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포항편)

기독교인들을 통하여 신화의 지역이 된 포항

편집인 | 입력 : 2022/03/31 [08:19] | 조회수: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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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지리적 여건과 역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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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로서의 포항

 

경상북도에서 가장 발달한 최대의 도시인 포항은 원래는 유배지였다. 장기면 일대는 조선시대 선비 200여 명이 유배를 다녀간 곳으로 유명하며 우암 송시열, 다산 정약용과 같은 석학과 거물 학자들이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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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1607∼1689)은 1675년부터 4년여 간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주자대전차이’와 ‘이정서분류’ 등의 명저를 저술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01년 220여일 동안 장기에 머물렀지만 장기고을 백성들의 생활상과 고을 관리들의 목민행태를 글로 남겼다. 장기농가 10장과 기성잡시 27수, 타맥행 등 130여 수에 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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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영일군 포항읍이 었고, 1949년에 시로 승격/분리될 만큼 어항으로써 꽤 규모가 있던 곳이었으나 지금과 같은 산업도시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이다.

 

연일군, 흥해군, 청하군, 장기군이 1914년 영일군으로 통폐합되었다가 1949년 포항시와 영일군으로 분리되었고, 1995년 포항시로 승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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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의병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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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은 뚜렷한 인물은 없어도 항일정신이 투철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항일정신은 의병활동과 3.1운동을 통하여 드러났다. 포항출신으로서 의병으로 유명한 사람이 장헌문과 최세윤이다.  

 

장헌문

 

장헌문 의병장은 경북 영일군 지행면(현 장기면) 죽정리 출신으로 1895년 일제가 민비를 시해한 데 이어 친일내각이 황후폐위조치를 내린 것에 대항해 1896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영일군에서 의병에 참가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헌문은 이듬해 5월 김재홍·김복선 등과 함께 거의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영일을 중심으로 경주·죽장·흥해·청하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며, 영덕에서 일어난 신돌석 의장과 연합하는 등 큰 활약을 하였다.

 

그는 의병을 일으킨지 4년만인 1909년 일본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구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918년 12월 출옥한 후로 후학을 양성하는 한편 옛 동지들을 찾아다니며 구국활동을 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최세윤

 

 

 

한말의병 항왜열전 기념비


2대 정환직대장의 순국 이후 산남의진의 700여 병력은 흥해 사람 정순기의 지휘 아래 청송군 보현 산악지대로 이동하였다. 정순기는 얼음이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평소 정환직과 가까이 지내던 최세윤에게 사람을 보내 산남의진의 지휘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산남의진(산남(山南)이라 함은 경상북도 문경 새재 이남의 영남 지방을 이르고, 의진(義陳)이라 함은 오직 구국 일념의 충성된 의기로 뜨겁게 뭉쳐진 의병 진영을 줄여 일컫는 말이다.

 

정환직, 정용기, 최세윤으로 이어진 산남의진은 영덕의 신돌석부대와 함께 구한말 제2단계 의병 운동을 대표하는 의진으로, 주로 포항, 영일 일대를 중심으로 거센 항쟁의 횃불을 들었다.

 

1908년 3월 5일, 산남의진은 제3대 대장으로 최세윤을 추대하여 새로이 출발하였으나, 일본군의 전력이 날로 증강되고 조직화되어 가는 반면, 의진은 무기와 군량이 바닥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에 최세윤 대장은 전략을 바꾸어 전체 의병을 4개 대대로 편성하고 유격 게릴라 전술을 감행키로 하여 영양, 진보, 안동 등의 시, 읍을 산발적으로 공격하여 크고 작은 전적을 거두었다.

 

산남의진은 1906년 2월 이 땅에서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고, 명실공히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겠다는 성스러운 뜻을 품고 구국의 횃불을 든지 4년 만인 1909년 마침내 그 의로운 횃불을 민족의 가슴속에만 영원히 꺼지지 않게 밝혀 놓은 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포항의 3.1운동

 

 영남에서 최초의 3.1운동이 일어난 곳은 당시 3.8. 대구 서문시장 운동이었다. 영일군 포항면의 최경성(36)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 장로, 송문수(37) 포항교회 장로 등이 참여했다.

