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의성)

의성은 토황, 토일, 토왜, 토주의 의로운 고장

편집인 | 입력 : 2022/05/02 [06:25] | 조회수: 409

  

 

  

의성의 지리적 여건

 

위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경상북도의 중앙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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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경상도가 좌우 갈라져있을 때는 경상좌도에 속해있었다. 의성은 경북 중앙에 속해 있어서 사방으로 다른 도시들이 연결되어 울진과 울릉, 독도를 제외 한 도내 지자체가 80km 반경 안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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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 다인면은 상주시와 예천군과 인접해있고, 비안면과 봉양면은 군위군, 사곡면과 춘산면은 청송군, 단밀면은 상주시와 구미시와 인접해있다. 신평면의 북부지역은 지리적인 관계로 안동 생활권에 근접해 있다.

 

위천-남대천으로 이어지는 낙동강의 지류가 군역을 동에서 서로 관통한다. 옛 의성군 영역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유역의 평지가 굉장히 적지만,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옛 비안군 영역은 대구/경북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평야지역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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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계 평야는 의성의 서부 지역인 의성군 안계면을 중심으로 단북면, 단밀면 등 3개면에 걸쳐 형성되어 있다. 면적은 약 1,000㏊이고 동서 길이는 약 8㎞, 남북 길이는 약 12㎞이다. 인공 제방을 축조하고 배수 시설을 설치하여 평야의 대부분은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으며, 일부 하천변은 과수원으로 이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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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의 서쪽으로 낙동강 본류가 흐르며, 낙동강의 주요 지류 중 하나인 위천이 의성 군내를 관통하며, 경작지가 넓고 평야지대가 비교적 많다. 특히 군 서부의 안계평야는 경주의 안강평야, 영천의 금호평야와 함께 경북에서 손꼽히게 넓은 평야이다.

 

그렇기때문에 농업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했던 1970년대 중반에만 하더라도 인구가 20만을 넘을 정도로 제법 큰 군이었으나, 이후 농촌 인구가 꾸준히 감소하기 시작하여 현재는 리즈 시절보다 인구가 크게 감소하였다.

 

면적 

  

의성군의 전체면적은 1,174.9㎢로서 남한 전국토 면적의 1.2%이며, 경상북도 면적의 6.2%를 차지하고 있다. 용도별로 가장 많은 임야는 830.5㎢(70.7%), 전답 214㎢(18.2%), 하천이 32.3㎢(2.8%)의 순이다. 군내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옥산면이 103.8㎢이며, 가장좁은 곳은 단북면으로 23.9㎢이다.

 

의성군내를 흐르는 하천은 모두 낙동강 수계(水系)에 속한다. 대부분의 발원지가 군내에 있기 때문에 하천의 길이가 짧고 유량도 풍부하지 못하다.

 

명칭

 

고려 초에 이르러 문소군의 성주가 견훤군을 막다가 전사했는데 이를 보고 의로운 고장, 즉 의성(義城)이라 하여 의성부로 승격되었다.

 

조선 초기에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비옥현과 안정현만 비안현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되어 독립하였으며 나머지 두 속현은 소속 주현에 흡수되었다. 조선 후기인 1895년(고종 32)에 전국이 13도로 개편되면서 의성, 비안이 군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의성군의 명칭은 고려초에 의성부로 확립되었고, 조선 고종에 와서 의성군이 된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비안군을 흡수하였으며 18개 면이 되었다. 1934년에는 산운면과 소문면을 통합하여 금성면으로 개칭하여 17개 면이 되었고, 1940년 11월 1일에 의성면이 의성읍(1읍 16면)으로 승격되었다. 1990년 4월 1일 안사출장소가 안사면으로 승격하여 1읍 17면이 되었다.

 

  의성군청 홈페이지

 

  

인구수는 약 5만 여명에 불과하다.

