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리적 여건과 역사
고령군은 대가야의 중심지로서 경상북도의 최남서단에 위치하고 있다. 인구는 2020년 2월 기준으로 32,220명이고, 지리적 위치는 동쪽으로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달서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경상남도 합천군, 남쪽으로는 경상남도 합천군, 창녕군과 접하며 북쪽으로 성주군과 접한다.
2. 교통
고령군은 대구·거창·합천·성주 등을 잇는 교통망이 발달되어 있다. 영남과 호남을 잇는 중심지로서, 광주 대구 고속도로가 통과하여 교통이 편리하다. 광주대구고속도로는 광주광역시 북구 문흥동을 기점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을 종점으로 하여 동서를 잇는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이다.
이처럼 고령은 광주대구 고속도로가 본군 동서간을 관통(19.8Km)하고 대가야읍을 중심으로 사통팔달하여 교통의 요충을 이루고 있다.
고령에서 역사적 인물로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어렸을 때 만화로 자주 읽던 어사 박문수이다.
3. 문화와 역사
고령군을 가면 온통 가야문화로 뒤덮여 있다. 가야의 고분들이 산을 덮고 있다.
이러한 가야는 난생신화로 시작한다. 난생신화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는 신화이다. 하늘에서 계란이 알이 려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족장은 특별하게 알에서 태어나 신비성을 더한다.
이러한 시조탄생에 대해 고대시대는 난생신화가 많았다.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이나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는 모두 난생신화를 갖고 있다. 삼국유사는 각부족국가의 시조들에게 난생의 의미를 부여했다.
가야의 난생설화
가야도 신라처럼 난생설화가 있다. 난생신화는 사람이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로서 고대는 어떤 민족의 시조 또는 왕후나 수장의 시조에 관한 난생설화가 많이 있다.
삼국유사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양산 기슭 나정 부근에 여섯 마을의 사람들이 모여 있을 때, 번갯불 같은 것이 땅에 떨어져 그 자리를 찾아가 보았더니 보랏빛의 큰 알이 있었고, 거기서 박혁거세가 태어났다.
실제로 박혁거세는 나정에서 태어났다. 얼마전에 나정의 유적지가 발견되어 혁거세의 나정출신은 역사적 사건이 되었다.
이 곳에는 우물의 흔적이 있었다.
이 우물터를 복원하면 다음과 같다.
이처럼 신화로 시작하는 신비의 가야문화도 난생설화로 시작이 된다. 김해의 금관가야, 고령의 대가야, 함안의 아라가야, 고성의 소가야, 성주의 성산가야, 진주의 고령가야 등 모두 난생설화에 의하여 태동된 부족국가이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은 고려 11대 문종(1075~1084) 때 쓰여진 가락국기(駕洛國記)를 소개했다.
“서기 42년 3월 계욕일(禊浴日)에 북쪽 구지(龜旨)(10마리의 거북이 엎드린 모양과 같다고 해서 이름 지은 산봉우리)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났다. 200~300명 정도가 이곳에 모이자 사람 말소리가 들렸는데 그 형체를 보이지 않고 소리만 났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하시길, 이곳에 와서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내려온 것이다.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위에서 흙을 파면서 노래하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라고 하면서 춤을 추어라. 그렇게 하면 곧 대왕을 맞이하게 되어 기뻐 춤을 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이 그 말처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얼마 되지 않아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자색 줄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땅에 닿았다. 줄의 끝을 찾아보니 붉은 보자기 속에 금상자가 있었고, 상자를 열어 보니 황금알 여섯 개가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면서 그 알을 향해 수없이 절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보자기에 싸서 안고 아도가의 집으로 가서 탁자 위에 두고는 모두들 흩어졌다.
12일이 지난 그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상자를 열어보니 여섯 개의 알이 어린 아이로 변해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뛰어났다.“
수로왕 난생신화의 내용을 담은 유물이 가야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유물이 발견된 장소는 금관가야의 본거지인 경남 김해가 아니라, 대가야 근거지인 경북 고령 지산군 고분이다.
대가야박물관에서 공개한 토제방울은 지름이 약 5㎝로, 호두보다 조금 더 컸다. 붉은색 천 위에 놓인 방울에는 희미한 선을 새겼는데, 육안상 거북 등껍데기 모양이 확실하게 보였다.
대가야 지배계층 무덤이 모인 지산동 고분군(사적 제79호) 탐방로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토제방울에 대해 연구원은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등장하는 수로왕 건국설화와 일치한다.
지름 5cm 가량의 토제방울에는 ①남성성기(구지봉), ②거북(구지가), ③관을 쓴 남자(구간), ④춤을 추는 여자, ⑤하늘을 우러러보는 사람, ⑥하늘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는 금합을 담은 자루 등 6종류의 그림이 독립적으로 새겨져 있다. 그동안 문헌에서만 나오던 건국신화의 모습이 유물에 투영되어 발견된 최초의 사례다.