 

포항제일교회의 전신인 포항교회

 

최경성 장로는 현장에서 일제 군경에 체포, 구속됐고 송문수 장로는 포항으로 피신했다.송문수 장로는 포항교회가 설립한 영흥학교 교사인 장운환 교인 등에게 대구 3·1운동을 들려줬다.

 

이 소식을 듣고, 영흥학교 교사들이 주동이 돼 3월 11일 포항장날인 여천시장에서 포항 3·1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경북의 3.11운동은 현재의 포항 중앙파출소 인근인 옛 여천장터에서 처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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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장터 만세운동 이후 포항은 경북지역 3.1 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3월 12일에는 영흥학교, 22일에는 청하장터, 27일 송라 대전리 두곡숲, 4월 1일과 2일에는 연인을 비롯해 기계·죽장·신광·청하·송라·흥해 등 포항시의 전신인 영일군 전역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당시 포항에서만 9차례의 3.1운동이 일어나 연인원 2900명이 참여해 40명이 숨지고 38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320명이 검거됐다. 주로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당시 일제의 임시호구조사 결과 영일군 포항면 인구가 6천588명이고 이 중 25% 가량이 일본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포항지역 3.1운동의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수치다. 포항에서 3.1운동의 열기가 높았던 이유는 여럿 있지만 가장 큰 동력은 기독교계의 헌신과 희생이 꼽힌다.

 

영일군 청하, 송라면에서 일어난 3.1일 운동도 교회가 중심이 됐다. 3·1운동과 관련해 옥고를 치른 청하면민 23명 중 14명이 대전리 주민이었고 그 중 13명이 대전교회 교인이었다.

 

대전3.1의거 기념관은 1919년 당시 3.1운동이 한창 일어났을 때 포항시의 대전리에서도 주민 주도로 일어난 의거를 기념하기 위한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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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1919년 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대전리 출신 독립운동가 14인을 기리기 위하여 2001년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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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안에는 3·1운동 당시 의사들의 유품과 판결문, 훈장 및 영정 등 여러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비록 작았지만 충분히 그 시대 사람들의 독립을 위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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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전체가 80여 가구인 한 마을에서 14인의 3․1의사가 난 곳은 전국에서도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다.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보면 청하의 만세시위는 2회, 참가인원 500명, 부상자 50명, 피검자(범죄혐의가 있어 수사기관에 일시적으로 잡혀 있는 사람) 40명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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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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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을 가장 발전시킨 이유 중의 하나는 1965년 포항종합제철소가 건립된 것이다. 그 해 5월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방문해 제철소 건립에 대한 의지를 더욱 더 다지게 되었고 미국의 제철소 건설 기술 용역회사인 코퍼스(Koppers Co. Inc)의 포이(F. Foy) 회의 지원약속에 따라 박태준을 종합제철소 건설 책임자로 임명했다.

 

박태준은 일본 와세댜 공과대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육군사관학교도 졸업한 수재이자 포항의 신화였다. 박태준이 없었다면 포항제철은 없었다. 이명박이 현대건설의 신화였다면 박태준은 포항제철의 신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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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당시 박태준은 만성적자에 허덕이고 있던 대한중석의 사장으로 부임 1년 만에 흑자 기업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1968년 4월 1일 자본금 4억 원(정부 3억 원, 대한중석 1억 원)으로 국영기업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가 창립되었다. 박태준은 대한중석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창업 인력 39명과 함께 서울 명동 유네스코 회관 3층에서 창업식을 개최하였다.

 

박태준은 1969년 1월 KISA의 모기업인 코퍼스의 포이 회장을 만나 우리나라의 상황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설명했지만, 차관을 조달하는 데 끝내 실패하자, 대일 청구권 자금을 전용하여 제철소 건설자금 1억 달러를 마련해야겠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그는 정부는 물론 일본 정·재계를 직접 설득했으며, 결국 포항제철소 건설 계획은 대일청구권 자금을 전용하고 일본으로부터 차관과 기술을 제공받는 방식으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69년 8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가 종합제철사업 협력원칙에 합의했다.