 

  의성군청 홈페이지

 

교통

 

고속도로는 중앙고속도로(의성IC)와 서산영덕고속도로(서의성IC, 북의성IC)를 이용할 수 있다. 2016년 12월 서산영덕고속도로 상주-영덕 구간이 개통되면서 서의성IC, 북의성IC가 신설되어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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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초까지만 하더라도 서산영덕고속도로 청주분기점과 의성군청을 기준으로 할 때 2시간이 소요되던 것이 1.5시간 정도로 30분이나 줄었다. 또한 서산영덕고속도로의 개통과 동시에 28번 국도의 의성군 서편 구간도 지속적으로 확장 중에 있다.

 

의성의 주산물, 마늘

 

상주의 주산물이 곶감, 사과이고, 영양의 주산물이 고추라면 의성의 주산물은 마늘이다. 의성마늘은 전국에서 가장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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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마늘 관련 기록은 1655년 나온 농가집성과 사시찬요초라는 책에 나타나는데, 본격적인 마늘 재배는 조선 중종 21년(1526년) 의성읍 치선리에 경주 최씨와 김해 김씨가 터를 잡으면서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의성마늘은 전국 마늘 생산량의 약 3.5%정도만 생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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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마늘은 오랫동안 저장하여도 품질이 잘 변하지 않고, 약리성분이 강하며, 매운맛, 쓴맛, 짠맛, 단맛 등 다섯가지 맛이 고루 함유되어 있어 다른 마른 맛보다 뛰어나며 양념 다지기를 할 때 즙액이 많아 적은 양으로도 양념효과가 좋으며, 김치를 담그면 오래두어도 잘 시지 않는 특성이 있다.


의성마늘은 조상대대로 재배하여 온 토종마늘이며 주야재배로 즙액이 많고 입안에서 독특한 향기와 매운맛이 감돌며 저장성이 강하다. 한지형 마늘로 전국1위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이를 이용한 의성마늘햄이 유명하다.

 

유적지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인 681년에 신라의 승려인 당나라 유학파 의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운사는 "높이 뜬 구름"이라는 뜻이다. 이는 최치원이 머물며 가허루(駕虛樓)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래 그의 호 고운(孤雲)을 따라 절의 이름을 개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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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건강과 장수를 기원하며 1904년 지어진 경북 의성군 단촌면에 있는 천년사찰 고운사의 연수전이 보물 제2078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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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이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고운, 해운, 해부이다. 868년 당나라로 건너가 과거에 급제한 후 당나라의 관료로 생활하였다.

 

신라 말 삼최(三崔) 중 한 사람으로,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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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은  6두품 출신으로서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병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승무랑 시어사로서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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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황소격문은 신라 제49대 왕 헌강왕 때 최치원(崔致遠)이 중국 당(唐)나라에서 벼슬하며 황소(黃巢)를 치기 위하여 지은 격문(檄文)이다. 최치원은 그 토벌총사령관인 고변(高騈)의 휘하에 종군하였는데, 황소가 이 격문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뛰어난 명문이었다 한다.

 

당나라 희종 광명 2년에 황소(黃巢)가 모반하여 복주를 점령하고 소란을 일으키자, 조정에서는 적을 치게 하였다. 이 때 최치원은 '토황소격문'을 지었다. 이 격문은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명문으로서 문필의 대공을 세웠다

 

중국 당나라의 황소黃巢(820-884년)는 중국 당나라 말기의 농민 반란 주모자이다. 그는 관리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에 낙방하고 소금 장사를 하였다. 당시는 정치가 몹시 어지러워 농민은 과중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마침 큰 흉년이 들어 민심이 동요한 틈을 타 왕선지가 난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난을 일으켰다. 이 난 때 신라의 최치원이 황소를 처단하기 위하여 당나라에 있으면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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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당나라는 혼란의 끝을 달리고 있었는데 부패한 환관들이 조정을 농락하고 자기들의 입맛에 따라 황제를 폐위하는 등 갖가지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동학란처럼 중국도 황소의 난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黃巢를 치는 것이 토황소격문이다.

