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개념
성리학은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줄임말이다. 성명(性命)이란 천성과 천명을 합한 말이고, 의리(義理)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의미한다.
성리학(性理學은) 12세기에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교철학이다. 성리학의 어원은 주희가 주창한 성즉리(性卽理)를 축약한 명칭이다. 인간의 심성과 하늘의 이치를 연결시킨 것이다.
조선시대의 통치이념이자,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정신세계를 장악했던 유학 성리학의 핵심사상은 성명과 이기론이다.
성리학은 유교철학
유교철학인 성리학은 유교를 형이상학적 철학으로 승화시켰고, 형이상학적인 철학을 인간의 심성에 적용시켜 인간이 이에 근원을 두고 기에 따라 살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이는 훗날 이황이 이기이원론으로 발전시킨다. 이러한 성리학은 주자학(朱子學)·정주학(程朱學)·이학(理學)·도학(道學)·신유학(新儒學) 등의 명칭으로 통용되고 있다.
주희의 성리학(주자학)
성리학의 시조인 주희는 [대학], [논어], [맹자], [중용]을 1190년에 사자(四子)라는 이름으로 한데 모아 새롭게 간행하여 사서(四書)를 경전화시킴으로써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논어]는 공자의 교설을 제자들이 모은 것이고, [맹자]는 맹자의 교설을 제자들이 모은 것이다. [대학], [중용]은 원래 [예기]의 한 편이었는데 [대학]은 증자(曾子)와 그 문인들이 지었고 [중용]은 자사(子思)가 지었다고 생각하여 각각 한 책으로 독립시켰다.
이러한 주희의 업적으로 말미암아 한당(漢唐) 시대 유학은 오경 중심의 유학이었는데 송대(宋代) 이후에는 사서 중심의 유학이 되었다.
주희는 사서를 집주(集注)하면서 자연적인 올바른 이치(理)와 그것이 인간 본성으로 내면화된 성(性)을 중심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이른바 성리학(性理學)의 기초를 닦았다. 성즉리였다.
그러므로 올바른 자연의 이치를 갖고 인간의 심성을 다루는 학문이 성리학이었다.
송대의 1313년부터 1912년까지 자그만치 600년동안 사서는 중국의 학교 교육과 관료 선발시험에서 공식적인 기본 교재였다.
이와 기, 말씀과 육신
하늘의 이치를 인간의 심성까지 연결하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기독교와 유사한 형태의 학문이었다. 이가 성을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영남의 유림들이 일찌기 자발적으로 기독교를 흡수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늘의 이치와 인간의 심성이 연결되는 것은 성리학과 기독교와 별차이가 없었다.
성리학의 도입
주자학으로서의 성리학의 도입은 충렬왕 때(13세기 후반)로 추정된다. 안향(安珦, 安裕)은 주희의 호 회암(晦庵)에서 ‘회(晦)’자를 따 자신의 호를 회헌(晦軒)이라 하여 주희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었다.
그 무렵 백이정(白頤正)은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원(元)의 수도에 가 10년간 머물다 돌아오는 길에 성리학 관계 서적을 많이 구해 왔다.
이러한 중국의 유교철학이 고려시대 영주출신 안향에 의하여 한국에 수입이 되면서 조선조의 국가통치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천재적인 학자들이 성리학을 연구함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영남의 사림파들을 중심으로 한국적 성리학으로 탈바꿈하였다.
한국적 성리학의 토대위에서 기독교가 전파되자 그 속도는 날개를 단 새처럼 되어 복음의 여파는 상당했다. 이미 일본에서는 자체적으로 이수정이 성경을 번역하였다.
주희가 사서라는 경전을 연구하듯, 서상륜과 이수정은 성경을 경전으로 보고 번역을 하였던 것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는 한국에 상륙할 때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들고 있었다.
서상륜은 1882년 한국에 선교사가 입국하기 3년전 만주에서 최초로 한국말 누가복음을 번역하여 간행하고 국내에 전파했다.
이수정은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 쓰다젠으로 부터 복음을 받아들이고, 조선백성을 위해 최초로 마가복음을 번역하였고, 한국의 최초의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이수정의 한국말 성경책을 소지하고 한국에 들어왔다.
성리학의 특징
성리학의 특징은 공자·맹자의 선진 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일분수(理一分殊)·천도유행(天道流行)·생생지리(生生之理)로써 보편타당한 법칙의 편재를 주장하였다.
