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영덕)

편집인 | 입력 : 2022/03/28 [01:17] | 조회수: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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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덕의 지역적 요건

 

영덕은 경상북도 동북부에 위치하여 영남지방에 속하고 포항시와 울진군, 영양군, 청송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청송은 김진홍목사, 영양은 김삼환목사, 영덕은 이광선목사의 고향이다. 종교천재들이 서로 인근지역에 살고 있었다. 영덕군은 741.10㎢의 면적에 1읍 8면 204개 행정리가 있다.

 

지도를 보면 북쪽은 울진군, 서쪽은 영양군·청송군, 남쪽은 포항시와 접경하고 동쪽은 동해가 있다. 군의 전지역이 태백산맥의 동사면을 차지하여 서쪽이 높고 동쪽으로 점차 낮아지는 지형을 이룬다. 서쪽의 군경계는 태백산맥의 분수령이며 칠보산·등운산·독경산·형제봉·명동산(812m)·삿갓봉·마고산·바데산 등 높은 산이 연봉을 이룬다.

 

현재 영덕군은 원래 영덕(盈德), 영해(寧海) 양군이었던 것을 서기 1914년에 합병(合倂)하여 오늘에 이르고있다.

 

2. 영덕의 역사성

 

영덕, 강구, 남정, 달산, 지품의 5개 읍면으로 삼국시대에는 야시홀(也尸忽)이라 하였다가 신라통일후 야성군이라 하였고 고려 초엽에 영덕으로 개칭하여 현종조에 예주에 속한 후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고려말 충선왕때에 현(縣)으로 되고 조선조 태종(太宗)15년(서기1415년)에 지현사를 두었다가 1914년에 영해를 합병하여 영덕군이라 칭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3. 영덕의 산물

 

영덕으로 가장 알려진 것은 이제필의 교주신원운동이나 의병운동을 했던 신돌석이 아니라 영덕 게이다. 영덕게는주로 영덕군 앞바다에서 서식하고 있으며 게껍질이 얇고 게살이 많은 것이 특징이어서 지역주민을 비롯해 외지에서도 영덕대게를 먹으러 원정방문을 하기도 한다.

 

게 철은 11월~5월 사이이고,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가장 맛있다. 이 시기를 맞춰 3월 초에 영덕에서는 대게축제를 개최한다. 강구항이 가장 유명하고, 대게축제도 이곳을 중심으로 개최한다.

 

강구항을 시작으로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작은 포구에도 대게집이 종종 있는 편이고, 북쪽의 축산항도 작지만 유명한 편이다. 1998년부터 현재까지 영덕군청 주최로 영덕대게축제가 열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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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영덕의 인물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는 영천 사람이고, 야은 길재는 구미사람이라면 목은 이색은 영덕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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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李穡, 1328-1396)은 거려말 삼은(포은, 야은, 목은) 중의 한 사람으로서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이다. 그는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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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권문세족의 전횡을 비판하여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적극 협력하였으며 또한 부패한 불교의 대안으로 성리학을 새로운 개혁의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배운 정도전은 이색의 학문성을 갖고 조선의 건국을 성리학에 토대를 두었던 것이다.

 

이색은 기일원론을 주장한다. 천지만물은 다 같이 일체이고 사람의 한 몸에는 천지만물이 다 갖추어져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 몸을 닦음에 먼저 그 뜻을 잡고, 그 뜻을 잡음에 기를 길러서 쉬지 않고, 멈추지 않은 경지에 이르면 나의 몸은 천지와 더불어 위 아래로 같이 흐르게 된다고 하여 기일원론의 입장을 견지했다. 나의 몸과 하늘은 하나이다.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유사하다.

 

그러면서 그는 성리학자인 만큼 본연지성을 강조하여 인간본래의 성품을 강조했고, 사람은 곧 하늘이라고 하여 인간의 존중사상도 나타나고 있다. 이색은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원나라에 가서도 국자감 생원이 될 정도로 천재적인 사람이었다.

 

이색은 7세 때(1335, 충숙왕 복위4)부터 독서를 하기 시작했으며 아버지 이곡의 친구이자 안향,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익제 이제현을 찾아가 정주학을 배웠다. 그는 학문에만 정진하여 많은 저서를 출판하기도 하였다. 

