조마국을 병합하여 감문주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신라 때는 김산군에 속하는 산간 촌락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선 초기에 역마 제도가 생긴 이후 인근 주민들의 물물 교환 및 주변 지역과의 교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했고, 1905년 경부선 철도의 개통으로 농축산물의 집산지로 성장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금산·지례·개령군 일원과 성주군 일부를 병합하여 김천군이 되었으며, 1949년에는 김천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천군을 금릉군으로 부르게 되었다. 1983년 금릉군 4개 리를 김천시에, 금릉군 2개 리를 선산군에 편입했으며 김천시 22개 동을 13개 동으로 통폐합하였다.

1995년 1월 김천시와 금릉군이 합쳐 도농 복합형의 통합시가 되었고 아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98년 13개 동을 9개 동으로, 다시 9개 동을 8개 동으로 통폐합했다가 2000년 성내동과 남산동을 성남동으로 통합하여 1읍·14면·7동으로 되었다. 2008년 용암동과 성남동[성내동]을 자산동으로, 평화동과 성남동[남산동]을 평화남산동으로 통합하여 1읍·14면·6동으로 되었다.

자연환경

1. 면적 및 위치

김천시의 면적은 약 1,000㎢로 경상북도 면적 1만 9000㎢의 5%, 전국 면적 9만 8992㎢의 1%에 해당한다. 김천시의 전체 면적 가운데 산지가 705㎢로 약 70%를 점하고, 경작지는 207㎢로 20%에 해당한다. 김천시 가운데 가장 넓은 면은 대덕면[98.278㎢]이며 이어 구성면[95.414㎢], 부항면[82.708㎢] 등의 순이다. 가장 좁은 지역은 감천면[27.651㎢]이며 다음으로 개령면[27.931㎢], 농소면[45.674㎢] 등의 순이다.

김천시는 경상북도 서남쪽 끝에 자리하여 서울에서 약 250㎞, 부산에서 190㎞ 떨어져 있고 대구와 대전의 중간 지점이다. 위도 상으로는 남쪽 끝인 증산면 황점리 북위 35°49′30″와 북쪽 끝인 감문면 송북리 북위 36°15′30″ 사이 47.8㎞에 걸쳐 있고, 경도 상으로는 동쪽 끝인 남면 부상리 동경 128°18′40″와 서쪽 끝인 부항면 하대리 동경 127°52′30″사이 38.8㎞에 걸쳐 있다.

『택리지()』에 “김산() 서쪽은 추풍령()이고 영서는 황악산()이다. 황악산·덕유산() 동쪽의 물이 합쳐져 감천()을 이루면서 동쪽 낙동강()에 흘러 들어간다. 유역에 도읍으로서 지례(), 김산(), 개령()이 있다. 선산()과 함께 관개의 이()를 누려 논이 기름지고 주민은 토지에 안주하여 죄짓기를 두려워하며 나쁜 일을 멀리하는 까닭에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고 했다.

2. 지질

김천시의 중앙을 남북으로 관류하는 감천을 기준으로 동쪽 일대는 대체로 화강암류이고 서쪽 일대는 편마암류의 지질이 분포한다. 편마암류가 분포하는 서쪽 산악 지대는 소백의 분포지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개마지괴, 경기지괴와 더불어 가장 오래된 육괴로서 중국 복건지괴와 연결되고 약 6억 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강암은 편마암에 비하여 침식에 약하므로 화강암 분포 지역인 감천 유역은 화강암 개척 분지로서 감천 유역 분지가 이루어지고 서쪽의 소백산맥 서주 지대는 편마암분포 지역으로서 침식에 강해 산악 지대가 형성되고 김천 지방에는 김천분지가 형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천시 [金泉市]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옛 지명.

내용

신라시대에는 풍무현()이라 하였으며, 감문군()의 영현이었다. 1018년(현종 9) 경산부()에 이속시키고, 공양왕 때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정종이 황악산()에 어태(: 임금의 태)가 봉안되었다고 하여 김산군으로 승격시켰다. 1895년(고종 32) 23부제 실시 때에는 대구부 관할의 김산군이 되었고, 그 이듬해 13도제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의 3등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이웃의 지례()ㆍ개령()의 두 군과 성주군의 신곡면()을 합쳐 새로 김천군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옛 김산군의 영역은 김천시 조마ㆍ대항ㆍ금릉ㆍ봉산ㆍ어모ㆍ감문ㆍ감천면 등으로 재편성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산 [金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천

이여송이 마신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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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김천시는 금지천()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임진왜란 당시 지원군으로 출동했던 명나라의 장군 이여송()이, 이곳을 지나다가 남산의 샘물을 마시고, 그 ‘맛이 중국의 과하천()과 같다’고 찬양한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대덕산과 우두령()에서 발원하여 김천 시가지를 관류하는 감천()도 물이 단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일대의 지명은 양호한 수질과 관련된 것임이 분명하다.