성리학은 인간은 우주의 보편타당한 법칙(天理)을 부여받았다고 보아 인간성(性)에 관심을 두었다. 즉 하늘의 이치는 인간의 심성까지 영향을 주었다. 성은 인간의 본연지성이었다.
성리학에서는 인간의 심성에 관심을 둔 나머지 자신의 지나치거나 부족한(過不及) 기질(氣質)을 교정하면 선(善)한 본성을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리학에서는 보편타당한 법칙을 궁구하고(窮理) 자신의 본성을 다 발휘(盡性)할 것을 주장하였다.
성리학에서는 보편타당한 법칙을 온전히 익히기(體認·體得) 위한 방법으로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론을 제시한다. 즉 사사물물(事事物物)에 깃들어 있는 이치(理)를 궁구하여 인간의 앎을 확장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위일체, 불상잡, 불상리
주자는 이와 기는 성격상 서로 섞일 수 없고 (不相雜, 決是二物) 분리될 수 없는 관계(不相離, 理氣相須)라고 했다.
불상잡, 불상리는 이황에 의하여 체계화되었다. 이황에게서 이와 기는 수동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발하여 운동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주리론은 하늘의 이치를 중시했고, 주기론은 현상으로 나타난 기를 중시했다. 주희는 사단은 리의 발동이고, 칠정은 기의 발동이라고 판단했다.
이황도 사단은 리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개신교, 불상잡, 불상리의 삼위일체
이것은 삼위일체의 사상과 유사하다. 칼케톤신조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불상잡, 불상리이다. 삼위일체의 세 개체도 하나이면서 나눌 수 없는 본질을 소유하면서 서로 방해받지 않고 세 개의 개체로서 존재한다.
칼케톤 신조를 보면 불상잡, 불상리이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아울러 완전한 사람이며, 두 본성은 나누어지지 않고, 분리되지 않으며, 변하지 않고, 혼합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분명히 구분되지만 삼위일체도 서로 떨어저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와 기의 관계에 익숙한 성리학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잡다하게 섞일 수 없고,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상잡, 불상리의 예수의 신인성과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성리학의 초기 수용과 발전과정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 전래되기 시작한 때를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송(北宋)에서 성리학이 발흥할 무렵인 고려 인종기 전후(11∼12세기)이다.
당시 고려에서는 송의 서적을 적극 수집해 들여 왔고, 김양감(金良鑑)·윤언이(尹彦頤) 같은 대학자가 사신의 임무를 띠고 송에 가는 한편, 중국 사신들이 고려에 빈번히 왔다.
16세기의 성리학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가 심화된 것은 16세기부터이다. 의리를 중시하던 이전의 성리학자들은 전기 사림파로, 이기심성(理氣心性)을 이론적으로 정밀화하였던 성리학자들은 후기 사림파로 분류할 수 있다.
16세기가 되면서 이기 문제의 본격적 논의가 이언적(李彦迪)과 서경덕(徐敬德)에서 시작된다. 이언적(李彦迪, 1491년 11월 25일 ~ 1553년 11월 23일)은 조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이다. 조선국 의정부 좌찬성 등을 지냈다.
학문적으로는 조선 최초의 철학적 논쟁인 태극논쟁(太極論爭)을 벌여 한국 성리학의 태두가 되었고,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는 사상을 확립해 이황에게 계승시켜주었으며, 보물 제 586호로 지정된 다수의 저서를 남겨 영남학파의 창시자로 추앙됨으로써 1573년 경주 옥산서원에 주향되었고,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언적은 이와 기, 형이상자(形而上者)와 형이하자(形而下者), 도와 기(器)·태극(太極)과 음양(陰陽)이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면서 둘(二而一, 一而二)인 관계로 합하여져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보편적 원리인 이를 구체적 기와 동시적으로 읽음으로써 이가 공허한 초월성이 아님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언적은 이와 기의 불가분성을 주장하면서도 ‘이가 있은 뒤에 기가 있다’고 함으로써 이의 선재성을주장하였다.
이황과 기대승, 8년동안의 사단칠정 논쟁
이기에 대한 논의는 사단칠정(四端七情)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심성론적 연구로 이어졌고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사단칠정에 대한 논쟁이 8년 동안 있었다.
사단이란 인간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주는 네 가지 단서를 말하며, 칠정이란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을 말한다. 그런데 사단과 칠정은 서로 중첩되기도 하고 구분되기도 하기 때문에 크나큰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조선조 500년 동안 사단과 칠정은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성선설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선한 본성은 구체적으로 네 가지 덕목으로 구분되는데 그것이 사덕,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이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 본질적인 덕목은 네 가지 단서를 통해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네 가지 단서란 남의 불행을 보고 측은해 하는 마음惻隱之心, 불의를 보면 수치스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 시비를 따지는 마음是非之心을 일컫는다.