 

그는 성리학을 통하여 우주만물과 인간의 성품을 해석하여 역성혁명은 거부하였지만 조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색의 사전에는 역성혁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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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하륜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그러나 그는 역성혁명의 주역인 이성계와 정도전에게 협력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1395년(조선 태조 4)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여 예를 다하여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 하여 고사하였다.

 

영해교주신원운동과 이필제

 

영해교조신원운동은 영덕군 영해에서 1864년(고종 1) 동학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동학교도들이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벌인 운동을 말한다. 이필제가 앞장섰다. 즉 이 운동은 동학교주 최제우의 누명을 벗기기 위한 운동이다. 

 

  최제우(좌)와 최시형(우)

 

그러므로 영덕군은 동학의 뿌리가 묻혀있는 땅이기도 하다. 우리가 동학혁명에 대해서는 호남의 전봉준을 위시로 한 황토현 전투, 충청도의 보은 집회, 우금치 전투에 대해서만 알고 있는데 영남은 최제우가 도를 설파한 지역이기 때문에 1860년대 초부터 동학운동이 일찍 발달한 지역이기도 하다. 

 

최제우가 사형 당한 뒤 동학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2대 교주 최시형을 통하여 발전해 나갔다. 제1차 교조신원운동1864년 교조가 처형당한 뒤 정부의 탄압으로 동학은 괴멸 상태가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동학은 제2대 교주 최시형의 구교(救敎) 노력과 농민들의 절대적 지지로 1860년 후반에 이르러 복구·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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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제의 난

 

이러한 토대위에 1871년 3월 10일(음력), 이필제(李弼濟)가 제2대 교주 최시형과 손을 잡고, 동학의 조직망을 통해서 동학도 2백여 명을 동원해 야간 기습 작전으로 영해(寧海)에서 봉기해 부사를 죽이고 군기를 탈취하였다. 이것은 이필제의 난이라고도 일컫는다. 영해교조운동은 일월산 병풍바위앞에서 시작되었다. 

 

  

 

동학의 역사에서 교조신원운동과 물리력을 통해 처음으로 관가에 저항한 인물은 이필제(李弼齊)다. 그는 1825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나 진천으로 옮겨 살면서 무과에 급제하고 한때 영천으로 유배를 갔다. 풀려난 후 영해에서 최시형을 만나고 주변 지방을 돌면서 동지들을 끌어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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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동학에 입도한 시기는 1863년 10월, 최제우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될 때 수천의 동학도들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도로 연변에 모인 것을 보고 감화를 받아서였다.

 

1870년 7월 경상도 영해로 거처를 옮긴 이필제는 이 지역 동학도들과 어울리면서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중 최시형을 만나 교조 순교일인 신미년(1871) 3월 10일 봉기할 것을 제안했다.

 

최시형은 반대하였지만 이필제는 그를 설득하여 억지로 승낙을 얻어냈다. 이필제의 난이 시작된 것이다. 

 

이필제는 "내가 스승님의 원한을 씻어내고자 한 뜻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옛글에 이르기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오히려 재앙을 받게 된다고 하였으니, 나 역시 천명을 받았습니다."고 하면서 "한 가지는 스승님의 욕을 씻어내자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못 백성들의 재앙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뜻하는 바는 중국에서 창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일을 일으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쪽에서 받았으므로 그 도를 동학이라고 하였으니, 동(東)은 동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영해는 우리나라의 동해입니다."며 난을 주도했다.  

 

이필제의 죽음

 

이필제는 혹독한 추국에도 조금도 굽히지 않고 조정의 부패와 최제우의 억울한 죽임을 토변하다가 1871년 12월 24일 모반대역부도죄로 능지처사되었다. 부인도 붙잡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가족ㆍ일가친척이 연좌에 얽혀 멸문의 화를 당하였다. 영해지방은 비록 봉기 이후 대대적인 관의 탄압을 받지만 그들의 저항정신만은 꺾을 수 없었다.

 

이 난은 영해에서 끝나지 않았다. 2차 교주신원운동은 1892년 서병옥, 서장옥을 통하여 충청 감사 조 ‘신원(伸寃)과 금폭(禁暴)’의 소장(訴狀)을 제출하여 충청도에서 발생하였다. 

 

1892년 10월과 11월에 동학교단 지도 세력들이 충청도 공주와 전라도 삼례에서 각각 집회를 개최해서 교조 신원과 탐관오리의 수탈 금지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충청 감사 조병식과 전라 감사 이경직에게 제출한 사건이다.