원래의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번 발굴을 계기로, 알에서 시조가 태어났다는 난생설화(卵生說話)는 가야지역 국가들의 공통적인 건국신화에 담긴 핵심요소일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김해금관가야의 김수로왕에 대한 난생설화만 있었다.
가락국기에 나오는 노래인 구지가(龜旨歌) 가사(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에서 거북 머리는 신과 하늘을 상징하고, 거북은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동물로 알려져 가야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개자가 거북이라는 토템신화를 갖고 있었다.
고대시대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려고 하는 욕망이 있었다. 동학의 인내천사상은 사람과 하늘을 연결하고자 하였다.
세월이 흘러 고령에서는 땅과 하늘을 연결하기 위하여 많은 교회들이 자생적으로 세워진다. 거북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예수의 이름을 불렀다.
4.철의 나라
가야는 한반도에서 가장 품질 좋은 철을 생산하는 나라였다. 솜씨 좋은 장인도 많아서 가야의 철기는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철을 제련해 한때 가야는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군사력이 강했지만, 통일 국가로 성장하지 못해 점점 약해졌다.
5. 일본으로 간 가야문화
이러한 가야의 문화는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그러나 가야국이 없어지고 난 뒤 가야인들의 흔적은 곳곳서 나타난다. 통합된 신라나 백제로 간 기록과 함께 일본 열도로 대거 이주한 기록이 발견된다. 고구려의 남하와 신라의 침입 등 한반도의 정세로 인해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옮겨 갔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처럼 통일된 국가 체계를 갖추지는 못한 채 ‘간’이라는 부족장들이 각각 자신의 영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야는 통일국가로 발전되지 못하고 부족상태로 남아있다가 562년에 신라에 흡수되었다. 김유신도 원래는 가야출신이었다.
김유신은(595-673)은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 사이에 태어났다. 그는 멸망한 가야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이며, 할아버지는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무력이다.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지만 가야의 문화는 신라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령의 대가야는 16대 520년 간을 계승했지만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어 대가야군(大伽倻郡)이 되었다. 757년(경덕왕 16) 때 고령군으로 바꿨다.
6. 가야의 쇠퇴
가야는 철기문화를 발전시켰을 정도로 문화적으로는 앞섰지만 정치문화가 일찍 발달하지 못하여 신라에 병합된 것이다. 가야는 여전히 작은 나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힘이 약했던 것이다.
6세기 전반부터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휘말리게 된다. 혼자 힘으로 신라, 백제를 감당하기 힘든 가야는 왜에 지원을 요청하곤 했는데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동맹군으로 삼으면서 관계가 소원해진 가야에 지원이 어렵게 됐다.
가야는 결국 562년에 신라에 흡수되어 가야국은 한반도에서 사라졌다. 찬란했던 문화의 흔적만 남아있다.
가야출신 중에 김유신 장군이외에 지금까지 구슬픈 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감동시키는 가야금을 전한 우륵도 가야출신이다.
7. 유대인의 한반도 왕래설
1) 토기문자를 통한 유대인의 왕래설
김해의 금관가야에서는 토기에 히브리 문자가 발견돼 유대인이 한반도에 왔었다는 학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토기에 새겨진 글자는 히브리-페니키아문자로 되어 있다. 페니키아문자의 영향을 받은 고대 히브리어와 거의 유사한 면을 드러내고있다. 이는 유대인들이 가야에 왔다는 결정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5-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문화의 토기에 히브리-페니키아 문자가 나타나 가야와 이스라엘간에 긴밀한 유대관계가 있지 않았느냐 하는 의혹을 던져주고 있다.
포항의 방어진 제일교회 염동옥박사는 오랫동안 가야와 이스라엘과의 관계성을 문자를 통해서 연구하여 왔다.
부산 복천동박물관에도 토기에 문자가 새겨져 있다.
한국과 이스라엘, 역사의 비밀'을 쓴 염동옥박사는 주후 2-3세기에 우리나라에 유대인들이 들어와 고대 히브리어가 쓰여진 토기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유대인의 한국왕래설을 주장하고 있다.
게셀의 달력은 B.C10 세기에 기록된 비문으로 원시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터어키 이스탄불 박물관에 서장되어 있다.
금관가야의 문자토기
신라나 가야시대 토기를 보면 문자가 종종 나온다. 신라가 가야를 점령하였지만 가야의 토기에서는 문자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릇에 찍혀있는 토기의 문자는 대부분 토기제작소와 관련이 있다.
한 토기에는 한자로 대왕이라고 쓰여있다.
다음은 이집트의 상형문자로서 400개를 의미한다.
김해의 박물관에도 히브리문자와 유사한 다량의 토기가 발견되어 다양한 문화교류가 있었으며 유대인들이 한반도에 당도했다는 설을 부추키고 있다.
이러한 문자에 대해 염동옥씨는 서아시아의 문물이 들어왔거나 유대인들이 한반도에 왔을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토기에 새겨져있는 기호에 대해 페니키아와 고대 히브리어의 글자라고 해석한다.