 

중국의 소금 산지는 일정지역에 편중되어 이를 독점만 할 수 있다면 엄청난 부를 보장받는 것이었다. 소금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도 빈번하게 발생하였는데 당나라도 안사의 난 이후 부족한 재정을 이 소금을 전매함으로써 보충하고 있었다. 황소의 난도 소금전쟁이었다. 최치원은 당의 관리였기 때문에 난을 진압하는데 일익을 담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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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황소격문의 내용은 도()와 권()을 내세워 천하대세의 운행이치를 밝히고, 당나라 조정의 바르고 강성함과 황소 무리의 비뚤어지고 무모함을 대비시켜 사태를 올바로 파악하여 항복하도록 권유한 것이다.

 

특히, 이 글 중의 “천하 사람들이 모두 백일하에 능지처참할 것을 생각할 뿐 아니라 땅 속의 귀신들도 이미 암암리에 처치할 것을 의론하였다.”라는 구절에서 황소는 저도 모르게 상 아래로 내려와 꿇어엎드렸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귀국하여 헌강왕으로부터 중용되어 왕실이 후원한 불교 사찰 및 선종 승려의 비문을 짓고 외교 문서의 작성도 맡았으며,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阿飡) 관등을 받았다. 그는 당대 천재 문인가였다. 그러나 천재는 일찍 죽거나 반대파세력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모함은 류성룡에게도 나타난다. 인류의 역사는 모함의 역사이다. 예수도 모함을 당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했다.

  

최치원 역시 예외가 아니다. 진골 귀족들이 득세하며 지방에서 도적들이 발호하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이상을 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행방불명되었다. 그의 명문은 시무 28조에 나타났다.

 

시무 28조


「시무28조」는 성종이 친히 개봉(開封)하도록 별도로 밀봉(密封)해서 올린 것으로, 성종대에 이루어져야 할 정치개혁을 모두 28개 조목으로 나누어 최승로 자신의 견해를 솔직하게 피력한 것이다.

 

28조 중 현재 알 수 있는 내용은 22조까지이며, 나머지 6조의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이 6조의 내용에 대한 복원작업이 시도되기는 하였으나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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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28조 내용


1. 요지를 가려 국경을 정하고, 그 지방에서 활 잘 쏘고 말 잘하는 사람을 골라 국방을 맡게 하소서.
2. 불사를 많이 베풀어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일이 많고, 죄를 지은 자가 중으로 가장하고, 거지 무리들이 중들과 섞여 지내는 일이 많습니다. 원컨대 군왕으로서의 체통을 지켜 이로울 것이 없는 일은 하지 마소서.
3. 우리 왕조의 시위하는 병사는 태조 때엔 그 수효가 많지 않았으나 뒤에 광종이 풍채 좋은 자를 뽑아 그 수가 많아졌습니다. 태조 때의 법을 따라 날쌔고 용맹스러운 자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돌려보내 원망이 없도록 하소서.
4. 왕께서 미음과 술과 두부 국으로 길가는 행인에게 시주하나 작은 은혜는 두루 베풀어지지 못합니다. 상벌을 밝혀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면 복을 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니, 작은 일은 임금의 체통이 아니오니 폐지하소서.
5. 태조께서는 수년에 한 번씩 사신을 보내어 사대의 예를 닦았는데, 지금은 사신뿐 아니라 무역으로 인해 사신의 왕래가 빈번하니 지금부턴 사신 편에 무역을 겸하고, 그 밖의 매매는 일체 금지하소서.
6. 불보의 돈과 곡식은 여러 절의 중들이 각기 사람을 시켜 관장하며 비싼 이자를 주어 백성을 괴롭히니 이를 모두 금지하소서.
7. 지방관을 두소서.
8. 중이 마음대로 궁궐에 출입하며 총애받는 것을 금하소서.
9. 관료들이 조회할 때는 모두 중국 및 신라의 제도를 따라 공복을 입게 하고 높고 낮음을 구분하도록 하소서.
10. 중이 객관이나 역사에 숙박하면서 행패부리는 것을 금하소서.
11. 풍속은 각기 다른 것이므로 모든 것을 반드시 중국과 같게 할 필요는 없사옵니다.
12. 공물과 요역을 공평하게 하소서.
13. 연등과 팔관으로 백성들을 많이 동원하고 노역이 심하오니 원컨대 이를 감하여 백성이 힘 펴게 하소서.
14. 임금께서는 교만하지 말고 아랫사람을 공손히 대하며, 죄지은 자는 법에 따라 벌하소서.
15. 궁궐의 노예와 말의 숫자를 줄이소서.
16. 중들이 다투어 절을 짓는데, 지방 수령들이 백성을 동원해 일을 시키니 백성들이 매우 고통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를 엄히 금하소서.
17. 근래에 사람들이 재력만 있으면 다투어 큰 집을 지으니 그 폐단이 많습니다. 제도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헐어버리소서.
18. 신라가 말기에 불경과 불상을 만드는데 금은을 사용하여 사치가 지나쳤으니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근래에도 그 풍습이 없어지지 않았으니 엄중히 금하소서.
19. 공신의 등급에 따라 그 자손을 등용하여 업신여김을 받고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20.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일이고,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이니, 몸을 닦는다는 것은 다음 생을 위한 것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곧 오늘의 일이옵니다. 오늘은 지극히 가깝고 다음 생은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일이 또한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21. 우리 왕조는 종묘사직의 제사는 법대로 안 하면서 산악과 성수에 대한 제사는 많습니다. 그 제사들의 비용이 모두 백성들로부터 나오니 제사를 지내서는 아니되옵니다.
22. 광종이 노비를 안검하니 천한 노예들이 옛 주인을 해코지 하는 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런즉, 노비와 주인의 송사를 판결할 때는 분명히 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소서.