 

정부는 이후 1968년부터 1992년까지 현금출자 2,341억 원, 대일청구권 자금 128억 원(5,080만 달러), 현물출자 150억 원, 합계 2,205억 원을 출자하였다. 이로써 드디어 포항제철소 1기 설비공사의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그 이후 박태준은 포항제철은 한국인의 피로 세워진 회사라고 피력하여 노동자의 단결을 촉구하였다. 이처럼 박태준의 신화는 한일기본조약을 통한 대일청구권 자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일기본조약

 

기본조약을 위해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과 오히라 일본위상이 회담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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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은 역사적인 한일기본조약을 맺고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공식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다.

 

한일기본조약은 이미 1965년 2월 가조인되었지만 청구권협상은 난항을 거듭한 끝에 6월 22일 타결되면서 양국은 서명과 함께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한일기본조약의 ‘2조’는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즉 1905년 을사조약은 한일기본조약 2조에 의해 이미 무효가 된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에 수반되는 관련 협정으로는 ▲한일어업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및 대우 협정, ▲경제 협력 협정, ▲문화재 협정부속협정 등 4가지다.

 

흔히 청구권이라고 불리는 경제협력협정의 공식 명칭은 ‘한일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 협력에 관한 결정’이다. 서문에는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및 양국 국민간의 청구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것을 희망하고 양국 간의 경제협력을 증진할 것을 희망하여 같이 합의하였다’라고 명시되었다.


이 협상으로 우리는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와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총 8억 달러를 1966년부터 1975년까지 10년간에 걸쳐 받았다. 1965년 당시 한국의 연간 수출액은 1억 7000만 달러에 불과했다.
 
지원받은 돈은 다음과 같이 쓰였다.
 

 


포철의 밑거름이 된 한일기본조약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또는 한일기본조약은 대한민국과 일본이 서로 일반적 국교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1965년 6월 22일에 조인한 조약이다. 4개 협정과 25개 문서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명칭은 일본국과 대한민국과의 사이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이다

 

한국정부 수석전권대표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일본정부 수석전권대표 시나(椎名悅三郎) 외상 및 수행대표들 사이에 조인되었다.

 

이 조약의 부속협정으로는 「청구권·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재일교포의 법적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어업에 관한 협정」·「문화재·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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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조 양 체약 당사국간에 외교 및 영사관계를 수립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대사급 외교사절을 지체없이 교환한다. 양 체약 당사국은 또한 양국 정부에 의하여 합의되는 장소에 영사관을 설치한다.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3조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연합 총회의 결정 제195호(III)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


제4조 (가)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을 지침으로 한다.


(나)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의 상호의 복지와 공통의 이익을 증진함에 있어서 국제연합 헌장의 원칙에 합당하게 협력한다.


제5조 양 체약 당사국은 양국의 무역, 해운 및 기타 통상상의 관계를 안정되고 우호적인 기초 위에 두기 위하여 조약 또는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교섭을 실행 가능한 한 조속히 시작한다.


제6조 양 체약 당사국은 민간항공 운수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기 위하여 실행 가능한 한 조속히 교섭을 시작한다.


제7조 본 조약은 비준되어야 한다. 비준서는 가능한 한 조속히 서울에서 교환한다.


본 조약은 비준서가 교환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각 전권위원은 본 조약에 서명 날인한다.
1965년 6월 22일 동경에서 동등히 정본인 한국어, 일본어 및 영어로 2통을 작성하였다. 해석에 상위가 있을 경우에는 영어본에 따른다.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원한 군사정부는 이듬해 10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측과 비밀회담을 가지게 한 결과 이른바 ‘김(金)-오히라(大平)메모’를 통하여 한일간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청구권문제가 타결되었으며, 어업협정문제 등도 1964년 4월에 이르러 타결되어 사실상 10여 년 만에 한일회담의 종결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1964년 한일협정 당시 대일 청구권 문제를 타결지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일본 외상의 메모 복제본

 

그러나 한국 내에서 제3공화국의 대일회담 자세를 비판적으로 보았던 야당·학생들의 반대데모가 극심하여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한국 정세가 혼란에 빠짐으로써 회담이 다시 중단되었다가 12월에 이르러 7차 회담이 속개된 뒤 1965년 6월 22일 일본수상관저에서 기본조약을 포함한 4개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당시 대학가에서는 굴욕외교라고 매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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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운동권세력은 김종필-오히라 회담에 마치 이면합의가 있었던 것처럼 선동하기도 했다. 2007년 노무현 정부는 1965년 한일회담 문서집을 일방적으로 공개하여 외교관례를 벗어난 행동을 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당시 박정희정부가 매우 성공적으로 한일회담을 했고 실리 또한 챙겼다.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1981년 한국경제의 목표로 100억 달러 수출이 정해졌다. 그리고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중화학공업화가 선택되었다.
 
