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구시의 지리적 여건
대구 동쪽은 경상북도 경산시, 서쪽은 경상북도 성주군과 고령군, 남쪽은 경상북도 청도군과 경상남도 창녕군, 북쪽은 경상북도 칠곡군과 군위군 및 영천시와 접하고 있다. 대구는 해방 이후 1981년에 달성군, 칠곡군, 경산군의 일부를 편입하여 대구직할시로 승격했고, 1995년에는 대구광역시가 되었다.
위치는 동경 126°38'∼127°00', 북위 35°03'∼35°15'이다. 면적은 883.54㎢이고, 인구는 인구는 244만 6144명(2020년) 이다. 2018년에 인구는 248만 9802명(2018년 기준)이었다. 4만명이 줄어든 상태이다.
행정구역으로는 7개 구, 1개 군, 6개 읍, 3개 면, 139개 행정읍·면·동(290개 법정동·리)이 있다. 시청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에 있다.
대구는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하였고, 고대국가시대에서부터 지리적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받았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대구'라는 지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대구의 지형은 분지(盆地)적 지형으로서 남부 산지, 북부 산지, 중앙부와 서남부 저지(低地)로 이뤄져 여름에는 고온다습한 지역이다.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이다. 남부와 북부의 산지 사이에 해당하는 동서 방향으로 넓은 중앙부와 낙동강 연변의 서남부는 거의 대부분이 평야이고, 곳곳에 구릉성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이러한 대구는 바닷가로 부터 멀리 떨어진 내륙분지지역으로 기온차가 심한 대륙성 기후로서 ‘대구 특수형 기후’라고도 한다. 전체적인 강수량이 비교적 적고, 최고기록기온이 40˚C, 최저기록기온 –20.2˚C에 달한 적이 있었다. 대구는 다른 지역보다 온도가 높다.
특히, 1942년에 기록한 대구의 최고기록기온 40˚C는 관측 이래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최고 기온 기록이기도 하다. 연평균 기온은 13.9˚C이며, 연평균 강수량은 1,052㎜이다.(2007~2016). 기후적으로는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다.
2. 대구의 역사적 접근
대구는 구석기시대로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 고인돌이 많았고, 달서구 월성동에서 출토된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좀돌날 석기유적으로도 알 수 있다.
그 후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금호강과 그 지류에 자연발생의 취락이 형성되었다. 청동기시대 유물로 중구 대봉동 지역에서 간돌검·붉은간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그 이외 민무늬토기와 홈자귀·반달형돌칼 등의 유물이 북구 침산(砧山)·연암산(燕巖山)의 구릉지대에 흩어져 있다.
삼국시대는 5-6세기말에 신라에 완전히 복속되었다. 대구지역은 후삼국시대에도 신라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요충지로 인식되어 후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나 고려의 재통일 이후 정치의 중심무대가 개경으로 옮겨지면서 신라시대와는 달리 그 비중이 점차 낮아져갔다.
고려시대 12세기에 무신의 난이 일어난 뒤 대구 부근의 청도·밀양·경주 등지에서 민란이 빈발하자, 고려시대 대구는 이를 진압하기 위한 군사활동의 근거지가 되기도하였다.
몽골침입기에는 팔공산 부인사(符仁寺)가 대장경판과 더불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1236년(고려 고종 23년), 이규보는 몽골의 침입에 불력으로 대항하기 위한 새로운 대장경의 각판 작업을 맞아 임금과 신하가 함께 기원을 드리는 아래의 글에서 200여 년 전 고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이라는 국난을 맞아 나라의 힘을 모으기 위해 만들기 시작하여 문종 대에 와서 완성한 옛 대장경의 소실을 안타까워했다.
'...(전략)…. 심하도다, 달단(達旦:몽골)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어리석음은 짐승보다 심하니, 어찌 천하에서 공경하는 바를 알겠으며, 이른바 불법(佛法)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불상과 범서(梵書)를 마구 불태웠으며, 이에 부인사(符仁寺)의 대장경도 남김없이 불태워버렸습니다. 아, 여러 해를 걸려 이룬 공적이 하루아침에 재가 되어 버렸으니, 나라의 큰 보배가 상실되었습니다. 제불다천(諸佛多天)의 대자심(大慈心)에 대해서도 이런 짓을 하는 데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하략)...' - (대장각판군신기고문/동국이상국집 권 25, [잡저])
몽고의 제5차 침입 때는 대구지역 주민들이 충청도 부여의 공산성(公山城)에 들어가 끝까지 저항하는 항몽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알겠지만 대구는 저항의 도시였다. 대구는 분지지역으로서 평야가 넓으며 기온차가 심하고, 전략적 요충지역이기 때문에 항시 소용돌이가 치는 곳이었다.
조선 건국 후 비옥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대구는 농업의 중심지로서 가구수가 증가하고 점차 대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이 곳 출신 사림이 주축이 되어 의병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601년(선조 34) 경상도감영이 설치되면서 대구는 명실상부한 영남지방의 중심지가 되었고, 대구부는 해안현·하양현·경산현·수성현·화원현·하빈현을 포괄하는 거읍이 되었다.
개신교의 전파에 따라 개화의 물결이 밀려들면서 다양한 교육기관이 발생했다. 1899년 달성학교를 효시로 다수의 초등교육기관이 생겨났다. 달성학교 수료증이다.
