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영양편)

영양이 예수를 만났을 때

편집인 | 입력 : 2021/12/25 [11:21] | 조회수: 742

  

A. 영양군의 지리 

 

경북에서 가장 오지로 불리는 곳은 북쪽 내륙에 위치한 봉화, 영양, 청송이다. 소위 BYC지역으로 불리운다.

 

봉화, 영양. 청송은 산이 많고 평지가 적은데다가 교통이 불편한 지역으로 산업이 발달하기에 지리적으로 약점을 지니고 있다. 화전민이 많았던 지역이다. 농지가 없다보니 산을 이용하여 농지를 개간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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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평야가 없고 산천지였다. 개화이후에 경부선이 개통되고 고속도로가 생겼지만 여전히 산이 많은 북부지역은 소외되었다. 

 

영양은 태백산맥이 동남방향으로 뻗어 많은 대소계곡을 형성하고 북고남저의 산간분지상의 지역을 이루고 있다. 영양의 산은 일월산이다.

 

일월산

 

영양은 전반적인 해발고도가 경북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임야가 85.4%이고, 농경지는 9.2%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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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은 해발1,219m의 일월산을 중심으로 수려한 자연 경관을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 안동군과 경계로 산맥이 가로 놓여있고 경상북도에서는 가장 높은 고원지대이다. 

 

 

B. 영양의 명칭과 위치

 

경북 안동권에 위치한 영양군은 신라 때 고은현으로 고려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뀌었고, 조선중기에 인근의 청기현을 합하여 울진과 분리되어 독립행정단위를 구성하였고 근대에 이르러 군으로 승격되었다. 영주와 영양, 봉화는 안동문화권이 강원도와 동해안 중심의 문화권과 교류하는 창구였다.

 

온통 산과 물로 둘러싸인 영양은 경상북도 동북부 태백산맥의 내륙지역에 위치하며 동쪽은 울진군과 영덕군, 서쪽은 안동시, 남쪽은 청송군, 북쪽은 봉화군 등 5개 시군과 경계하고 있다.

 

 

  

C. 영양의 교통

 

2016년 12월에 되서야 인근 청송군에 당진영덕고속도가 개통이 되면서 동청송영양 나들목이 개통되었다. 개통하기 전에는 전국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의 하나로 교통도 매우 불편하였다.

 

다른 지역에서 영양으로 가려면 대부분 이웃한 안동을 경유해야만 했었다. 안동에서 60키로 떨어져 있지만 최근에는 2차선 도로가 잘 개발되어 있다. 

   

현재 철도편은 전혀 없으며 국도는 국도 제31호선과 국도 제88호선이 유일하다. 이나마도 4차선 확장이나 직선화가 되어있지 않다. 영양군에서 가장 가까운 철도역은 영화에 나오는 봉화군의 양원역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역이다.

 

 

 봉화 양원역

 

D. 영양의 교육시설과 인구

 

영양에는 고등학교도 없었고 안동에나 가야 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고등학교를 가기 조차 어려웠다.  영양과 청송은 어디를 가든지 산과 물뿐이다. 인간적으로 희망이 없는 오지이다.   

 

 

   

인구는 2만 명도 되지 않는다. 군 전체 인구는 읍 설치 기준에도 못 미친다. 울릉군을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기초자치단체이다.

 

 

 

 

 

E. 영양의 주산물-고추

 

주산물은 고추, 사과, 담배, 더덕, 천궁, 천마, 어수리 곰취나물, 산머루 등이 많이 생산된다. 특히 영양은 고추로 유명한 곳이다.

 

고추홍보관이 있을 정도이다. 영양군의 고추재배면적은 2,172ha이고, 경상북도 재배지의 10%를 차지한다. 영양의 담배재배는 약 300년 전부터 행해졌고 전매제가 실시되기 전까지 외국시장에서 가장 인기있는 제품이 되었다. 