이는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할 당시의 일본의 경험에서 배운 것이었다. 이에 따라 박대통령은 1973년 1월 12일 대통령 연두기자회견 중화학공업화선언에서 “정부는 이제부터 중화학공업 육성의 시책에 중점을 두는 중화학공업시책을 선언하는 바입니다........80년대 초에 우리가 100억 달러의 수출목표를 달성하려면 전체 수출상품 중에서 중화학제품이 50%를 훨씬 더 넘게 차지해야 되는 것입니다”라고 선언하고 내각에 중화학공업을 획기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도록 특별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100억 달러 수출, 일인당 1,000 달러 국민소득의 달성수단으로 1973년부터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1980-81년 목표였던 100억 달러 수출계획은 1977년 12월 22일 오후 4시 100억 1,600만 달러 수출에 도달함으로써 달성되었다. 이는 1964년 1억 달러 수출돌파에 이어 13년 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이 자금으로 인해 한국의 경제는 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자금은 한국경제의 마중물이 되었다. 

우리가 일본에 요구했던 8개항의 대일청구권요강을 살펴보면 ①조선은행을 통하여 반출한 금(金) 249,633kg 및 은(銀) 67,541kg ②1945년 8월 9일 현재 일본 정부의 조선총독부채권 반환 청구 ③1945년 8월 9일 이후 한국으로부터 송금된 금품의 반환 청구 ④1945년 8월 9일 현재 한국에 본사 본점 또는 주된 사무소가 있던 법인의 재일재산의 반환 청구 ⑤한국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의 일본국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일본국채 공채 일본은행권 피징용 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청구권의 반제청구 ⑥한국인의 일본 정부 또는 일본에 대한 개별적인 권리 행사에 대한 항목 ⑦전기 제 재산 청구권에서 발생한 제과실의 반환 청구 ⑧전기의 반환 및 결제의 개시/종료에 관한 항목 등이다.

이 중에서 특히 ⑤항에서 피징용 한국인 미수금과 전쟁에 의한 피징용자의 피해에 대한 보상을 구체화 했다. 징용자 수는 노무자 667,684명, 군인 및 군속 365,000명 총 1,032,684명이라고 산정했다. 개인청구권에 대해서는 5차 한일회담 예비회담에서 “우리(한국)는 나라로서 청구하며 개인에 대해서는 국내에서 조치하겠다”고 언급했다. 따라서 개인청구권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마무리되었다고 일본이 주장하는 것은 타당하다.

  

박태준

 

박태준은 포철의 신화를 써나갔다.  일본에서 대일청구권으로 돈을 끌어오자는 것은 박태준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통행금지를 지킨다고 딸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 골든타임을 놓쳐 딸을 잃는 아픔도 있을 정도로 원리원칙주의자 였다. 그는 딸을 잃었지만 대한민국의 산업을 살린 장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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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면 박태준 기념관도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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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준은 철의 사람이었다. 포항제철을 신일본제철을 능가하는 세계 최대의 제철소로 끌어 올렸다. 대일청구권이 없었더라면 포철의 신화는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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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시절 3억달러에 해당하는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 중 일부를 이용하여 1960년대 후반부터 박태준회장을 필두로 포항제철소가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경북에서 최대의 도시 규모로 급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포항제철

 

포항제철소의 제1고로에서 1973년 6월 첫 쇳물을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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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소는 1970년대 국가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철강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제2제철소의 실수요자로 지정받아 전라남도 광양만을 매립하여 광양제철소를 세웠다. 광양제철소는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종합제철소이면서 단위제철소 기준으로 세계 최대 규모와 효율을 자랑한다

 

이어 같은 해 7월 3일 조강연산(가공되지 않고 제조된 그대로의 강철이 한 해 동안 생산된 양) 103만 톤의 포항제철소 1기가 준공되었다. 포항제철소는 가동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매출액 1억 달러를 기록하며 흑자로 전환하였다.

