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신앙유산답사기(대구편2)

대구10.1 폭동을 중심으로

| 입력 : 2022/02/20 [04:31] | 조회수: 411

 나의 신앙유산답사기는 계속해서 대구의 10.1 폭동과 대구에 온 선교사들의 사역에 대해서 다룬다.  

 

1. 대구의 폭동

 

대구사건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대구10.1 폭동사건이다. 7,500여명이 검거되고 30명이 사형을 당한 사건이다. 전국의 73개 시군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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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영천폭동으로 이어졌다. 영천은 지주와 소작농들의 소작쟁의가 심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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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은 대구와는 달리 지주의 반감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영천폭동은 토지개혁과 신분제 철폐를 위한 소작농들의 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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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의 대구폭동사건은 2년후 1948년 여순사건과 제주 4.3사건의 도화선이 되었고, 1950년 6.25까지 연결된 엄청난 사건이었다.  

 

박헌영의 계획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미군정의 미곡정책의 실패에 있었지만 사건의 이면에는 박헌영이 도사리고 있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결혼식에 나타나 축하를 해주었다.

 

 

  

당시 10.1 폭동이 진압된 이후 우익세력 위주의 한민당은 '이 사건은 박헌영 일파의 모략선동에 기인한 것'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좌익도 박헌영이 꾸민 계략이라고 비판했다.

 

좌익세력 이영이나 정백 등 반(反) 박헌영 세력 공산주의자들도 '이번 싸움이 박헌영의 공산당이 벌인 모험주의'라며 격렬히 비난했다. 좌우익이 모두 박헌영이 꾸민 폭동이라고 비판하는데는 이의가 없었다.

 

김규식과 여운형등 좌우합작 세력에서는 보다 합리적인 비판을 했다. "10.1 대구 폭동사건은  미 군정의 미곡정책이 옳지 못한 것이 항쟁의 주요 원인"이라면서도 이면으로는  "폭력으로 혼란을 일으킨 원흉은 조선공산당"이라면서 조선공산당을 비난했다.

 

민간인들의 피해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무고한 양민들이 좌익으로 몰려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다. 진실화해 위원회는 억울하게 죽은 양민들의 누명을 벗어주고자 노력했다.  

 

정부는 1946년 10월 항쟁이 일어난 지 74년 만에 대구에 희생자 위령탑을 세웠다. 그동안 ‘빨갱이’라는 낙인에 숨죽여 살았던 유족들에게는 작지만 명예 회복의 징표로 보인다.

 

채영희 10월항쟁유족회장은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도 알 수가 없는 유족이 많다. 유해도 찾지 못했다. 미군정의 부당한 처우에 저항하다 희생된 우리 부모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유족의 아픔을 위로할 작은 위령탑이라도 생겨 한이 조금이나마 풀리게 됐다”고 말했다. 채영희씨는 아버지를 보지도 못한 채 어머니는 늘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만 되새겼다고 했다.   

 

  


 진실화해 위원회는 59명의 사망자만 찾아냈다.

 

  

 

억울하게 죽은 민간인들이 많이 있다.

 

  

 

좌익을 척결한다는 의미로 죄없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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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사건이나 제주 4.3사건에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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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사 위조 사건

 

10.1 폭동의 원인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1945년에 있었던 정판사 사건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 공산당 박헌영은 자금압박을 받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엄청난 범죄를 저지르기에 이른다.

 

자금의 압박을 받은 박헌영은 위조지폐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김일성과 박헌영

 

그것이 정판사 위조사건이다. 위조지폐를 인쇄하기로 결심한 것은 남한정부로 부터 서훈을 받은 주세죽의 남편 박헌영이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1946년 5월 서울에서 발생한 위폐 범죄 적발 사건으로, 남한의 공산주의 운동 세력과 미군정의 정면 충돌을 불러오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공산당의 당원인 은행 직원이 이관술의 지휘하에 10만 원의 위조지폐를 만들다가 야간순찰중이던 군정청 수도경찰에 의해 적발되었다. 그들은 현재 백억대에 해당하는 1,200만원을 위조해 만들었다.