 

조병식과 이경직은 탐관오리의 수탈 금지와 교조 신원은 조정의 일이라는 답변서를 보냈으며, 동학교단은 이를 계기로 조정을 상대로 교조 신원 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제3차 교조신원운동은 서울에서 이루어졌다. 

 

1893년 2월 11-14일 동학교단에서 파견한 박광호를 비롯한 40여 명의 교도들이 교조 신원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정부에 제출하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 밤낮으로 호소한 사건으로, 서울 복합 상소 운동으로 일컫기도 한다.

 

조선 정부는 상소 주동자 박광호 체포를 명령하고 동학교도의 상경을 막지 못한 전라 감사 이경직과 한성부윤 신정희를 파면하는 등 동학을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제4차 교주 신원운동은 1893년 3월에 충청도 보은에서 집회를 개최하면어 발생했다. 전국에서 2만여 명의 교도가 모인 보은 집회에서 동학교단은 교조 신원을 주장하는 한편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라는 정치적 기치를 전면에 내세웠다.

 

정부는 어윤중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임명하고 보은으로 급파해서 동학지도부에 대한 회유와 설득을 진행했다. 그 결과 보은 집회는 4월 3일에 해산되었다.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은 단지 최제우의 누명만 벗기는데 목표를 두지 않고, 서학과 외세를 배격하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종교적 운동이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의 객관적 정세는, 동학교도들의 운동을 교조신원운동 차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1860년대부터 광범하게 진행되어 온 민란의 경험을 통해, 농민들은 사태의 근본적 해결은 전국적인 봉기를 통한 민씨정권의 타도와 외국 세력의 축출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정치적 운동으로 승화하였다. 

 

그러므로 교조신원운동은 민란이 동학혁명으로 이어지게끔 하는 기폭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운동이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이 영덕군 영해였다.  

 

 평민의병장 신돌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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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돌석(申乭石, 본명(本名)은 신태호(申泰浩), 일명은 신돌석(申乭錫), 1878년 11월 3일 ~ 1908년 11월 18일)은 구한말의 평민 의병장이다. 신돌석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의 평범한 농가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계는 평민 출신이었다. 

 

초기 의병 운동이 주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평민 출신이었던 그는 대한제국 최초의 평민 의병장으로 유명하다. 그는 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태백산, 소백산 주변에서 활약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태백산 호랑이'로 불릴 만큼 신출귀몰한 전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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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의병장으로 2년 8개월간 경상북도 영양, 봉화, 진보, 청송 등의 산골과 울진, 평해, 영해, 영덕 등의 동해안, 삼척 등 강원도 동해안을 넘나들며 일본의 각종 건물과 근거지를 공격하며 숱한 전투를 치른 평민장군이다.

 

그는 일본군의 대규모 토벌작전과 신돌석 생포작전에도 끝끝내 잡히지 않고 산악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벌였던 인물이었지만 현상금을 노린 친척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가보훈처의 포상자 공적조서에 따르면, 신돌석의 고종형제 김자성(金自聖)이 자기집으로 유인하여 삼형제가 도끼로 쳐죽였다고 하며 신돌석의 유해를 들어옮기고 일본 헌병대에 고발하였으나 생포하지 않고 살해 후 고발하였다는 까닭으로 일본 헌병대로부터 퇴짜를 맞고 현상금을 받는 데 실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영덕에 가면 신돌석의 생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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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장사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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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장사리는 장사상륙작전을 감행한 곳이다. 장사 상륙작전 또는 장사동 상륙 작전은 1950년 9월 15일부터 9월 28일까지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에서 벌어진 상륙작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작전명 174호, 174 고지라고도 한다.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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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부산항을 출발한 이후, 9월 15일 06:00에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학도병 772명으로 구성된 제1독립유격대대 이 LST 문산호를 타고 장사리 해안에 상륙하여 국도 제7호선을 봉쇄하고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고 철수한 작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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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륙작전은 인천 상륙 작전의 양동작전으로 실시되어 양동작전으로서는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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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병의 총알받이로 인해 장사리에 관심을 두게 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하였다. 그러기에는 학도병들의 많은 희생이 뒤따랐던 것이다. 인천상륙은 원래는 제8군의 임무였으나, 유엔군의 상륙지점 교란을 위해 인민군 복장을 입고 특수 작전을 해야 하는 사정상 북한군과 외모가 비슷한 남한 출신 학생들인 학도병에게 작전명 174를 맡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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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는 3일간의 물자만 보급받아 9월 14일 2시에 장사리 해안에 상륙하여 교란할 때 다쓰고 철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때마침 불어온 태풍 케지아로 인해 LST 문산호가 좌초되는 바람에 작전 계획은 뒤틀려버렸다. 발이 묶은 제1독립유격대대는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7번 국도 차단 임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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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 뒤, 9월 19일에 유엔군 정찰기에 포착되었고, 해안선을 따라 항행하던 미국 제7함대 태스크 포스 77 소속 USS 헬레나 (CA-75)가 이끄는 포격임무대(bombardment Task Force)의 엄호를 받으며, LST 조치원을 타고 철수하였는데, 일부는 남겨졌는데 그들의 생사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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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의 결과로 제1독립유격대대의 183명이 전사하고 92명이 부상을 입었고 실종자는 52명이었다. 부대는 휴식을 취하고 인원을 보충받은 정비한 뒤, 전선에 복귀하였다. LST 문산은 좌초된 채로 버려졌고, 시간이 지나 1991년 3월 6일에 난파선으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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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영덕의 장사리상륙작전이 있었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그들은 잊혀졌지만 이제는 기억해야 한다.