서남아시아의 토기가 한반도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고, 페니키아와 히브리 문자를 아는 사람들이 한반도까지 직접 들어와 토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
대가야시대의 지역이었던 고령근처 합천에서도 문자가 있는 토기가 발견되었다.
2) 조형물을 통한 유대인의 왕래설
공통적으로 금관에는 새가 조형되어 있다. 새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이끄는 전달자로서 신성하게 여긴 동물이다.
왕관은 나무가지에 새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다.
이스라엘의 왕관에도 새의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과 솔로몬이 썼던 왕관이다.
3) 굽다리 토기를 통한 유대인의 왕래설
이스라엘 토기와 신라시대의 토기도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있는 고대의 토기도 가야 박물관에 있는 토기와 유사하다. 가야의 토기는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았다.
신라와 가야시대의 토기는 굽다리 토기이다.
3) 언어를 통한 유대인의 왕래설
특히 언어에 이어서 유사한 면이 많은 것은 유대인들과 교류한 흔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언어의 유사성은 단지 문물교류만 갖고는 어렵고 유대인들이 들어왔을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가야와 신라의 왕호와 국호는 히브리어 명칭이다. 가야왕 수로왕은 히브리어의 왕을 뜻하는 '사르'이며, 신라의 초대왕 박혁거세는 히브리어의 하키세에서 왔다.
하키세는 '왕자', '왕위'를 의미한다. 고대신라의 왕호는 차차웅, 니사금, 마립간으로 변하여 갔다.
차차웅은 히브리어의 차치인으로 '장군', '우두머리', '왕'이라는 뜻이다. 니사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사크는 '제사장', '군주'라는 뜻이다.
마립간은 최고의 왕호를 뜻한다.
히브리어 메레크, 말레크는 '왕', '군왕'이다. 엄마는 히브리어로 엠이고, 아버지는 히브리어로 '아브'이다. 형제는 히브리어로 '아으'이다. 하나, 둘, 셋은 히브리어로 하다드, 다베크, 샬로시이다.
만장일치를 추구하는 신라의 화백제도는 히브리어로 화박이다. 화박은 '의견을 모으다', '합의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4) 의식을 통한 유대인의 왕래설
출애굽기12장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우슬초 묶음을 갖다가 양의 피를 문 인방과 좌우설주에 뿌리면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1.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3.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출12:21-23)
이러한 풍속은 우리나라에게까지 임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피는 바르지 않았지만 팥의 붉은 색이 악귀를 쫏는다고 생각하여 문지방과 집안을 다니면서 팥을 뿌리고 다니는 습성이 있었다.
대문에 피대신 붉은 팥을 뿌리면 악귀가 집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문만 아니라 온 집안에 팥을 뿌리고 다녔다.
이러한 미신이 심각할 정도에 이르자 영조는 문지방에 팥죽뿌리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니 그만두라고 까지 했다
5) 중국과 몽골, 일본을 통한 유대인의 왕래설
유대인들이 일본까지 갔다는 증거는있다. 현재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중국에까지 온 유대인들이 한국을 통하여 일본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국와 일본에서 선교사로서 사역을 했던 스코틀랜드 사람 McLeod published 는 이스라엘 고대 역사의 요약에서 일본 행령에 대한 삽화를 제시하여 유대인들이 일본에 왔다는 설을 뒷받침했다. 그는 일본 사람들이 성경에 나오는 잃어버린 단지파의 후손이라고 판단했다.
일본의 유대인들
일본 메이지 시대, 무역상인으로 방일한 스코틀랜드출신 노먼 맥레오드는(Norman McLeod)는 일본과 고대 유대가 유사하다고 생각하여, 조사를 진행하여 처음으로 일본와 유대인이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일유동조론으로 부를 만한 주장을 구체화했다.
그는 유대인의 조상을 추적하기 위하여 일본과 한국에서 수십년 동안 머물기도 하였다. 일유동조론의 역사는 그의 일본에 관한 저작인 《일본 고대사의 요약 ( Epitome of the ancient history of Japan , 부제: Japan and the Lost Tribes of Israel)》라는 책에서 시작되었다.
In 1870 McLeod published Epitome of the Ancient History of Japan. According to Zvi Ben-Dor Benite, MacLeod had been a missionary who spent decades in Japan and Korea "searching for the true Israelites". and Illustrations to the Epitome of the Ancient History of Japan, claiming that the Japanese people included descendants of the Lost Tribes of Israel, who formed the aristocracy and traditional priestly castes. Evidence cited for this theory included similarities between the legends of Emperor Jimmu and Moses, the presence of "Portuguese-Jewish" racial features on some Japanese, and similarities between Shinto and Judaism.[
1901년에는 《유대대백과사전》의 뉴욕 출간판에 있는 사라진 10지파에 대한 항목에 인용되었다고 한다.