 

영양 고추홍보관

 

청양고추는 영양과 청송의 줄임말이다. 일조시간이 많고 일교차가 크며, 고추재배의 적절한 토양조건을 갖고 있다. 풍기가 인삼을 재배하기 위한 적절한 토양을 갖고 있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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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두들마을과 주실마을

 

두들마을

 

영양에는 두들마을과 주실마을이 있다. 두들마을은 이씨 집성촌이고, 주실마을은 조씨 집성촌이다. 두 마을을 통해서 문인이 배출된다.

 

 

  두들마을





두들마을은 1640년(인종 18년) 석계 이시명 선생이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렵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들어와 학문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념한 곳이다. 그러다 보니 산골짜기 영양에 많은 인재들이 나온다. 독립운동가, 의병, 문학가, 종교인들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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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의 아들 중 넷째 숭일이 선업을 이었고 후손들이 더해져 재령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이문열도 두들마을 출신이다.

 

이 마을은 일찍이 석계 선생이 영해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후 크게 문풍이 일었던 곳으로서, 훌륭한 학자와 독립운동가 등을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길암 이현일과 밀암 이재 등이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후학에게 널리 전하였고, 근세에는 내산(奈山) 이현규가 의병 대장을 지냈으며, 유림 대표로 파리장서사건에 서명한 독립운동가 이돈호와 이명호, 이상호 등도 이 마을 출신이다.

 

또한 항일 시인인 이병각과 이병철, 소설가 이문열을 배출한 곳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선과 정의로 표상되는 천상의 논리와 지혜와 자유로 특징지워지는 지상의 논리 사이의 충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천당과 영원을 약속하는 기성 종교의 비현실성에 대하여 사람의 아들들에게 절실한 삶의 복락, 현세적 의무의 중요성을 제기하는 것, 즉 신의 문제보다는 인간의 문제에, 종교적 진리의 실현보다는 사회적 정의의 실현에 더욱 치중하는 것이 「사람의 아들」의 기본 방향이다.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나 아편의 종교처럼 맹목적인 종교심보다는 현실에 충실하라는 경고이다.  

 

 

 

 

주실마을

 

두실마을에 이문열이 있다면 주실마을에는 승무의 조지훈이 있었다. 지훈은 호이고 원래의 이름은 동탁이다. 주실마을도 모두 양반이고 유학의 집안이다. 

 

조지훈은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박목월,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이면서도 민족운동.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반대한 사람이다. 그야말로 그는 의식이 있는 지성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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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이 살았던 영양군 일월면 주곡동의 주실마을은 400여년이 된 마을로 조광조 후손인 한양조씨 마을이다. 양반마을이다.

 

원래 이곳은 주씨가 살았으나 1630년 조선중기 조광조의 친족 후손인 한양인 조전선생이 사화를 피해 정착하게 되면서 주실마을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였던 조지훈 (1920~1968)의 생가인 호은종택(경북도기념물 제78호)이 마을 한복판에 널찍이 자리 잡고 있다.

 

 주실마을

 

  조지훈의 생가(호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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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1926-1968)은 시인이며 학자인 동시에 논객이었다. 그는 어려서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보통학교 3년을 수학하고, 1938년 혜화전문학교(동국대학교) 문과를 입학하여 1941년에 졸업을 했다.

 

향수를 쓴 정지용이 문단에 추천했다. 그는 승무, 고풍의상, 봉황수 등을 써서 이름을 알렸다. 그는 시문학에 천재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일찌감치 교육을 받을 정도로 집안이 넉넉하였지만 대부분은 교육조차 받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다. 

