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하와이)

편집인 | 입력 : 2022/04/27 [19:01] | 조회수: 717

한인들은 일제시대 이전부터 살기위하여 조국을 떠났다. 1863년에 러시아로 떠났고, 1903년에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러시아로의 이주

 

한국의 해외이민은 1863년부터 시작된다. 나라에 기근이 들고 관리들의 수탈과 가렴주구로 민중들은 더이상 살 수 조차 힘들다고 판단, 러시아 연해주로 이민을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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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땅 연해주

 

  연해주의 한인들

 

연해주는 과거 말갈의 땅이었고,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되어 발해가 세워지자 발해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발해의 15부 가운데 하나인 솔빈부가 우수리스크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는 여진족이 이곳에 살았다. 한인들은 연해주가 대조영이 세운 발해의 땅이였기 때문에 우리 땅이라 생각하고 이주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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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정착지, 연해주 지선허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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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1870년에 발생한 이북지역의 대기근은 러시아로의 대규모 이민을 일으켰다.1863년 12월에서 함경도 무산 출신인 최운보와 경흥 출신인 양응범이 농민 13가구를 이끌고 처음으로 러시아 포시예트(Posyet) 구역에 정착하면서 연해주 지신허 마을을 개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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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지신허 마을

 

지신허는 ‘계심하(鷄心河)’, ‘티진헤(Tizinhe)’라고 불리는 강의 이름을 중국식 발음으로 부른 것이다. 한인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우리나라의 한자 발음에 따라 ‘지신허(地信墟, 地新墟)’, ‘지신하(地新河)’ 등으로 표기하였다. 한인 러시아이주 140주년 기념사업회는 지신허가 최초의 한인 마을이라고 적고 있다. 

 

"이 곳은 연해주 핫산지역 비노그라드에 있었던 옛마을로서 1863년 함경도 농민 13세대가 두만강을 건너와 정착한 극동아시아 최초의 한인마을로 현재는 옛터만 남아있다. 그러나 1937년까지 1천 7백여명의 한인들이 모여 살던 매우 큰 마을이었으며 현재 50만에 이르는 CIS 지역 거주 한인들의 발원지가 되는 곳이다. 이에 우리는 이 비를 세워 한인이주 140년을 기념하고 한국과 러시이 친선우호를 돈독히 하며 우리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바이다 (2004년 5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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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신허 마을의 주민 수는 국경 지대인 육진 지방 농민들이 대거 월경해 넘어오면서 빠르게 늘어났다. 1863년 최초의 이주민 13가구에서 1864년 가을에는 30가구 140명으로, 1865년에는 65가구 343 명으로, 그리고 1866년에는 100여 가구로 크게 증가하였다. 1867년에는 500명이 지신허로 이주하였고, 1868년에는 900명이 국경을 넘었다.

 

중국의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경제유민(流民)으로서 당시 입국이 금지되었던 지역에서 농지를 개간하면서 신분상으로 불안정한 생활을 꾸려갔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약 100Km, 버스로 2시간 정도 떨어진 연해주 제2의 도시 우수리스크는 인구 20여만 명 중 고려인이 2만 정도(연해주 고려인의 1/2)가 사는 곳이다.  우수리스크에는 고려인 문화센터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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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대한제국에서 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어두운 현실 때문에 연해주로의 이주는 계속 늘어났다. 그곳에 정착한 한국인이 20만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양반과 부패한 관리들의 핍박, 또는 심한 굶주림을 피해 연해주로 간 사람들도 있었고, 일제의 탄압과 박해를 피해 그곳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구한말의 농민, 노동자들이 기근, 빈곤, 압정을 피해서 국경을 넘어 중국, 러시아, 하와이, 멕시코, 쿠바로 이주하였다.

 

하와이 이민

  

하와이 이민은 한인 102명을 태우고 갤릭호(Gaelic)가 호놀룰루 항구에 1903년 1월 13일 도착함으로 미주 한인 이민이 시작되었다. 인천 내리교회 교인들이 50명이었다.