 

1기를 시작으로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던 포항제철소는 1976년 5월 조강연산 260만 톤의 2기 제철소, 1978년 12월 조강연산 550만 톤의 3기 제철소, 1981년 2월 조강연산 850만 톤의 4기 포항제철소를 준공하였다.

 

현재 포항은 경상북도 동남부에 위치한 도시로서 인구는 2021년 12월 기준 50만 3000명을 넘고 있으며 경상북도 내에서 인구, 소비 수준, 교육 수준 모두 1위로 경상북도 최대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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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0월 민영화를 완료한 포항제철소는 해외 투자를 확대했으며, 그 결과 철강사업 부분에서 해외 80개사를 거느리는 세계 철강 1위 회사가 되었다.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2002년 3월 현재의 상호인 포스코(POSCO)로 변경하였다.

 

포항의 교육기관

 

현재 포항은 고등교육기관으로는 4년제 대학에 이공계 대학으로 유명한 포항공과대학교(포항공대/포스텍/POSTECH)와 한동대학교가 있으며, 2, 3년제 전문대학은 선린대학교, 포항대학교가 있다. 포항공대에는 국내 유일의 방사광가속기가 위치해 있다.

 

  포항공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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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해안도시인 만큼 해병대 제1사단의 주둔지이며, 해병대 교육훈련단이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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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학도병

 

포항여고앞에 가면 포항여중전투 학도의용군명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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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몰학도 충혼탑은 1950년 한국전쟁당시 동해안 지역으로 공격해오는 북괴군 12사단의 공격을 방어하던 3사단이 북괴군의 집중적인 공격으로 포항이 실함되는 위기의 순간에 있었다.

 

그래서 포항여자 중학교(현,고등학교)에 위치한 국군 3사단의 후방지휘소를 경계하던 학도병 중대가 후방으로 침투하여 공격해오는 북괴군 766유격부대와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결전을 치루고 이를 저지 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국군 3사단 및 해군, 공군의 일부지원부대가 무사히 후방으로 철수하여 전투지원 임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전투에 참가한 학도병 71명중 전사한 47명의 군번없는 학도병을 추모하기위하여 격전의 현장인 이곳 포항여자고등학교의 정문앞과 용산동에 1977년 12월 건립하였다.

 

1950년 8월 11일 포항여중에 학도병들이 모여들었다.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도 여기에 참석하였다.

 

 포항여중

 

그러나 군경험이 없는 많은 학도병들이 사망했다. 중학교 뱃지가 그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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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교단에서 기독신문을 운영하는 김만규목사가 이곳 전투에 참가한유일한 생존자로서 학도병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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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여고 근처에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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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둘러보다 故이우근 학도병이 쓴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를 읽어보면 전쟁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에 ‘내 조국, 내 가족’을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 나선 10대의 학도병들이 감당했어야 됐던 심리적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된다.

이 곳에는 이우근 학생의 시가 돌비에 쓰여져 있다.

 

이 글은 한국전쟁 시 학도병으로 참전하였던 당시 동성중학교 3학년(17세) 이우근 학생이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우근을 비롯한 자원 학도병 71명은 1950년 8월 10일 포항여중 전투에 참전하여 그 중 48명이 전사하였는데, 이 편지는 그때 전사한 이우근 학도병의 피로 물든 군복 주머니에서 발견된 것이다.

 

실화는 2010년 영화 '포화 속으로'의 소재가 되었으며, 포항시에서는 2009년 '학도병 이우근 편지비' 를 건립하여 당시 희생된 학도병들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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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의 시는 돌비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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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십여 명은 될 것입니다. 저는 두 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저의 고막을 찢어 놓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제 귓속은 무서운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머님! 괴뢰군의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우기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님!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저 옆에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볕 아래 엎디어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엎디어 이글을 씁니다.

