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천의 지리와 행정
영천시는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350㎞ 지점에 위치하고, 경상북도의 동남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쪽은 경주시와 포항시, 서쪽은 경산시와 대구광역시, 남쪽은 청도군, 북쪽은 청송군과 군위군이 접하고 있는 경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이다.
영천은 1413년(태종 13) 이래 지금까지 존속한 행정구역으로 고려 초 이래로 영주군(永州郡)이라 하던 지역을 태종 때, 영천군이라 고치고, 1981년 7월 영천읍이 영천군에서 분리하여 영천시로 승격되었다. 영천은 두가지의 명칭이 있다. 하나는 현재의 영천시이고, 다른 하나는 영주시 안에 있는 지역이다. 공교롭게도 영주(永州)가 영천(永川)이 되고, 영천(榮川)이 영주(榮州)가 된다.
현재의 영천시는 1995년 1월 금호읍과 청통 ·신령 ·화산 ·화북 ·화남 ·자양 ·임고 ·고경 ·북안 ·대창 등 10개 면을 영천시에 통합, 도 ·농 병존형의 새로운 영천시로 개편함으로써 행정구역상으로는 1981년 이전 영천군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인구는 1975년에는 약 19만명이었는데 점점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천도 대구처럼 분지에 위치하여 겨울과 여름의 기온차가 심한 편이며, 연평균 기온은 12.4℃, 역대 최저기온은 -20.5℃이다. 연중 강수량 평균은 1,046.8㎜로 다른 지역보다 적게 내리는 편이며, 6-8월에 1년 강수량의 반 이상이 내린다. 비와 눈이 이상할 정도로 적게 온다. 그래서 저수지가 약 1,000여 개 정도 된다. 대부분의 동네에는 저수지가 있는 수준이다.
2. 교통과 도로
최근에는 상주영천고속도로가 개통돼서 구미- 포항 루트에서 상주영천고속도로를 타고 화산JC에서 바로 새만금포항고속도로로 갈아탈 수 있다. 호남으로 바로 갈 수 있는 편리한 상황이 되었다. 영남에서 호남까지 최단거리로 갈 수 있다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의 개통 전에는 포항으로 들어가는 최단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영천시내를 경유할 수 밖에 없었고 이러한 요인으로 영천-포항간 도로에 화물차도 많았지만 새만금포항고속도로의 개통 이후 도동JC에서 영천시 외곽인 청통면 - 화산면 - 고경면을 거쳐 포항으로 직결된다.
3. 영천의 문화유산
임고서원과 정몽주
임고서원에는 정몽주의 영정이 있다.
정도전은 영주출신이지만 정몽주는 영천 출생이다. 포은 정몽주는 고려 삼인 중의 한 사람으로 영천에서 출생하여 개경(개성)에 거주하였다.
포은 정몽주는 영천, 야은 길재는 구미, 목은 이색은 경북 영덕에서 출생하였다. 구미의 길재는 쇠망해 가는 고려왕조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의 유명한 유학자들은 경북에서 나왔다. 근대화 이후 한국의 유명한 기독교 지도자들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영남에서 나오는 것과같다. 유학의 정신이 그대로 기독교로 전이되었다.
정몽주는 이색의 문하생으로서 수학하게 된다. 유년기에 성균관유생인 아버지인 정운관에게서 한학을 배우다가 이색의 문인이 되었다.
이색은 이제현과 백이정, 권부, 안향 등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이제현은 백이정의 문인이자 권부의 사위로 28살 때 원나라에 가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리학을 이루었다.
이제현의 성리학은 이색으로 이어졌고 이색의 학문은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에게 이어진다. 고려말 유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문하에서 배출된다. 정도전도 마찬가지이다.
정도전과의 관계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는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을 만나게 되면서 특히 정도전과는 친한 벗이 되어 정도전의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에 감격, 공조하였다. 이후 정도전과는 오랜 친구로 지내게 된다.