 

그래서 초기의 하와이 이민은 기독교인들의 이민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반수 이상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이후에도 한인이 머문 곳은 항시 한인교회가 설립되었다. 하와이에도 이민을 가자마자 한인들은 교회부터 설립을 하여 교회는 한인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이주민들은 제물포에서 나가사키까지는 현해환을 타고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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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에 조국을 버리고 머나먼 태평양을 건너 신천지의 꿈을 안고 떠난 한인들은 나가사키에서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내렸다. 

 

이들은 이미 한국에서 미국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절반이 기독교인이 된 상태였다. 갤릭호는 자유를 찾아 떠난 한국인들의 메이플라워였다.

 

존스목사

 

1888년 배제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던 존스 목사는 1892년부터 인천내리교회에 시무하면서 교인들에게 하와이 이민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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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교회의 성실한 청년들을 동서개발에 취직을 시켜주는 등 교인들에 이민의 필요성을 말하자, 교인들은 신뢰를 갖고 이민을 하기 시작했다. 살길을 찾고자 함이었다. 당시 미국은 가나안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인천 내리교회는 안정수권사, 홍승하전도사를 최초 해외선교사로 파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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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화전도사가 이민단을 인솔하고, 안정수권사가 통역을 맡았다.

 

신학문에 열망을 가진 청년들, 도시노동자, 하급공무원, 한말의 군인, 정치망명객, 동학교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와이 이민광고는 월급을 1달라 50센트씩 준다고 하였다. 하와이 이민은 호레이스 알렌 의사의 역할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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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렌은 1884년 9월 제물포를 거쳐 조선에 들어왔다. 한국에 아펜셀러나 언더우드보다 1년 먼저 들어온 의료선교사였다.  미국 장로교 선교부 소속의 의료선교사인 그는 1883년 중국에 파견되었지만 사역은 실패하고 어렵게 조선으로 진출하여 주한 미국 공사관부 의사로 근무하다가 갑신정변을 맞게 된다.

 

이때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자객의 칼을 맞고 빈사상태에 빠지는데 알렌은 봉합수술과 극진한 치료로 민영익의 목숨을 살려낸다. 10여명의 한의사들과 어의가 총출동해도 침만 갖고서 지혈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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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신임을 얻은 알렌은 근대식 병원 설립안을 올렸다. 1885년 왕립병원 광혜원을 설립하게 되었고, 의료 사역에 매진한 공로를 인정받아 1886년에는 대한제국으로부터 정2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받기도 했다.

한국 근대의학은 이듬해 탄생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제중원(濟衆院)에서 시작됐고, 세브란스병원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영익은 생명의 은인 알렌에게 현금 10만 냥을 보내고 친형처럼 모신다. 알렌은 민영익보다 두 살 위였다. 알렌은 민영익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병원 건설 방안을 왕실에 올리고 민비와 고종의 신임을 얻어서 급기야 제중원을 연다.

 

알렌은 고종 황제의 신임을 받았고, 나중에 한국공사로 임명되어 하와이 이민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알렌은 당시 인천 내리에 있는 해외 기업사 데실리(Deshler, 은행가로서 홍콩 상하이 은행의 한국 인천 지사를 두고 한국서는 평국 은행으로 알려짐)와 만남으로 하와이 사탕 수수밭에 이민을 주선 하게 되었다 .  

 

이민자들이 고국을 떠나온 이유를 들어 보면 1. 아메리카에서 빠른 행운을 만들 것을 희망하였다. 2. 돈을 많이 벌어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3. 그들의 자녀들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매달 1달러 50센트 준다고 하였다.  

 

   - 고    시 -

대미국 하와이 정부의 명령을 받아 아래와 같이 공포함.

