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하와이2)

편집인 | 입력 : 2022/04/28 [07:56] | 조회수: 609

 

한국의 이민사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이주와 식민시대 수탈. 징용 등 강제이주로 나뉜다.

 

하와이로의 이주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이주이다. 다행히 선교사들이 적극 참여하여 한인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한국이 깨어나기 위하여는 해외로 눈을 돌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국이 미국을 만났을 때 한국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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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한인들은 두가지의 이유로 1863년 연해주를 필두로 미국, 중국, 일본, 베트남, 호주, 카자흐스탄 등 전세계에 약 732만명(2021년 기준)이 진줄하였다.

 

러시아 16만, 중국 235만명, 미국 263만명, 유럽 68만, 일본 81만, 캐나다 24만, 중동 18만, 우즈베키스탄 18만, 호주 18만, , 베트남 12만, 아프리카 1만, 중남미 9만, 남아시아태평양 49만, 카자흐스탄 10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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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메이플라워호

 

그러나 어느나라 이든 한인들은 돈을 풍부히 갖고 떠난 이민이 아니었고, 더이상 한반도에서 살 수 없다고 판단, 경제적 자유를 위해 이민을 선택한 것이다. 러시아나 하와이로의 이민은 한국에서 먹고 살기 어렵다고 판단,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위한 자발적 선택이었다.

 

갤릭호라는 한국의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한인들은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위한 몸부림으로 메사추세츠가 아닌 하와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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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청교도들

 

영국의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9월 16일, 잉글랜드 남서부 플리머스에서  메이플라워호 (Mayflower)를 타고, 신대륙 아메리카 식민지, 현재의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도착했다. 이들이  ‘필그림 파더스’라고 불리는 ‘청교도’ (프로테스탄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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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의 승무원은 25에서 30명 정도였고 이민자 102명 중 35명만이 청교도(Puritan)였다. 이들 35명 청교도들은 영국 성공회와의 갈등과 종교적 박해를 피해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이주했다고 알려져 있다.

 

메이플라워

 

1620년 12월 플리머스에 상륙한 이들은 반수 이상이 추위와 괴혈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인디언에게서 옥수수 재배를 배워 최초의 혹독한 겨울을 타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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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주자들


그러나 영국인들과 달리 한인의 이주는 기본적인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하와이로 떠나기 위해서 인천부두에서 배를 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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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 도착한 한인들은 사탕수수농장에서 중노동으로 시달려야 했다. 하루에 10시간씩 일하고 한달 월급이 고작 1달러 50센트였다. 여권 한장 달랑 들고 출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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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는 미국 내 설탕 소비가 증가하면서 기업 형태의 사탕수수 농장이 조성되었다. 농장 운영에서 가장 큰 과제는 노동력의 확보였으며, 이에 따라 농장주들은 다국적 이민자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중국, 일본인들을 고용하였는데 노조파업이 심하자, 한국인들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와이 이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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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상 하와이의 사탕수수 산업은 매우 중요했으며 그로 인해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들은 산업을 확장해야한다는 결론에 인해 처음에는 유럽에서의 노동력을 수입하려고 했지만 조건이 여의치않아 아시아 쪽으로 노동력 수입의 눈길을 돌렸다.

 

중국의 노동자들

 

그리하여 가장 먼저 중국으로부터 노동력을 수입하여 중국인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오기 시작했으며, 그 후 1880년에는 일본인 노동자들을 하와이로 오게했다. 그로부터 20년 정도 후 고종이 노동 이민을 허락하여 한인 노동자들 역시 하와이에서 노동을 목적으로 이민을 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중국인들이 먼저 사탕수수농장에서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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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 노동자 집

 

일본의 노동자들

 

일본인의 노동자의 모습이 동상으로 만들어졌다. 일본 최초의 해외 이민은 1866년에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계약이민 153명이 떠났다. 1903년 86명의 조선인 이민자들이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상륙했으니 그 역사는 한국인에 비해 길다.

 

 일본인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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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음과 같은 주택에 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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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노동자들

 

한인 노동자들은 중국이나 일본 노동자들보다 못한 액수였다. 저임금 중노동을 하였다. 

 

우리나라사람들도 외국노동자들에 대해서 구타를 하는 등 비인격적인 대우를 하듯, 초기의 한인들도 채찍으로 얻어맞으면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내해야 했다. 이윤옥은 와이파후 사탕수수밭에서라는 시를 써 당시의 고통스러웠던 상황을 전해주고 있다.