 

6. 100년 이상된 교회들

 

영덕읍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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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읍교회는 미장로교 선교사 권찬영선교사가 영덕에 자주 와서 전도활동을 하여, 주제면,이현철,  및 부인 등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어서 강우근, 노졔식, 노태식, 주세용 등이 결신함으로 1908년 12월에 교회설립을 하게 되었다. 

 

삼사교회

 

삼사교회는 1907년 3월 3일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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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교장로회 총회장을 지낸 이광선목사는 삼사교회 출신이다. 이광선목사는 삭발투쟁에 앞장서 사학법재개정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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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은 목은 이색의 철학, 신돌석의 의병장 활동, 이필제의 교조신원정신이 이어져 교회안에서 3.1운동이 이너지고, 학도병들이 목숨을 걸고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절개와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다.  

 

강구교회

 

강구교회는1910년에 삼사교회의 여신도 남순근이 김수건, 남명호, 김정봉 등에게 복음을 전하므로 이들이 오포교회를 세웠고, 1903년에 세워진 강구교회와 병벙합하여 실제로 오포교회의 역사를 가지기 때문에 강구교회는 1910년 4월 15일이 설립일이다.

 

 이 교회는 3.1운동 때 애국운동을 전개했고, 신사참배 운동에 반대하여 주명우장로는 옥고까지 치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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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교회

 

양성교회는 1909년에 세워졌고, 영수 허일을 대신하여 강희태가 시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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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교회

 

화천교회는 1910년에 세워졌다. 김용근, 김용규와 그 형제 및 숙질이 문중사숙인 화수재에서 예배하여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 후 화재가 발생하여 어려웠으나 온 교회가 모든 힘을 다해 예배당을 신축하고 남녀 전도회를 조직하여 봄과 가을 두번으로 나누어 전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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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결론

 

영덕의 인물로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내고 현재 인도네시아 국가대표 감독인 신태용씨가 영덕 출신이고, 문재인정권의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을 지낸 김수현, 전 삼성라이온즈 감독 유중일, 이랜드 축구선수 박태하, 삼보컴퓨터 창업주인 이용태, 김병로 해양경찰청 차장, 예장통합 총회장이며 한기총 대표, 외항선교이사장, 콩고대학 이사장을 지낸 이광선 목사 등이 있다.

 

영덕은 해변지역으로서 훈련을 2주밖에 배우지 못한 17세의 학도병 들을 통하여 적을 양동작전으로 교란하며 시간을 지체케 함으로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지역이다. 특히 이 지역의 오래된 교회들이 부산의 초량교회와 더불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적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기도를 하였다.  

 

영덕은 칠곡이 낙동강전선을 사수하여 한반도를 지켰듯이 장사리의 학도병 희생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지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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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이상 된 교회가 있는 곳은 항시 축복의 땅으로 전쟁에서도 반드시 승리 할수 있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장사리 상륙작전 역시 여호와께 속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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