1, 하와이 군도로 누구든지 일신이나 혹 권속을 데리고 와서 주접 하고자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 편리하게 주선함을 공고함.
2, 기후는 온화하여 극심한 더위와 추위가 없으므로 각인의 기질에 합당함.
3, 학교 설립 법이 광대하여 모든 섬에 다 학교가 있어 영문을 가르치며 학비를 받지 아니함.
4, 농부를 위하여는 매년 어느 절기든지 직업 얻기가 용이한데 신체가 강건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은 여일 하고 장구한 직업을 얻기 더욱 무난하고 법률의 제반 보호를 받게 함.
5, 월급은 미국금전으로 매삭 15원(일본 금화 30원, 대한 돈으로 57원 가랑)씩이요, 일하는 시간은 매일 10시간 동안이요, 일요일은 휴식함.
6, 농부의 유숙하는 집과 나무와 식수와 병을 치료하는 경비는 고용하는 주인이 지급하고 농부에게는 받지 아니함.
7, 대한제국에 이 고시를 공포하는 권을 줌.

호놀룰루

1903년 8월6일
대미국 영지 하와이 이민감독겸
광고대리 사무관, 렌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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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설득력은 하와이에 대한 좋은 보고다. 1. 하와이는 날씨와 경치가 좋으며 살기가 좋다. 2.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륜 마차로 천국을 가자고 말하였다”라는 기록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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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어 남녀 50명의 기독교인이 싸인을 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의 20명이 자원하여, 1902년 안창수, 정인수 통역관을 대동하여 이민 길에 오른 것이다. 이들은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통역관 정인수도 목포에서 유진벨로부터 영어를 배운 기독교인이었다. 정인수는 당시 17세 였다. 유진벨로부터 부지런히 영어를 배워 통역을 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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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의 중요한 의의는 평등한 신분제 사회로의 전환과 해외독립투사로서의 활동이었다. 하와이 이민자들은 하루 10시간 사탕수수밭에서 중노동을 해서 번 달러를 모아 독립운동자금과 교육비로 고국에 보냈다.  1902년 12월 22일 제물포 항에서 이민자들이 출발하여 일본 나가사키에서 배를 갈아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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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19명은 신체검사에서 탈락한다. 나머지 사람들을 태운 갤릭호는 1903년 1월 13일 마침내 호놀룰루 항 외곽 샌드아일랜드에 도착한다. 여기서 또다시 신체검사를 하여 눈병을 앓던 16명이 배에서 내려보지도 못한 채 다시 인천항으로 돌아갔다. 결국 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 등 86명이 호놀룰루 항에 내린 첫이민자들이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난 한국의 청교도들이었다.  

 

  하와이 초기 이민자들


1905년까지 6,727인이 하와이에 상류했다. 이민자들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아메리칸 드림이 있었다. 호놀룰루 이민국의 자료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1월13일(1903년) 기선 겔릭호가 동양으로부터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는데 제1차 한인 이민 1백1인이 내도한 가운데서 수인은 안질이 있으므로 환송하고(귀국시키고) 기타 93인(부인 유아포함)은 오하우 섬 일루아 농장 목골리아 동리에 가서 주접(住接)하여 사탕수수 배양과 관개 등에 종사하고 그 뒤에 계속하여 1903년 말까지 16차 기선 편에 1천2백33인이 내도 하고 1904년까지 33차 선편에 3천4백34인이 내도 하고 1905년 7월 초순까지 16차 선편에 2천6백59인이 내도 하여 총계 7천2백26인 중에서 환송한 인수 4백79인을 감하고 실수 6천7백47인이 하와이에 상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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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한인 50년사>는 1910년 11월부터 1924년 10월까지 사이에 하와이에 들어온 여자가 9백 51명이고 미국 본토에 들어온 여자가 1백15명 그래서 모두 1,066명이 들어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남녀를 합하여 귀국한 사람도 1,246명이나 되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초기 이민자 중 약 1,246명은 얼마간의 돈을 벌어 한국으로 되돌아왔고, 약 2천 명은 1910년까지 캘리포니아로 재이주했다. 하와이 이민자들 사이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기만 하면 채찍을 맞는 학대에서도 벗어나고 두세 배의 돈벌이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샌프란시스코가 꿈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한 마음을 먹고 돈을 모은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운이었다. 