 

박헌영일당은 일제 조선총독부의 조선은행 100원권 지폐를 인쇄하던 서울 중구 소공동소재 근택인쇄소(近澤印刷所) 직원인 공산당원 박락종(朴洛鍾)에게 그 인쇄소가 들어있는 빌딩(적산건물 敵産建物)과 그 안의 인쇄기계 등 설비 일체를 접수토록한 후 이를 조선정판사(朝蘚精版社)라 개칭하였다. 정씨 성을 가진 판사가 아니라 인쇄와 출판을 하는 정판사라고 개칭을 한 것이다. 

 

 

  정판사 건물(근택빌딩)

 

 

박헌영은 이곳에 조선공산당본부를 두고 당기관지 해방일보사라는 신문을 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9월20일 극비리에 1,200만원에 해당하는 조선은행권 100원권 지폐를 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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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법으로 규정한 발권과정을 거치지 않고 임의로 시중에 유통시켰기 때문에(법화가 아닌) 위조지폐가 된 것이다. 공산당원들은 이 돈으로 활동비를 흥청망청 뿌리며 즐거워했고 사회에는 돈이 넘쳐나 인플레가 심하여 경제혼란까지 일어날 정도였다. 박헌영은 고급 요정에서 살다시피했다.

 

최운하 총경은 유능한 형사들을 풀어 몇몇 공산당원들을 감시하다가 마침내 다음해 5월에 이들을 체포하며 정판사를 급습, 이들의 엄청난 범죄 전모를 밝혀내고 말았다.

 

이들은 11월23일(1946년) 양원일 재판소장에 의해 피고 전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다(이관술, 박락종, 송언필, 김창선 무기징역, 신광범, 박상근, 정명환 징역 15년, 김상선, 홍계훈, 김우용 징역 10년). 최고 책임자 박헌영은 재빨리 북한으로 월북한 후였다.

 

재판 이후 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을 '조선판 히틀러 테러'라고 비난하면서 조선인민보(좌익계열 신문)에 "공산당은 방화라든가 지폐 위조 같은 것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세계의 상식입니다. 왜나하면 공산당은 인민 대중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인민 대중에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며 또 할 수 없는 정당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고, 이주하 등 공산당 필진들도 억울한 누명임을 강조하는 주장 글을 발표했지만 이는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했다.

 

당시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주요 언론들은 사건을 상세히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위조지폐 사건은 벌써 여러번 발생하여....이란 사건은 한 국가의 경제를 교란 혼동시킬뿐만아니라 조국재건의 중대한 사명에 큰 장애가 되는 때문이다"라고 보도했다.   

 

이렇게 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었다는 의혹은 점차 기정사실화에 들어갔고, 당시 급속도로 번져가던 조선공산당의 발목을 잡았다. 이관술은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수감된 후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때 처형당했다.


사건 이 후로 '정판사'는 당시에 우파 노선을 걷던 한국 천주교에 불하되어 경향신문을 인쇄하게 되었다. 그래서 경향신문이 출간되었던 것이다. 좌익들이 운행한 해방일보는 무기한 정간으로 사실상 폐간 조치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공산당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재기를 노려야 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수세에 몰렸던 박헌영은 이남의 공산세력을 조직하고자하여 더욱 극렬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1946년 5월 12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주최로 독립전취국민대회를 열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였다. 

 

박헌영은 1946년 6월 27일부터 7월 12일까지 보름동안 평양을 방문하고, 9월 중순에 대구시 총파업 계획을 세웠다. 1946년은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물자난으로 서민들의 생활은 빈궁해졌고, 민심은 흉흉해져, 공산당들이 전술을 펼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그 결과 공산당의 선동으로 1946년 부산철도 노동자 7,000여명이 파업선언을 하면서 9월 24일에는 전국산하 철도종업원 4만여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산하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에 지령을 내려 철도노조총파업본부를 영등포공장에 설치하고 전국철도노조에 다시 파업지시를 내렸다. 이처럼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전국철도 파업이면에는 박헌영이 있었다. 그는 남한을 공산화하기 위하여 김일성보다 더 열심이었다.  