 

 

                      와이파후 사탕수수밭에서


                                                                                      -  이 윤 옥

         오하우섬 와이파후 사탕수수 공장

         굴뚝 우뚝 솟은 곳 아래 옹기종기 모여 둥지 튼 조선인들

         그리운 고향 떠나 올 때
         고이 간직한 흑백사진 철지난 영화 포스터처럼 걸려있는
         좁은 방마다 물씬 묻어나는 고향의 정경

         빼앗긴 나라 소식에
         울밑에 봉선화 심고
         초여름이면 손톱에 붉은 물들이듯
         끓는 피 가슴에 넘치던  처녀들

         뙤약볕 사탕수수밭 중노동에
         시달려 받은 돈
         독립자금에 선뜻 내어
         나라 살린 그 마음

         임들은 비록 갔지만
         판잣집 울안 붉은 봉선화 꽃
         오늘도 붉게 피어
         임들의 뜨거운 피 전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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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메이플라워 호

 

청교도의 이민과는 한인들은 전혀 다른 삶이었다. 한인들의 메이플라워호는 혹독한 시련을 거쳐야 겨우 부활할 수 있는 십자가 메이플라워호 였다. 

 

  한인들의 메이플라워(갤릭호)


그들은 월급 1달러 50센트를 벌기위하여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위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하와이로 들어가 하루에 10시간씩 중노동의 일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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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은 다음과 같은 가옥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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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사탕수수농장에서 일을 하다가 끝내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하와이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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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는 하와이 노동자들의 동상대신에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렵탕이 설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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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들에게는 한국의 상황보다 낫다고 판단, 중노동은 하지만 희망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의복은 양복으로 바뀌어 갔다. 그러나 조금씩 의식주의 안정을 찾아갔다. 고생한 보람이 의상을 통하여 나타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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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을 때는 한복을 입었지만 서양에 있을 때는 양복을 입었다.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

 

그들이 입은 양복뒤에는 미국의 고마움과 한인의 정체성을 잊지않는다는 자세로 성조기와 태국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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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망국의 목전에 선 조국에 등 떠밀려 강제이주나 다름없는 하와이로의 이민생활, 노예나 다름없는 사탕수수 노역과 인종차별, 나라없는 설움을 견뎌내며 그들이 학수고대했던 것은 의식주의 안정과 국가의 안정이었다.

 

그것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그들은 하와이에서도 민족의 광복을 잊지 않고 태극기를 항시 지니고 다녔다. 오늘날에는 보수 우익세력으로 이념화되었지만 태극기부대는 항시 국가를 존중하는 편에 섰다. 주사파보다는낫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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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떠난 한인들에겐 그 어디에도 ‘지상낙원’은 없었다. 국내에선 외세에 휘둘리고, 국외에선 피부 색깔 때문에 차별을 받아야 하는 슬픈 디아스포라였다.

 

그럼에도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한인들은 조국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고, 일제 강점 이후 독립 자금을 대는 데에 앞장선다. 하와이 이민자들의 송금으로 세운 학교가 인하대학교이다.

 

인천 하와이 대학교


이들의 불행했던 삶들이 희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인하대학교였다.

 

'인하'의 이름의 유래는 인(仁)천의 하(荷)와이 라는 뜻이며, 미국의 MIT와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공과대학 설립을 목표로 1954년 3월 31일 초대 학장에 한국인 최초로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한 천문학자 이원철 박사, 초대 이사장에 이승만대통령의 수양아들인 당시 부통령 이기붕이 취임 하였다.

 

이 학교는 6.25가 끝나자마자 바로 1954년 4월 24일 신입생(179명)의 입학식을 가졌다. 1958년 3월 14일에는 대학원의 설립이 인가되었다. 다행히도 1968년 9월, 인하공과대학이 한진상사(주)에 인수되면서, 한진그룹 故 조중훈 회장이 재단 이사장으로, 성좌경 박사가 학장으로 취임하였다.

 

197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인하공과대학은 지금의 인하대학교가 되었다. 인하공과대학은 한양공과대학과 버금가는 학교였다. 뒤에는 한진그룹이있었기 때무니다. 초대 총장에 성좌경 박사가 취임하였다. 1984년 의과대학이 신설되었으며, 1990년 3월 의과대학 부속병원을 인천에 기공하여 1996년 5월 지하 3층, 지상 16층 규모로 개원했다.