 

최근 문재인정권에 항전하는 현대판 최치원 조은산은 대통령에게 드리는 토문소격문에 해당하는 시무 7조를 쓰기도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또한 시무28조 못지 않게 명문이었다.

 

토문재인격문 조은산

 

토문격문이란 문재인 정권을 치는 격문이다. 조은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국민도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모방하여 시무 7조를 청와대 게시판에 올려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흉내내기도 하였다. 40만 이상이 그의 글을 보았고, 심지어 공중파에 까지 뉴스화되어 문재인정권의 실정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토황소격문이 아니라 토문재인격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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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무 7조 상소문’ 전문

  

塵人 조은산이 시무7조를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니 삼가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기해년 겨울

  

타국의 역병이 이 땅에 창궐하였는 바,
가솔들의 삶은 참담하기 이루 말할 수 없어
그 이전과 이후를 언감생심 기억할 수 없고
감히 두려워 기약할 수도 없사온데
그것은 응당 소인만의 일은 아닐 것이옵니다

  

백성들은 각기 분(分)하여 입마개로 숨을 틀어 막았고
병마가 점령한 저잣거리는 숨을 급히 죽였으며
도성 내 의원과 관원들은 숨을 바삐 쉬었지만
지병이 있는 자, 노약한 자는 숨을 거두었사옵니다

  

병마의 사신은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가려 찾지 않았사오며
절명한 지아비와 지어미 앞에
가난한 자의 울음과 부유한 자의 울음은
공히 처연 했사옵고,
그 해 새벽 도성에 내린 눈은
정승댁의 기왓장에도 여염의 초가지붕에도
함께 내려 스산하였습니다

  

하오나 폐하

 

인간의 본성은 본디 나약하나
이 땅의 백성들은 특히 고난 앞에 결연하였고
인간의 본성은 본디 추악하나
이 땅의 백성들은 특히 역경 앞에 서로 돕고 의지하였나니

 

아녀자의 치마로 돌을 실어
왜적의 골통을 부순 행주산성이 그러하였고
십시일반 금붙이를 모아
빈사 직전의 나라를 구해낸 경제위기가 그러했듯

 

이는 곧 난세의 천운이오 치세의 근본이 아니고
무엇이겠사옵니까

  

어느 대신은 집값이
11억이 오른 곳도 허다하거늘

 

현 시세 11프로가 올랐다는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며

 

어느 대신은
수도 한양이 천박하니
세종으로 천도를 해야 한다는

 

해 괴한 말로 백성들의 기세에
찬 물을 끼얹고

 