유대대백과 사전은 McLead의 글을 싣고 있다. 유대인이 일본에 들어와 잃어버린 지파로서 일본과 유대인은 공동조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단지파의 후손?
그는 또한 한유동조론(韓猶同祖論)도 주장한 바 있는데, 10지파의 주요 부족이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단 지파 등 일부 지파는 한반도에 남아 한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일부는 이 단 지파를 단군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한민족이 단지판의 후손이라는 것은 얼토당토한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의 유대인의 왕래 가능성
몽고로 들어간 유대인들이 고려에 침공을 하여 고려 여인들과 피를 섞었을 수도 있다. 특히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에 처음으로 페니키아언어에서 시작한 모음과 자음으로 형성된 한글 알파벳이 페니키아와 산스크리트어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이미 알파벳은 페니키아 언어에서 온 것이다.
"페니키아문자 이후 형태만 바꾼 다른 알파벳과 달리 독창적 형태의 과학적 문자인 한글의 우수성을 아는 것은 한국인의 기본이다.
동시에 페니키아 문자 이후 알파벳이라는 개념이 지구촌 전역에 전파되면서 조선사회까지 들어왔다는 배경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유대인들은 중국의 개봉까지 왔다.
중국의 유대인들
유대인들은 이미 주전 10세기 솔로몬왕때부터 중국과 무역을 하였다. 그리고 바벨론에 주전 586년에 멸망당한 후, 주전 2세기 중국의 주 왕조시대에 중국까지 왕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최근에도 2016.9.24. 뉴욕타임즈에서 중국유대인을 조명하기도 하였다.
송나라수도였던 개봉(카이펑)에는 명청시대 건립한 3개의 석비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존숭도경사기이다.
다른 하나는 명나라 홍치2년(1489년)에 건립한 중건청진사기이다.
내용은 유태교의 원류, 교의, 교구등을 기록하고, 개봉유태교사의 연혁을 기록했다. 청나라 강희 2년(1663년)에 건립한 비석도 이름은 동일하다.
강희문비문에 따르면 "교는 천축에서 기원했고, 주나라때 중주에 전해졌다"고 했다.
비석에는 유태인이라는 칭호가 나오지 않았고 단지 일사낙업(이스라엘)인이라고 했다. 유태인이라는 말은 주전 6세기 이후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을 보았을 때, 유대인들은 그 이전에 중국에 왔을 가능성이 있다.이는 6세기 이전에 이스라엘을 떠났을 가능성이 있다.
개봉(카이펑)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성서로만 인정한다.
모세오경은 기원전 9세기에서 4세기에 완성된다. 그들이 중국에 들어왔을 때는 구약이 완성되기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다가 개봉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종교를 천축교라고 불렀다. 그들의 조상이 인도에서 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에 인도에서 성서가 발견되었는데 인도서북부에는 이미 유태인의 성서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모세오경만 있었기 때문에 개봉유태인들은 '교경교'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다. 교경교는 바로 모세오경의 교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다가 개봉유대인들은 유태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주나라에 유대인들이 건너왔을 확률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유대인들이 주나라 보다는 중국의 한나라(기원 34년)때 왔다고 보고 있다. 한나라는 기원전 205년부터 기원 220년까지 계속된 나라이다.
유태인들은 상인이므로 실크로드를 통하여 광무제 건무10년(원34년)에 바빌론에서 유태인 대 학살이 있었을 때 중국으로 도망쳤다고 본다.
1900년 뉴욕에서 발행된 "중국 유태인"의 저자 Jhon Etrer에 의하면 기원 3-4년 후 곧 바로 다른 유대인 이민이 중국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당시 이주민들의 증언이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과 바벨론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는 증거와 일치하고 있음을 들고 있다.
또한 역사학자인 Parl Grace에 의하면 기원 231년경 바벨론의 혹심한 유대인 박해를 피해 다수의 유대인이 중국에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1926년 프랑스인 Prevost는 낙양에서 히브리어 비석조각을 발견한다. 이는 낙양에 유태인들이 살았다는 흔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나라때 유태인들이 중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프랑스 고고학자 Paul Pelliot(1878-1945)가 당나라때 돈황석굴에서 히브리어 기도문을 발견하기도 했다.
돈황석굴에서는 신라의 혜초가 쓴 왕오천국전이 발견되기도 한 곳이다.
혜초는 신라에서 인도까지 2만키로를 행군한 승이다. 그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맞먹는 왕오천축국전을 쓰기도 하였다. 그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당시 유태인들은 서양무기인 포를 바치고, 통상을 희망했다. 그러자 송나라 황제는 환영하여 유태인들이 정착하게 해주었고 유대교 회당까지 지을 수있도록 해주었다.
개봉에는 페르시아지역의 유태인들과 인도의 유태인들이 이주해 머물게 되었다. 개봉의 유대인 정착은 1127년 이전부터 이루어졌고, 인도와 페르시아로부터 왔고 약 1,000여명 정도였고, 1163년에는 회당을 세웠다.