 

노동자들은 철도파업을 시작으로 전신, 전화, 전기, 운수, 섬유, 금속, 화학, 출판 등 40여개의 노조단체 노동자 25만 1천명이 가담하여 해방 이후 최대규모의 파업을 돌입했다. 파업은 1주일 동안 계속되었고 서울에서만 295개 공장이 파업에 들어갔고, 3만여명의 노동자와 1만 6천명의 학생이 가담하였다.

 

이 파업은 소련군정과 조선공산당이 정치적 음모에 의한 것으로 노동자들이 얻은 이익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므로 10.1 폭동의 원인은 소련군정과 조선공산당의 세력을 등에 업은 좌익들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박헌영은 정판사사건으로 물러나지 않고 총파업과 인민항쟁을 촉발시켜 공세로 전환하겠다는 신전술을 폈다. 그것이 10.1 폭동의 시작이었다. 그러므로 10.1 폭동은 순수한 대구노동자들의 혁명이 아니라 소련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의 세력을 입은 박헌영이 뒤에 있었다.  

 

10.1폭동의 전개

 

대구의 10월 폭동은 박헌영이 1946년 9월 24일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전평) 조직을 총동원한 철도파업과 9월 전국노동자 총파업에 이어 연이어 일으킨 사건으로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박헌영이 황해도 해주로 올라가 폭력전술로 노선을 변경한 후 일어난 전국적 규모의 대 사건이었다. 노동운동이 아니라 폭동사건이었다. 

 

직접적으로 10.1 폭동은 정읍의 동학혁명처럼 경제적 곤궁으로 말미암은 사건이기 때문에 기아폭동이기도 했다. 굶주림을 참지 못한 국민들이 미군정의 미곡정책에 규탄하면서 벌어진 사건이다. 미군정의 행정 실패로 쌀값이 폭등하여 식량난과 전염병(콜레라)이 겹치자 당시 미군정은 쌀 강제 수집과 제한 배급 정책을 펼쳤고, 대구에서는 굶주린 시민들의 시위가 수시로 벌어졌다.

 

1946년 5월 말부터는 쌀 배급과 인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벌어졌고 9월에는 부산에서 25만 명이 총파업에 참가했으며, 급기야 10월 1일 저녁 대구역 앞에서 수천 명의 시위 노동자와 100명의 무장 경찰들이 대치하다가 경찰의 발포로 2명이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1946년 10월 1일 오전 전평선동자들은 부녀자들을 부추키면서 1,000명을 동원,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쌀을 달라고 외치게 했다. 당시 사무실 주위에 모여 수천 명의 노동자들은 '쌀배금 일급제 폐지, 박헌영선생 체포령을 취소하라'라고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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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영을 지지하는 사람들

 

광화문에서 민주 노총 노동자들이 "이석기를 석방하라"고 외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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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분노한 시민들은 숨진 노동자의 시신을 메고 대구 경찰서를 점거해 무기를 탈취했고, 대구역 앞에서 경찰과 시민들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시위대는 부잣집 혹은 친일파의 집을 털어 식량과 생필품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여순반란사건이나 제주 4.3 사건은 항시 무기고를 탈취하면서 폭력시위양상으로 갔다. 결국은 경찰과 군대에 의한 무고한 양민까지 학살되는 사태로 빚고 말았다. 공산당은 항시 폭력으로 귀결한다. 그것은 막스와 레닌의 혁명이 폭력을 정당시해서라도 혁명에 성공해야 한다는 슬로건이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는 이념을 통하여 사단의 영이 역사하였다. 

