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청송편)

편집인 | 입력 : 2021/12/27 [03:11] | 조회수: 656

 

  청송군

 

 

A. 청송군의 위치

 

청송은 경북 내륙지역으로서 동쪽은 영덕군·포항시, 서쪽은 안동시·의성군·군위군, 남쪽은 포항시·영천시, 북쪽은 영양군에 접한다. 영양밑에 청송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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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가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가 통하는 남부 지역을 개발하였기 때문에, 경북 북부 지역은 낙후지역으로 전락했는데, 청송군은 이웃한 봉화군, 영양군과 함께 경북 북부 중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을 일컫는 BYC로 불리기도 한다.

 

2016년 12월 26일가 당진영덕고속도로 개통되어 교통의 혜택을 입고 있다. 이어 상주영덕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당진영덕고속도로(고속국도 제30호선)는 충청남도 당진시를 기점으로, 경상북도 영덕군을 종점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고속도로이다.

 

상주영덕고속도로는 상주에서 영덕까지 잇고 있다. 청송군, 영덕군 일대는 이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고속도로 혜택을 제공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영양군과 울진군이 직간접적인 혜택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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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청송군의 명칭과 개관

 

청송군은 고구려시대에 청기현이라 칭하였으나 신라에 이르러 적선이라 개칭하고, 고려초에는 부이(鳧伊)라 개칭하고 그 후 운봉(雲鳳)이라 칭하다가 세종조에 송생현과 합하여 청송군으로 개칭하였으며 안덕현을 병합하여 청송도호부로 승격(1459년)하고 부내(府內)를 9面 57里로 구분하였다.

 

1914년 부령 제111호로 부·군·면 통폐합에 따라 진보군 일부를 합병, 8면으로 구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따라 현서면 3개동(복, 덕성, 성재)이 안덕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 청송면이 청송읍으로 승격(1읍 7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면적 : 846.12㎢이고, 인구는 25,623명으로 80년대 7만명에서 점점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초등학교가 8개, 중학교도 8개, 고등학교는 4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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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에는 주왕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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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은 유네스코 지질공원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은 과학적 중요성, 희귀성, 시각적인 아름다움, 교육적 가치 등을 지닌 지질유산 지역으로서 지질학적 중요성뿐만 아니라 생태학적, 고고학적, 역사적, 문화적 가치도 함께 지니고 있는 특정 지역을 말한다. 

 

대한민국은 제주도, 청송, 무등산권,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이 유네스코에 등록되어 있다.

 

 

 

이외에 청송은 외지고 빈티가 나는 가난한 지역이지만 만석꾼의 고택도 있다. 7개동 99칸으로 ‘덕천동 심부자댁’이라 불리기도 한 송소고택은 만석꾼 청송 심씨의 7대손인 송소 심호택이 조상의 본거지인 덕천동에 이거하면서 건축한 가옥으로서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상류층가옥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안채, 큰사랑방, 작은사랑채, 행랑채, 별채 등의 온돌방이 있을 정도로 대가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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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의 주산물은 사과와 고추이다.

 

 

 



C. 청송교도소

 

청송군 자체도 BYC라고 불리는 전국 3대 오지 중 하나인데, 그중에서도 청송 교도소의 입지는 '육지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곳이다. 청송하면 생각나는 것이 청송교도소이다.

 

한 교도관은  "청송교도소는 수감 여건이 국내에서 가장 엄격하다"며 "도주를 막기 위해 교도관들의 숫자도 다른 시설보다 많고 정문을 제외한 교도소 주변은 절벽과 강으로 둘러싸여 탈옥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천혜의 요새'"라고 말할정도이다. 특히 교도소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기때문에 기온이 매우 낮고 겨울에도 눈도 많이 오고 날씨도 매우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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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면이 물살 빠른 반변천으로 둘러싸여 있고, 나머지 한 면 또한 광덕산의 깎아지를 듯한 절벽으로 되어 있다. 죄수가 탈출해도 도망하기도 어려운 곳이다.

 

교도소를 창립한 1981년 개소 후 40년간 이곳을 탈옥한 재소자는 1명도 없다. 빠삐용의 신화는 재현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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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삐용이 와도 탈출하기가 어려운 곳이 청송교도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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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교도소는 바다가 없기 때문에 뛰어내리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므로 청송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은 형기가 마칠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탈출이 불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D. 항일의병기념관

 

항일의병기념관은 전국적인 항일의병의 활동상과 함께 청송지역의 의병활동상을 알리면서 의병정신을 재조명하고 나라사랑 전통정신 문화를 보여주는 역사교육의 장으로 조성된 전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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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독 청송출신들이 의병활동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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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청송의 교회

 

 화목교회(1904)

  

1904년에 화목교회가 세워졌다. 화목교회는 1904년 11월 청송군 현서면 덕계리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화목교회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1920년대로 전해진다. 6.25전쟁 때 순교한 엄주선 강도사가 시무한 교회이다.