본직이 법무부장관인지 국토부장관인지
아직도 감을 못 잡은 어느 대신은
전월세 시세를 자신이 정하겠다며
여기저기 널뛰기를 하고 칼춤을 추어

 

미천한 백성들의
애 간장을 태우고 있사온데

 

과연 이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는 자들은
일터에 나앉은 백성들이옵니까
아니오면 궁궐과 의회에 모여 앉은
대신들이옵니까

  

또한 역사를 되짚어 살펴보건데
과연 이 나라를 도탄지고에 빠트렸던 자들은
우매한 백성들이었사옵니까 아니오면
제 이득에 눈먼 탐관오리들과
무능력한 조정의 대신들이었사옵니까

  

하여 경자년 여름

 

간신이 쥐떼처럼 창궐하여 역병과도 같으니
정책은 난무하나 결과는 전무하여 허망하고
실(實)은 하나이나 설(說)은 다분하니
민심은 사분오열일진데

 

조정의 대신들과 관료들은
제 당파와 제 이익만 챙기며
폐하의 눈과 귀를 흐리고
병마와 증세로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은
날로 극심해지고 있는 바,

  

소인이 피를 토하고 뇌수를 뿌리는 심정으로
시무 7조를 주청해 올리오니 부디 굽어 살피시어
조정의 대신들과 관료들은 물론 각지의 군수들을
재촉하시고 이를 주창토록 하시오면

 

소인은 살아서 더 바랄 것이 없고
죽어서는 각골난망하여
그 은혜를 잊지 않겠사옵니다

  

하여 소인 조은산은 넙죽 엎드려
삼가 시무 7조를 고하나니

 

토주사파격문 전광훈

 

전광훈목사는 토주격문을 행동으로 옮겨 문재인의 주사파 정권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전목사는 주사파를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토주격문을 실천하는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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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왜격문 류성룡

 

류성룡은 왜를 토벌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의 징비록은 사실상 토왜격문이었다.


조선 시대의 문신.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류성령이 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우의정 자리에 오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참모총장의 역할을 맡아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가장 괄목할만힌 일은 50세의 이순신을 벌탁한 일이다. 이외에도 전쟁에 대한  <징비록>을 써서 훗날 조선이 전쟁을 예비하도록 하는 혜안이 있는 천재문인이었다. 

 

 

 

서애 류성룡이 문경새재를 오가면서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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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에서 묵다>

  

살랑살랑 솔바람 불어오고

졸졸졸 냇물 소리 들려 오네

나그네 회포는 끝이 없는데

산 위에 뜬 달은 밝기도 해라

덧없는 세월에 맡긴 몸인데

늘그막 병치레 끊이질 않네

고향에 왔다가 서울로 가는 길

높은 벼슬 헛된 이름 부끄럽구나.

 

류성룡은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승장구하여 영의정까지 오른다. 

  

안동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본 서원의 전신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풍산유씨의 교육기관이었는데, 이를 1572년(선조 5) 유성룡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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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산서원 만대루

 

 징비록

 

징비록은 류성룡이 선조 25년(1592)부터 31년(1598)까지 7년 동안에 걸친 임진왜란에 대하여 적은 책이다. 징비록은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적혀 있는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을 인용한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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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난중의 일은 부끄러울 따름이다" 라고 하여 스스로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저술하였다.


징비록의 내용은 전쟁의 배경, 전투 당시의 상황, 조선·일본과 명나라간의 외교 관계, 주요 맹장에 대한 묘사와 전투 성과, 이후의 백성들의 생활상 등을 기록한 책으로 임진왜란에 대한 총체적인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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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7년 동안 조선군 총사령관으로서 조선의 육군참모총장의 역할을 하였다. 류성룡이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을 것이므로 임진란에서 일본에 패배하였다면 한일합방이전에 조선은 일본과 17세기 초에 이미 합방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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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어렸을 때 같이 지냈던 이순신의 공을 인정하여 정읍현감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파격천거하였다.  이는 신의 한수였다. 그리고 이순신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는 이순신의 뒤를 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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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조선후기의 실학자 정약용이 수원성을 만든 기중기를 발명하듯 그 역시 발명가였다. 천재들은 항시 창조적 능력이 있었다.  류성룡은 임진강에 칡넝쿨로 부교를 설치하여 대포와 군수물자를 이동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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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은 직업군인인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속오군을 주장하여 양반의 병역의무를 지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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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과감하게 세재개혁을 하여 가구별 징세를 토지별 징세로 하여 서민의 세금을 감세하고 부자들의 세금을 증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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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압록강 자유무역지대를 설치하여 무명, 소금을 수출하고, 식령을 수입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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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 류성룡함