 

순천의 코잇 선교사는 1920년대 우리나라에 볼세비키즘이 전국에 퍼져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원산의 성령사건 이후 한반도의 한편은 성령을 통한 대부흥운동의 역사가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악령을 통한 좌익의 폭동이 끝나지 않았다. 악령은 6.25를 통하여 약 250만명 이상이 처참하게 죽도록 만들었다. 예수시대처럼 한반도에도 성령와 악령이 동시에 역사했다. 악령은 주로 신사참배와 좌익을 통하여 역사했다. 폭력으로 끌과가 무고한 인명을 희생시키는 것은 악령의 역사이다.    

 

이러한 좌익사상이 오늘날도 민주의 이름으로 주사파의 옷을 입고 청와대와 각계 각층에 침투하여 국가를 소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한국은 주사파적 민주주의의 나라가 되었다. 뉴스앤조이와 CBS, 이단감별사들은 주사파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고 한국교회를 파괴하는 반기독교적 전위부대역할을 하였다. 

 

뉴스엔조이와 CBS는 윤리와 개혁을 명분으로, 이단감별사들은 교리를 명분으로 한국교회를 파괴하는데 앞장섰다. 이들은 뒤로 연대했다. 오히려 동성애는 지지하는 양샹을 보여왔다.

 

그들 이면에는 민주와 개혁을 명분으로 한 좌익사상이 내면에 들어있기 때문에 한국교회를 파괴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특히 이단감별사들은 한국의 성령을 통한 은사운동을 죽여버렸다. 이제는 이단감별사들이 죽어야 한국교회가 살 것이다.   

 

미군의 쌀배급정책 실패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미군의 쌀정책을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10.1 대구폭동이 있기 전에 당시 쌃값이 60배로 오른 상태였다. 당시 미군은 매점매석을 하지 못하게 하여 균등하게 배급하려는 정책이었지만 생각보다 쌀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적어 쌀값이 폭등하는 바람에 민심만 흉융해지고 반미운동이 확산된 싱태였다.

 

남로당은 이러한 사회분위기를 이용하여 그들의 투쟁이 이념문제가 아니라 의식주에 대한 순수한 항의인 것처럼 포장을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반미시위를 일으키도록 선동했다. 그렇게 해서 박헌영의 위조지폐 사건을 덮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10.1 폭동사건은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과 연계해서 보아야 한다. 이처럼 10.1 폭동이면에는 박원영이 아닌 박헌영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태는 미군의 무리한 진압으로 끝을 맺는다. 광주사태도 그렇듯이 군부가 개입하면 수많은 양민들이 피해를 당하도록 되어 있다. 대구폭동사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공산당의 선동에 힘입어 미군이 개입함으로서 무고한 양민들만 처참하게 죽어간다. 반미를 외치다 그들은 좌익의 이름으로 죽어갔다. 실제 노동운동을 통한 좌익도 있었지만 남로당 세력의 책동에 현혹되어 이녘도 모른채 좌익으로 몰려 죽어간 사람들도 많이 있다. 좌익과 좌익적인 것이 구분이 안되었다.    

 

쌀을 요구하여 시위에 참여했던 민간인들은 쌀대신 싸늘한 주검을 얻게 되었다. 쌀을 찾아 나선 사람에게 돌어온 것은 쌀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동학혁명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쌀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10만명이나 되는 동학교도들의 뗴죽음이었다. 민비는 청을 끌어들여서라도 민중들을 죽여야 했다. 많은 노동자들과 민간인들이 좌익들에게 이용을 당했다. 그 이면에는 박헌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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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당시 미군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장갑차와 기관총 부대를 앞세워 진압했지만, 시위는 영천과 인근 지역으로 번져 12월 중순까지 전국 73의 시군으로 확산되었다. 대구 경북 일대에서만 인구의 1/4인 77만 명, 전국에서 23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경북에서만 경찰과 시위대 양쪽에서 170명이 숨지고 180여 명이 다친 것으로 집계됐지만 보복이 두려워서 신고를 꺼리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희생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천에는 민간인들이 아작이 났다고 하여 영천에는 아작골까지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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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0월 사건을 좌익 폭동이냐 아니냐는 두가지의 시각이 있지만  미군정 하에서 식량난과 토지개혁 지연, 친일 관리 중용 등 모순이 지속되자 성난 민심이 폭발한 사건이라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 사태 발생 후 친일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 단체들의 좌익 토벌이 정부 수립 이후까지도 계속됐고, 재판도 없이 민간인을 처형하는 사적보복까지 흔히 벌어졌다. 당시는 군사재판이었기 때문에 단심으로 판결을 했다.