 

영양군은 지형상 3개 생활권으로 나뉘면서 유일하게 청기면에는 중학교 이상의 고등 교육 시설이 없어 중학교부터 남부는 입암, 중부는 영양, 북부는 일월 등 인근 읍면에서 고등학교는 안동 등 타지에서 유학했다. 김삼환목사같은 이는 가난해서 아예 안동까지 유학을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G. 영양의 인물

 

그러나 영양은 가난한 동리였지만 애국충절의 고장이며, 자수성가한 사업가, 언론인, 법조인, 종교인 등을 많이 배출했다. 돈은 없어도 인물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김삼환목사의 고향인 청기면은 인물들이 많이 나온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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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기면은 대표적인 애국충절의 마을이다. 청기면 남쪽 지역에 있는 상천리에는 구한말 대표적 순국선열인 벽산 김도현(1852-1914)선생의 생가와 선생이 왜군과 맞서 싸운 검산성이 있다.

 

  김도현 선생 생가

  

김도현 선생은 고종 31년(1894)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사재를 털어 검산에 창의도총부를 정하고 봉화 청량산에 들어가 의병을 일으켰고, 안동, 함창, 선성과 강릉, 영양 일월산 등지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그는 영양 영흥학교를 창설하고 교육에도 힘썼으며, 1914년 국권을 강탈당한 것을 통분해 동해(영해 관어대)에 투신 자살했다. 헤이그에서 자결한 이준열사와 같았다. 광복 후 1962년 건국 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이외에 영양 청기면의 3·1운동을 주도한 인암 오윤승(1875-1960)도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이다. 오윤승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3월 24일 청기면민 약 400명을 동원해 시위했으나 체포돼 1년형을 선고받았다.

 

 

  

청기면 기포리에는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김윤명의 의병에 가담했던 회곡권춘란(1539-1617)의 고택도 있다.

 

일월산 기슭에 자리잡은 이 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 회곡 권춘란(1539∼1617)이 노년에 살던 곳이다. 권춘란은 아들이 없어 동생 춘계의 맏아들을 양자로 삼았는데, 이 집은 권춘계가 임진왜란 이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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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양군은 애국충절의 지역이기도 하면서 문학과 종교인, 사업가, 법률가, 교육가, 정치가(이재오)등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물이 발생한 이면에는 개신교들이 세운 교회를 무시하지 못하였다. 교회는 당시 가장 근대문명이 발달한 곳이었다.

 

이러한 근대의 교회는 영양을 발전시키는데 공헌을 한다. 교회의 역사가 없었더라면 많은 인물이 배출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오늘의 김삼환목사도 없었을 것이다.  

 

H. 영양의 초기교회사

 

영양은 안동에서 전도하는 권찬영(J.Y.Crothers)선교사 부부의 전도를 받은 사람이 1904년에 교회를 개척했다.

 

권찬영선교사는 1910년부터 그가 은퇴한 1952년까지 40년동안 안동에 있으면서 안동 인근지역까지 복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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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에는 1904년 찰당골(내당동)에 교회가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이것이 내당동교회이다. 영양군 내당동교회는 곽진섭이라는 사람이 대구 약전 골목에 양초를 팔러갔다가 권찬영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고 찰당골에 내당동교회를 설립하였다.

 

내당동교회는 소멸되었지만 다시 일부 교인들이 설립하여 당동교회가 내동동교회를 잇고 있다.  

 

  당동교회(1904)

 

 

일제의 박해와 생활고로 인해 교인들은 하나씩 흩어져 내당동교회는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흩어진 교인들 중 곽석진이라는 사람은 오리교회(1905)를 설립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영양교회(1907)와 괴동교회를 설립하였다.   

 

 오리교회(1905)

 

 

  영양교회(1907)

 

1908년에는 영양군 수비면에 계동교회가 설립되었다.

 

  계동교회(1908)

 

현재까지는 예장통합교단 소속 24개 교회를 비롯하여 타교단까지 합치면 약 70여개에 달하는 교회가 설립되었다.

 

예장통합 경안노회 청영시찰


I. 교회의 영향 

 

이러한 기독교의 영향은 새로운 사고와 의식을 깨우치게 하여 영양군에서는 많은 인재가 발생하였다.  