일부 학자들은 개봉(카이펑) 유대인들이 잃어버린 10부족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중국 송나라 시대 개봉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아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황소의 난 때 많은 핍박으로 많은 사람들이 몽골제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황소의 난(黃巢-亂)은 당나라 희종 연간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875년~884년사이에 일어났다. 당나라 말기에 시작된 환관의 횡포와 인민의 수탈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토호나 상인층이 반당나라 경향으로 돌아선 것과 기근도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6) 최초의 유대인 중국 유입설
이상, 유대인들이 중국에 들어간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최근의 비교적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중국 측 문헌에 의하면 중국에 유대인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기원전 995년경으로 보고 있다.
솔로몬 왕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지난 때로서 다윗 왕을 거쳐 이스라엘의 영광이 최고에 달했던 때 중국과 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시님은 중국의 도시를 말한다.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이사야 49:12)
시님은 오늘 날 중국 남부의 '광동성'(廣東省), '복건성'(福建省)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서 고대 중국 대외무역 기지였다.
주나라 시대 유입설
유대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시기(BC586년에 포로에서 석방)이므로 일단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박해를 피하여 비단과 황금의 나라를 찾아 중국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한나라 시대 유입설
세 번째가 기원 58년에서 75년경 소수의 유대인이 중국에 들어왔고 기원 103년에서 117년 사이 한나라때 (후한의 화제, 안제) 중국 대륙의 혼란을 틈타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중국 땅 깊숙이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송나라 시대 유입설
네 번째 유입 시기는 기원 1000년경부터 1200년경 송나라 시대 때 인도와 동남아를 거친 유대인들이 중국에 들어왔다. 송나라는 중국문화의 꽃이라고 할 만큼 문화가 발달했고 유럽과도 많은 무역을 하였다.
원나라 시대 유입설
다섯 번째, 기원 123O년경 많은 유대인들이 육로를 통해 중국 북경까지 진출했다. 이때는 몽고가 동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로 역사상 동서양이 처음 만나는 시기였다.
몽고의 원이 송을 무너뜨리고 중국을 지배할 때였다. 유명한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들어 온 것도 이 때이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도 이스라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몽골의 유대인들
1329년 몽고 왕은 국교에 따라 외국인에게 세금을 무겁게 할 것을 명하였다. 장부에는 세금을 많이 내어야 할 사람의 명단과 세금을 잘 내지 않아서 처벌을 해야 할 사람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 대부분이 유대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은 세금을 안 내려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또한 1340년에는 남편이 죽었을 때 그의 처가 자식이 없는 때는 죽은 자의 형제가 취하는 의무를 가진다는 유대율법에 의한 관습을 금지하는 법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 대한 무수한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 만큼 많은 유대인이 몽골에 많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심지어 원나라 태종(쿠빌라이 칸) 왕비는 평생 소원이 그리스도가 태어난 예루살렘에 한번 가보는 것이 꿈이었다고 마르코폴로에게 말했다고 동방견문록은 적고 있다.
그리고 몽고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학문적 바탕이 없는 유목민인 몽고가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스페인, 터키 등 서구 깊숙이 침략하여 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였다고 본다.
유대인들은 중국의 박해를 피하여 몽골제국까지 들어갔다.대륙 깊숙이 도망친 유대인들은 징키스칸을 도와 몽고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몽고왕조의 부흥은 중국에 있어서 다른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몽고 대제국의 유대인세력은 대단했다. 마르코 폴로 자신도 당시의 유대인이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분명히 유대인들은 몽고를 도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고사에 보면 몽고조정의 주요관리 명단에 중국이나 몽고사람이 아닌 수많은 외국인(한문표기)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고려침공 때 한국에 들어왔을 가능성 커
몽골에 들어가서 세력을 가졌던 유대인들이 고려침공 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확률이 높다. 이와같이 몽골과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정착을 한 유대인들은 한국까지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일찍부터 중국으로 진출한 유대인들이 신라와 가야까지 흘러들어가 언어와 유적에 영향을 주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신라와 가야시대에 이미 근동의 유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경주 괘릉을 보면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8. 신라와 흉노족 김일제
신라의 왕손이 흉노족의 후손이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오늘날의 몽골족을 말한다. 문무왕비에 김일제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흉노인 가운데 한국사람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갖는 사람은 김일제(金日磾, BC 134~BC 86)일 것이다. 그가 우리나라 성씨 가운데 가장 많은 김(金)씨의 시조라는 견해 때문이다.
김일제는 중국 역사에 실재하는 인물이고, 그가 중국 金씨 한 분파의 시조인 것은 맞다. 중국에선 金을 진(jīn)으로 발음한다. 중국에는 황제(黃帝)의 아들인 소호김천씨(少昊金天氏)를 시조로 하는 金씨와, 흉노 왕자 김일제(金日磾)를 시조로 하고 金씨의 2대 계보가 있다고 한다.
문무왕비에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가 나온다.