정몽주와 정도전은 청소년기 때부터 권문세족과 외척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사상적, 정치적 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정적으로 돌변한다. 정도전은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정몽주는 역성혁명을 반대한다.
정몽주는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고 암기력이 뛰어났으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어머니 영천 이씨(永川 李氏) 부인은 아들인 정몽주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되리라 예상, '백로가'(白鷺歌)라는 시 한수를 지어 주기도 하였다. 백로가는 정몽주 어머니의 시이다. 정몽주는 어머니의 시대로 백로로 살다가 죽었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새울세라
그는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문관검열로 출사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 예의판서, 예문관제학, 수원군 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으나 역성혁명과 고려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온건개혁을 선택하였으며, 명나라에 외교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관직은 수문하시중과 익양군충의백에 이르렀다. 역성혁명파의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년(공양왕 4년) 4월 이성계의 문병차 돌아가던 길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몽주가 이방원을 만났을 때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했다고도 한다. 이때 이미 이방원은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철퇴를 꺼내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여버려라 하고 지시하였고, 정몽주는 제자 변중량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하였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으나,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려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녹사(錄事) 김경조(金慶祚)에게 끌라고 했다.
이에 녹사가 포은 선생이 술이 취해 그러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아한 눈치로 물으니,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녹사는 말을 끌고 선죽교(善竹橋)를 향했다. 선죽교를 넘으려 할 때 궁사가 말 혹은 정몽주를 저격하여 넘어뜨렸고, 순간 4∼5명의 괴한이 나타나 낙마하여 부상을 입은 정몽주와 그를 감싸안고 보호하던 김경조를 철퇴 또는 몽둥이로 내리쳐 때려 죽였다.
선죽교의 유래
선죽교의 원래 이름은 선지교였다.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 참대나무가 솟아 올랐기 때문에 선죽교가 된 것이다.
이때 그가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일부 묻었는데, 후일 백범일지에 1945년 이후 김구(金九)가 선죽교를 방문할 때까지도 그 흔적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김구는 선죽교를 방문한 바 있다.
북한이 세계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개성역사유적지구(The Historic Monuments and Sites in Kaesong)’가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37차 세계유산위원회(The 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세계유산(World Heritage)으로 등재가 확정되었다. 선죽교는 유네스코에 등록이 되었다.
선죽교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있다.
북한화가 김종성은 절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참대를 그리기도 했다.
이방원과 정몽주의 시조
정몽주는 정도전과도 결별을 하였지만 이방원과도 대립관계에 있었다. '하여가'는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에게 건넸다는 노랫말이다. 이 노랫말은 '이러면 어떠하고 저러면 어떠하냐'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칡덩굴이 좀 얽힌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냐는 것이다. 고려면 어떻고 조선이면 어떠냐는 것이다.
이 물음의 의도는 정몽주를 설득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함께할 나라가 고려인지 조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정몽주를 조선 쪽으로 설득했다. 고려 충신이자 수많은 제자를 거느린 정몽주를 자기 편으로 포섭한다면 이방원은 아주 큰 지원군을 얻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정몽주의 대답은 일편단심으로 대응했다. 정몽주는 이벙원의 물음에 흔들리지 않았고 단심으로서 죽음을 선택했다.
정몽주는 영천사람으로 고려시대의 마지막 충신이었지만 영주사람 정도전은 나주 유배의 체험으로 역성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영남은 이론이 있었지만 호남은 항시 이론을 혁명으로 실천하려고 하였다.
동학이론도 영남에서 나왔지만 강력한 실천은 호남에서 이루어졌다. 정도전 역시 그의 성리학적 이론은 호남 나주의 유배를 통하여 실천적 유교로 돌아섰던 것이다.
이러한 유교적 이론과 실천은 훗날 개신교 통하여 사회적 개혁으로 이어졌다. 영남에 가장 많은 유학자가 나왔지만 한국 개신교를 이끈 지도자들은 대부분 영남출신들이다.