 

그 이전 1919년에 이 교회 김기수 조사가 화목 지역 만세운동[3월 26일]을 주도하다가 안동형무소에 복역한 재판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45년 조성대 목사와 박치환 장로, 김점식 집사 등은 신사참배와 징병을 위한 부역에 반대하다가 옥고를 치렀으며, 그에 앞선 1938년에는 ‘설교 원고’의 사전 검열에 반대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던 사실도 교회의 역사[당회록]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화목교회는 마을에 아직 학교가 없을 때 국민학교[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설립해 교육으로 지역사회를 섬기는 모범을 보였다. 화목교회 임재양 목사와 박효일 장로는 마을에 국민학교를 설립하기 전인 1919년에 영신여자학원을 설립해 운영[국민학교 설립 후 5년 만에 폐교]했으며, 중학교가 없던 시절에는 화목학원을 설립해 중등 교육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청송교회는 항일운동의 본산지, 교육운동의 본거지 역할을 하였다. 

 

화목교회(1904)

 

 

1951년 화목교회를 담임했던 엄주선강도사는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홀로 기도하다가 공산당들에게 납치되어 공산군 총검에 찔려 순교를 했다. 현재는 순교자 엄주선 강도사 테마공원이 설립되어 있다. 예장통합 총회는 순교테마공원을 기독교사적지 10호로 지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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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주선강도사는 예천 상락교회에서 1936년 3월 15일 세례를 받았다.  

 

 예천 상락교회 돌비석 

 

 

수락교회(1908)

 

1908년에 노래교회와 수락교회가 세워졌다. 노래교회는 폐지되었고, 수락교회는 박영수라는 사람이 1908년 11월 16일 자택을 기도실로 하면서 집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1909년 9월 15일 교회를 수락동으로 이전하면서 수락교회가 설립되었다.  

 

 수락교회(1908)

 

복동교회

 

김진홍목사가 어려서 다녔던 복동교회는  1915년에 창립되었다. 복동교회는 1915년에 청송군 안덕면 복리의 소대마을에서 처음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때 예배를 주도했던 인물이 선교사 제임스 애덤스(James E. Adams, 안의와)이다.

 

  복동교회(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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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교회

도동교회는 1916년에 창립되었다. 도동교회는 1916년 3월 1일에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동교회(1916)



개일교회(1918)

 

개일교회는 1918년 11월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0년 대구 선교지부의 중심인물이었던 애덤스(JamesE.Adams)[안의와]가 파송한 박낙현에 의해 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 개일교회는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겪었던 서정환 목사가 시무했던 곳이다.

 

개일교회(1918)

 

E. 청송의 인물

 

 
청송은 경북내륙의 오지이지만 일찌감치 복음이 들어와 교회를 통한 신교육과 새로운 사상이 싹트게 되어 많은 인물이 배출된다. 

 

경북 청송군 진보면은 청송군의 북부에 있다. 15개 법정리로 구분돼 있고 면사무소는 진안리에 있다. 영양군·영덕군 및 안동시 경계와 맞닿아 있다. 동부와 남부는 비교적 높은 산이 분포해 있으나, 청송군 내에서는 상대적으로 구릉지가 많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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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전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처남 김복동은 청송군 청송읍 출신이다.
 
청송읍 출신 인물로는 국회의원을 지낸 윤용구 제3,4대 국회의원(청송) 자유당,박주운 제5대 국회의원(양주)민주당, 황병우 제10,12,13대 국회의원(청송ㆍ영덕ㆍ울진) 신민당, 신한민주당, 민주정의당. 3선의원, 윤태균 제14대국회의원(민주자유당), 김복동 14,15대 국회의원(대구동구갑)이 있다. 한동수 3선 청송군수, 우병윤 경상북도 경제부지사, 윤주학 국방과학연구소(상임감사), 조영호 제54대 부산지방조달청장, 이상룡 시조시인이자 명예문학박사, 일본에서 자수성가한 이정행 선생, 윤영균 한국산림복지진흥원 초대 원장 등 그밖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청송읍 출신들이 활동을 하고 있다.
 

 

 

F. 김진홍 목사


청송군 안덕면 출신 중에 김진홍목사가 있다. 그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어머니 돈을 몰래 훔쳐 가출하기도 하였다. 김삼환목사도 오지 영양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돈을 몰래 훔쳐 가출한 적도 있다.

 

 

김목사는 일본에서 태어나 5살 때 어머니와 함께 청송으로 왔고, 홀어머니로 슬하에서 공부를 하며 계명대학에 수석으로 들어가 장학생으로 마치고, 장로회신학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마쳤다. 어려서 삼덕면에 있는 복동교회를 다녔다. 

 

그는 지금도 책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어머니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아서 책을 사주었기 때문이라고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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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는 꾀를 내고 싶으면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생각났고, 졸릴 때도 어머니의 머리카락이 생각나서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다.

