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의 명칭과 지리
상주의 원래 이름은 낙양이다. 낙동강은 낙양동쪽에 있다는 의미이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 함백산(咸白山, 1,573m)에서 발원하여 영남지방의 중앙저지(中央低地)를 통하여 남해로 흘러드는 강이다.
상주는 경상북도 서북부에 있는 시로서 1,254.80km2라는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인구는 현재는 약 9만 7천여명 정도이지만 인구밀도가 상당히 낮다.
북쪽으로 문경시, 충청북도 괴산군, 동쪽으로 예천군·의성군·구미시, 서쪽으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 남쪽으로 김천시, 충청북도 영동군과 접한다. 동서간 거리 48.3㎞, 남북간 거리 49㎞이다.
이 지역의 지질구조는 소백산괴(小白山塊)에 속한다.
서쪽 경계에는 속리산(1,058m)·팔음산(762m)·포성봉(933m), 남쪽에는 국수봉(793m), 북쪽에는 작약산(763m)·도장산(828m) 등의 높은 산들이 솟아 소백산맥의 줄기를 이룬다. 이러한 산지로부터 이안천과 북천·남천이 동류(東流)하여 낙동강에 합류함으로써 이 하천 유역에는 도내 굴지의 비옥한 함창평야와 상주평야가 발달하였다.
상주는 소백산맥 동쪽 사면과 낙동강 중상류 지역에 나타나는 남부내륙형 기후구에 속하여 연평균기온 12.3℃, 1월 평균기온 -3.4℃, 8월 평균기온 26.4℃이고, 연평균강수량은 1,156mm이다. 시를 상징하는 꽃은 장미이며, 나무는 감나무, 새는 까치이다.
경상도의 중심지 상주
상주는 경주시의 ‘경’과 함께 경‘상’도란 이름의 어원이 된 유서 깊은 도시로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까지 경상감영(慶尙監營), 즉 오늘날의 경상(북)도청과 같은 행정기관이 있었던 “경상도의 중심지”였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인구 27만 명 이상을 자랑하는경상북도 서부의 중심 도시였던 시절도 있었다.
상주의 교통과 인구
그러나 경제성장기에 경상북도는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통한 남부가 개발되면서, 상주시가 속한 경북 북부의 인구가 경부축의 중심 도시인 대구, 구미나 수도권으로 빠져나가는 이촌현상이 일어났다.
2019년 2월 8일을 기점으로 인구 10만 명 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2019년 12월에 인구 10만 명을 잠시 회복했지만, 바로 다음 달에 다시 10만 명 선이 무너졌다. 상주인구는 경상도 시 단위에서 하위권에 속한다.
상주는 전형적인 농촌 기반의 도시이나, 대구광역시, 대전광역시, 청주시 모두 1시간이면 접근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문화생활을 누리기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다. 소백산과 속리산국립공원을 끼고 있기도 하다.
상주의 주산물
주산물로는 쌀ㆍ누에고치ㆍ곶감 따위가 생산되며, 무연탄ㆍ흑연 따위가 채광된다. 명승지로 속리산, 남장사(南長寺), 화달리(化達里) 삼층 석탑 따위가 있다. 1995년 1월 행정 구역 개편 때 상주군을 통합하여 도농 복합 형태의 시를 이루었다.
상주의 동학운동
이후 최시형이 상주에 직접 포덕활동을 하여 상주의 동학은 1863년에 급성장하게 된다. 동학을 창도했던 경주와 가까웠던 지역적인 면도 일익을 담당했다. 그래서 호남의 전봉준의 동학보다 경북의 동학은 일찌감치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주의 동학은 관과 항리와 양반들에게 탄압을 당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유교질서와 양반서열을 흔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양반들과 유생들은 동학은 이단사교로서 마땅히 배척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주의 동학은 양반의 배척 결의와는 상관없이 농민과 민중들, 일부 양반 자제들을 통하여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1865년 4월, 최제우 교주의 유가족은 상주 화북의 동관암에 있는 육씨 집에 은신하였고 2대 교주 최시형이 1880년대 중반부터 화령 봉촌리의 앞재 마을과 공성면 효곡리의 왕실 마을에서 은거하면서 상주의 동학은 빠르게 확산되어 나갔다. 1890년대에 상주의 동학이 가장 왕성했던 곳은 팔음산 아래의 화동면 덕곡이었다.
