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예천편)

예천이 예수를 만났을 때

편집인 | 입력 : 2021/12/28 [05:44] | 조회수: 451

 

 

 

  A. 예천군의 위치와 지명

 

예천은 신라 22대 지증왕 6년(505년)에 수주현이고 하였고, 고려시대 성종 14년(995)에는 청하라는 별호가 있었고, 조선시대 태종 13년(1413)에 보천군으로, 태종 16년에 예천군이라 명명하여 지금까지 예천군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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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은 안동시· 영주시, 남쪽은 의성군·상주시, 서쪽은 문경시와 접하고 북쪽은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계를 이룬다. 행정구역은 1읍 11면으로 이루어졌으며, 군청 소재지는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대심리에 있다.

 

동북쪽에는 소백산맥의 산악지대로 형성되어 있고 서남쪽에는 낙동강과 내성천변에 일부 평야를 이루고 있다. 교육기관으로 경북도립대학교가 있고, 예천여자 고등학교. 대창고등학교, 경북일 고등학교가 있다. 인구는 56,165 명으로 6만명이 되지 않는다.   

 

 

 

 B. 교육과 문화

 

근대에 들어와 신교육이 보급됨에 따라 유지들이 남명학교(南明學校)를 세워 인재 양성에 노력했으며 항일의병투쟁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4월 1일부터 12일까지 군 내 각지의 장날에 수많은 주민들이 모여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은산장터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4일 하리면 은산장터에서 금곡리 출신 권창수(당시28세),이용헌(당시41세),이재덕(54), 이헌호(46)채동진(42)등 5명이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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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으로는 동양 최고의 철불로 9세기 중엽에 제작된 감천면 증거리의 한천사철조여래좌상(보물 제667호)이 있다. 용문면 선리에는 청룡사석조여래좌상, 보물 제424호)·청룡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25호)이 있다.

 

유교문화재로는 용궁면 향석리의 용궁향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0호), 무이리의 무이서당(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30호) 예천청주정씨재실(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5호)이 있다.

 

 

 

그리고 예천읍 백전리에 예천향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8호), 왕신리에 신천서원(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39호)이 있다.

 

도로는 영주∼의성 간과 안동∼문경 간 국도가 예천읍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으며, 시·군도가 각 면으로 뻗어 있다. 철도는 경북선 철도가 군의 중앙을 지나 문경∼영주로 연결되어 편리하다.

 

C. 예천의 동학운동

 

호남은 동학운동이 실현화된 지역이라면 경상북도는 동학이 창도된 지역이다. 최제우는 경상도 경주 용담사에서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1860년 종교체험 후, 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많은 신도가 추종하기 시작했다.

 

▲    경주 용담사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이 되었고, 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최제우는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 해 7월 최시형을 북접주인으로 정하고 해월(海月)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 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예상대로 포교한 지 2년만인 1863년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최시형은 대구에 잠입, 옥바라지를 하다가 체포의 손길이 뻗치자 태백산으로 도피하였고, 이어 평해와 울진 죽변리에 은거하면서 처자와 최제우의 유족을 보살피다가 동학의 재건을 결심하고, 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양(英陽)의 용화동(龍化洞)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영양군은 김삼환목사의 고향이다. 여기에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은거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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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는 신분, 지위, 남여 차별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학을 창도하고 민중들과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면서 동학교도수가 늘어나자, 조정은 1863년 최제우를 체포하고 '좌도난정률'로 다스려 대구관덕정에서 효수했다. 

 

관덕장은 당시 나라의 기틀을 뒤흔드는 것으로 여겨 중죄인으로 취급됐던 천주교인들은 을해박해(1815년), 정해박해(1827년), 기해박해(1839년)와 병인박해(1866년) 등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한 장소이기도 했다.

 

  대구 관덕장

 

원래 이곳은 무과의 과거를 보던 연병장으로, 활쏘기와 말타기를 위한 승마장으로 사용되었고 세시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도 이곳에서 행해지곤 한 곳이다. 이 처형장은 조선시대 중죄인들을 처형하던 3대 처형장의 하나로 꼽힌다. 대구에는 관덕장으로 끌려가는 최제우를 본 최제우 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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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장에서 처형당한 최제우는 훗날 달성공원 관풍루에서 동상으로 부활했다.