 
대한민국은 현재 7천600t급(만재 1만600t급) 3척의 이지스 구축함을 보유하고 있다. 1번함인 세종대왕함을 시작으로 2번함 율곡 이이함, 3번함인 류성룡함을 성공적으로 건조해 각각 2008년, 2011년, 2012년 해군에 인도해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류성함의 명칭을 부여한 것은 류성룡이 임진란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류성룡은 지금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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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의 징비록은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유출되었고, 1695년(숙종 21년)에는 징비록 전체 내용에 조선의 행정 구역표, 조선 지도가 첨부된 '조선징비록'이 간행되기도 하였을 정도로 상세하게 적혀있었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주요 직책을 역임한 덕분에 당시 보고된 문서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징비록의 집필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당시 남인의 일원이었던 류성룡이지만, 징비록에서는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한다.

 

그는 명군의 원조를 중시하면서도 이순신과 조선 관민(官民), 의병의 공로를 특히 강조하여, 임진왜란에 있어서의 조선 중심 전쟁 사관을 확립하였다.

 

백선엽의 징비록

 

6.25 전쟁의 영웅 백선엽 장군도 <6.25 징비록>이라는 책을 쓴 바 있다. 백선엽장군은 터어키 군대에 대한 묘사를 한다.  백선엽은 징비록에서 투르크 전사들의 전공을 칭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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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크의 후예들의 용맹

 

썬더볼트 작전이 펼쳐지는 동안 유명해진 부대가 있다. 미 1군단 예하 미 25사단에 배속해 있던 터키 여단이었다. 이 부대는 아군이 처참하게 무너졌던 평북의 군우리 전투에서도 이름을 드러낸다. 그러나 중공군 공세에 맥없이 물러났다는 부끄러운 기록과 함께였다.

 

그러나 썬더볼트 작전이 펼쳐지면서 터키 여단은 결코 다시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의 싸움터는 당시 김량장으로 불렸던 용인 일대였다. 터키 여단은 김량장리와 신갈을 향해 진격했다. 미 1군단 오른쪽 전선을 담당한 터키 여단은 썬더볼트 작전의 개시일인 1월 25일 첫날에는 진격이 순조로웠다. 그러나 이곳을 방어하고 있던 중공군은 인근 야산에 이미 강력한 진지를 구축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튿날인 26일 터키 여단의 선두부대는 곳곳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펼쳐야 했다. 적지 않은 손실에도 터키 여단 선두는 중공군의 공격을 맞받아가며 싸움을 벌였다. 매우 격렬한 싸움이었다. 터키 여단의 이름이 아군 진영에서 오르내렸던 이유는 당시 벌어진 중공군과의 처절한 백병전(白兵戰) 때문이었다.

 

류성룡같은 전쟁의 영웅이 있었기에 이순신이 있었고, 현대에는 그러한 피가 백선엽장군에까지 흘러 낙동강전선을 사수하여 주체사상에 물든 북한군으로부터 한반도를 구하였던 것이다. 한국을 궤멸시켰던 주체사상이 오늘날 청와대까지 들어가 국가를 파탄으로 몰고가고 있다. 의성의 전쟁 영웅 류성룡은 조선을 왜로부터 사수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토일격문의 의성교회

 

의성의 교회들은 토일소격론에 앞장섰다.