상주 31개면 가운도 농민군 세력이 강했던 지역은 화북, 화동, 모동, 모서지역이었다. 화서의 강선보나 모서의 김현영과 같이 양반 자제들 중에서도 농민군지도자가 나와서 양반지주와 토호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관아를 점령한 농민군들은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배를 채우고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양식이 없는 사람들은 곡식을 가져가게 했고, 병든 사람들은 치료를 받게 했다. 더불어 횡포를 부리던 토호(土豪)나 향리들을 혼내주고 그 재물을 빼앗기도 했다. 그 중 공성면의 소리 마을은 아예 불태워 없애 버렸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서도 농민군들은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상주의 농민군들이 동학 교단에서 규정한 4대 강령을 충실히 준수했기 때문이다.
상주의 농민군들은 장차 낙동의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농민군의 사기는 매우 충천했고, 각오 또한 비장했다. 그러나 농민군이 결전 태세를 갖추기 전에 일본군이 먼저 읍성을 기습해 왔다.
9월 28일 낮, 농민군은 결사 항전했지만 신식 무기를 앞세운 일본군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이렇다 할 무기도 없이 온몸으로 싸우던 농민군은 백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퇴각하고 말았다. 관군에서 탈취한 농민군의 무기는 대부분 일본군이 낙동 병참부로 가져갔다.
이처럼 상주 농민군의 활동은 일본의 동향과 직접 관련이 있었다. 상주에서 농민군과 일본군 간에 직접 충돌이 발생한 것은 1894년 8월 29일 이었다.
8월 29일 일본군 25명과 일본 인부 12명은 문경으로 가던 중 농민군을 공격하였고, 농민군은 당시 600여 명이었지만 불의의 습격을 받고 2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당한 채 흩어졌다. 당시 11채의 가옥이 불탔고, 화승총 103정, 도검 4자루, 창 3자로 말 2마리, 동전 9관을 빼앗겼다. 그러나 농민들은 관군와 싸워 승리하기도 하였다.
처음에 상주지역 농민군들은 관아를 9월 22일 점령하기도 하였다. 갑오척사록에 따르면 예찬에서 민보군의 공격을 받고 흩어졌던 농민군들이 상주에 모여서 상주관아를 점령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당시 농민군들은 약 1만여 명이 넘었다. 그러나 상주성의 농민군들은 9월 29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3시간의 접전을 벌였으나 50여명의 전사자와 2명의 포로를 남기고 상주에서 빠져나갔다. 당시 상주성으로 들어가는 동문이다.
동학 농민군은 상주성에 있는 관아를 점령하였으나 일본군의 침입으로 상주를 빠져나갔다. 이후 상주에서도 예천과 마찬가지로 향리층이 주도하여 보수집강소를 설치하고 500여 명의 민보군을 모아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특히 1894년 9월 29일 경북지역의 소모사로 임명된 상주의 전승지 정의묵이 상주지역이외에 경상북도 15개 고을을 관리하면서 10월 20일 벽유당에 소모영을 설치하면서 상주는 농민군 진압의 거점이 되었다. 특히 소모영 유격대장으로 임명된 민보군 가운에서 선발한 김석중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가장 많은 농민군이 처형된 곳이 관아의 문류인 태평루 앞과 남사정이었다. 12월 2일, 9일에 동학 농민군 등 14명을 총살하였다.
그는 별퍼군 200여 명을 이끌고 상주뿐만아니라 영동, 청산, 보은 등 총청도 지역 농민군 진압에도 앞장섰다. 상주 소모영이 1895년 1월 24 일 해체될 때까지 상주는 농민군 진압의 거점이 되었고 많은 농민들이 이 곳으로 끌려와 형벌을 받거나 처형되었다. 이로써 상주의 동학운동은 농민군의 패배로 끝났지만 '제폭구민(除暴救民)'과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한 반봉건, 반위세 항쟁이었다.
그렇지만 상주의 동학농민혁명은 낙동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하기 위해 9월 22일 봉기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반봉건보다는 반외세적 성격이 강한 민족 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상주의 동학운동은 몰락하지 않고 1924년 남접 김주희 선생이 세운 동학교당을 통하여 여전히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동학교당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0호로 지정되어 있고, 교당의 유물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총 177종, 1084점에 이른다.
현재 이 교당에 유전되는 유물은 동학경전, 동학가사 등의 전적류 100종 132점과 동학경서 판목, 동학가사 판목 등 68종 794판의 판목 및 예복, 학창의 등 6종 31점의 복식과 교기, 인장 등 유물 4종 130점 등이 전시되어 있다.
