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은 해발1,219m의 일월산을 중심으로 수려한 자연 경관을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 안동군과 경계로 산맥이 가로 놓여있고 경상북도에서는 가장 높은 고원지대이다.
B. 영양의 명칭과 위치
경북 안동권에 위치한 영양군은 신라 때 고은현으로 고려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고, 조선중기에 인근의 청기현을 합하여 울진과 분리되어 독립행정단위를 구성하였고 근대에 이르러 군으로 승격되었다. 영주와 영양, 봉화는 안동문화권이 강원도와 동해안 중심의 문화권과 교류하는 창구였다.
온통 산과 물로 둘러싸인 영양은 경상북도 동북부 태백산맥의 내륙지역에 위치하며 동쪽은 울진군과 영덕군, 서쪽은 안동시, 남쪽은 청송군, 북쪽은 봉화군 등 5개 시군과 경계하고 있다.
C. 영양의 교통
2016년 12월에 되서야 인근 청송군에 당진영덕고속도가 개통이 되면서 동청송영양 나들목이 개통되었다. 개통하기 전에는 전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의 하나로 교통도 매우 불편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영양으로 가려면 대부분 이웃한 안동을 경유해야만 했었다. 안동에서 60키로 떨어져 있지만 최근에는 2차선 도로가 잘 개발되어 있다.
현재 철도편은 전혀 없으며 국도는 국도 제31호선과 국도 제88호선이 유일하다. 이나마도 4차선 확장이나 직선화가 되어있지 않다. 영양군에서 가장 가까운 철도역은 영화에 나오는 봉화군의 양원역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역이다.
봉화 양원역
D. 영양의 교육시설과 인구
영양에는 고등학교도 없었고 안동에나 가야 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가기 조차 어려웠다. 영양과 청송은 어디를 가든지 산과 물뿐이다. 인간적으로 희망이 없는 오지이다.
인구는 2만 명도 되지 않는다. 군 전체 인구는 읍 설치 기준에도 못 미친다. 울릉군을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기초자치단체이다.
E. 영양의 주산물-고추
주산물은 고추, 사과, 담배, 더덕, 천궁, 천마, 어수리 곰취나물, 산머루 등이 많이 생산된다. 특히 영양은 고추로 유명한 곳이다.
고추홍보관이 있을 정도이다. 영양군의 고추재배면적은 2,172ha이고, 경상북도 재배지의 10%를 차지한다. 영양의 담배재배는 약 300년 전부터 행해졌고 전매제가 실시되기 전까지 외국시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제품이 되었다.
영양 고추홍보관
청양고추는 영양과 청송의 줄임말이다. 일조시간이 많고 일교차가 크며, 고추재배의 적절한 토양조건을 갖고 있다. 풍기가 인삼을 재배하기 위한 적절한 토양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석계의 아들 중 넷째 숭일이 선업을 이었고 후손들이 더해져 재령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이문열도 두들마을 출신이다.
이 마을은 일찍이 석계 선생이 영해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후 크게 문풍이 일었던 곳으로서, 훌륭한 학자와 독립운동가 등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길암 이현일과 밀암 이재 등이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후학에게 널리 전하였고, 근세에는 내산(奈山) 이현규가 의병 대장을 지냈으며,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사건에 서명한 독립운동가 이돈호와 이명호, 이상호 등도 이 마을 출신이다.
또한 항일 시인인 이병각과 이병철, 소설가 이문열을 배출한 곳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선과 정의로 표상되는 천상의 논리와 지혜와 자유로 특징지워지는 지상의 논리 사이의 충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천당과 영원을 약속하는 기성 종교의 비현실성에 대하여 사람의 아들들에게 절실한 삶의 복락, 현세적 의무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것, 즉 신의 문제보다는 인간의 문제에, 종교적 진리의 실현보다는 사회적 정의의 실현에 더욱 치중하는 것이 「사람의 아들」의 기본 방향이다.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아편의 종교처럼 맹목적인 종교심보다는 현실에 충실하라는 경고이다.
주실마을
두실마을에 이문열이 있다면 주실마을에는 승무의 조지훈이 있었다. 지훈은 호이고 원래의 이름은 동탁이다. 주실마을도 모두 양반이고 유학의 집안이다.
조지훈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이면서도 민족운동.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반대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그는 의식이 있는 지성인이었다.
조지훈(1926-1968)은 시인이며 학자인 동시에 논객이었다. 그는 어려서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38년 혜화전문학교(동국대학교) 문과를 입학하여 1941년에 졸업을 했다.
향수를 쓴 정지용이 문단에 추천했다. 그는 승무, 고풍의상, 봉황수 등을 써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시문학에 천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교육을 받을 정도로 집안이 넉넉하였지만 대부분은 교육조차 받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다.
영양군은 지형상 3개 생활권으로 나뉘면서 유일하게 청기면에는 중학교 이상의 고등 교육 시설이 없어 중학교부터 남부는 입암, 중부는 영양, 북부는 일월 등 인근 읍면에서 고등학교는 안동 등 타지에서 유학했다. 김삼환목사같은 이는 가난해서 아예 안동까지 유학을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G. 영양의 인물
그러나 영양은 가난한 동리였지만 애국충절의 고장이며, 자수성가한 사업가, 언론인, 법조인, 종교인 등을 많이 배출했다. 돈은 없어도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영양군에는 1904년 찰당골(내당동)에 교회가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이것이 내당동교회이다. 영양군 내당동교회는 곽진섭이라는 사람이 대구 약전 골목에 양초를 팔러갔다가 권찬영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찰당골에 내당동교회를 설립하였다.
내당동교회는 소멸되었지만 다시 일부 교인들이 설립하여 당동교회가 내동동교회를 잇고 있다.