 

비봉교회

 

1900년 3월 초 의성군 의성읍 비봉리의 김수영이 청도 장터에서 노방 전도 중인 선교사 배어드로부터 복음을 접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전도 활동을 펴고 가정 예배를 보면서 비봉 교회가 시작되었다. 1902년 의성군 의성읍 비봉동 748에 초가 4칸으로 첫 예배당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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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봉교회는 교육을 중시하여 1908년 사립기독개신학교를 세워 신도들의 자녀를 교육하였다. 그러나 이 학교는 1930년대 일제에 의하여 강제 폐교되었다. 당시 박봉순, 설봉화 장로와 설인철 구경모집사가 이를 반대하다가 일경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1912년 와가 8칸으로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21년 당회가 조직되었으며, 1936년 4월 함석 양제 콘크리트 132㎡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1944년 5월 일제의 강압으로 교회가 철거당했으며, 철거한 자재는 일본인 학교를 건축하는 데 쓰였다.

 

1979년 3월에는 93㎡ 규모의 교육관을 건축하였고, 1982년 12월에는 79㎡ 규모의 목회관을 건축하였다. 1994년 3월 99㎡ 규모의 봉사관을 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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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3월 선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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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계교회

 

 1903년 두 번째로 설립된 쌍계 교회는 초가를 기역자 모양으로 지어 남녀가 따로 예배를 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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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게교회는 경상북도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 있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 소속이다. 쌍계 교회는 김인옥, 이성준이 군위의 봉황 교회에 다니다가 1903년 의성군 비안면 신묘동에 초가를 매입하여 예배당을 마련하면서 시작되었다.

 

1903년 3월 15일에 교회가 설립되었으며 박영화가 초대 목사를 지냈다. 1906년 신묘동에서 의성군 비안면 쌍계동 572번지로 교회를 이전하였다. 1919년 3월 12일 쌍계 교회 박영화 목사, 박영달 장로, 박영신 형제가 일제에 저항하여 만세 시위를 일으켰으며, 이로 인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1925년 6월 17일 교회를 현 위치로 이전하고 예배당을 15칸으로 신축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교회가 폐쇄되었다가 해방 이후 집회를 재개하였고, 1951년 11월 27일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2002년 2월 17일 이슬비 선교회를 조직하였고, 2003년 10월 3일 『쌍계 교회 100년사』 발간 및 100주년 기념 예배를 보았다.

 

의성교회

 

 

 의성제일교회(통합)

  

 

1908년 초가 3칸의 기도소로 시작된 의성 교회는 불과 5년 만인 1913년에 기와집 30칸의 예배당으로 증축되었다. 이는 교세가 그만큼 급속히 신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의성교회는 일찌기 비봉교회에 다녔던 김기화와 김경찬, 김천특 신자들이 20리 길인 비봉에 왕래하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호미동에 기도처를 설립한 것이 1908년이었는다. 이것이 의성교회의 시작이다. 

 

1913년에 초가 3칸을 헐고 와가 30칸으로 건축하였다. 1919년에는 교회신도들이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에는 김익두목사를 초청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는 학술강습소를 설치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1919년 의성경찰에 의하여 강제로 폐쇄를 당하기도 했다. 

 

이교회를 담임했던 유재기 목사는 1937년 큰 부흥을 일으켰으나 '조선소년군'(1922)이라는 농촌계명단체를 창립하여 일제의 주목을 받게 되어 결국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유재기목사와 동료들

 

의성농우회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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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조선예수교 농우회(農友會) 발기총회(제17회 총회회의록 11쪽)가 발족됐다. 의성농우회는 평양장로회신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농촌경제활성화 사업으로 야학, 농사개량, 협동조합 등을 진행했는데, 기독교 지도자들의 반일사상 혐의로 사건화한 것이다.

 

유재기목사는 이 일에 주동이었다. 유재기 목사가 시무했던 경북 의성읍교회가 소속된 합동교단의 경중노회 100회사에는 1939년 7월 유재기 목사가 농민 복음운동인 농우회 사건으로 박대환 등 많은 성도들과 함께 의성경찰서에 검거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농우회는  평양장로교 학생들과 기독청년들이 중심이 된 농촌사업 연구모임으로 일제가 탄압하면서 농촌사회운동에 임하던 기독교 지도자들을 대거 검속된 사건이기도 하다.