 

대부분의 한인들은 미 본토로 이주를 원했다. 미 본토는 가아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이 좋은 한인 1천여 명이 1905년부터 1915년까지 10년 동안 미국본토로 이주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미본토는 가나안이 아니었다. 본토로 간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대신 1900년대 초 미 중서부 지역의 탄광지대에서 주로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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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부터 20년까지 10년 동안 커네컷 광산회사에서 일했던 한인들은 모두 411명이었다. Lee(이씨), Park(박씨), Kang(강씨) 등의 성이 적혀졌다. 전 근무지와 입사일자, 퇴직일자, 일당 등이 비교적 자세히 쓰여져 있다 .이와 함께 개인별로 나이, 체중, 신장, 눈과 머리의 색깔 등도 자세히 기록돼 있다.

 

당시 탄광 노동자의 한국인 신상 카드는 다음과 같다.  

 

  고용카드

   

재미 지리학자 이정면(86.李廷冕) 유타대 명예교수는 유타, 와이오밍 등 미 중서부로 이동한 한인 노동자들의 흔적 발굴에 노력해왔다. 얼마전에 타계했다. 

 

1890년대 이전 한인들의 서부 광산 노동

 

그는 1860년대에 동,서부에서 각각 건설된 철도 교차지점인 유타주 골든 스파이크와 금, 은, 구리광산 등이 산재한 중서부에 노동력 수요가 많아 중국 등 외국 근로자들이 대거 몰려 들었고 이 와중에 한인들이 유입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한경일보  2010.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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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한인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전에 미서부 광산에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이교수는 솔트레이크시티 시립묘지 등의 묘비와 사망자 명부를 살펴보다 1890년대 이전 사망자 중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이름, 한글 묘비를 찾아냈으며 이는 1800년대 중반에 건설된 미 대륙횡단 철도공사에 한인들이 선로공(trackman)이나 채탄부(trackgang)로 일했음을 시사해준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이어 "여러 자료에 따르면 1860년대 학정과 기근을 견디지 못해 약 400만명이 조선 땅을 등졌는데, 중국 만주로 떠난 200만명중 일부가 중국인 노동자(Chinese coolies)들에 섞여 유타주의 철도 공사장으로 유입될 때 따라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하면서  "한인 광부 다수가 임금을 주지 않으려는 악덕 업주에 의해 폭발사고로 위장, 살해됐을 가능성"도 제기했다.

중서부 산간지대를 20∼30여 차례 찾아가 한인 흔적을 찾던 중 유타주 트레몬튼의 한 온천에서 만난 한 백인으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커네컷 광산에서 임금을 주지 않으려고 광부들을 잡아다 골짜기에 모아놓고 다 죽였다. 당시 광산에서 흔한 일이었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증언에 따라 인근 묘지 관리소의 매장자 명부를 열람한 결과 한인 이름을 다수 찾아냈다.

 

유타주 캐슬게이트 광산폭발 사고

유타주 캐슬게이트 광산( Castle Gate Mine. )에서도 1924년 3월 8일 지하갱도에서 두 차례 대폭발 사건이 발생, 171명이 생매장됐으며 이들은 한국인 3명을 포함해 대부분 24개국 출신의 외국인이었다.

 

미본토로 이주한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이 아니라 대부분 광산에서 일을 했다. 

 

캐슬게이트 광산

 

채탄작업을 위해 투입된 광부는 모두 172명 이었고 구조대가 구조에 나섰다. 하루가 지난 뒤 사체 1구를 찾아냈다. 가족들의 울부짖음 가운데 구조작업은 6일 동안 계속됐다. 그러나 생존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한인도 탄광폭발로 희생
 
172명 전원이 생매장을 당한 것이다. 희생자들 대부분은 외국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를 비롯 이탈리아, 러시아, 독일, 스페인, 체코, 아일랜드 등 24개국에 달했다. 희생자중에는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도 포함되었다. 이들은 캐슬게이트 묘지입구의 동판에 사망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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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게이트 묘지 입구의 ‘Historic Castle Gate Cemetery’ 동판에는 1891년부터 1960년대까지 광산에서 사망한 30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이 가운데 한국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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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공우 독립운동가 사망

한인 희생자 가운데 독립운동가 류공우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한인들이 몇 명 더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류공우( K.W. Ryu)를 제외하고는 묘비조차 없는 실정이다. 이 사진은 류 씨가 당시 미국 정착 후 찍은 사진을 경기도 포천 집의 아내에게 보낸 것이라며 증손 유재석(포천 거주.성 '유씨'로 표기) 씨가 연합뉴스에 제공한 것이다. 
 