김천은 추풍령을 통과하는 영하취락()이며 경부선의 교통 요지로 등장하면서, 도시화가 촉진되어 1931년에 읍 승격, 1949년에 시 승격되었다. 현재 인구 규모는 14만 609명이고, 김천 부근에는 황악산의 직지사()가 자리하며, 관광지의 통과도시로 각광을 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천 [金泉] - 이여송이 마신 샘 (땅 이름 점의 미학, 2008. 5. 15., 오홍석)

 

 

1894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동학 농민군이 봉건 정부의 수탈과 탐학에 반대하고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며 일으킨 운동. [역사적 배경] 김천 지방에 동학이 전파된 때는 제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시기였다. 1890년 11월 최시형은 경상북도 김천군 구성면 용호동 김창섭의 집에 머물면서 내수통문을 각 읍에 포고하였다. 김천에서 농민군이 조직된 시기는 대체로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장악한 이후일 것으로 보이며, 1894년 8월 무렵 김천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김천의 동학 조직은 김천장터를 비롯하여 대항면, 조마면, 구성면, 봉산면 등에 퍼져 있었다. 또한 김천군의 동학 주요 인물 가운데는 양반 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과] 동학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폐정 개혁을 실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탐관오리 및 횡포한 부호에 대한 엄정, 불량한 양반과 유림에 대한 징벌, 노비 문서 소각, 칠반천인의 대우 개선, 백정의 평양립(平壤笠) 철폐, 청춘과부의 재혼 허용, 무명잡세 허용, 각종 공사채 무효, 인재 위주의 관리 채용, 토지 평균 분작 등이었다. 김천군의 지주들은 동학 농민군으로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받았다. 당시 승지였던 봉계의 조시영, 구성면 광명리 기동의 여영필, 여위룡, 배헌 등이 그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여위룡과 그의 아들 여영조가 가장 심한 공격을 받았다. 이들 여씨 집안의 토지는 기동과 그 주변에 많이 분포해 있었는데, 이들은 소작농에 대한 탐학이 심했을 뿐 아니라 소작인들을 무시하는 태도 또한 심했기에 소작들인에게 인심을 많이 잃었다. 1894년 9월에는 김산과 지례에서도 일부 지주에 대한 동학 농민군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특히 김산의 여영조가 공격을 받았다. 1894년 9월 교주 최시형이 김산의 도집강 편보언(片甫彦)에게 기군령을 내리자, 편보언은 농민군을 이끌고 상주와 선산을 공략하였고, 선산군 해평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또 편보언은 각처 접주들에게 기군령을 전달하였다. 이에 강주연은 죽정, 배재연(裵宰演)은 신하, 김정문은 기동, 강기선(姜基善)은 하기동, 권봉제(權鳳濟)는 장암, 조순재(曺舜在)는 봉계, 장기원은 공자동에서 농민군을 무장시키고 대기하였다. [결과] 김천 지방의 동학 농민군은 경상감사 조병호(趙秉鎬)가 보낸 남영병에 의해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하였다. 남영병은 9월 26일 선산에서 농민군을 해산시키고, 10월 5일 개령을 거쳐 김산에 들어왔다. 10월 6일 농민군 강기선은 남영병에 붙잡혀 곤장을 맞은 뒤 총살당하였다. 10월 7일에는 공자동에 있던 농민군의 근거지가 초토화되었으며, 10월 8일에는 지례에서 농민군 4명이 처형당하였다. 이로 인해 김천 일대의 동학 농민군은 패퇴하였고, 기존의 질서가 복구되었다. [의의 및 평가] 동학농민운동은 반제·반봉건 투쟁의 최고봉에 위치하였다. 위로는 갑오개혁의 추진력으로 작용하였고, 아래로는 반일 의병 투쟁으로 계승되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교회연합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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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출처 디지털김천문화대전-교회연합 시위

정의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경상북도 김천시의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이 벌인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한 지배 정책과 식민지 수탈을 기조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제창되었다. 이런 국내외적 정세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필요성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에 따라 1919년에 접어들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3월 1일을 기해 전 민족적인 만세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김천은 일제의 한국 침략의 상징이 된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만들어진 신흥 도시로 경북 내륙의 주요 산물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대구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파이프 역할을 하는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이용하여 만세 독립운동이 발발하는 주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경과

김천군 황금동[현 김천시 황금동] 황금동교회의 시위가 적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은 만세 독립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이들 종교인들은 3월 20일 밤 대항면 운수리에 있는 황악산에서 피어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결과

시내에는 일제 관헌의 경비가 삼엄하여 한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종교인들은 시내 곳곳에서 일본 경찰의 탄압을 피하며 밤늦도록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탄압받은 사람은 없었다.