 

게다가 이 사건의 관련자들은 국민 보도 연맹에 가입하게 하였고 명단에 적힌 사람들 대부분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학살당했다.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을 당하여 아작이 났던 사건이다. 

 

2007년부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2010년 3월 진실화해위원회는 <대구 10월 사건 관련 진실규명결정서>에서 이 사건을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 군정의 친일 관리 고용, 토지개혁 지연, 식량 공출 정책의 강압적 시행 등으로 인하여 불만을 품은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서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국가의 책임이 있다고 인정해 유족들에게 사죄와 위령 사업을 지원하도록 권고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위령탑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이면에 박헌영이 있었다는 사실은 밝혀내지 않았다.  

 

  10.1 폭동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탑


심지어 이 사건의 이면에 있던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이 국가로부터 서훈까지 받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노무현대통령이 공산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한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을 서훈한 바 있다. 박헌영과 주세죽은 슬하에 딸이 하나 있었다.

 

  주세죽과 박헌영


그 딸이 사망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엄마를 대신해서 주세죽의 서훈장을 받았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박헌영의 결혼 축하를 해주었고 남한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이 축하를 해주었다. 주세죽은 이념을 초월했다.

 

 

출처 연합뉴스, 주세죽의 딸

 

"위는 우리나라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다음 훈장을 추서함"

 

▲     ©편집인

 

주세죽은 러시아 이름으로 카레예바이며, 박헌영(朴憲永)의 첫째 부인이다. 189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함흥의 영생여학교에 2년 동안 다녔으며, 3·1운동에 참가하다가 체포되어 1개월 수감되었다. 1925년 1월 허정숙·박원희 등과 함께 조선여성해방동맹을 결성하였고, 그해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에 선임된 뒤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주세죽은 레닌학교출신이자 공산당이었지만 북한에서는 공산당으로서 인정받고, 남한에서는 항일투사로서 인정을 받았다. 항일정신앞에 공산당은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남북한 정부에서 모두 인정을 받은 불세출의 여인이 되었다. 공산당의 의도에 의해 무고한 민중들은 죽었는데 공산당은 남한정부에서 서훈을 받았다. 이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이다.(계속)

 

결론적으로 10.1 폭동사건은 노동자들이 경찰에게 먼저 투석을 하자, 경찰이 발포를 한 사건에서 전국으로 확산된 운동이다. 조선노동당은 이 사건을 철두철미 이용하여 남한을 혼란으로 가게끔 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여순반란과 제주4.3운동으로 이어졌고 2년 후 6.25동란으로 결과를 맺고 말았다.

 

이 사건 이면에는 박헌영이 있었다. 그는 김일성 이상으로 남한을 공산주의화하려고 별별 노력을 다했던 사람이다. 첩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컴플렉스를 극복하고자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하여 한반도를 죽이는데 역할을 하였다. 이단감별사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안한 가정사가 한국교회를 죽이는데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이면에는 악령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므로 대구 10.1 폭동사건은 사회주의 이념이 토대가 된 악령이 역사하여 폭력으로 점철된 사건이다. 악령의 결국은 사람들과 교회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한편으로 선교사와 교회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실현하고자 했다. 대구의 선교사를 통하여 성령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대구는 한국최고의 성서주석가를 배출한다.        

 

 

2. 대구의 선교 

 

http://lawtimes.net/3796 (대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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