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대구3)

편집인 | 입력 : 2022/02/22 [05:08] | 조회수: 421

대구제일교회

 

대구의 선교사역은 대구제일교회로부터 시작이 된다. 개척초기에는 서자명, 정완식 등을 중심으로 교세가 확장되면서 1908년 재래양식과 서구 건축양식을 합작하여 교당을 건축하였다. 1933년 신도들의 헌금과 지방교회의 성금을 모아 지금의 벽돌조 교회당을 건축하고 이름을 제일교회로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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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의 수많은 교회는 대구제일교회로부터 시작이 되었을 정도로 대구제일교회는 경북지역 교회의 효시이다. 대구제일교회를 빼놓고서는 경북교회역사를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더군다나 다른 지역의 교회와 달리 대구제일교회는 아담스 선교사가 세운 대구의 새문안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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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역시 호남선교처럼 189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구제일교회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하기 2년 전에  1893년 4월 22일 베어드(배위량) 선교사가 대구에 첫걸음을 내디고 대구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면서 시작이 된다. 

 

 

 

남장로교출신 중 7인의 개척자들은 서울에서 10개월동안 한글을 배우고 1893년 9월에 전주로 내려왔다. 1893년 남장로출신 선교사들은 전주에서 선교사역을 하고, 북장로교 출신 선교사들은 같은 해 1893년 대구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호남선교도 1893년부터 시작이 되었다. 일단 본격적인 선교라기 보다는 방문선교에 불과했다. 대구도 마찬가지이다. 베어드는 대구를 방문해서 대구제일교회를 개척했다. 

 

남장로교 7인의 선교사들은 새문안 교회를 설립한 북장로교출신 언더우드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1893년부터 호남선교를 개척하게 되었다. 이들은 전주스테이션, 군산스테이션, 순천스테이션, 광주스테이션, 목포스테이션을 만들어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선교를 하게 되었다. 반면 영남에는 안동스테이션, 대구스테이션이 있었다. 

 

이처럼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은 항시 교육과 의료를 동반한 스테이션선교를 하였다. 그러나 해외에 나가 있는 한국교회는 스테이션선교라기 보다는 팀플레이나 체계적 선교가 아닌 독고다이식 선교를 하여 생계형 선교사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선교지의 재산문제 때문에 선교사들과 교단이 많은 갈등을 양산하고 있다.  최근의 한국선교는 선교지를 위한 선교라기 보다는 선교사들을 위한 선교로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를 선교할 때는 생계형 선교가 아닌 단체의 팀플레이 선교였고, 항시 교육과 의료선교를 동반하였다.    

 

대구선교의 효시, 베어드

 

북장로교출신 베어드는 1891년 1월에 미국 북장로교의 파송을 받아 부산에 입국을 해서, 현 초량교회인 1892년 11월에 설립을 하고, 1893년 4월 대구에 방문하여 1893년 4월 22일 대구제일교회를 개척했다. 이처럼 미국장로교선교사들은 동학운동을 전후하여 영호남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대구제일교회는 베어드선교사가 대구를 방문하여 1893. 4. 22. 대구제일교회를 개척하였다고 보고 있다.       

 

  대구제일교회 홈페이지

 

아담스 선교사

 

대구제일교회는 조선 말기인 1893년에 남성정교회(南城町敎會)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경북지방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1896년 부지를 마련하고 베어드가 갑자가 서울로 상경함에 따라 그의 처남 아담스가 1897년 11월 7일 대구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하며 교회 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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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에드워드 아담스(Adams, James Edward, 한국명: 안의와)는 1867년 5월 2일 미국 인디에나 주 맥코이(McCoy)에서 출생했다. 1888년 캔사즈주 터피커(Topeka)의 워시번(Washburn)대학을 졸업하고, 존 홉킨스(Johns Hopkins) 대학에서 1년간 수학하였다. 1894년 시카고에 있는 맥코믹(McCormick)신학교를 졸업하고 넬리 딕(Nellie Dick)과 결혼하였으며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사로 1895년 5월 29일 내한하였다. 의학적 지식을 갖고 한국에 왔다.

 

그의 아내 넬리 딕은 1866년 9월 15일 캔사스 주 토피카(Topeka)에서 출생했다. 신앙적인 가정에서 출생한 넬리는 교회학교 학생에 불과했을 때 기네스 박사(Dr H. Grattan Guinness)의 ‘선교사가 되려는 이상’(The Idea of becoming a missionary)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듣고 처음으로 선교사에 대한 관심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신앙생활에 정진하였고, 그 후에는 여자청년선교회(Young Ladies’ Missionary Society), 기독청년 면려회(Christian Endeavour), 그리고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등에 가담하면서 선교사로서의 삶을 준비하게 되었다.