  류공우

류공우 묘지


 

사망자 명단에 있던 한인은 총 3명 엄정칠, 류공우, 박00 였다.  Park. Y.S 는 1924년 3월 8일 43세로 죽었다. 

 
 
이외에도 캐머러(Kemmerer) 광산에서 발생한 탄광화약고 폭발사고로 8명의 광부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희생자중 한 명이 바로 한국인인 신씨(Shin. B. M.)이다.(다시쓰는 이민사, 남도일보, 2001. 5. 21, https://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9560)
 
이처럼 한인들은 하와이로 이민가기 이전부터 중국을 통하여 서부 광산에 정착되어 일을 하였고, 하와이에서 본토로 건너간 사람들 중 다수가 광산에서 일을 하였던 것이다.
 
그 중의 서너 명이 갱도폭발로 인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초기 이민자들은 주로 사탕수수농장, 광산에서 힘겹게 일을 하였던 것이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들도 힘든 초기정착 생활을 이어갔다. 
 
젊은 여인들이 낭만적인 연애도 할 여가도 없이 사진 한 장으로 아저씨뻘에 해당하는 사람들과 결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청춘여인들의 삶을 힘들게 했다.
 

사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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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을 둘러보아도 (임시)정부의 사업 발전은 고사하고 이름이라도 보전할 길이 막연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임시정부가 해외에 있는 만큼 해외 동포들에게 의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백범)

  

초기 하와이 이민자들 중에는 미혼의 젊은 남성 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결혼문제가 심각하였다. 또한 하와이의 한인 노동자들은 이동률이 높아 농장주들도 한인 노동자들을 안착시키기 위해 미혼 남성들의 결혼을 추진하였지만, 독신의 한인 남성들이 하와이 현지에서 타국인과 결혼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고국에서 이른바 ‘사진신부’를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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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시작으로 미국의 동양인배척법(Oriental Exclusion Act)이 제정된 1924년까지 14년 동안 1천56명의 조선 여성이 중매쟁이가 건넨 신랑감 사진 한 장을 들고 혈혈단신 태평양 건너 머나먼 땅 하와이로 갔다. 이역만리 항해에 나선 사진신부들의 나이는 16세에서 24세 정도, 학력은 대부분 무학이었다

  

사진신부로 온 여성들은 하와이가 지상의 낙원이라는 중매쟁이의 달콤한 말에 속아서 들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신랑이 신부를 불러들이기 위해 나이를 속이거나, 사진을 젊게 조작하였다. 사진신부는 1910년에서 1924년 사이에 약 6백 명에서 1천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와이의 이민이 늘어나게 된 것은 사진신부에 의한 결혼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인이민사회가 구축되기까지 사진신부들이 한 몫을 했다. 사진신부가 없다면 한인 이민사회가 형성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어린 신부들은 사진 한장에 모든 운명을 맡기었다. 남자들와 여자들의 평균 나이 차는 15살이었다. 대부분 10대후반의 어린 여인들이 혼기가 차자, 결혼을 지원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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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출신의 최사라는 조선최초의 사진신부(寫眞新婦)였다. 최사라의 신랑은 1909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총회장을 지낸 38살의 노총각 이내수였다. 최사라의 나이는 23살이라 남편과 15살의 차이가 났다. 그녀는 하와이에 도착해 가정을 이루는 한편 하와이의 조선여인들을 규합해 독립운동을 지원한 용기 있는 여인이었다. 최사라는 유진벨이 전한 복음을 듣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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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사라는 당시의 결혼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녕들 하시오. 나는 사라 최, 아니 최사라라고 합니다. 아마 많이들 낯설 거외다. 내 이름을 듣고 아 그 사람 하면서 무릎을 칠 사람은 천에 하나도 안 될 테지요. 조금은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나는 남편을 사진으로 처음 만났소. 그때 남편은 태평양 건너 하와이에 있었고, 나는 망해버린 조선 땅에 있었지. 무슨 얘기인지 짐작하시겠지?