 

교회는 신문명, 근대교육, 유교탈피, 서구지식과 문화를 알게함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는데 앞장섰다.   

 

이처럼 유교가 중심되었던 영양군에 교회가 들어오면서 걸출한 인물들이 나오게 된다. 호남지역도 보면 100여년 이상 교회가 있는 곳에는 항시 인물이 발굴되었다. 

  

그러므로 영양이 오지라고 해도 유학과 항일운동, 의병운동이 있었던 곳으로 정신문화가 살아있었던 곳이다. 

 

특히 100년전부터 교회가 설립되면서 인구 2천도 안되는 청기면에서  많은 인재들이 나오게 된다. 김삼환목사도 청기면출신으로서 신당교회를 다녔다.

 

영양군 청기면 당리, 신당교회 

  

 

신당교회

 

  

교회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동리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입신양명을 하게 된다. 

 

청기면 출신 중에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 김연우 지원장과, 전 영덕지원 부장판사 권재칠 변호사, 김용일 전 대구지법 총무과장, 안종익 서울지방청 생활안전과장, 이갑형 전 울산중부경찰서장, 남병상 전 영양경찰서장이 있다.


언론계에는 금동수 전 KBS 부사장, 조창용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유성 포항 MBC 국장, 오창해 전 마산 MBC 아나운서 실장이 있다.

 

행정공무원으로는 전 경북도 노인 건강국 노인 효 복지과장을 지낸 김화기 경북문화콘텐츠 진흥원 본부장과 오도창 영양군수, 구창회 전 관세청 감사국장, 황병기 전 감사원 사무총장, 임재암 전 농산물품질관리원장, 박진호 경기도 하남시 미사2동 주민센터 동장, 이동교 전 대구시 교통국장을 꼽을 수 있다. 

이 밖에 교육계에는 조병인 전 경북 교육감, 권원달 충북대 명예교수, 오창우 계명대 교수, 오재춘, 영진전문대 교수와 오창린 동국대 경주 캠퍼스 교수, 오신창 전 영양중·고 교장 김인환 전 영주 영광여고 교장이 있으며, 김선굉 소설가, 이창환 시인 등이 문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명성교회 김삼환목사도 청기면 출신이다.  

  

 

   

이렇게 많은 인재가 발굴될때까지 100여 년 전에 교회가 세워졌다. 호남도 교회가 100년 전부터 세워진 곳은 반드시 인물이 나왔다. 

 

박화성, 황성수, 목일신, 김대중, 김일, 유제두, 박지성, 정세균, 이낙연, 김영진 장관 등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예수병원, 광주 기독병원, 애향원, 영명학교, 신흥학교, 정명학교 등의 단체도 좋은 예이다. 교회가 일찌기 세워진 지역은 항시 사회적으로 훌륭한 인물과 단체가 발생하였다.

 

J. 김삼환목사가 예수를 만났을 때

 

우리가 주목할만한 인물은 영양출신 중에 정치인 이재오, 문학가 이문열, 시인 조지훈도 있지만 종교인으로서 김삼환목사이다. 

 

김삼환목사와 어려서 함께 살았던 김삼환목사의 친구의 형수인 권 권사는 김삼환목사가 어려서부터 다른 친척은 잘살았는데 김목사의 가정은 가난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가 훗날 명성교회를 이루면서 마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고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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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환목사는 차비도 없어 안동까지 가서 고등학교를 다니지도 못할 정도로 가난해서 교육의 헤택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는 일찌기 교회네 다닌 결과 고등학교 대신 경안성서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했고, 피어선 신학교도 다니고, 훗날 장로회신학대학교 목회연구과에서 공부한 것이 그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5개나 받는다. 