그러나 김일제는 몽골박물관에서도 같은 내용이 있다.
몽골의 비석에서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가 새겨져 있다.
신라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는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4]'(5행),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6행)라는 구절이 있다. 투후는 김일제의 호이다.
또한 당나라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부인의 업적을 기리는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도 신라 김씨의 뿌리가 투후 김일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신라 김씨 왕족은 자신의 조상을 중국 한나라 때 투후를 지낸 김일제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집단무덤 유적으로는 부산 가덕도 북서쪽 바닷가에 위치한 장항유적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서 50여개의 유골 중에서 여러개의 유럽형 인류의 유골이 발견된 것이다.
한반도는 신전장이었는데 모든 팔과 다리를 펴서 묻는 신전장이 아니라 굽혀서 매장하는 굴장의 모습이 발견된 것이다.
두대골을 분석한 결과 유럽에서나 나타나는 H형 모계 유전자가 확인되었다.
이원준 서울대 박사는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는 인골형이라고 했다.
이광호박사는 한민족과 유럽인과의 관게를 결정하는 유전적 유형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독일에서 몽골을 거쳐서 한반도에 7,000년전에 한반도에 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충북제천 황석리에서도 유럽형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백인들은 기원전 1,000년부터 벼농사전래 경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거쳐서 한반도에 이주했을 가능성이 크다. 1962년 발굴된 충북 제천 황석리 고인돌의 주인공 인골은 그간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는 계기를 낳게 된다.
당시 인골을 분석한 결과 현재 한국인과 형질적으로 너무나 다르다는 결론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고고학자 김병모 씨는 황석리 지석묘(고인돌) 남자 주인공을 북유럽인, 즉 백인이라고 주장하기까지 이른다(경향신문 2003년 6월 30일 자 보도).
그렇다 보니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지배층에 백인이 존재했다는 이야기가 돼 버렸고 나아가 한반도인은 서양인 형질을 포함한 사람일 것이라는 이야기로까지 확대된다.
강원도 평창하리에서도 백인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다.
신석기시대에는 중국·일본과 구별되는 우리만의 빗살무늬토기를 가진 것만보아도 유럽인들이 한반도에 유입될 가능서은 얼마든지 있다.
유대인들 역시 앗수르. 바벨론, 헬라, 로마에 박해를 받아 일찌감치 전세계로 유람했고, 중국과 일본까지 들어간 것을 보았을 때 한반도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역사 시대에 들어와 서역인이 한국으로 흘러들어오는 경우는 드물지만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선사 시대의 인골에서 나타나는 코카서스 인종의 비율은 역사 시대에서 확인되는 정도의 유입을 크게 웃돈다.
백인의 유골은 서몽골에서도 발견이 된다.
이들은 다음의 경로를 통하여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이다.
흉노족인 몽골족이 낙랑군으로 되었고 고구려에 멸망함으로서 이들은 신라와 백제까지 쫏겨가 거기서 정착하였다.그러므로 낙랑군을 통하여 유대인들이 신라에 들어았을 확률은 얼마든지 있다.
이처럼 회화의 유사성과 언어의 유사성이 신라와 가야시대의 토기와 호칭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이는 비단길을 건너서 온 유대인들이나 서역사람들의 영향일 수가 있다.
유대인들은 중국이나 일본까지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한반도에도 유대인들이 충분히 왔을 가능성도 여전히 있다.
잊혀진 10개의 지파중 하나의 지파가 한반도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도자기의 문자나 국호와 왕호에 있어서 히브리식 영향은 충분히 유대인의 한반도 왕래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있다.
9. 어사 박문수
전설적인 암행어사 박문수는 고령출신이다.
고령출신인 박문수(朴文秀, 1691년 10월 28일(음력 9월 8일) 출생 ~ 1756년 5월 22일(음력 4월 24일) 별세)는 조선 후기의 영조시대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암행어사와 조선국 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백성편에 서서 지방 향리들의 수탈과 탐욕에 대해 철퇴를 가하기도 했다. 그는 백성들의 영웅이었다.
암행어사들은 도량형을 들고 다녀 관리들의 수탈을 자로 재어 꾸짖었다.
이 도량형을 갖고서 지방관리들의 부정축재를 재기도 했고, 규격을 무시한 형구로 지나친 형벌을 가하지 않았는지 판단했다.
어사 박문수는 1727년에는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기용되자 어사로서 부정한 관리들을 적발했고,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종사관으로 출전하여 전공을 세워 경상도 관찰사에 발탁되었다.
1730년 박문수는 호서지방의 어사로 나가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힘썼으며, 1734년에 진주사 부사(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앞서 안동서원을 철폐 시킨 일로 탄핵을 받아 풍덕(豊德) 부사로 좌천 되기도했다.
1741년(영조 17년) 어영대장을 거쳐 함경도 진휼사로 나가 경상도의 곡식 1만 섬을 실어 와서 기민(飢民)을 구제하여 송덕비가 세워졌다.