 

김목사는 1971년 장신대학원을 다니면서 서울 청계천에 활빈교회를 세우고 빈민선교와 사회사업을 펼첬다. 1974년경 박정희 정권의 유신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다가 끌려가서 옥고를 치뤘다. 이후 청계천 거주민들과 경기도 화성에서 두레마을및 활빈교회 구리두레교회 개척 퇴임후 동두천으로 이주해서 두레수도원을 설립했다.

 

금년들어 80세의 김진홍목사가 동두천 산골짜기에 들어온 지 10년 째이다. 그는 1971년에 청계천에서 머물면서 목회사역을 하였다.

 

  1970년대의 청계천


김진홍목사는 당시 청계천에 들어가 넝마주이들과 함께 하면서 전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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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촌에는 빈민판자촌이 많이 있었다. 청계천 활빈교회도 판잣집이었다.

 

청계천 활빈교회

 

1970년대 중반 서울시는 청계천 판자촌 지역 철거를 시작하면서 김진홍목사는 철거민들을 데리고 농사짓고 세금도 내며 사람답게 살고자 활빈귀농개척단을 조직하여 경기도 화성군 소재의 남양만 간척지에 정착하였다. 남양만에 바다 갯벌을 막아 960만평의 농토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곳에 15개 마을에 1200세대가 입주하게 되었다김목사는 여기에 7개의 개척교회를 세웠다. 남양만 주민회를 조직하고 교회가 센터가 되어 주민봉사와 지역사회를 통하여 두레선교운동을 실천하였다.

 

김목사는 공동체 마을을 세우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50세대를 한 마을에 입주하여 공동 소유하고, 공동 작업하고, 공동으로 누리는 마을을 건설하려 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개입하여 공동체 마을이 북한의 집단농장과 유사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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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는 박정희정권에 투쟁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김진홍목사는 청계천에서 목회하다가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로 감옥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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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김진홍목사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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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당시의 감옥상황을 술회한다.

 

 

  

남양만의 활빈교회는 다음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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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목사는 1997년 남양만 시대를 끝내고 1997.3.1 구리에서 구리활빈교회를 개척하였고 남양만 활빈교회는 1999년에 사임하였다. 구리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구리두레교회에서 2010년 교회를 떠 날때까지 약 3,000여명의 신도들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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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11년에 구리 두레교회 사임을 하고 동두천에 산 7만 5천평을 매입하여 동두천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받은 퇴직금으로 산 7만 5천여 평을 매입하여 신화를 써나가고 있다. 그는 동두천산 속에 금식 수도원을 세웠다. 구리 두레교회 이상의 신화를 쓰고 있었다.  

 

 두레수도원


주택도 30채 씩이나 지어 두레공동체를 형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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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공동체는 양봉사업을 해서 매년 7억의 수입을 올리고 있고, 국제대안학교는 100 여명을 육박했고, 심지어 실내 체육관까지 확보했고, 남녀 기숙사까지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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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여름에는 약초를 가꾸고 있는 농사꾼으로서 일을 하고 있다.

 

 

 

교회는 최근에 두레교회와 신광교회와 연합을 하여 신도들은 매 주일마다 600-700여명 참석을 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헌금은 보통 때보다 40% 인상 되어 코로나시대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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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홍목사는 요즈음은 지금부터 약 10년 동안(80-90세)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평신도를 위한 주석책을 쓰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은 모세처럼 80부터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의 사택 지하는 도서가 즐비하게 놓여있고, 주석을 쓸 준비를 마쳤다.

 

 

 

아침에 일어나면 냉수마찰을 하여 혈액순환을 하고, 산을 한바퀴 돌면서 체력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그래야만 남은 인생 90세까지 10년 동안 창세기부터 게시록까지 50여권의 주석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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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마주의 김진홍목사가 이제 평신도용 성서주석학자로 인생의 마지막 도전을 하고 있다. 김진홍목사는 모세처럼 자신의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며 하나님나라 갈 때까지 은퇴는 없다고 했다. 

 

김진홍목사는 1971년 청계천 사역, 1974년부터는 유신정권반대로 감옥, 1970년대 중반에서 1996년까지는 남양만 사역, 1997년부터 2010년까지는 구리 사역, 2011년부터는 동두천 사역에 마지막 인생을 불태우고 있다. 그는 청계천 판자촌에서 동두천까지 늘 주변인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1941년생인 김진홍목사의 나이가 80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모세처럼 80부터 시작이라는 것이다. 김진홍목사에게 90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청송군과 김진홍목사가 예수를 만났을 때 변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인물이 나오고 김진홍이라는 종교인이 신화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한국의 그룬투비였다. 요약하면 경상북도의 가장 오지마을에서 김삼환, 김진홍목사가 예수를 만났을 때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하였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하여 오지마을 청송에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였던 것이다.      

 

그는 최근 C채널에 참여하여 김삼환목사와 대담하면서 자신의 인생이 있기까지 어머니의 영향이 상당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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