 

 

넬리 딕 아담스(Nellie Dick Adams, 1866-1909)는 1909년 10월 31일 4번째 자녀 출산 후유증으로 43세를 일기로 한창 젊은 나이에 먼 이국땅에서 순교했다.

 

그녀의 묘지는 현재 동산의료원 선교박물관 경내 잔디밭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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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달리 한국을 사랑했던 그녀는 선교기지내에 유년 주일 학교, 부인 주일학교, 부인 사경회 등을 운영하며 남편의 선교사역을 도왔다. ‘넬리 딕’의 장례식은 한국여성들의 애도 물결로 줄을 이었다고 한다.

 

‘넬리 딕’의 묘비명에는 ‘그녀는 죽지 않고 잠들어 있다(She Is Not Dead But Sleepeth)’로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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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아담스는 내한 초기 부산에 머물었다가 그의 매형 베어드(Baird) 선교사 후임으로 1897년 11월 1일 대구로 옮겨와서 선교부를 개척하고 1898년 12월 18일 대구제일교회를 시작했다.

 

1900년 11월 11일 대구에 설립된 희도(喜道)학교는 근대학교의 효시이며, 설립자 겸 교장으로 활동했다. 아담스는 교육(계성·신명·희도), 의료(동산병원), 선교(제일교회)의 사역을 시작했다.

 

아담스, 교육사역

 

1902년에는 부루엔의 부인 부마태가 교회 구내에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했다.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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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여학교의 교훈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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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이 학교를 세운 1907년 10월 미국북장로교 부르엔 선교사의 부인이었던 마샤 스코트 브루엔(부마태)여사가 12명의 여학생들앞에서 한 말이다. 그녀는 동산의료원 은혜동산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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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죽어서도 대구제일교회 옆에 있는 신명여고를 보고 있을 것이다. 대구신명여고에는 부루엔의 동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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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에 첫 졸업생 3명을 배출했다. 신명의 뜻은 '믿음으로 학문의 햇불을 밝힌다'는 뜻이다.  

 

신명여학교 학생들은 1919년 3월 8일 당시 계성고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다. 신명학원은 그래서 동산동 교정에서 ‘신명 3·8 독립만세운동 기념식’을 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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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여고는 해외 독립운동가였던 이금례(1회) 여사와 계명대 의대 교수를 지낸 사회사업가 신동학(35회), 미국 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인 피아니스트 변화경(52회), 패션 디자이너 박동준(55회)씨 등 각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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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부인 박영옥(35회)씨와 대구여성단체협의회장을 지낸 문정자(37회·대한어머니회 대구시연합회장)씨, 계명대 김복규(54회·행정학) 교수도 동문이다.


경제계에서는 주사제를 만드는 제일제약 김성자(36회) 회장과 대구상공회의소 여성기업특별위원장인 명진섬유 석정달(45회) 대표가 있다.

 

또 법조계에는 이명숙(68회)·황보영(69회) 변호사 등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으며, 걸프전 종군기자로 활약한 문화방송 이진숙(65회) 기자도 이곳 출신이다. 국민혁명당의 강연재 변호사도 신명여고 출신이다.

 

  이진숙기자

 

계성학교

1906년 10월 15일 아담스는 계성중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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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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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현 프린스턴 신학원교수는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분으로서 계성고등학교출신이다. 마이애미대학교 정치학 교수를 역임한 찰리 최목사도 이상현박사와 계성고등학교 동기생이다.  

 

대구제일교회는 계성고등학교와 하버드대출신 이상현박사를 1996년 부흥회 강사로 초청한다. 1997년에는 김삼환목사를 초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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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스 선교사는 1912년 12월 19일, 경상노회(제5회) 노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그의 전도로 1914년, 경산군 평사(平沙)교회를 비롯하여 1921년 연일군 중감(中甘)교회 등 여러 교회를 설립하는데 기여했다.

  

의료사역

 

호남에서 테이트는 남장로교출신으로서 1893년 전주에 도착했고, 잉골드는 의사로서 1897년에 전주에 도착했다.

 

그는 한강 이남의 최초의 의사이고 근대병원을 세운 예수병원의 설립자이기도 했다. 영남의 존슨보다 잉골드는 2년 먼저 전주에 들어와 1898년에 예수병원을 세웠다.