당동교회(1904)
일제의 박해와 생활고로 인해 교인들은 하나씩 흩어져 내당동교회는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흩어진 교인들 중 곽석진이라는 사람은 오리교회(1905)를 설립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영양교회(1907)와 괴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오리교회(1905)
영양교회(1907)
1908년에는 영양군 수비면에 계동교회가 설립되었다.
계동교회(1908)
현재까지는 예장통합교단 소속 24개 교회를 비롯하여 타교단까지 합치면 약 70여개에 달하는 교회가 설립되었다.
예장통합 경안노회 청영시찰
I. 교회의 영향
이러한 기독교의 영향은 새로운 사고와 의식을 깨우치게 하여 영양군에서는 많은 인재가 발생하였다.
교회는 신문명, 근대교육, 유교탈피, 서구지식과 문화를 알게함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는데 앞장섰다.
이처럼 유교가 중심되었던 영양군에 교회가 들어오면서 걸출한 인물들이 나오게 된다. 호남지역도 보면 100여년 이상 교회가 있는 곳에는 항시 인물이 발굴되었다.
그러므로 영양이 오지라고 해도 유학과 항일운동, 의병운동이 있었던 곳으로 정신문화가 살아있었던 곳이다.
특히 100년전부터 교회가 설립되면서 인구 2천도 안되는 청기면에서 많은 인재들이 나오게 된다. 김삼환목사도 청기면출신으로서 신당교회를 다녔다.
영양군 청기면 당리, 신당교회
신당교회
교회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동리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입신양명을 하게 된다.
청기면 출신 중에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 김연우 지원장과, 전 영덕지원 부장판사 권재칠 변호사, 김용일 전 대구지법 총무과장, 안종익 서울지방청 생활안전과장, 이갑형 전 울산중부경찰서장, 남병상 전 영양경찰서장이 있다.
언론계에는 금동수 전 KBS 부사장, 조창용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유성 포항 MBC 국장, 오창해 전 마산 MBC 아나운서 실장이 있다.
행정공무원으로는 전 경북도 노인 건강국 노인 효 복지과장을 지낸 김화기 경북문화콘텐츠 진흥원 본부장과 오도창 영양군수, 구창회 전 관세청 감사국장, 황병기 전 감사원 사무총장, 임재암 전 농산물품질관리원장, 박진호 경기도 하남시 미사2동 주민센터 동장, 이동교 전 대구시 교통국장을 꼽을 수 있다.
이 밖에 교육계에는 조병인 전 경북 교육감, 권원달 충북대 명예교수, 오창우 계명대 교수, 오재춘, 영진전문대 교수와 오창린 동국대 경주 캠퍼스 교수, 오신창 전 영양중·고 교장 김인환 전 영주 영광여고 교장이 있으며, 김선굉 소설가, 이창환 시인 등이 문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명성교회 김삼환목사도 청기면 출신이다.
이렇게 많은 인재가 발굴될때까지 100여 년 전에 교회가 세워졌다. 호남도 교회가 100년 전부터 세워진 곳은 반드시 인물이 나왔다.
박화성, 황성수, 목일신, 김대중, 김일, 유제두, 박지성, 정세균, 이낙연, 김영진 장관 등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예수병원, 광주 기독병원, 애향원, 영명학교, 신흥학교, 정명학교 등의 단체도 좋은 예이다. 교회가 일찌기 세워진 지역은 항시 사회적으로 훌륭한 인물과 단체가 발생하였다.
J. 김삼환목사가 예수를 만났을 때
우리가 주목할만한 인물은 영양출신 중에 정치인 이재오, 문학가 이문열, 시인 조지훈도 있지만 종교인으로서 김삼환목사이다.
김삼환목사와 어려서 함께 살았던 김삼환목사의 친구의 형수인 권 권사는 김삼환목사가 어려서부터 다른 친척은 잘살았는데 김목사의 가정은 가난했다고 털어놓았다.
이외에도 재단법인 빛과 소금을 만들어 교파를 초월하여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매달 1,000여명씩 돕고 있다. 그리고 파송선교사 42 명을 매달 200 만원씩 지원하고, 300 여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매달 일정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코로나의 상황에서도 한 명도 끊이지 않았다.
요약하면 김목사는 용산참사, 태안반도 기름닦기, 정의연 할머니 사택제공, 군선교회, 이북돕기, 통일선교 등 사회와 국가의 일에도 앞장서서 도왔다. 심지어 자신과 상관없는 기장측 목사가 화재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 때도 함께 했다.
그는 국경과 교파, 신분을 초월해서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 신분이나 교파차별을 하지 않고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다. 코로나가 닥쳐와 미자립교회 목사들이 어려움을 당하자, 수백명을 매달 30만원씩 2년을 도왔다. 코로나시대 선교사들의 지원은 한명도 끊지 않았다.심이러한 일들을 아들 김하나목사가 그대로 잇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떠난 이후에도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사람들을 위하여 일을 했다. 산위의 물을 가둬 작은 호수를 만들어 가뭄에 대비하도록 했다.
김목사는 농림부 장관에게 요청하여 물을 막아 작은 호수를 만들어 가뭄시 밑의 밭농사에 물이 모자르지 않도록 했다.
지역민들은 "우리 지역은 농사철만 되면 물이 부족하여 오랜 세월 고생하면서 농사를 지어 오던 중 지역 출신이신 김삼환 목사님꼐소 농림부 장관과 상의하여 이 곳 죽곡 저수지를 막게 되어 물 걱정없이 농사를 지울 싰도록 하여 주심에 감사하여 지역 동리자들이 뜻을 모아 작은 표적으로 기념하고자 합니다"며 돌감사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