 

 

이후 최시형이 1863년부터  본격적으로 포교활동에 들어갔다. 최제우에 이은 동학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은 본관은 경주, 초명은 경상, 자는 경오, 호는 해월이며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로부터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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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가 죽은 1863년부터 최시형은 1880년에 <동경대전>, 1881년에는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1884년 육임제를 정하여 교단을 정비했으며 교세를 확장했다. 1892년 교조신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신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했으며, 1894년 일어난 갑오농민전쟁에 동학교도들과 함께 참여했다.

 

1898년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이미 호남동학은 전봉준이 1895년 체포됨으로 힘을 잃은 상태였다.

 

영남에서 제2대 교수 최시형으로 인한 동학은 기하급수적으로 퍼졌다. 영남의 동학은 호남의 동학보다는 20년전부터 일찌감치 발전하여 관군이 손대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한 힘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경상북도 동학은 창도이후 탄압속에서도 포교활동이 꾸준히 이어나갔고, 교단조직이 정비되면서 1871년에는 영해교주신원운동이 발생하여 동학이 본격적인 사회운동으로 나서게 되었다. 결국 지역의 관민에 의해 패배했지만 한 때 엄청난 세력으로 영향혁을 행사했다. 경북에서 동학운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이 경상북도 서북부지역의 예천이었다.   

 

경상도 서북부 지역은 동학 창도 초기부터 포교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발도 무시하지 못하였다. 유림지역인 영남에서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운동은 신분계급을 타파하는 양반이 아닌 상놈운동으로  비쳐졌고, 쳑결대상의 종교였다. 특히 상주에서는 서원을 중심으로 한 동학배척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예천의 동학

 

예천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1894년 3월 소야(蘇野)에서 최맹순(崔孟淳)이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관동수접주(關東首接主)가 되어 교도들을 불러 모으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세력은 수만을 헤아렸다고 할 정도였다.

 

예천 지방의 지도자는 최맹순은 본래 강원도 춘천 사람으로 스무살 무렵 동학에 입도하여 몸을 숨기며 동학 경전을 익혔다. 최시형이 1870년에 강원도 일대를 잠행하며 포덕에 열중할 적에 인연이 닿아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곳에서 옹기장수를 하면서 이웃집에 사는 장북극을 동학에 끌어넣기도 하면서 동학조직을 넓혀갔다.  


1894년 3월 보은집회가 있은 뒤 경상도지역의 동학교도들은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듬해 3월 고부봉기가 한창 일어날 무렵, 최맹순은 후진 소야마을에 접소를 차리고 관동수접주라고 일컬으면서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며칠이 지난 뒤인 6∼7월에는 면과 리단위에까지 조직을 만들어 나갔는데 48개 접소에 7만여 명을 끌어들였다. 명실공히 예천지역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최맹순의 지휘아래 예찬 동학농민군은 예천 읍치 외곽 다른 지역에 농민군 도소를 설치하였고, 수십 명이 읍내에 들어와서 영장을 지낸 이유태(李裕泰)를 끌어내서 결박·구타하고 돈을 탈취해간 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기본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거나, 악덕 지주나 토호들을 지칭하였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읍정을 관장하고 폐정들을 개혁해나갔다.

 

이들은 읍내로 들어와 악질 구실아치 김병운을 두들겨 패고 그의 아버지 묘를 파내기도 하고,  안동부사가 경진가점을 지날 적에는 부사의 의관을 빼앗은 뒤 두들겨 패고 마누라의 비녀, 가락지 따위의 여장을 깡그리 빼앗아 가기도 하였다.   최맹순은 아무런 준비도 없는 읍내를 공격하려 하지 않고 농민군의 행패만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예천의 유림들과 백성들이 동학운동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여 동학농민들과 관민의 투쟁은 불가피했다. 소야접 최맹순은 관민상화라는 북접교단의 기본원칙에 따라 향촌질서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하였지만 관이나 향촌지배세력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예천군수는 동학에 반대할 목적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군민들에게 무기를 나눠주면서 동학농민들을 척결하고자 했다. 관에서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세웠던 관군의 지휘본부를 집강소라고 불렀다. 