 

1997년 10월 31일 한진그룹 부회장인 조양호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2002년 11월 17일 인하대 소유 기업인 한진그룹에서 473억원의 건립비를 지원하여 전자도서관 「정석학술정보관」이 2003년 9월 17일 개관했으며, 정석학술정보관은 당시 국내 최대 규모였다.

 

2009년 3월에는 법학전문대학원, 의학전문대학원이 개원하고 , 2014년 10월 우즈베키스탄에 타슈켄트 인하대학교(IUT-Inha University in Tashkent)를 개교하였다. 2014년 개교 60주년을 맞이하며 ‘60주년기념관’을 착공하였으며, 2016년 2월 준공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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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는 2017년 기준 중국(59), 미국(50), 일본(23), 프랑스(26), 러시아(11), 영국(7) 등 해외 53개국 345개 대학 및 기관과 자매결연을 맺고 교환학생, 공동연구, 해외교류학점인정제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명실공히 국제대학교의 위상을 갖고 있다. 서울에는 서울대가 있고, 부산에는 부산대학교가 있다면 인천에는 인천대학교가 아니라 명실공히 인하대학교가 초일류대학이 되었다.  

 

이외에도 인하대학교는 중국 샤먼대학厦门大学), 프랑스 르아브르대학, 이스라엘 하이파대학, 영국 헐대학, 브라질 포르탈레자대학, 말레이시아 펄리스대학, 독일 마그데부르크 대학 등 7개국 7개 대학과 ‘글로벌 U8 컨소시엄’을 결성하여 경영, 국제물류, 해양 및 첨단과학기술 등 4개 핵심전략 분야를 중심으로 학생교류, 커리큘럼 공동개발, 교수 교류 및 강의, 연구프로젝트 공동추진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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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놀룰루에는 인천 하와이 공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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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과 하와이는 동네 이웃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피땀어린 하와이 노동자들의 헌금으로 지어진 대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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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학교는 하와이 이주교민들의 작품이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인하대학교는 없었을 것이다. 해외 이주민들의 자금으로 형성된 민족대학이었다. 특히 이승만이 적극적으로 후원을 많이 하였다. 인하대학교는 사실상 이승만 대학이나 마찬가지였다.

 

인하대학교는 인하공과대학으로 시작이 되었다. 6·25의 와중이던 1952년 하와이 교포 이주 50주년 기념사업으로 뒤떨어진 한국의 공업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발의로 설립되었다. 이승만 없이는 인하대학교를 상상할 수 없다.

 

학교 설립에 필요한 재원으로는 이승만이 설립 운영하였던 한인기독학원(Korea Christian Institute)을 처분한 대금과, 하와이 교포들의 성금, 그리고 한국 거주민들의 성금 및 국고 보조 등을 기금으로 하고, 인천시로부터 교지를 기증받아 1954년 2월 ‘재단법인 인하학원’의 설립이 이루어짐으로써 금속, 기계, 광산, 전기, 조선, 화학공학 등 6개 학과가 설치되고, 1954년 4월 24일 인하공과대학으로 개교를 하였다. 이승만은 교육이 살아야 국가가 산다는 신념이 있었다.

 

이승만의 교육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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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2월 3일 '대조선국민군단'을 창설한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온 이승만은 교육·언론·선교 사업에 매진했다.

 

 

 ▲ 이승만 박사가 호놀룰루에 도착한 날(1913.2.3) 출영객들과 함께 찍은 사진.

  

이후 이승만은 1939년 11월 미 본토로 거주지를 옮길 때까지 30대 후반부터 60대 전반까지 하와이에서 세월을 보냈다.  

 

이승만이 한 일을 보면 1) 한인기숙학교. 한인여자학원(한인기독학원)을 통한 교육활동, 2) 한인감리교를 통한 종교활동과 한인기독교회 창립, 3) 동지식산회를 통한 산업활동, 4) 국민회. 교민단. 동지회를 통한 단체활동, 6) 순한글월간지 태평양잡지를 통한 언론활동  등이다. 태평양잡지에는 이승만이 박사학위논문(미국의 영향하에 성립된 중립론)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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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잡지에는 기독교를 국가건설의 기본사상으로 삼자고 하는 기독교민족주의 논리가 들어있고, 신생 한국의 정치체제로서 공화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정치체계상론이 담겨있다. 이박사는 특히 교육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실력있는 한인들을 양성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도 많이 나타난다.    