 

제중원

 

대구에서 제중원을 개원한 사람은 잉골드보다 2년 늦게 한국에 들어온 미국 북장로교출신의 존슨(Dr. Woodbridge O, 1869-1951, 장안차)은 대구 최초의 의료선교사였다.

 

한국 이름 장안차인 그는 1899-1910년까지 제중원의 초대원장으로 있었다. 그는 팔공산 파계사에서 스님들과 어울리면서 한국말을 익혔다. 불자의 스님들에게 한국말을 배워 개신교도들 위하여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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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슨 선교사는 스님들로부터 한글을 2년 동안 배워 1989년 7월 대구에 한옥을 마련하여 미국약방을 개설하였다. 그 해 10월에 약제실과 수술실을 갖춘 제중원을 개원했다. 최초의 제중원은 대구읍성의 성벽의 안쪽에 위치했다.

 

 대구제중원

 

제중원은 한강이남 최초의 병원이었고 영남지역 최초로 서양의술을 펼친 병원이다.  이 병원은 1899년 크리스마스 전에 개원하였고 훗날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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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에 시작한 전주 예수병원보다 1년 늦게 시작한다.

 

 

 

100년 된 사과나무

존슨은 대구 사과를 보급(1900년 경)한 공적이 있다. 존슨(W. O. Johnson, 장인차) 선교사가 미주리 주에서 묘목으로 처음 수입하여 선교부 뜰 안에 심었다. 병원의 역사는 사과나무를 통해서 알려진다. 

 

가수 이용은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고 했다. 존슨은 대구에 사과나무를 심었다. 이용이 심은 사과나무는 온데 간데 없다. 그러나 존슨이 심은 사과나무도 고목이 되어 죽었지만 아들 나무를 통하여 열매를 맺었다.

 

  

 

  

 

  

 

  


대구의 사과나무는 존슨시절에 심겨졌는데 1세대 나무는 죽고 2세대 나무가 살아서 열매를 맺고 있다.사과나무는 선교의 역사와 함께 하고 있다. 병원도 사과나무처럼 번성하여 굴지의 대학병원이 되었다.  

 

대구제일교회 119년의 역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1893년 4월 22 베어드(배위량) 선교사 대구에 기독교 전래.

 

2. 1895년 11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에서 대구스테이션 설치 승인

 

3. 1896년. 1월 대구스테이션 부지 및 건물 매입 초가5동, 와가 1동

 

4. 1897년 11월 1일 아담스(안의와)선교사 대구 부임

 

5. 1899년 12월 제중원(동산의료원) 설립.

 

6. 1900년 대남소학교 설립.

 

7. 1902년 신명여자 소학교 설립

 

8. 1906년 보이스 아카데미(계성중학교) 개교

 

9. 1907년 걸스 아카데미(신명여자중학교) 개교.

  

이상근박사

 

대구제일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이상근박사이다. 그는 대구제일교회역사뿐만아니라 한국기독교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정류 이상근박사(1920-1999)는 대구제일교회(1957-1999)에서 42년 동안 목회했던 한국 최고의 성경주석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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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신구약 주석, 외경주석까지 완성했다. 1959년 달라스 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1975년 신약성경 주석 12권을 완간하고, 1993년에는 구약성경 주석 15권을 완간했다.  

 

  


그는 1920년 대구출생으로 1932년 수창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9월 18일(수요일밤) 만 15세 때 계성중학교 다니는 친구의 인도로 대구중앙교회에 첫 출석하여 처음 신앙생활 시작했다.

 

1935년 교회에 나간지 얼마안되어 발의 고통 때문에 100일 작정기도를 하였고, 1940년 대구 동산에 있는 성경학교에서 수학을 하였고, 194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평양신학교

 

평양신학교에서 대학검정고시를 합격하여 대학에 갈 수 있는 자격을 확보하였다. 그는 1944년에 졸업을 했고, 그 해 12월 30일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1945년에 목사안수를 받고 평양신학교 강사를 역임했고, 장대현교회에서 부목사 생활을 했고, 1945-46년까지 평양 능라도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월남하였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창동교회를 분립 개척했고, 분립한 지 2년만에 창동교회는 대동강변에 능라도교회를 개척해 세웠다.

 

  능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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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1 대구 폭동이 발생하였을 무렵에 이상근박사는 칠곡옥계 교회(현재 구미옥계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고, 대구남산교회 전도목사로 있으면서 대봉교회를 분립개척을 하기도 하였다.