 

이곳은 조선시대 관청의 객사로 쓰였던 건물인데 지금 대창고등학교로 옮겨져 교장실, 행정실 등으로 쓰였다. 예장통합교단의 부총회장 이순창목사와 명성교회수석 장로 김종식장로가 대창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집강소(대창고등학교)

 

군수는 8월에 1천 5백여명의 민보군을 모집하여 관아의 무기로 무장을 시켰다. 이에 대해 농민군들은 8월 2일 읍내로 들어가는 사방 통로를 막아 예천 읍치 지역을 봉쇄하는 한편, 보수집강소 세력을 압박해 나갔다.      

 

그러던 중 1894년 8월 10일 새벽 농민군을 분노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것은 읍 동쪽으로 50리나 떨어진 안동 감천까지 쳐들어간 예천의 민보군이 농민군 11명을 체포하여 돌아온 후 모래밭에 생매장하여 죽인 사건이었다. 예천 공설운동장 옆에 동학군의 생매장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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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보군의 주도세력은 양반유생과 향리이다.  지역의 특성에 따라 양반 유생층이 실권을 잡았느냐 향리층이 실권을 잡았느냐의 차이가 있었지만, 기득권을 지키려는 목적은 같았다.

 

양반 유생층과 향리, 토호 등 보수지배층에 의해 민보군에 강제 편제된 농민들은 상황이 발생하면 농민군과 싸워야 했다. 오랫동안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온 농민들이 스스로 또는 강제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집단에 속해 서로 죽고 죽여야 했던 것이다.

 

보수지배층이 민보군을 결성한 목적은 분명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고 기존 신분, 경제 질서를 거부하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것이다. 오로지 주자학만을 성인의 도로 섬기던 양반 유생들에게 동학은 사교에 불과했다.

 

 

 

 

동학농민군은 반상의 질서를 부인하고, 땅에 대한 소유와 큰 장사에 대한 보수지배층의 독점권을 인정하지 않으니 보수지배층의 입장에서 동학농민군은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할 패역의 무리였다. 2차 봉기를 일으킨 동학농민군이 척왜(斥倭)를 내세워 함께 외적을 물리치자는 제의를 했지만, 보수지배층은 응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일본의 침탈보다 눈앞의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보수지배층은 되려 일본군, 관군과 힘을 합쳐 동학농민군을 공격했다.

 

민보군은 결국 상주와 낙동강 상류지역에 거주했던 일본군들과 협력하여 농민을 잔인하게 죽였다. 민비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청나라를 끌어들여 동학농민을 학살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SBS 녹두꽃, 민보군들이 농민을 죽임

 

생매장사건과 관련하여 동학군들은 이에 대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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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8월 20일 동학농민군은 예천 읍내로 통하는 모든 길목을 차단하고, 예천읍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예찬  민보군은 급히 안동부도총서에 구원병을 요청하기도 했다. 8월 23일 민보군 300여명이 화지를 공격하였으나 윤치문이 이끄는 예찬 안동 의성에서 합세한 동학농민군이 이를 물리쳤다.

 

소야의 관동대접주 최맹순은 8월 24일 다시 각 접에 사통을 보내 함께 예천읍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농민군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보수집강소에서는 8월 27일 총수(銃手) 100여 명을 징발하여 현산(峴山) 옆의 골짜기에 잠복시키고 밤이 새도록 지키도록 하였다.

 

예천 동학농민의 수는 4-5,000 명


예천읍내 공격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예천읍 서쪽에 있던 화지 농민군이었다. 현산에 나가있던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8월 28일 오후 농민군 “1만여명”이 한천 남쪽의 유정(柳汀)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고 보고했다. 실제로 동학농민의 수는 4천-5천이었다. 민보군은 2천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전쟁은 농민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고 민보군의 승리로 끝났다. 협공하기로 했던 금당실 동학농민군이 약속된 시간에 오지 못하고 늦게 도착했다. 

 

전투는 밤이 되어서 시작되었다. 한천제방 위에 진을 치고 있던 보수집강소의 민보군들이 긴 제방을 에워싸고 양면에서 농민군을 협공하였다. 캄캄한 가운데 단지 유성(流星)같은 불빛만 보이고 우레 같은 소리만 들렸다. 총탄이 떨어지는 숲속에서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어지럽게 땅으로 떨어졌으며 검은 연기가 하늘에 가득 차서 적과 아군이 구분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민보군 측과 사전에 통모한 유정 바로 남쪽의 청복동 주민들이 산 위에 횃불을 많이 설치하여 군대가 있는 것으로 위장하고 일제히 큰소리로, “안동의 구원병 3,000여 인이 올 것이다. 너희 적도들이 어디로 달아나겠는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관군과 민간인이 협조한 것이다.