 

 


그는 영양에서 가난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교육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고, 완고한 아버지밑에서 농경일에 종사하면서 다양한 농촌의 체험이 훗날 계시적 행동이 되어 목회에 성공하게 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장로교회로 발전시켰다.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이처럼 시골 영양군에서 교회의 영향은 지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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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에서 만난 하나님이 그의 교회를 세계적으로 부흥시켰다. 재적 인원이 10만명이 넘는다. 코로나시대에도 인산인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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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집앞에는 개울이 흘렀고 아버지를 돕느라 논농사, 밭농사를 마다하지 않고 다했으며, 시간이 나면 물고기를 잡아 아버지에게 대접을 하기도 했다. 

 

그의 모든 놀이는 설교를 통하여 훗날 영감적 말씀으로 바뀌어졌다. 모든 체험을 설교에 인용하여 동질감을 느낀 많은 신도들이 공감하면서 하나님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빈궁이 부요가 되고, 불임이 임신이 되고, 귀신이 쫏겨나가고, 질병에 걸린 자들이 치유를 받고, 이루말할 수 없는 예수의 기적이  그를 통하여 창출되었다. 역대 대통령들이 거의 명성교회에 다녀갔다.

 

특히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이 집무할 때, 청와대를 내집처럼 드나들어 대통령들을 기도해주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영삼대통령 추도에 초청받기도 하였다.

 

 

김삼환목사는 노무현 대통령을 세워놓고 설교를 하기도 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앞에서 설교도 하여, 대한민국 대통령들 앞에서 설교를 하는 영예까지 안았다. 
 
 
 
노대통령의 추도식에도 명성교회 성가대를 보내기도 할 정도로 야당출신 대통령과도 좋은 관계를 가진 바 있다.  

 

 
김목사는 농촌의 체험을 바탕으로 예화를 인용하면서 그들에게 설교를 하였다. 뱀과 물고기잡은 이야기, 논밭 일을 하고 과수원농사를 한 이야기 등, 모든 과거의 농촌활동을 설교화시켰다.  그는 처음에는 상청교회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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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청교회앞에서 물놀이를 하곤 하였다. 모든 것이 훗날 설교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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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요강, 화장실, 풀빵기계, 아버지 돈을 훔쳐서 도망한 이야기, 남의 과수원의 과일을 훔친 아야기, 화투를 쳤던 이야기 등을 격의 없이 소박하게 설교에 인용하여 신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심지어는 총회앞에서 아버지에게 맞은 설교를 하여 총대들의 가슴을 움직이기도 했다. 이야기 설교의 천재였다.      
  

 

 
결국 그의 어려서의 체험이 계시적 말씀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 대통령들까지도 김삼환목사의 설교듣는 것을 좋아했을 정도이다.
 
김목사의 설교는 국내 대통령들에게만 감화를 준 것이 아니라 이디오피아. 이스라엘, 미국 등의 대통령과도 만나서 이야기를 할 때고 그들이 감동을 했다. 
    

그의 집앞에 개울물의 물놀이 경험이 세계의 지도자들앞에서의 설교로 변하였다. 집앞의 작은 개울은 넓은 낙동강을 향하여 흘러내려 가듯이, 그의 사역도 5대양 6대주로 흘러나갔다.  

 

 


물은 낙동강으로 흘렀고 김삼환목사는 서울 한강근처로 흘러갔다. 아무도 그가 명성교회를 굴지의 교회로 만들 것을 하나님이외에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만 세우는데 끝나지 않았고, 안동성소병원을 인수하여 굴지의 안동 최고의 병원으로 만들고 영양에 있는 병원, 이디오피아에 있는 병원까지 운영하여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시바이처나 이태석 신부가 한 일의 수천 배를 하고 있다. 

 

  이디오피아 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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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09년에는 태안에 기름유출사고로 인해 앞장서서 사상 최악의 기름유출을 몸으로 막는데 앞장을 서기도 했다.   