 

이해 9월 이 박사는 재미 한인학교의 효시가 된 한인중앙학원을 세웠다. 한인중앙학원은 1913년 이승만이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교명을 바꾼 하와이 한인 학교이다.

 

 

 

1906년 하와이 감리교회에서 한인기숙학교[Korean Boarding School for Boys]를 설립하였다. 1913년 9월 이승만이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하와이의 중심이 되는 학교라는 뜻으로 학교 이름을 ‘한인중앙학원’으로 바꾸었다.

 

이승만의 노력으로 30여 명에 불과하던 학생 수는 6개월 만에 99명으로 증가하였고, 1913년 가을 학기부터 여학생을 받아들여 남녀 공학으로 바꾸고 18명의 여학생이 한인중앙학원에 다녔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던만큼, 남녀차별을 하지 않았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한인중앙학원에 다니는 여학생들을 위해 1914년 10월 의연금 2,400달러를 모아 기숙사를 세우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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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7월 새로운 감리사에 윌리엄 헨리 프라이(William Henry Fry)가 임명되어 한인중앙학원의 재정을 감독하자, 이승만은 "한인들의 교육은 한인들이 맡아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1915년 6월경 한인중앙학원의 여학생들을 위한 한인여학원을 설립하였다. 고민하던 이승만은 결단을 내렸다. 1916년 가을 그는 한인 학생들에게 민족 교육을 시키기 위해 미국 감리교 선교부와 손을 끊은 것이다.

 

한인여학원 설립 이후인 1916년 6월 한인중앙학원의 학생 수는 44명이었던 반면, 한인여학원의 학생 수는 62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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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중앙학원의 운영이 부진에 빠지자 감리교총회에서는 1918년 한인중앙학원의 운영을 한인들에게 맡겼지만, 1918년 9월 결국 폐교하였다.

 

한인 최초의 남녀공학 학교

 

1918년 교민들의 도움을 얻어 기숙사를 갖춘 한인기독학원(Korean Christian Institute)을 세웠다. 그것은 한국인이 세운 최초의 남녀공학제 학교였다. 1928년 폐교 이후 양로원, 고아 숙소 등으로 활용됐다. 이 부지는 1950년 매각됐다.

 

 ▲ 이승만이 1918년에 설립한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의 학생과 교직원

이승만은 왼쪽 끝에서 네 번째로 흰옷을 입고 서있다. 건물 1층은 교회로, 2층에 교실, 3층에 여학생 기숙사

 

이승만의 광화문 교회

 

이승만은 1938년 4월에 4만여 달러의 건축경비를 들여 호놀룰루에 <한인기독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이 건물은 경복궁 대궐의 정문인 광화문을 본 딴 것이다. 이승만은 학교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해 한인기독교회(Korean Christian Church)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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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기독교회가 아니라 그야말로 광화문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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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훈목사는 이박사의 뜻을 실현코자 광화문을 이승만광장이라고 명칭하고 광야교회를 주도한 바 있다. 이는 이승만의 정신을 실현코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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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이승만은 서양교단의 통제를 받지않는 독립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한인들 가운데는 여전히 감리교회에 남고자 하는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인기독교회의 설립으로 한인 교회가 둘로 갈라지는 결과가 되었다.

 

이처럼 이승만이 교회의 분열을 각오하면서도 미국의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은 초교파적인 교회를 세우려한 데는 ‘한인기독교회’가 미국의 교파로부터 감독을 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것은 교민들의 헌금으로 이루어진 한인교회 재산이 미국의 교단본부에 귀속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가 어느 한 교파에 속한다는 것은 다른 교파의 한인들을 멀리함으로써 독립운동을 위해 힘을 모으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두철미 민족사상으로 가득찼다.  


우남 이승만 박사가 세운 하와이 한인기독학원의 매각대금이 인하대학 설립의 종잣돈이었다. 1921년 우남이 설립한 하와이 동지회도 1970년 동지회 건물을 매각한 대금의 반인 9만 5000달러를 인하대 장학금으로 전달했었다. 인하대학은 이승만의 작품이었다. 하와이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 대학이 인하대학교이다. 

 

하와이 교민들의 독립운동

 

하와이 이주민들은 한국의 독립에 대해서 하루도 잊은 날이 없었다. 백범 김구도 하와이 이주민들의 재정을 상당히 의존하고 있었다. 한인들의 삶은 고달펐다.