의의와 평가

김천군 종교인들의 교회연합 시위는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확인케 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만세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교회연합 시위 [敎會聯合示威]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경상북도 김천시의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이 벌인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한 지배 정책과 식민지 수탈을 기조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제창되었다. 이런 국내외적 정세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필요성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에 따라 1919년에 접어들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3월 1일을 기해 전 민족적인 만세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김천은 일제의 한국 침략의 상징이 된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만들어진 신흥 도시로 경북 내륙의 주요 산물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대구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파이프 역할을 하는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이용하여 만세 독립운동이 발발하는 주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경과] 김천군 황금동[현 김천시 황금동] 황금동교회의 시위가 적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천주교와 기독교 신자들은 만세 독립시위를 벌이기로 하였다. 이들 종교인들은 3월 20일 밤 대항면 운수리에 있는 황악산에서 피어오르는 봉화를 신호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결과] 시내에는 일제 관헌의 경비가 삼엄하여 한 장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어려웠다. 그리하여 종교인들은 시내 곳곳에서 일본 경찰의 탄압을 피하며 밤늦도록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탄압받은 사람은 없었다. [의의와 평가] 김천군 종교인들의 교회연합 시위는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확인케 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만세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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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근대
출처 디지털김천문화대전-독립운동

정의

일제 강점기 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전개된 민족 독립 운동.

개설

일제 강점기 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도 일제의 침탈에 맞서 민족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개항 이후부터 한일 병합 조약에 이르는 시기에는 국권 수호와 회복을 위한 운동으로 의병 전쟁과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1910년 국권 피탈 이후로 이러한 국권 회복 운동은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면서 1919년의 3·1운동과 1920년대의 국내외 무장 투쟁으로 발전하여 근대적인 국민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 운동으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이후로는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정책을 반대하고 조국 광복과 자주적 근대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항일 독립 운동의 전개로 이어졌다.

구한말 국권 회복 운동

국권 회복 운동은 의병 전쟁과 계몽 운동, 그리고 구국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김천 지역의 경우 국권 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1896년 김산장의군()이 일어나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고 지역의 유림들이 적극 참여하였다. 지역 출신으로 김산장의군에 참여한 여중룡은 『남은유고(稿)』에서 관련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1908년 지례군 거물리에서도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일제 관헌 기록에 따르면 그 외에도 김천 지역에서는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지속적으로 일제의 침탈에 맞선 의병 항쟁이 전개되었다.

계몽 운동으로 김천 지역에서는 비밀결사 신민회에 김태연과 편강렬이 참여하였다. 또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적극 동조한 을사오적을 제거하려는 오적제거계획()이 추진되었는데, 김천 지역의 여영조·나인영·이기·오기호·윤주찬·김민석·민형석·최동석 등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1907년 경제적 계몽 운동의 차원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나자 김천에서도 금주단연회가 조직되어 국채 보상 운동에 동참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천 지역에서는 계몽 운동의 주요 방향이었던 학교 설립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1910년대 독립운동과 3·1 운동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무단 폭압 정치 하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한 독립 운동이 대한독립의군부,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의 비밀결사에 의해 전개되었다. 그리고 1919년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국내외 정세 변화를 계기로 민족 독립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3·1운동으로 나타났다.

이에 김천 지역에서도 서울과 대구에서 전개된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김천 시내를 비롯한 관내 주요 면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먼저 3월 11일 서울과 대구의 독립 만세 운동의 영향을 받아 김수길과 김충한이 중심이 되어 용두동 시위가 계획되었다. 이후 3월 20일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들이 연합한 교회연합 시위, 3월 24일 용두동 시위운동, 4월 1일 만천봉 만세 시위 등이 발생하였다.

또한 개령에서는 3월 24일부터 4월 6일까지 4차례에 걸쳐 독립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양천동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뿐만 아니라 일본헌병대 구내에 들어가 만세 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편지를 통해 일제에 대한 한국 지배의 부당성과 독립 의지를 표현하는 투서 운동도 일어났다. 3·1운동 직후 김천 지역의 유림은 유림 세력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독립 청원 운동으로 일어난 파리 장서 사건에 참여하였다.