 

 

 

 





 

김삼환목사는 2009년 용산참사때도 유가족 편에 서서 활동하여 유가족을 감동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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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의연 길원옥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조문을 가서 정의연 할머니들을 위로해주었다. 그에게는 대통령이나 힘없는 할머니나 차별이 없었다.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항시 그가 함께 했다. 정의연할머니들이 편안하게 거하도록 집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의 공적인 사역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00억 이상을 들여 여주 민영교도소를 설립하는데도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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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교육에까지 헌신하여 영주의 영광여고까지 인수하여 전원이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는 최고의 학교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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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농어촌 목회자의 자녀를 위해 순천장학관을 비롯하여 7개의 장학관을 세우기도 했다.  세계로 금란교회 주성민목사는 명성 장학관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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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호남에는 4개의 장학관을 세웠다. 그러나 호남목회자들이 명성에 가장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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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재단법인 빛과 소금을 만들어 교파를 초월하여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매달 1,000여명씩 돕고 있다. 그리고 파송선교사 42 명을 매달 200 만원씩 지원하고, 300 여명 이상의 선교사들을 매달 일정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코로나의 상황에서도 한 명도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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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김목사는 용산참사, 태안반도 기름닦기, 정의연 할머니 사택제공, 군선교회, 이북돕기, 통일선교 등 사회와 국가의 일에도 앞장서서 도왔다. 심지어 자신과 상관없는 기장측 목사가 화재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 때도 함께 했다. 

 

 

그는 국경과 교파, 신분을 초월해서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 신분이나 교파차별을 하지 않고 찾아가서 위로해 주었다. 코로나가 닥쳐와 미자립교회 목사들이 어려움을 당하자, 수백명을 매달 30만원씩 2년을 도왔다. 코로나시대 선교사들의 지원은 한명도 끊지 않았다.심이러한 일들을 아들 김하나목사가 그대로 잇고 있다.   

 

심지어 자신이 떠난 이후에도 고향을 잊지 않고 고향사람들을 위하여 일을 했다. 산위의 물을 가둬 작은 호수를 만들어 가뭄에 대비하도록 했다.

 

 

 

김목사는 농림부 장관에게 요청하여 물을 막아 작은 호수를 만들어 가뭄시 밑의 밭농사에 물이 모자르지 않도록 했다.  

 

지역민들은 "우리 지역은 농사철만 되면 물이 부족하여 오랜 세월 고생하면서 농사를 지어 오던 중 지역 출신이신 김삼환 목사님꼐소 농림부 장관과 상의하여 이 곳 죽곡 저수지를 막게 되어 물 걱정없이 농사를 지울 싰도록 하여 주심에 감사하여 지역 동리자들이 뜻을 모아 작은 표적으로 기념하고자 합니다"며 돌감사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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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의 물은 아래로 흘러 밭농사에 많은 도움을 주고 물부족을 해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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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환목사 고향의 마지막 생존자인 할머니는 자신의 시동생이 김삼환목사와 친구라고 하면서 김삼환목사에 대한 말을 쏟아냈다. 할머니의 시동생은 명성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을 한 후 소천했다.     

 

 

K. 결론 

 

영양에서 김삼환목사가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수만명 이상이 할 일을 하게하셨다. 할머니는 김삼환목사가 동리에 있는 사람들을 중국에 3박 4일동안 여행을 시켜주었고, 매년 소한마리를 잡아 자신들에게 나줘주었다고 했다. 

 

산과 골짜기, 시냇물밖에 없는 영양에 복음이 들어오니 영양이 변하기 시작했다. 청기면의 수많은 사람들이 입신양명을 한 것은 우연일까? 보편사속에 구속사가 들어오니 보편사는 변하였던 것이다.

  

▲     ©편집인

 

한 사람이 수백년 살아도 해내지 못할 일을 김삼환목사는 목회 40년만에 해낸 것은 우연일까? 하나님의 은혜일까? 김삼환목사가 예수를 만났을 때, 그리고 영양이 예수를 만났을 때 영양 산골짜기에서 기적이 발생했다. 그리스도의 영양분이 공급될 때 영양은 점점 건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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