"낮이면 사탕 밭에서 살고 밤이면 농막에 들어가 밤을 지낼 때 피곤한 몸의 사지가 아프고 결려서 누었거나 앉았거나 편치 안 해서 전전 불매하던 것이 그들의 정경이었다. 그러한 형편으로 매일 10시간 일하고 69전을 받아 그날그날을 지냈으며 그같이 한숨과 눈물에 젖은 노력이 재미한인사회 건설과 조국광복 해외운동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 <재미한인 50년사, 김원용 지음> 혜안, 2004

 

이국땅 낯선 환경의 사탕수수 밭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이들 이민자들은 고국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1910년 일제의 조선 합병소식은 청천벽력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하와이 이민자들은 국가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군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한달에 1달러 50 센트 버는 돈을 갖고 수천불을 임시정부와 애국단체에 보냈다. 

 

얼마전에 EBS TV에서 하와이 애국단에 대해서 방영한 적이 있다. 이 단체는 백범일지에 하와이애국단으로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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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우·김경옥·김예준·김성옥·현도명·김태정·김형기·김기순 등의 발기로 비밀리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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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체는 1931년 9월부터 김구의 특무공작을 후원할 목적으로 조직하여 동년 11월 15일 거사자금으로 1,000달러를 지원하였다. 그 결과 1932년 1월 이봉창의거의 일왕폭탄투척사건과 동년 4월 홍구공원에서의 윤봉길의거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하와이 애국단의 존재가 하와이 내에 알려지게 되자 동년 2월 14일 마침내 정식 발족하여 임시정부의 후원단체로 적극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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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예준의 장님은 아직까지 살아있다. 아버지가 너무 인색해서 독립운동 자금으로 한국에 돈을 보낼 사람이라는 것을 절대 믿을 수 없다까지 하였는데 가족 몰래 돈을 보냈던 것이다.

 

"저는 김예준의 장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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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자금을 한국에 보내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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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들도 독립자금을 보내는데 열심을 다했다.

  

황마리아 지사의 횔동

 

2017년 3월 현재 하와이 지역 여성독립운동가 서훈자는 황마리아 지사를 포함하여 모두 5명인데 황마리아 지사, 전수산(1894~1969, 2002년 건국포장), 박신애(1889~1979,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 초기 하와이에서 미 본토로 진출), 강혜원(1886~1982, 황마리아 지사 딸로 후에 미 본토로 진출), 심영신(1882~1975,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 등이다.

 

특히 황마리아 지사는 경술국치를 당한 3년 뒤인 1913년 4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부인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조국을 돕는 일에 발벗고 나서게 된다. 조국을 돕는다는 것은 조국에 애국자금을 보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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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부인구제회는 나라에 경제적으로 후원하겠다는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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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로서는 2,000 불이라는 거금을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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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도 800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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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부인구제회가 독립군에게 보낸 영수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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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황마리아 지사의 사위 김성권도 1904년 하와이 사탕농장 노동자로 이민하여 오하우(Ohau) 에와(Ewa) 농장에 배치되어 일하면서 1906년 5월부터 1년간 기관지 '친목회보' 주필로 필봉을 휘두르며 한인들의 결속과 애국정신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따님인 강혜원 지사는 어머니 황마리아 지사와 함께 하와이로 건너와 가피올라니(Kapiolani) 농장에 배치된 뒤 일과 병행하여 하와이 마노아벨리(Manoa Valley) 여학교를 다녔다. 그 뒤 북미 중가주 롬폭(Lompoc)에 거주하는 김성권과 약혼하고 1913년 10월에 북미 캘리포니아(California)로 이주해 12월 9일 혼인, 다뉴바(Dinuba)에 정착하였다.

 

가족들이 모두 독립투사로 일하였다. 그들의 노동은 독립투사로서의 애국운동의 일환이었다. 그녀는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37년 8월 5일 이국땅에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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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노디와 안정송 추서 

 

2021년 9월 22일 오전 9시 30분(한국 시각 23일 새벽 4시 30분) 하와이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독립유공자 고故 김노디 애국지사, 고故 안정송 애국지사 훈장 추서식이 열렸다.

미국 하와이를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23일(이하 한국시각) 하와이 이민세대로서 최근 독립운동 공적이 발굴된 고 김노디 지사와 고 안정송 지사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김노디 지사는 대표적인 여성독립운동가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즉 모금활동에 열심이었다.