그는 가재도구와 관이 바다를 덮을 정도로 영남까지 떠 내려오자 재해가 있을 줄 판단했다. 당시 영남 관찰사로 있었을 때였다.
그래서 쌀 3,000섬을 이북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소론이었던 박문수는 암행어사 활동을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녀 백성들뿐만아니라 양반들고 군포를 내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그러나 소론에게 눈에 가시였던 박문수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들은 박문수가 탐욕스럽고 불법을 자행한다고 했다.
그는 임금에게 양반들과 조정 관료들에 대해 세금에 대한 결단을 하지 않는다고 입바른 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영조는 화를 내지 않고 박문수의 말을 수용하였다.
영조는 적이 많은 박문수를 많이 감싸는 편이었는데 오죽하면 경연 자리에서 상례에 과하게 벗어나는 까칠한 농담을 날려대도 "박문수가 아니면 누가 저렇게 바른 말 하겠냐", "원래 쟤 성격이 저런 걸 새삼스럽게 고치겠냐" 따위의 말로 덮어버렸다고 한다.
박문수는 왕과 독대를 자주 했다. 군신 관계를 떠나서 거의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고... 거기다가 고개까지 빳빳이 들고 서 있었는데, 다른 대신들이 머리를 숙이라고 하자 "아첨하는 무리일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지요!"라고 말한 적도 있다.
그러자 영조는 박문수처럼 얼굴을 들고 왕과 마주볼 수 있도록 개선하기도 했다.
박문수는 국사의 행정일을 맡아 쓸데 없는 비용을 절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론이 일으킨 나주 괘서사건으로 박문수는 감옥에 가게 된다. 나주괘서사건은 1755년(영조 31) 나주객사에 한 장의 괘서가 걸렸다는 내용으로 괘서에는 "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 백성이 곤궁한데 가렴주구는 더욱 심하다.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군사를움직이려고 하니, 백성은 동요하지 말라"고 쓰여 있었다. 이는 영조의 정책과 집권세력인 노론을 비방하는 소론의 작품이었다.
이로 인해 소론은 대규모 몰락하거나 죽게 된다. 그러므로 나주괘사사건은 소론(少論)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 사건이다. 이 때 박문수도 소론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게 된다.
박문수는 1755년 소론이 주도한 나주 괘서 사건에 휘말려 그와 관련한 옥사에 연루되었는데 영조는 직접 박문수를 불러 안심시키고 여전한 신임을 보여주었으나 이후 스스로 죄인을 자처한 다음 세수도 빗질도 않으며 집에 틀어박혀 살다가 이듬해인 1756년에 세상을 떠났다
박문수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영조는 그가 정승이 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해서 세상을 떠난 그 날로 바로 박문수에게 영의정에 임명하기도 하였다. 일계급 특진을 한 것이다.
삼국시대 김유신이 가야출신이었다면 조선 영조시대에 유명했던 어사 박문수도 가야문명을 이어받은 고령출신이다.
한국구비문학대계에 보면 어사 박문수에 대한 일화가 많이 있다. 그는 박혁거세나 김수로왕처럼 신화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 역사가 있는 인물이었다.
어사 박문수는 암행어사로서 무주 구천동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언울한 사람들의 누명을 벗겨주기도하였다.
박문수의 일화
그의 일화는 헤아릴수 없이 많이 있다.
박문수는 의리도 있고 여인에 대해서는 정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암행어사라는 신분을 바탕으로 억울한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고, 불법한 관리나 악인을 처벌하기도 한다.
1. 박문수가 잠행을 하다가 시내에서 빨래하는 여자를 보았다. 그 여자의 미모에 반해 무조건 따라 들어가서 야심한 밤에 다시 만나기로 언약을 받아냈다. 밤에 여자를 만나 즐겁게 관계를 맺었는데, 다음날 알고 보니 여자는 곱사등이었다.
시내에서 만난 여자의 시누이가 짝을 만나지 못해 밤에 들어와 관계를 맺은 것이다. 박문수는 사태를 해결하려고 마패를 보여 주며 치마폭에 자신의 어인(御印)을 찍어 주었다.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여자가 박문수의 아들을 낳아서 어인을 주며 아버지를 찾으라고 했다. 마침 박문수는 본가에 아들이 없어서 그 아들을 받아들여 살았다고 한다. 이외에 자식에게 자신의 묘 터를 정해 주어 자신의 죄를 막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2. 옛날에 홍판서가 홀로 된 며느리와 살았다. 어느 날 며느리 혼자 집에 있는데, 젋은 중이 와서 시주하라고 했다.
며느리가 시주하려고 문밖으로 나가니, 그녀의 미모에 마음이 끌린 중이 그녀를 방안으로 끌고 들어가 정을 통하려 했다. 그녀가 중의 요구를 뿌리치며 반항하자 중은 집의 기둥에 꽂혀 있던 낫으로 그녀를 찌르고 달아났다.