동학교도들이 입는 옷도 전시되어 있다.
상주의 기독교 전래
상주는 동학혁명이 1894년에 끝났지만 1년 전인 1893년에 베어도 선교사가 상주에 첫발을 내딛는다. 동학혁명 이전부터 상주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동학혁명이 끝난지 5년이 지난 1900년경에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다. 기독교를 통한 새로운 종교의 역성혁명이 시작되었다. 사산교회, 함창읍교회, 청리 수상교회만 선교사들이 직접 개척을 했다. 나머지는 한국인들이 주도해서 설립을 했다.
한국인의 자생적 교회설립
미북장로교회 선교사 베어드(W.M.Baird) 가 부산에 도착한 것이 1891년 2월 2일이었다. 그는 부산에 거점을 학보한 후 1893년 4월 17일에서 5월 20일까지 33일 동안 서경조, 박재룡과 함께 경북지방을 순회하게 되었다. 부산동래를 출발하여 밀양,청도, 대구, 동명, 성주, 안동, 상주, 안동에까지 올라갔다가 의성, 신령, 영천, 경주, 울산을 거쳐서 부산으로 돌아갔다.
이수정과 서경조
베어드 선교사가 일행과 함께 상주에 도착한 날은 1893년 4월 27일 저녁이었다. 이 날 선교사는 상주시장에서 장이 서는 날 갖고 간 여러 권의 성경을 팔았다. 이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자생적으로 각 처소에 들어가 교회를 세우기도 하였을 것이다. 한국은 자생적 교회가 많이 있다.
언더우드 아펜셀러가 1885년 한국에 들어오기 전 일본에서 이수정이 이미 1883년에 마가복음을 번역하였고, 1884년에는 서경조와 백홍준이 황해도 소래지역에 소래교회를 자생적으로 설립했다. 상주시의 최초 교회도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인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설립이 되었다. 상주출신으로서 김재수는 경북최초의 장로교인이었다.
경북최초의 장로교인, 김재수
경북 최초의 장로교인은 김재수이다. 그는 훗날 김기원으로 개명을 하여 경북 최초의 목사가 된다. 김재수는 1891년 심한 종창을 앓던 중 부산에 선교부를 찾아가 1890년에 부산에 와 있었던 선교사를 통하여 세례를 받았다. 이 사람은 상주 출신으로서 경북지역의 최초의 교인이 되고, 목사가 된다. 선교사들의 일기에 그를 김서방이라고 불리웠다.
1893년 4월 28일
오전, 상주
우리는 어제 오전에 낙동을 출발하였다. 상주까지 반쯤 왔을 때, 우리는 김서방이 한 작은 마을의 길가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서방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가 부산의 기독교병원의 환자였으며, 거기서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아마도 사랑방에서 열리는 예배에도 참석했던 것이 분명하다.) 선교사 베어드는 1893년 4월 28일 상주에서 김서방(김재수)을 만났다고 적고 있다.
1893년 4월 28일
우리는 아주 가난해 보이는 작은 집에 살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부산을 떠난 후 7일 만에 집에 도착하였고, 며칠 전까지 몸져 누워있었다고 했다. 그의 집으로 가는 길에 세척기가 부셔져 그의 상처를 세척할 수가 없었다. 그는 우리가 앉을 만한 방을 가진 이웃집으로 우리를 데려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우리에게 그의 친척들을 소개해 주었는데, 그들은 약12채 정도의 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다. 김서방은 우리에게 식사하고 가라고 간곡히 권했고, 거절하기 어려웠다. 그와 함께 성경을 읽고 토론을 한 뒤 우리는 그곳을 떠났다. 김서방은 언덕마루까지 나와서 우리를 배웅했다. 불쌍한 친구! 그는 이제 얼마 살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성경을 가지고 있으며, 아마도 그의 이웃들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웃들은 유교사상에 빠져 있어 성경과 그리스도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리라고 김서방은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어제 밤 낙동에서 40리 떨어진 상주에 도착했다. 마부한 사람이 몸이 안 좋아 낙동에 남겨두었다. 우리와 함께 여행하는 소년의 건강 상태도 점점 안 좋아진다. 부산을 떠나 여기까지 온 상황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라도 건강이 안 좋을 경우 많은 문제가 야기된다.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랄 뿐이다. 어제는 비교적 괜찮은 하루였다. 우리는 쉴 수 있는 방을 겨우 얻었고, 오늘 오전에는 책을 판매하고 있다.(출처, 상주교회 홈페이지)
대구장로교회사연구』라는 책을 낸 이재원은 그의 책에 김재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애덤스 목사와 같이 대구에 온 어학선생 金在洙는 부해리 목사의 증언으로는 상주 출신이다. 그는 1854년 11월 3일 경북 상주군 낙동면 화산리에서 출생하여 8세에 상주군 화산리 私塾에서 수학하였고, 18세에 조승장과 결혼하여 2남을 두었다.