 

이에 당황한 농민군은 소문에 속아 예천 동남쪽의 서정자들 쪽으로 퇴각하였다. 선동정치에 속은 것이다. 민보군이 추격하자 많은 농민군이 오지(汚池)에 빠져 죽거나 맨몸으로 달아나다가 민보군의 창검에 전사하였다. 오합지졸의 동학농민군이 민보군과 이에 연대한 신식무기를 든 관군을 이길수가 없었다. 예천한천제방은 동학농민과 민보군의 전쟁이 치열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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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과 민간인, 일분군의 삼위일체가 동학농민을 척결하였던 것이다. 일본군대는 소야리와 석문리에 들어와 군량미와 무기를 실어갔다. 그래서 전북의 정읍, 장흥, 충청도의 우금치, 예천은 관군과 일본군이 협력하여 동학을 물리친 곳으로 동학인들의 한이 서려있는 곳이다.

 

예천 동학의 지도자 최맹순은 1894년 11월 21일 경상도 문경 벌천에서 관군에게 체포되어 다음날 바로 총살되었다. 아들 최한걸까지 같이 총살되어 부자가 사망했다.   

 

 

D. 예천의 교회들

 

상락교회

 

예천군 지보면에 자리잡은 상락은 낙동강 상류에 있는 30호정도 밖에 안되는 가장 작은 마을이다. 1906년 10월15일 양조환(김윤식목사의 외증조부), 양성환, 김낙진(계명대 총장 김태한의 선친), 전병원(전성천의 백부)병원 등 3인이 의성 안계 장터에서 삼분교회출신 오의근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상락교회를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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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멤버들은 예수를 믿으면 잘산다는 말에 교회를 시작하였다.

 

  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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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3명의 가계를 보면 박사학위소지자가 70여명이나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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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환장로 가계도를 보면 평양신학교, 경기고등학교 교장, 연세대학교 대학원 출신, 일본대학졸업자, 총회장(김윤식목사)까지  까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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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고등학교

  경기 고등학교

 

 

김낙진장로 가계도를 보면 목사 7명, 장로 11명, 권사 6명, 박사 15명, 교수 1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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젼병원장로 후손들도 많은 박사학위소지자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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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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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1913년 경북예천에서 출생한 전성천 박사는 일본 아오야마(靑山)대학 신학부를 졸업한 후,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에서 석사, 예일 대학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승만 정부에서 공보실장 및 정부대변인, 성남교회 원로목사를 지냈다. 그는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의 교회에 봉직하는 것을 평생의 영광으로 삼았다. 그는 영남교회사를 지필하기도 했다.

 

전박사는 1975년에는 기독교방송사 사장, 방송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윤치영, 윤보선과 사돈으로 윤보선의 동생인 윤완선의 딸 윤남경이 그의 제수이다.

 

전성천박사로부터 이승만을 배운 전광훈목사는 전성천박사와 7촌 관계이다. 전목사는 전성천박사가 없었다면 자신은 이승만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전목사는 중학교시절부터 전성천박사집에 머물면서 이승만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전목사는 현정권과 대척점에 서서 현정부를 주사파정권이라 비판하고, 광화문에서 100만대군을 이끈 보수우파의 리더가 되었다. 전광훈목사의 사상적 기조는 전성천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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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락교회는 예천 지보면이라는 작은 부락에 위치한 30호정도 밖에 안되는 시골교회였다.

 

 예천군  지보면

 

  지보면


예수믿으면 잘 산다는 믿음을 갖고 시작한 농촌교회에서 박사학위소지자가 70명, 수십 명의 목사와 장로가 나와 그야말로 한 교회를 통하여 사회의 인물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예수믿어서 잘살게 된 대표적 케이스이다.