 

  김노디


그녀는 미국 오벌린대학 재학 중인 1919년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재미한인대표자회의에 참석해 일제의 여성 인권 유린행위를 폭로하고 성평등을 역설하면서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또 대한부인구제회 임원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1921년부터 미국 각지를 돌며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점을 인정받았다.

 

이외에도 추서를 받은 사람은 안정송이었다. 이화학교 선생이었던 안정송 지사는 하와이 이주 후 대한부인회와 대한부인구제회 임원으로서 독립운동 자금모집과 동포 교육에 앞장섰다. 광복 이후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 일원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했으며, 독립기념관이 세워진다는 소식에 1983년 하와이 독립운동 자료를 직접 들고 조국 땅을 찾기도 하는 등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안정송 지사


두 지사는 하와이 이민 1세대로 일제강점기 독립자금 모금을 지원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한 공적을 뒤늦게 인정받아 국가보훈처가 2021년 제102주년 3·1절에 두 지사에게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여기서 문 대통령은 "하루 1달러도 안 되는 품삯의 3분의 1을 떼어 300만 달러 이상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후원회를 결성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면서 "언제 들어도 가슴을 울리는 애국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이어 문대통령은  "118년 전 102명으로 시작한 하와이 동포사회는 이제 7만 명 공동체로 발전했고, 미국 전체로는 250만 명의 동포사회가 형성됐다"면서 "이민 1세대들의 헌신 위에서 후손들은 미국 사회로 당당히 진출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지역사회와 미국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2일(현지시각) 미국 하와이대 한국학 연구소에서 열린 독립유공자 훈장 추서식에서 참석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내리교회


이처럼 하와아는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으로서 제2의 한국이었다. 힘든 노동을 하면서도 이들은 대한민국을 한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의 구심점은 한인교회였다. 내리교회는 교인 50인을 보내면서 하아외에서도 한인교회를 설립하여 복음을 전할 선교사를 파송했다.

 

  인천 내리교회


내리교회는 한국 최초의 감리교회로서 고종 22년(1885년) 7월 19일 아펜설러 목사에 의하여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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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연합교회

 

1903년에 미주에 첫 한인교회가 세워져 미주한인교회는 금년으로 119년의 역사를 지니게 되었다. 그리스도연합교회이다. 미주한인교회는 한인 이민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한인 이민자들의 삶이 교회를 중심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미주한인 이민의 역사가 곧 미주한인교회의 역사이다.

 

 그리스도연합 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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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11월 인천 내리교회 권사이며 통역 요원으로 첫 이민선을 타고 온 안정수와 우병길 등이 피어슨 감리사의 주선으로 리버와 호텔 스트리트 모퉁이 집의 방을 빌려 첫 예배를 시작한 것이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시작이다.


1903년 첫 이민선 갤릭호를 타고 하와이에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이민 온 사람들 102명 가운데 50여 명이 인천 내리감리교회 교인들이었고, 그들은 그해에 곧바로 ‘그리스도연합감리교회’를 세웠다. 1904년에는 하와이에만 한인교회가 14개, 1914년에는 39개가 되었다.

 

하와이 이민과 해외 선교의 시작은 내리교회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존슨목사는 적극 이민을 장려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인들의 미주이민에 가장 공헌을 한 사람은 내리교회 존슨 목사이다. 신도들 중 50명이 하와이 이민길에 올랐다. 그들은 하와이에 도착하자 마자. 내리교회가 파송한 안정수전도사와 김이제의 주도하에 에배를 드렸고 1904년에는 내리교회가 파송한 홍승하전도사에 의하여 예배를 드렸다.

 

1903년 11월 3일 한인감리교회 선교회를 조직하고, 11월 10일 공식적인 첫 에배를 드렸다. 이것이 오늘날 하와이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이다. 존슨목사가 보낸 홍승하는 한국교회가 해외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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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초기부터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다.

 

 

 

에바교회는 1905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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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하와이 교포들은 교회에서 애국심을 고양하고 신앙심을 갖게 되어 하와이에 조금씩 노란 민들레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교회가 있는 곳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축복을 하셨다. 교회는 한국이나 미국 등 국경을 초월하여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쳤다. 교회가 있는 곳은 반드시 인물이 뒤따랐다. 하와이 교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와이 교포 중  이순기씨는 이승만과 독립운동을 같이 했던 사람으로 하와이를 거쳐서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이민 초기 세대였다. 1920년에 아들 새미리(sammy lee)를 낳았다. 부친은 당시 이민자로서는 드물게 영어에 유창했고, 대학에 입학하여 학위까지 받았음에도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직장을 얻지 못하고 식료품점을 운영했다.