 

이 사건으로 일제는 주기철 목사와 송영길 이유택 박학전 목사 등을 검속했다가 안동 군위 청송경찰서에 유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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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후임자인 의성교회 조선출목사까지 지독한 박해를 받아 다시 교회를 떠나게 되어 일제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한 교회이다. 이 교회는 훗날 의성제일교회(통합)와 의성교회(합동)교단으로 나뉘어졌다.

 

 의성교회(합동)

 

박곡교회 

  

박곡교회는 1904년에 설립된 118년 이상 된 교회이다.  1959년 9월 세계 교회 협의회[WCC] 가입을 두고 교회가 통합 측과 합동 측으로 분리된 후, 1969년 합동 교단에 가입을 하였으나, 1987년 11월 3일 합동 교단에서 통합 교단으로 소속을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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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는 의성군 안평면 금곡리에 사는 권수백의 전도를 받은 박곡리의 김학배, 이만기, 손용진, 최달모 등이 1904년 10월 16일 설립하였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1943년 교회가 폐쇄되었고, 다음 해인 1944년에는 친일파에 의해 교회당이 매각되어 해방 후 예배당을 신축하였다. 1992년 4월 7일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2004년 교회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의성의 기독교인

 

사랑의 교회 오정현목사, 예장통합교단의 총회장을 지낸 지용수목사, 광화문 세력을 이끈 전광훈목사가 의성출신 이다. 전광훈목사가 없었다면 주사파정부는 계속 정권의 명맥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 보수 일각에서는 전광훈목사가 나라를 지켰다고 보고 있다.

 

문재인정부는 친북, 친중, 반기독교적 정책으로 이어나가 이념적, 종교적 염려를 가져왔다. 여기에 주사파척결에 가장 앞장서서 항전한 사람이 보수 우파의 지도자 전광훈목사이다. 그는 광화문 대규모 집회를 이끌기도 했다.  이는 주사파를 척결하는 토주소격론의 집회이기도 했다.

 

 

  

 스포츠인


2018년 11월 의성군은 컬링의성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정했다. '컬링 의성', '컬링의 성(城)'도 되는 중의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의성은 스포츠와 거리가 있는 조그마한 도시지만,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컬링이 동계 올림픽의 인기 종목으로 급부상하여 의성은 컬링의 메커가 되었다. 모든 국민이 영미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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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

 

의성은 말그대로 의로운 고장이었다. 토황소격문, 토왜격문, 토주사파격문, 토일격문에 앞장선 사람들을 배출한 의로운 고장이다. 

 

의성출신인 최치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에게 의로운 상소를 올렸고, 류성룡은 이순신을 천거하고 징비록까지 작성하여 더 이상의 임진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 항일을 대비하는 사람이었다. 의성은 토일격론을 실천한 고장이었다. 특히 교회가 토일격론의 중심지이다.

 

의성군에서의 만세시위운동은 토일격론의 일환이었다. 1919년 3월 12일 비안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시발로 안평·봉양·장곡·신명·춘산면에서 4월 초까지 전개되었다. 

 

3월 3일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갔던 김원휘가 서울과 평양 등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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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곧바로 귀향하여 3월 6일 쌍계동 교회에서 박영달을 만나 서울·평양 등 전국에 걸쳐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을 전하면서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할 것을 촉구하고, 이튿날 안평면 괴산동교회 목사 박영화에게 평양의 상황을 알리고 함께 시위운동을 주도할 것을 상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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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교회들이 항일운동, 근대교육과 농촌계몽에까지 앞장서 의성이 의로운 고장이 되게끔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최근에 의성은 스포츠까지 축복을 받아 동계올림픽에서 컬링에서 은메달까지 확보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의성에는 100년이상 된 교회가 여러개 있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가 넘치는 의로운 고장이 되었다. 토황, 토일, 토왜, 토주의 고장이었다. 의성출신들은 의가 넘치는 고장이 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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