 

영양에서 김삼환목사, 청송에서 김진홍목사는 광야에 길을 낸 사람들이다. 상락 마을에서 박사학위 소지자가 70여명이 나온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 교회는 농촌교회이지만 신풍, 어신, 갈동, 우망, 봉전, 축동, 풍양, 지보교회를 개척할 정도로 교세가 상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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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교회는 청송 화목교회에서 순교한 엄주선 강도사가 다녔던 교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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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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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읍 노하동에 자리 잡고 있는 예천교회는 1911년 2월, 권수도, 김분이, 최악이, 김조경 등이 모여서 설립한 교회이다. 권수도장로는 신사참배반대로 투옥되기도 했고, 6.25때는 예배당이 파괴되기도 했다.

 

이 교회의 성장은 1952년 상락교회출신 김윤식목사의 취임으로 이루어졌다. 김윤식목사는 이 교회는 영주노회에서 내실있는 교회중의 하나로 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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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76회 총회장이 된 김윤식목사는 1927년 경북 예천에서 출생하여 장신대학교를 졸업 후, 일본 동경신학대학원과 미국 피츠버그신학대학원에서 수학했으며, 1953년 경안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예천교회에서 19년간 목회했다.

 

  김윤식목사

 

 

1971년부터 5년간 교단 총무로 재직한 후 1976년 종암교회로 부임했다. 또 경안노회와 서울북노회에서 노회장을 지냈으며, 1991년 제76회 총회장에 선출됐다. 그는 1996년 5월 원로목사로 추대됐으며, 美 성앤드류스장신대 신대원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현재 그의 동생인 김종식장로는 명성교회장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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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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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영목사의 사역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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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과 청송은 대표적인 오지이다. 그러나 한국의 종교천재들은 영양과 청송출신이다. 예천 상락은 30호밖에 되지 않는 농촌지역이다.

 

여기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한국사회와 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많은 박사들과 전문가들을 몰래 양육하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 하나님은 광야와 같은 임야를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보잘것 없는 시골교회였지만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은 한국의 국제화를 실행하셨다.

 

양궁의 고수들이 예천 출신들이 많이 있다.

 

신궁 김진호

 

 


시골 교회의 영향은 한국의 양궁을 세계화하는데도 기여했다. 

김진호는 경북예천출신으로 기독교 신앙의 힘으로 2018년에는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이 되었다. 대한체육회는 2018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에  한국양궁 원조신궁 김진호 선수를 선정했다.

 

남자는 김일이 스포츠 영웅이다. 김진호 선수는 1975년 예천여중 2학년때 양궁에 입문하여 197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개인전 금메달을 따내며 여궁사로 등장해서 4년만인 1979년 7월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30회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에 등극하며 한국기록경기 사상 최초로 세계재패를 이룩하는 쾌거를 거뒀다. 그녀는 한국에 와서 카 퍼레이드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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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력을 요약하면 1983년 로스앤젤레스 세계선수권대회 5관왕,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개인전 동메달,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을 차지한 것이다. 

 

1979년에는 체육훈장 백마장,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상했다. 김진호 선수가 수립한 생애통산 신기록은 37개로 김 선수는 불모지 한국양궁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은 제1의 양궁여왕 이다.

 

양궁을 하나님께 맡겼다.

 

김진호는 “내 자세를 지키면 편안하게 쏠 수 있었고 결과도 잘 나왔다.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김진호는 자신이 세계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신앙의 힘이 컸다고 절대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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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호는 “양궁은 마지막 세 발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경기다. 마지막 세 발을 쏠 때면 긴장감이 최고치에 이른다. 그럴 때면 기도를 하게 된다”고 고백했다.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대에 섰다"고 했다.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말자며 기도했다.

 

김제덕

 

예천군 출신으로 이번 도쿄 올림픽에서 양궁단체전과 양궁혼성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따 금메달 2관왕에 올랐다. 

 

도쿄올림픽 양궁 2관왕 김제덕(경북일고)과 스포츠클라이밍 선수 서채현(신정고) 등 100명이 각 분야 청년 인재들에게 수여되는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기도 했다. 이외에 세계 양궁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윤옥희도 예천출신이다.

 

  © 편집인


예천도 영양이나 청송처럼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을 때, 수많은 인물이 나타났던 것이다.  

 

 

http://www.lawtimes.net/3693 (영양편)

 

http://www.lawtimes.net/3696 (청송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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