세례를 받고 고향에 왔지만 문중의 핍박이 많자, 김재수는 1894년 베어드목사를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는 1913년 평양신학교를 6회로 졸업하고 경남 웅천지방에서 목사로 시무하였다. 1915년 경북노회로 이명해서 구미 상무교회를 시무하고, 1925년 대구 중앙교회에서 임시목사로 시무했고, 1931-1936년 기간에는 대구제일교회 최재화 목사 재임중 동사목사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부해리 선교사는 "김기원 목사는 성경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해서 주일학교를 많이 도우신 분"이라고 하고, 구미상모교회 김성현장로는 "김기원 목사는 성경 말씀을 많이 아시고 또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해 주심으로 작은 예수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평가하고, 대구신학교 정규선목사는 "김기원 목사님은 주야로 성경을 읽으시고 묵상하시며 눈물겨운 가난과 병고 속에서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셨다"고 평가했다.
상주 최초의 교회, 서정교회(1900년)
선교사들이 상주시장에서 성경책을 팔자, 베어드 선교사는 약 2만명이 온 것 같다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드러냈다는 것을 적고 있다.
1893년 5월 1일
월요일 저녁
상주는 부산에서 480리 떨어져 있다. 상주에서 서울까지도 480리 길인데, 사실 형편은 상주-서울 간 길이 더 좋다. 일행 중 두 사람의 건강이 좋지 않아 오늘 아침까지 상주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이를 통제할 사람을 하나 보내주도록 이 지방 관리에게 요청해야만 했다. 이들은 분명 외국인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서 전도사는 약 2만 명은 온 것 같다고 했다. 가능한 많은 양의 책들이 배포되었다. 관리는 매우 친절하고 적극적이었다. 그는 수차례 찾아 왔고, 우리가 요청한 것을 들어 주었다. 우리는 그에게 1달러에 670전씩 모두 7달러를 팔았다. 나는 관리의 보호 하에 마부를 맡기고 상주를 떠나야만 했다. 상주에서 마부 한사람을 충원했는데 식사를 포함하여 10리에 10전씩 주기로 했다. 서정교회
상주 서정교회는 1900년 5월 1일 정씨 부인에 의하여 교회가 개척되었다.
1900년 5월 1일
정씨부인에 의하여 상주군 내서면 서성내리(현: 상주시 서성동)
소재의 초가 4칸에서 전도사(성명미상)가 교회를 개척하다. 1905년에 부루엔(부해리) 선교사가 서서 내리교회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1909년이 되어서야 이희봉목사가 부임했다. 1914년에 서성내리교회를 서정동교회로 개명하였다. 1926년 부원교회가 분립하게 된다.
이희봉목사는 부원교회가 분립하기 전 1917년에 사임하고 서정동교회는 1925년에 이상백목사가 부임했다. 당시 면이 읍으로 승격함으로 서정동교회를 상주읍교회로 개명을 했다. 상주읍교회는 다시 1973년 상주교회로 개명을 한다. 이처럼 서성내리교회는 서정교회로 개명이 되었고, 서정교회는 상주읍교회로 되었다가 다시 상주교회로 개명을 한다. 1947년에는 상주교회가 분립되어 상주제일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상주 출신의 교역자 이희봉(李熙鳳)
1909년에 서정교회에 부임한 이희봉목사는 경북 상주 출신으로서 일찍 기독교에 입교한 사람으로 선교사 부해리의 조사가 되었다. 1901년 선산 죽원교회의 조사로 시무하기 시작하여 1915년까지 선산, 김천, 칠곡, 상주 등에서 조사로 시무하였다.