 

나는 사진을 보고 신랑을 정하고, 혈혈단신 태평양을 건너갔던 천 여 명의 사진신부 가운데 1호 사진 신부였어요. 1978년께였나 하와이 초대 이민들에게 왜 이곳에 왔느냐는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껏 살아남아 있던 사진 신부들은 이런 대답을 했었지요.

 

“예수쟁이라고 놀림 받는 것이 싫어서, 남자들 횡포 때문에, 시부모를 안 모실 것 같아서, 하와이에는 빗자루로 돈을 쓸기 때문에 그걸로 친정을 돕기 위해서…”


1910년 11월 28일 내가 하와이에 발을 디뎠을 때 ‘남편’이 마중 나와 있었지. 내 나이 스물 셋. 그 당시 풍습으로는 혼기를 놓친 과년한 처자였지만 신랑 얼굴을 보니 고개를 들 수가 없더군. 부끄러워서였냐고? 아니 너무 기가 막혀서 그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신랑 이내수는 나이 서른여덟. 조혼 풍습 남아 있던 조선으로 따지자면 아버지와 딸이라고 해도 이상할 일이 없는 부부 아니었겠소. 그래도 나는 사진 신부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편이었고, 신랑은 신랑 후보군 가운데에서는 평균치였어요. 어떤 처자는 대놓고 신랑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소.

 

거기에다가 보내 준 사진은 대개 10년 전 사진이었거나 남의 좋은 차나 저택을 배경으로 멋들어지게 연출한 사진들이었으니 우리 사진 신부들 사이에 곡소리 드높은 것도 당연했지. 하지만 사기 당했다고 배돌려 돌아가기에는 태평양은 너무나 넓었어요. 결혼을 강요당하다가 정신 줄 놓아버린 사람도 있고, 악착같이 고국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었지. (중략)

 

그런데 우리 남편들은 어떻게 하와이로 오게 된 걸까요. 당시 하와이는 만성적인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어요. 백인 노동자는 너무 비쌌고 중국, 일본인들도 세월이 감에 따라 미국 본토로 건너가거나 파업을 일으키거나 등등 호락호락하지 않게 됐기 때문에 하와이 농장주들은 유순한 일꾼들이 절실했지요.

 

이 사정을 안 것이 구한말 오래도록 미국 공사를 지냈던 알렌이었어요. 알렌은 휴가차 미국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노동력 부족을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고, 한국인들을 끌어댈 생각을 하게 돼요. 알렌은 고종 황제에게 이렇게 얘기를 했다더군요.


“지금 백성들은 개국(開國)은 물론 진취(進就)를 원하고 있고 거기다 흉년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하와이로 보내서 척식사업과 신문화를 도입하도록 하는 게 현명한 선택입니다.”

 

김어진 할머니는 17살 때 13세 많은 남편과 결혼을 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민 박물관

 

유말순 할머니는 20세의 나이에 44세의 남편과 결혼을 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 편집인

 

이덕금 할머니는 25세 때 53세의 남편을 만났고, 이기문 할머니는 18세 때 41세의 남편과 결혼했다. 

 

  © 편집인

 

그러나 사진신부에 의해 태어난 2세들이 미국시민이 되고 아시아계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사진결혼에 대한 반대 여론이 일어났고, 1924년 미의회는 동양인배척법(Oriental Exclusion Act)을 통과시키면서 더 이상 사진신부는 미주지역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다.

 

 

  © 편집인

 

사진신부의 의의와 평가

 

미주지역에 사진신부는 연령차가 있었지만 한인사회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이었던 남녀 간의 성비 불균형이 해소되었고, 가정적 안정이 찾아왔다. 나아가 사진신부를 통해 가정과 자녀가 생기면서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인단체, 한인교회, 한인학교 등이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할 수 있었고 이들이 토대가 되어 여성단체를 만들면서 해외 독립군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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