홍판서가 집에 돌아와 며느리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뒤에 몸에 박힌 낫을 빼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술집 마누라가 와서 그 광경을 목격하였다.
노파는 “홍판서가 며느리를 겁탈하려다가 말을 듣지 않으니까 칼로 찔러 죽였다”고 관가에 신고했다. 그래서 홍판서는 며느리를 죽인 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이 고을 가까이 오다가 한 중을 만났는데, 명지 바지에 기름 때가 졸졸 흐르는 모습이 수상쩍은 데가 있었다.
박 어사는 그 중을 수상히 여겨서 함께 길을 걸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중은 자기가 시주를 얻으러 갔다가 주인 여자의 미모에 반해 겁탈하려다가 말을 듣지 않자 죽인 일이 있다고 했다.
박 어사가 중과 헤어져 홍판서 집에 방문하여 홍판서가 며느리를 죽인 죄로 곧 사형에 처해질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중이 거처하는 절로 사령들을 파견하여 살인한 중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결국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던 홍판서는 석방되었다.
3. 박문수가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중에 날도 저물고 배도 고파 오누이가 살고 있는 어느 집에 가 밥을 청하였더니, 양식이 없어 아버지 제사에 쓸 쌀로 밥을 지어 대접하였다.이에 감격한 박문수가 집안 형편을 살피고는 그들에게 근심이 있는 것 같아 사정을 물었다.
소년이 어렸을 때 정혼한 처녀가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안이 기울자 청혼한 처녀가 내일 다른 곳으로 시집간다는 것이다.이튿날 아침, 박문수가 지략을 내어 그 처녀의 아버지를 굴복시켜 전일의 약속을 지키게 하고, 그 처녀에게 장가올 신랑은 소년의 누이의 배필로 삼아, 같은 날 남매를 나란히 혼인시키고 재산도 나누어 주었다.
이처럼 고령은 신비의 고장이면서 정의의 지역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난생설화와 문헌설화가 있는 곳이다. 가야의 사람들은 난생설화를 토대로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자 하였다. 철기문화도 가장 발달했고, 도자기 문화도 발달했고, 유대인의 왕래 가능성도 있는 지역이다.
문자, 장신구, 토기, 언어, 의식은 이스라엘과 유사한 면이 많이 있다. 유대인들이 왔을 확률이 가장 높은 지역이다. 실제로 고령에는 100년 이상된 교회가 많이 있다. 하늘에서 내려와 마굿간에서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교회가 있다. 지금 고령은 난생설화가 아니라 성령을 통한 역사적 사건이 있다.
고령의 교회들은 100년전부터 난생설화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한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역사 이야기에 충실했다. 유대인 왕래의 흔적은 교회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가 보다 구체화되었다.
10. 100년 이상된 교회
안림교회
고령 지역에서 최초로 교회가 세워진 곳은 안화리이다. 안림교회가 처음 세워진 안화리는 고령 기독교의 산실이요 발상지라 할 수 있다.
안림교회는 1902년 3월, 대구제일교회 소속 부해리 미국 선교사의 지원과 김호준 조사의 동참 하에 강재성, 최래익, 배치운, 임재하, 백경준, 조쌍례, 최주현 등의 신도와함께 49.59㎡ 규모의 초가집을 구입해 쌍림면 안화리에서 예배를 본 것으로 교회를 시작했다.
1913년이 되어서야 66.12㎡ 규모의 예배당을 건축했다. 1931년 가옥을 신축해 예배당으로 사용했으며, 1957년 5월 예배당을 증축할 때까지 계속 사용했다.
안림교회가 세워진 안림리는 조선시대 역촌으로 역원들이 상주하였으며, 말을 먹이는 마구간과 대장간과 객점이 늘어서 있던 상민의 촌락이었다.
당시만 해도 합가, 신촌, 하거리 등에는 권문 세도가들의 집성촌이 있었고, 이에 비해 안림의 주민들은 천대받고 멸시 받는 처지의 천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여, 사랑과 평등의 새 나라를 열망하며 희망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원송교회
1902년 안림교회를 시작으로, 같은 해 덕곡면에는 원송교회가 세워졌다.
고령읍교회
1906년에 고령읍교회가 성립되어 고령 지역의 교회가 활성화 되었다. 현재 고령에는 기독교연합회에 가입한 교회 47개가 있으며 성도 수는 2,0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산당교회
1907년 2월 13일 조구승, 조목승, 강준병과 교인들이 본동 295번지에 초가 1칸[대지 79.34㎡]을 구입하여 예배당으로 사용하면서 산당교회가 창립되었다.
1919년 대지 158.68㎡를 추가 구입하여 초가 4칸으로 예배당을 꾸몄다. 1924년 예배당 2칸을 증축하였고, 1933년에는 기와집 12칸을 신축하였다.
구한말 당시 많은 교회들이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창립되었으나, 산당교회는 외부의 원조 없이 지역 교인들의 건실한 인내력과 신앙심에 의하여 자립적으로 세워진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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