 

괴뢰군은 지금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언제 다시 덤벼들지 모릅니다. 저희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괴뢰군 수는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들은 겨우 71명 뿐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머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님! 어서 전쟁이 끝나고 ''어머니이!'' 하고 부르며 어머님 품에 덜썩 안기고 싶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제 손으로 빨아 입었습니다. 비눗내 나는 청결한 내복을 입으면서 저는 한 가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빨아주시던 백옥 같은 내복과 제가 빨아 입은 그다지 청결하지 못한 내복의 의미를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님, 저는 그 내복을 갈아입으면서, 왜 수의를 문득 생각 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님!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저희들을 살려두고 그냥은 물러갈 것 같지가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님, 죽음이 무서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머니랑, 형제들도 다시 한번 못 만나고 죽을 생각하니,죽음이 약간 두렵다는 말입니다.

 

허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돌아가겠습니다. 왜 제가 죽습니까, 제가 아니고 제 좌우에 엎디어 있는 학우가 제 대신 죽고 저만 살아가겠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천주님은 저희 어린 학도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어머님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이 되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웬일인지 문득 상추쌈을 재검스럽게 먹고 싶습니다. 그리고 옹달샘의 이가 시리도록 차거운 냉수를 벌컥벌컥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어머님! 놈들이 다시 다가 오는 것 같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뿔싸 안녕이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이따가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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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유골로 남아있다. 그들의 유골이 발견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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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데기에는 그들에 대한 충혼탑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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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북괴군에 빼앗긴 후 시흥의 한강선전투에서 학도병은 처음으로 총과 실탄을 지급받고 교복과 교모를 쓴 채 자진 투입되었다. 한강방어선이 무너지자 수원에서 처음으로 조직을 갖춘 비상학도대가 결성되어, 500여 명이 후방지역 선무활동부터 시작하였다. 이후 대전에서 700여 명이 의용학도대를 조직하여 그 중 상당수가 국군으로 입대하였다.

 

전선의 변동에 따라 대구로 이동하게 된 학도출신자들은 대한학도의용대로 개편되고, 이와는 별개로 부산에서도 대한학도의용대가 조직되어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외에도 지역별로 자진하여 구성된 학도의용대가 지역내 국군부대로 지원하여 당시 국군의 모든 사단에 학도병이 없는 부대가 없었고 군번도 없이 전투에 참가 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대한학도의용대를 통해 실전에 참가한 대원수는 2만 7700명에 이르고, 20만의 대원이 후방선무공작 등의 보국에 공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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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학도병들이 승리할 수있었던 것도 포항에 100년이상 된 교회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포항을 축복하였던 것이다. 학도병들의 피와 일본 징용자들의 피값으로 포항은 발전하였고 경북에서 가장 축복받은 땅으로 변하였다. 포항이 축복받은 이면에는 100여년 이상 된 많은 교회가 있었다. 교회가 있는 지역은 항시 인물이 나거나 인물들을 통하여 지역이 복을 받았다.  

 

100년 이상된 교회

 

성법교회(1903)

 

성법교회는 포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서 1903년 "청송 수락교회"의 박영수 씨가 마을을 방문,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이후 1913년 "안의와"선교사가 순회를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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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중앙교회(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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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대도교회

 

미국 선교사 맹의와(McFarland, Edwin Frost)가 대구 계성학교 학생전도대를 이끌고 각지로 전도하던 중 전도대원 김병호씨와 함께 대도동에 와서 전도를 시작하여 정일찬, 최경진, 김란수씨를 결신시켜 1년간 열심히 전도케 하니 수십명의 결신자를 얻어 교회를 세우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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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동교회(대송교회,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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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이곳 동해바다 영일만 대송면 넓은들의 괴동마을에 살던 박군현씨는 일본에 가서 머무는동안 그리스도 복음을 접하며 자기집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하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1901년 포항대송교회 전신인 괴동교회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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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웃 친지와 친구들 그리고 가족까지 27명을 전도해 예배를 드리며 경북 동해안 일대에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감당했다고 전해진다. 교회 설립자이신 박군현 성도님은 청운의 꿈을 안고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일본에 가보니 일본이 개화가 되어있고 젊은이들이 너무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아 나도 여기서 예수를 믿고 그 예수를 가슴에 안고 고국으로 돌아가서 젊은이들에게 예수를 나누어 주면 나라의 발전에 큰 능력과 힘이 되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본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기 집 사랑방에서 처음 두 청년을 데리고 예배를 드린 것이 교회의 시작이다.