1920년대 독립운동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은 국내외에서 무장 투쟁과 폭탄 테러 등의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여 근대적인 국민 국가 수립하겠다는 민족 운동으로 승화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임정 군자금 모집 및 군정서 모병 운동, 대한독립후원 의용단 등이 일어났다. 또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독립 운동도 이념적으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920년대 접어들어 지역에서는 대중 단체 결성과 활동을 통한 민족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고, 경상북도 독립 운동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 1920년 금릉청년회의 결성으로 시작된 청년 운동은 김천청년연맹, 김천청년동맹으로 확대 발전되어 지역 대중 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1922년에 결성된 김천형평지사는 조선조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온 백정에 대한 신분 차별에 맞서 신분 해방을 지향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여성 운동·노동 운동·소년 운동 등 대중 운동 단체가 속속 결성되어 일제의 침탈로 인한 대중들의 사회 경제적 위기를 원호하고, 대중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며, 식민지 현실을 자각케 하여 민족 독립의 의지를 북돋웠다. 1927년 국내외에서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가 협동 전선을 구축하여 민족 운동의 지도 기관을 설립하자는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일어나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김천 지역에서도 그 흐름에 따라 신간회 김천지회와 근우회 김천지회가 설립되어 지역의 사회 운동을 이끌었다.

1930년대 독립운동

1930년대 이후 항일 독립 운동은 군국주의 일본의 전쟁 수행을 반대하고 나아가 조국 광복을 목표로 국내외에서 전개되었다. 이 시기 김천의 대표적인 운동은 비밀리에 결성된 조공재건그룹 김천협의회의 활동이었다. 이는 1920년대의 지역 사회 민족 운동의 역량을 바탕으로 하여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전쟁 정책에 반대하면서 민족 독립을 위해 전개한 운동이었다.

의의와 평가

김천 지역의 독립 운동은 유교적 전통이 기반이 되고 있었다. 개항 이후 외세의 침탈에 대항하여 유교적 가치와 전통을 유지하고자 하는 위정척사운동이 나타났다.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후에도 유교적 전통과 일정한 관련이 있는 비밀 결사 운동이 펼쳐졌고 파리 장서 사건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또 일제 강점기 대표적 독립 운동인 3·1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3·1 운동 이후 독립 운동이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로 분화되고 대중 운동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김천 지역의 민족 운동은 전국적인 흐름에 동참하면서도 지역의 사회 문제를 민족 문제와 연관시키면서 독립 운동으로 발전되어 갔다.

1930년대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지역에서는 조공재건그룹 김천협의회가 결성되어 1920년대의 지역 사회 운동을 확대시키고 전국적 차원의 운동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민족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김천 지역의 독립 운동은 식민지 민족 운동이 전국적으로 승화되고, 국내외에서 끊임없는 독립 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독립운동 [獨立運動]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1) 김천지역

김천지역의 교회는 선교사 부해리(H. M. Bruen)에 의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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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3월15일 부해리(H. M. Bruen)가 김천지역 최초의 교회인 송천교회를 송천4리 하송마을 139번지(현재의 주소는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 하송마을)에 위치한 이사윤의 사랑방에서 설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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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자로는 김중권, 이사윤, 이영화로 나타난다. 송천교회의 설립당시 첫 조사는 방명원 조사였다. 방명원 조사는 청도군 청도읍 평양1리 출신으로 부해리(H. M. Bruen) 선교사를 따라 송천교회를 설립한 첫 해 조사로 시무했다.

이후 송천교회에서 황금동교회가 분리되었는데 황금동교회는 김천시내에서는 최초의 교회로 설립되게 된다. 이때 황금동 교회의 설립자는 박상순으로서 황금동 183번지의 주택을 매입하여 황금동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부해리(H. M. Bruen) 선교사가 첫 당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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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지역의 이러한 교회의 설립과 분리의 역사(1901~1957)는 부해리(H. M. Bruen)가 직접 설립한 교회(송천교회, 광기교회, 복전교회, 송곡교회, 신암교회, 황계동교회, 신곡교회, 대신교회)와 부해리(H. M. Bruen)가 설립자를 도와서 설립한 교회(월명교회, 관기교회, 대양교회, 중감교회)가 있다. 그리고 현지인들만으로 설립된교회(류성교회, 지좌교회, 인의동교회, 하강교회, 작내리교회)와 기존교회에서 분립된교회(황금동교회, 능치교회, 평화동교회, 김천제일교회)가 있다.

 

 송곡교회



 광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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