구체적으로 이희봉은 조사를 하면서 선교사를 도와 선산의 죽원교회, 노상동교회, 습례교회, 김천지방의 대양교회, 복전교회, 인의동교회와 상주 지역의 서정교회(西町敎會)를 비롯한 금흔(錦欣), 화산(花山), 오리원(五里院), 석산(石山), 사산(沙山), 오광(五廣) 등에서 시무하였다. 1909년 서정교회에 부임하여 1910년 보성의숙을 개설하여 성경을 비롯하여 역사, 지리, 산수 국어 등을 가르친 일찍이 서구문물에 눈을 뜬 사람이었다.
그는 1916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제9회로 졸업하고 같은 해 목사안수를 받았다. 목사가 된 그는 다시 청산교회, 상주 서정교회, 선산 죽원교회, 고령읍교회, 황금동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던 중, 1918년 경북 노회장을 3~4회 연임하게 된다. 그 후 대구 칠성정교회), 김천 송천교회를 담임하다가 1931년 상주 남문외교회(尙州南門外敎會)를 개척하여 목회활동을 왕성하게 하였다. 1921년 대구제일교회에서 분립한 대구 칠성동교회가 창립되면서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러한 그가 갑자기 건강이 문제가 되어 1937년 상주 남문외교회와 상주 서정교회가 합병을 하고 상주 서정교회 원로목사로 추대 받았다. 그리고 목회 일선에서 물러나 생활하다가 1940년 향년 64세를 일기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사산교회
사산교회는 1908년에 브루엔 선교사가 세운 교회이다. 신자 여러명이 선교사 브루엔의 인도로 사랑방에서 예배를 시작하였다. 화산교회도 1908년에 설립을 하였다.
함창읍교회와 브루엔 합창읍교회는 함창장로교회(예장통합)로 개칭하였다.
함
1960년 합동교회와 분리되었고 합동교회는 함창중앙교회로 개칭하였다. 브루엔 선교사
브루엔선교사는 상주시 교회를 설립하고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경상도 서북지역에는 브루엔 선교사가 많은 공헌을 하였다. 브루엔은 1896년 22세 나이에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를 1899년에 졸업하고 북장로교회로부 안수를 받았다.
그는 1899년 10월 세번째 선교사로 대구에 도착하여 안의와, 장인차 등과 함께 대구, 경북 지역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01년 마르타 브루엔과 결혼을 하였고, 1902년에 대구에 와서 선교사들간의 경북지역 선교분할로 김천, 선산, 군위, 고령, 성주, 상주, 칠곡 등지의 선교를 담당하여 직간접적으로 교회를 개척하는데 열심이었다.
경산, 영천, 포항등의 동부지방은 안의와선교사가 맡아서 일을 했고, 안동, 봉화, 연주 등지의 북부지방은 1902년 대구선교기지에 임명되어 온 바렛(W.M.Barre, 1872-1956, 방위렴)이 맡게 되었다. 브루엔은 1903년에는 안의와(아담스)목사의 후임으로 대구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1904년에는 대구성경학원의 남자 조사반을 맡아 수업을 진행했다. 1912년에는 경산노회조직에도 크고 공헌을 했고, 1915년에는 대구 남산교회를 세우 담임목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그가 1909년에 함창읍교회를 설립했다.
청리 수상교회
1919년에는 청리 수상교회가 설립되었다. 청리 수상교회는 1919.3. 김문석의 집에서 최초의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가 시작되었다. 김문석은 외지에서 복음을 안고 들어온 사람으로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설립했다.
이러한 교회의 교육과 신앙의 역사로 근대 교육이 형성되고, 교회를 통하여 일반 사람들은 근대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도 상주출신이고, 교회가 세워진 이후, 상주에는 인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서울대학교 출신으로 법철학교수 최종고 교수, 김부겸 국무총리, TV 조선의 9시뉴스를 진행하는 신동욱 앵커와 하버드 대 박사 출신의 프린스톤신학대학원의 이상현교수가 있다.
CTS 사장을 지냈던 한양대학교 박사출신의 김기배 예술단장도 상주출신이다. 이외에도 상주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존재한다. 교회를 통한 항일운동과 근대교육에 힘입어 상주는 근대교육으로 수많은 인재들을 양산했다. 교회는 상주의 역사를 바꾸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http://www.lawtimes.net/3698 (예천)
http://www.lawtimes.net/3693 (영양)
http://www.lawtimes.net/3696 (청송)
http://www.lawtimes.net/2839 (안동)
http://www.lawtimes.net/2947 (안동2)
http://www.lawtimes.net/2948 (안동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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