 

이후 포항제철의 확장으로 교회 위치를 옮기게 된 1969년에는 지역교회였던 장흥교회와 합병하며 포항대송교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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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에 한국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가 세워졌다면 포항에는 동해안지역 최초의 교회 괴동교회(현 포항대송교회)가 있다. 두 교회는 바로 한국인이 중국과 일본에서 복음을 접하여 세운 교회라는 점이다. 외국인선교사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국인이 세운 자생적인 교회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포항제일교회(1905)

 

포항제일교회(현재 포항소망교회 소유)는 1905년 5월 12일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제임스 애드워드 아담스 선교사가 영일군 북면에서 처음 복음을 전한 이 날을 창립일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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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한창이던1951년에는 포항 전투로 인해 온 시내가 모두 폐허로 변했지만 유일하게 포항제일교회 종탑과 건물만 자리를 지켜냈다. 당시 현장을 찍은 사진은 미국 타임즈 표지에 소개되면서 전세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현재 교회 외벽에는 당시 탄환과 포탄의 흔적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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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일교회는 다른 데로 옮기고 현재 포항중앙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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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총회장 김태영 목사)는 2020.7. 15일 오전 11시 포항소망교회에서 ‘한국기독교사적 제38호, 포항소망교회 3·1운동 경북지역 발상지 및 6·25 포항전투 보존 기념교회’ 지정 예식을 개최했다. 행사는 총회 역사위원회(위원장 장태식 목사)와 포항남노회(노회장 이하준 목사), 포항소망교회가 주관했다.

 

이곳은 1919년 3월 11~12일 포항교회 송문수 장로와 교인들이 중심이 됐던 포항지역 3·1 만세운동의 발상지로 경북에서 가장 먼저 3·1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또 1951년 6·25전쟁 당시 포항전투에서는 포항시의 모든 건물이 파괴됐지만, 교회 건물이 보전돼 뉴욕타임스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다.

 

한편, 포항제일교회는 '포항3·1운동' 역사를 간직한 만큼 포항시와 지역의 역사성을 살려 구 포항제일교회 예배당 중심으로 '근대역사·문화거리 조성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포항3·1운동 기념비' 건립을 시작으로 '포항3·1운동 운동길'조성과 현재 충혼탑이 세워진 수도산 덕수공원에 '포항3·1운동 기념탑' 등을 세울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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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포항에는 발산교회, 대곡교회(현 기북교회), 1909년 송라침례교회, 계원침례교회, 화진침례교회, 1911년 칠포교회, 1912년 신계침례교회, 방산교회(장기교회 전신), 1913년 대전리교회, 중명교회, 1914년 청하교회, 1915년 장기교회, 월포침례교회, 1916년 제일침례교회, 1917년 죽장교회, 청하 유계교회, 1919년 죽장 상옥교회 등이 100여년 이상이 되었다.

포항의 출신 인물로는 클론 출신의 강원래, 대통령 이명박, 김시진 롯데 자이언트 감독, 용인대 총장 김정행, 전국회의언, 단병호,  20대 국회의원 이철희, 정광용, 전방송통신위원장 최시중, 전국가대표 이동국 등이다.  

 

결론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가 의병장들, 학도병들, 산업역군들, 박태준 같은 인물을 통하여 포항이 경북 최대의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포항은 '신화는 없다'를 쓴 이명박 대통령을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신화를 쓴 박태준, 이명박은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인들을 통하여 포항은 신화의 지역이 되었다.

 

 

http://lawtimes.net/3869 (포항편) 

 

http://lawtimes.net/3868(영덕편)

 

http://lawtimes.net/3855 (칠곡편)

 

http://lawtimes.net/3849 (구미편)

 

http://www.lawtimes.net/3796 (대구1)

 

http://www.lawtimes.net/3797 (대구2)

 

http://www.lawtimes.net/3799 (대구 3)

   

http://lawtimes.net/3803 (영천)

 

http://lawtimes.net/2675 (영남1) 

 

http://www.lawtimes.net/2676(영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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