달성학교는 훗날 1951년 대구고등학교로 개명되었다가 1953년 경북고등학교로 개명된다. 경북고등학교는 일류 고등학교였다.
1906년 계성학교가 설립되어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계성학교는 대구광역시 서구 상리동에 위치한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이다. 110년이나 된 개신교 미션스쿨이다.
이듬 해 개교한 신명학교와 더불어 근대적 중등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게 되어 교육·문화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하버드 대 출신의 미국 프린스톤신학교 교수인 이상현교수도 계성고등학교 출신이었다.
일제의 침입이 시작되면서 대구는 항일저항운동의 근거지로서 한몫을 하였다. 대구는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저항의 도시였다. 이외에도 대구는 근대적 교육을 통한 민족실력양성운동이 전개되었고, 1907년 서상돈(徐相敦)·김광제(金光濟) 등이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해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1915년 서상일 등은 영남지역의 독립투사들과 함께 조선국권회복단중앙총부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이 단체는 3·1만세운동에서 대구지역의 시위를 주도했고,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가 조직되어 항일투쟁을 지속했으며, 1930년대 이후 학생들의 비밀결사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민족항쟁의 본거지로서 그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었다.
이처럼 대구는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항일 애국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대구는 신교육과 신문명이 발달하면서 저항의 도시가 되었다. 전라남도의 광주 이상이었다.
1945년 광복 이후 대구는 해외귀환동포의 정착과 월남 피난민들의 유입으로 급격한 인구증가가 있었고, 공장이 많이 설립됨에 따라 노동운동을 통한 사회적인 문제가 야기되었다.
미군정이 지속되던 1946년 10월 1일 좌익의 교묘한 선동에 의해 이른바 10월 대구폭동이 일어나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낸 뒤 진압되기도 했다. 박헌영의 꾀임에 속아 쌀 배급문제로 좌익의 노동자들이 미군정에 항의를 한 폭동이었다.
이러한 좌익에 의한 혼란을 극복하면서 1949년 대구시로 개칭되었다. 1946년 대구10월 폭동은 1948년 여순반란사건과 제주 4.3사건의 도화선 역할을 하게 된다. 폭동은 대구로부터 시작이 되었다. 이는 대구가 발전하면서 공장이 40여개 이상이나 되었기 때문에 노동운동이 활성되었기 때문이다.
1950년 6·25전쟁 과정에서는 대구는 낙동강방어작전의 군사적 중심도로서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6·25전쟁의 최대 위기는 낙동강전투였다. 1950년 8월, 한반도의 10%밖에 남지 않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부지역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무차별 공세에 힘겹게 맞서고 있었다.
대구는 한번도 전쟁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일찍부터 근대교육이 발전한 대구는 1960년 이승만(李承晩) 정권시 대구지역의 고등학생들은 2· 28 학생의거를 일으켜 반독재투쟁을 전개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의 부정과 부패에 맞서 떨쳐 일어났다. 그것을 2·28 대구민주운동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 뒤 4·19의거로 연결되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정착에 하나의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기도 하였다.
1981년이 되서야 달성군의 월배읍·성서읍·공산면, 칠곡군의 칠곡읍, 경산군의 안심읍 등을 편입해 직할시로 승격하게 되었고 1988년 1월 1일에는 달서구가 설치되는 등 많은 행정구역이 변동되거나 조정되었다.
1995년 1월 1일 광역시로 개칭되고, 3월 1일에는 달성군 전역이 대구광역시에 편입하면서 시역이 크게 늘어나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구가 서서히 줄어들고 있고 경제적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모직산업이 죽으면서 젊음이들이 직업을 찾아 다른 도시로 떠나고 있는 실정이다.
3. 대구 동학
동학의 창도주 최제우는 4년만에 혹세 무민의 죄로 대구 관아를 거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철종의 죽음으로 최제우는 대구 감영으로 다시 돌아왔다. 대구감영에 도착한 최제우는 관찰서 서헌순으로부터 22차례의 혹독한 신문을 받았다.
추운 겨울날 묶아놓고 마당에 꿇어 앉힌다음 매질을 가하면 얼어붙은 살은 갈라지고, 선혈이 낭자하여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광경이었고 1864년 2월 하순에 다리뼈가 우두둑 부러지는 소리까지 났다고 했을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864년 3월 10일, 최제우는대구 남문앞 개울가 기다란 판자에 꽁꽁 묶인 채 참수를 당하였다. 그는 대구 관덕정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관덕정은 당시 나라의 기틀을 뒤흔드는 것으로 여겨 중죄인으로 취급됐던 사람들이 참수를 당하던 사형장과 같은 곳이었다.
천주교인들은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등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한 장소이기도 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대구감영도 동학도들에 대해서 민감하게 대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구에는 관덕장으로 끌려가는 최제우를 본 최제우 나무가 있다.
동학을 창시하였던 최제우는 민심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죄목하에 지금의 종로초등학교에 위치해 있었던 경상감영감옥에 투옥되었다가 관덕정에서 처형당했다. 대구 종로초등학교에 있는 이 나무는 억울하게 희생된 그의 감옥 생활을 지켜 보았을 것으로 생각되어 최제우 나무라 명명되었다.
3. 대구10.1 폭동사건
4. 대구에 온 선교사들
http://lawtimes.net/2675 (영남1) http://www.lawtimes.net/2676(영남2)
<저작권자 ⓒ 뉴스와논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