새미 리는 12세였을 때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을 생생히 지켜보게 되고, 자기도 반드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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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미리는 157cm의 단신이라는 핸디캡이 비교적 덜한 종목으로 다이빙을 택한 것이다. 당시 유색인종들은 수영장 이용에 있어서도 많은 제약을 받았기 때문에 훈련에 애로를 겪는다. 일주일에 한 번 겨우 입장이 허용되었다.

 

수영장은 일주일에 한 번, 물을 갈기 전날인 수요일에만 유색인종의 출입을 허용했기 때문에 평소에는 모래사장 위에 다이빙 보드를 설치한 곳에서 연습을 해야만 했다. 리는 이 같은 인종차별을 딛고 1942년 유색인종 최초로 미국 다이빙선수권 10m 플랫폼과 3m 스프링보드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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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는 런던올림픽 남자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아시아계 미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거머쥔 데 이어 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도 같은 종목 우승을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

 

1948 런던올림픽 시상식 장면

 

새미리는 이때 착용한 수영복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했는데, 이는 2012년 등록문화재 제501호로 지정됐다. 

 

새미리는 은퇴 이후 1960년 로마올림픽, 64년 도쿄올림픽 지도자로 미국 대표팀을 이끌었고 밥 웹스터, 사모아계인 그렉 루가니스 등 미국의 걸출한 다이빙 스타들을 배출시켰다. 루가니스는 리의 지도를 받은 지 1년만에 미국 최연소 국가대표로 뽑혔다. 이후 1984, 1988 두 번의 올림픽에서 연속으로 10m와 3m 두 종목에 걸린 금메달을 싹쓸이하였다.

 

새미리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미국 한인 사회에서는 이민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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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비인후과 의학박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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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자랑스러운 한국인상, 2013년 한미우호단체가 수여하는 올해의 미국 한인 영웅상을 수상했으며, 특히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에는 그의 이름을 딴 새미 리 광장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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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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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도 친분이 돈독했다. 이후 1948 런던 올림픽에서도 각각 선수와 코치로서 런던을 찾아 친분을 다졌고 이후 올림픽이 개최될 때마다 만났다고 한다.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당시 개막식 전날에 손기정은 성화봉송 주자로서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을 달렸는데, 이 때 손기정으로부터 성화를 넘겨받은 인물이 바로 새미 리였다.

 

L.A 올림픽 성화봉송 손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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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16년 12월 2일(현지시간) 향년 96세로 타계했다. 

 

이외에도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의 손길이 미쳐 하와이 사탕수수 이주민 가족 중에 하와이주 대법원장이 나왔다. 이름은 문대양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무학자 후손 중에 대법원장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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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민 3세였다. 초기 사탕수수밭 노동자로서 독립운동자금을 보내고 6.25전쟁 당시 구호물자를 모았던 조부모와 부모 밑에서 뼛속까지 한인으로 자란 그는 1993년 미국에서 한인 최초의 대법원장이 됐다.

 

이외에도  빅 아일랜드 하와이 카운티 시장으로서 성공한 해리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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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사탕수수밭 노동자 후손이자 아시안 최초로 연방판사가 된 고 최영조(미국명 허버트 최 1916-2004)판사가 있다. 허버트 최(Herbert Choy 1916년- 2004년)는 한국계 미국 법조인으로, 최초의 아시아계 미국 연방법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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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버트 최는 1916년 하와이에서 한국계 사탕수수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4세 때까지 하루 12.5센트의 임금을 받으며 파인애플 가공공장에서 일했다. 그 후 하와이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에 진학해 법무박사 학위를 받아 법조인이 되었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연방 항소법원 판사로 임명된 후, 1984년 시니어 판사 지위를 얻었고, 2004년 사망으로 종신 임기가 만료될 때까지 판사로 재직하였다


이처럼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 자손 중에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하와이주 대법원장, 하와이 카운티 시장, 연방항소법원 판사가 출생한 것은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 였다. 사탕수수 노동자 무학자의 핏줄에서 최고의 유(有)학자들이 나온 것은 전적으로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였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100년 이상된 교회가 있는 곳에 그 땅은 반드시 인물을 산출하였다.

  
  http://lawtimes.net/3907 (하와이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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