손양원, 주기철, 한상동, 정성구, 이상근, 이상현, 김진홍, 김삼환, 이원영, 강신명, 전성천, 이성헌, 조용기 목사 등은 한국기독교계의 지도자로서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최근에 광화문 집회를 주도하여 현정권에 강력하게 항전하는 전광훈목사도 경북의성 출신이다.
정몽주, 정도전, 이색, 길재, 안향, 이황, 유성룡 등이 귀의했던 유학은 개신교를 통하여 새로운 유교적 기독교로 발돋움했다.
유교적 기독교는 한국을 근대화하는데 실천적 종교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박정희, 이병철, 박태준 등도 모두 영남 출신으로서 한국 경제 근대화의 기수들 이다.
실천적 유교정신은 개신교를 통하여 유교적 기독교라는 신흥종교로 탈바꿈하여 사회적, 경제적, 정신적 영향을 끼치는 종교로서 탈바꿈하게 되었다. 성리학적 종교는 서구의 종료를 통하여 한국적 유교적 기독교로서 토착회되었다.
4. 영천폭동
종교적 이론이 실천될 때 항시 혁명이나 폭동으로 드러났다. 역성혁명인 동학혁명, 10.1 대구폭동, 영주폭동은 좋은 예이다.
1946년 한국의 모스크바인 대구에서 10·1 대구폭동(大邱暴動) 사건이 발생했다. 대구에서 좌익계의 소란이 벌어진 것은 9월 24일 철도 파업 소동의 연장이었다.
1946년 9월 24일 서울에서 철도 노조 파업이 일어났고, 대구로 번져 철도 파업과 동시에 40여개 공장 노동자들이 동정 파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대구역 앞의 공회당과 호텔 등에 집결하여 적기가(赤旗歌, 북한의 혁명가요)를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기세를 올리고 무장경찰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대구가 아니라 모스크바였다.
모스크바는 지금까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등 하여 폭동과 혁명, 폭력을 즐기고 있다. 좌익은 항시 폭쳑을 통하여서라도 파괴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대구 10.1 폭동, 영천 폭동, 여순반란사건, 제주 4.3 사건이 항시 폭동으로 간 것도 좌익들과 무관하지 않다. 결국 박헌영은 북으로 도망가고 희생자들은 무고한 양민들이다. 어설프게 폭동에 개입하다가 좌익으로 엄청난 많은 사람들이 주검으로 결말을 맺고 말았다.
위령탑 건립문
영천 임고강변에 가면 위령탑이 있다. 대구10.1 폭동이 영천에 번져 여기에 가담한 사람들과 1945-1950년 까지 좌익으로 몰려 적법절차없이 사살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한 위령탑이 건립되었다.
이들의 대부분이 아작골이라는 곳에 매장되었다.
아작골 산에는 원혼비가 세워져있다.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이 600여명 이상 사살되었다.
대구폭동의 연장선에서 영천에도 시위가 대규모로 있었다.
영천은 대구와 달리 주로 지주와 소작농들의 소작쟁의가 심했다.
그러자 경찰과 군인들은 좌익소탕을 목적으로 마을전체를 불지르고 무고한 주민집단을 사살했다.
아작골은 대구 10월 사건 관련자들과 보도연맹 사람들이 집단으로 아작났다고 하여 아작골이라고 불렀다.
영천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교회는 한옥식의 자천교회 이다. 자천교회(慈川敎會)는 남녀석을 구분한 전통적인 한옥 예배당으로 지어졌다. 이는 교회사뿐만 아니라 건축사·문화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어 현재 총회사적지 제2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52호, 한국 교회 100주년 기념 교회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권헌중은 원래 영천 사람이 아니다. 의병활동 경력으로 일제의 눈을 피해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형편이었다. 이후 대구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식솔들을 데리고 청송과 영천의 경계가 되는 노귀재를 넘던 중 아담스 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여기서 복음을 접한 것이 1898년이었다.
권장로는 1898년에 초가집을 구입하고, 1903년에 미국인 선교사 어드만과 함께 교회를 창립하고, 1904년에 예배당을 완공했다.