 

  대봉교회

 

대봉교회는 남산교회로부터 분립된 교회이다. 1948년에 개척을 시작하였다가 1953년에 유학차 도미한다.

 

  대봉교회 연혁

 

1955년에는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수학을 하였고, 뉴욕신학교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6년 영남신학교 이사장에 피선되었고, 1959년에 미국달라스 신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달라스 신학교

 

한국에 돌아와서 영남신학교 이사장및 교장을 역임하였고, 1960-1964년 장로회신학대학교 강사를 역임하였고, 1974년에는 59회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에 피선되어 총회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 신약 12권을 완간하였고, 1993년에는 구약성경 주석 15권을 완간하였다.  

 

이성희 목사는 이상근박사에 대해 하루에 원고 15장을 썼다고 가장 많은 양의 작업을 했다고 기뻐했다고 했다. 

 

1959년 박사학위를 받고 오신 아버지는 그 해부터 끈기있게 주석집필에 몰두하셨다. 어느 해 여름, 조용한 대구 팔공산 기슭의 여관에서 한 주간의 휴가를 얻으셨다. 우리 형제가 아버지를 만나러 그곳에 갔을 때 아버지는 한 방 가득 책을 펼쳐놓고 글을 쓰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날 가장 많은 양의 작업을 했다며 기분 좋아 하셨다. “오늘 내 평생 글을 제일 많이 썼다. 그런데 원고지 몇 장이나 썼는지 맞춰봐라.” 우리는 맞추지 못했다. 아버지는 “오늘 15장을 썼다”고 했다. 종일 책과 씨름하여 쓰는 양이 200자 원고지 15장이 못 됐다. 아버지는 그렇게 매일 쓴 적은 양의 글을 모아 구약과 신약 그리고 외경의 주석을 마치셨다. 오래 전 미국의 어느 신학자에게 물었을 때 세계적으로 신구약과 외경 주석을 다 쓴 분은 내 아버지밖에 없다고 했다.

 
이상근박사가 성경주석가가 될 수 있기까지는 아픔의 가시가 있었다. 그것은 평생 발에 병을 안고 살아갔다.

 

 

 

 

16살에 100일 작정기도를 하였지만 낳지를 않았다. 발때문에 학교도 가지 못하고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민간치료를 한다고, 한방약을 붙인 것이 덧나서 고등학교도 못가니까, 대학 진학도 못하고, 검정고시로 입학했다. 바깥 출입을 못하니까 집안에서 계속 성경만 보아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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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만 읽은 것이 훗날 성서학자가 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60년 동안 발을 절면서 고통 가운데 살았다. 1993년에 은퇴한 이후 외과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받게 되었는데, 발뒤꿈치에서 길이는 1cm 정도, 머리카락 굵기의 철사가 나왔다.

 

어렸을 때 맨발로 놀다가 철사에 찔린 것이 속에 들어가서 그의 평생 가시가 되었던 것이었다. 철사라는 가시가 있었기에 성경만 연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근박사는 발 수술을 받은 후 철사를 들고 “이 철사가 내 육체의 가시가 되어, 60년 동안 나를 찔렀으나, 이 가시로 인하여 내가 대(大)성서학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였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 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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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미국 선교사들의 교회설립이 대구제일교회를 낳게 하였고, 대구제일교회를 통하여 신명학교, 계성학교, 동산의료원을 통하여 수많은 지성인들, 목회자들이 탄생하였고, 수많은 시민들이 병원을 통하여 치료를 받았다.

 

선교사들을 통한 대구에 복음이 들어오게 되면서 이상현박사, 이상근박사가 탄생되었다. 대구에 복음이 없었다면 이상근박사는 없었을 것이고, 아들 이성희목사도 없었을 것이다. 

 

대구10.1 폭동시에도 대구제일교회는 요동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종로가 아닌 대구에 심은 사과나무는 선교사들의 사역의 열매를 말해준다. 단순한 사과열매가 아니라 선교사들의 피와 땀의 결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열매이다. 

  

  존슨 사과나무



은혜 동산


수많은 선교사들의 희생은 보편사 속에 밀고 들어온 구속사의 역사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의 희생을 통한 십자가의 구속사는 보편사 속에 들어와 대구의 역성혁명을 가져왔다. 대구는 어느듯 국제도시가 되고 말았다. 

 

http://www.lawtimes.net/3796 (대구1)

 

http://www.lawtimes.net/3797 (대구2)

 

http://www.lawtimes.net/3799 (대구 3)

   

http://lawtimes.net/2675 (영남1) 

 

http://www.lawtimes.net/2676(영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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