결국 마을로부터 교회 설립을 허락받은 권헌중은 초가삼간 한 채를 구입하여 서당을 겸한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자천교회 역사의 첫 출발이 된다. 2008년 자천교회는 권헌중 장로 기념비를 세웠다.
내부는 전통적인 한옥스타일의 교회이다.
자천교회의 에피소드를 말하자면 김익두목사가 영천에서 부흥회를 하면서 앉은뱅이을 고친 것이다. 이 사람이 권헌중과 서석희장로의 뒤를 이은 도장을 파는 조병희씨 이다.
조병희는 원래 저잣거리에서 도장을 파던 평민이었다. 그리고 그는 앉은뱅이였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에게 놀림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하루하루 힘든 삶을 연명하던 인물이었다.
그러한 그가 김익두목사 집회에 우연히 참석하여 병을 고치게 되었던 것이다. 김익두목사는 2만 여명 이상의 난치병 환자들을 안수 기도하여 고쳤으며, 280 여 개의 교회를 세웠고, 200 여 명의 신학생들을 공부시켰다.
김익두 목사의 신유사역은 일반신문에서도 관심거리였다. [동아일보]는 1920년 5월 17일부터 부산진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를 소개하면서 “벙어리가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걸어 간다”고 썼다. 영천에서도 그러한 기적이 발생했던 것이다.
김익두목사의 부흥회는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였다.
이후로 조병희씨는 예수를 영접하고 본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헌신적으로 자천교회를 섬기다가 1920년에 안수 집사가 되고 결국 영수[장로제도 이전에 있었던 직분]의 자리에 올라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앉은뱅에에서 일어선 평민이었던 그가 반상의 차별을 없애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자천교회는 교회학교를 통해 교회가 여성들에게 해방 공간이 되었던 것처럼 평민들에게도 해방 공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골 마을까지 깊게 뿌리내린 봉건적 신분 질서를 타파하는 데에도 앞장섰고, 근대화문명과 민주주의를 가져오는데도 주춧돌 역할을 하였다.
신성학교 설립
자천교회는 신교육기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신성학당은 근대식 교육기관이었다. 서당 훈장으로서 의병 활동을 하였던 권헌중은 지성인이었기 때문에 당시 선교사들이 실시하였던 근대식 학교 교육 제도를 도입하여, 자천교회 예배당에 ‘신성학교’라는 2년제 소학교를 설립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에는 학교의 시작을 1913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상부 기관에 보고된 시점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실제로는 좀 더 일찍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학교가 갖는 의미는 주일학교[Sunday School]가 아닌 교회학교[Church School]로서 당시 우리 사회에 근대식 학교가 드물었을 때 교회가 근대식 공교육의 현장을 감당했다는 데에 있다. 이러한 교회학교는 자천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육 선교에 힘을 쏟았던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초기 한국교회가 가진 일반적 현상이었다. 영천에 근대식 교육기관이 처음 들어온 것이었다.
이 당시 신성학교의 여러 교육의 면면들을 보면 일제 치하에서 한국교회가 민족 실력 양성을 도모하기 위해 실시했던 문맹 퇴치 운동, 농촌 계몽 운동, 절제 운동, 민족운동에 앞장서 근대화를 앞당기는 초석의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교회는 반항일운동, 반좌익운동, 반봉건, 근대교육을 실천하는 곳이었다.
이외에 1973년, 대한민국에서 여성 최초로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노동부(현 고용노동부) 등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였고, 1994년에는 광명시장에 임명되어 최초의 여성 관선 시장이 된 전재희도 영천 출신이다. 그는 17, 18대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선교사의 도움으로 1903년에 세워진 교회는 암울해진 희망없는 일제 시대에 신앙을 통하여 희망을 주고, 민족의식을 갖고 독립운동에 앞장섰고, 나아가 종교활동에만 머물지 않고 서구의 근대화교육을 일찍 받아들여 수많은 인재를 양성했고 지식인들을 깨웠다. 보편사 속에 들어온 구속사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이 보편사를 포도주로 변화시키는 질적인 능력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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