그러나 주희는 맹자의 성선설을 보충하기 위하여 현실 속의 악惡을 종합적으로 설명하는 새로운 설명방식을 도입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가 끌어들인 것이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망하는 7가지 감정의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이다.
주희는 일곱 가지 감정은 선할 때도 있고 악할 때도 있고 인간의 선한 본성이 반드시 사단으로만 표출되지는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의 자연본성은 칠정으로도 표출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통해 인간의 본성은 선하지만 표출된 정서는 악할 수도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사단도 인간의 감정이며, 칠정도 인간의 감정이라고 규정했다. 기대승의 입장도 동일하다. 오히려 주기파의 기대승이 주희의 입장에 선 것이고 이황은 주희의 이론을 한국식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주희가 인간의 감정을 사단과 칠정이라는 두 가지로 구분하고 분명한 해석을 하지 않은 채 죽자. 주리론자들과 주기론자들의 서로 다른 해석을 한 것이다.
이이로 대표되는 주기론자들은 "칠정이 사단보다 포괄적인 개념이다. 사단을 칠정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자. 칠정 가운데 선한 것들만 추려서 사단이라고 하자"고 했다.
주리론자들은 상위 그림에서 보듯, "사단과 칠정은 엄격히 구분된다. 사단은 이理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칠정은 기氣를 중심으로 설명해야 한다. 사단과 칠정은 표출되는 구조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하여 서로 떨어져있는 것으로 주장했다. 이러한 이론은 훗날 기대승의 질의에 무너지고 만다. 주희의 불상리 이론에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이理와 기氣의 해석에 대한 차이에 기인한다. 이(理)란 우주 전체의 자연적, 윤리적, 보편적 원리를 의미하며, 기氣란 우주를 구성하는 자연적·윤리적인 물질·에너지를 의미한다. 우주의 원리로서의 이는 영원토록 순선무악하다. 반면 현실로서의 기는 악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다.
주기론자들은 이理에 능동적 움직임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며, 주리론자들은 이理에 능동적인 성질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입장이 나뉜다. 주리론자들은 이황의 사상에 근거하여 주자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소극적인 이(理)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이(理)다.
이에 따라 주기론자들은 아무리 우주의 보편적 원리를 의미하는 이理라 하더라도 결코 인간의 윤리적 행위에 직접적인 개입을 할 수 없는 이는 무형무위라고 주장한다. 반대로 주리론자들은 엄밀한 보편적 이理가 직접 인간의 윤리적 행위에 능동적으로 개입한다고 주장한다. 이가 發하고 움직인다고 보고 있다. 이의 능동성을 주장한다. 더이상 주자가 말하는 무위의 이(理)가 아니다.
주자의 움직이지 않는 이(理)가 이황에게 와서 움직이는 이(理)로 탈바꿈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황의 영향을 받아 움직이는 이(理)는 종교나 신화의 영역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황의 움직이는 이(理)의 주장으로 인해 움직이는 이치와 현상의 기를 가진 개신교의 인격신의 선교가 쉽게 안동에 뿌리를 쉽게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황이 중심된 주리론자들의 이理의 능동성이 비록 주희의 개념 규정에 다소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지 몰라도 더 중요한 것은 이론 자체가 아니라 윤리의 실천이다. 주리론자들은 이를 무위의 상태로부터 움직이게끔 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이(理)로 승화시켰기 때문에 안동 사람들이 개신교를 수용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이미 안동은 철학적으로 개신교를 수용할만한 내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불상리, 불상잡은 바로 삼위일체를 수용하는데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고 이의 능동성은 개신교의 능동적인 인격적인 신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주기론자들의 입장은 이렇게 정리된다.
"인간의 감정은 외부에 대한 자극을 통해 육체와 에너지氣가 발동해 생긴다. 이런 과정에 이理는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못한다. 단지 기氣가 발동하는 과정에서 인간이 이理라는 원리를 제대로 구현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것이 사단이 되는 것이다."
반면 주리론자들의 입장은 이렇다.
"인간의 감정 가운데 사단은 우주의 원리가 먼저 명령하고, 인간의 육체와 에너지氣가 그것을 제대로 잘 따를 때 생기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 가운데 칠정은 인간의 육체와 에너지氣가 먼저 섣불리 꿈틀댄 후 뒤늦게 이理가 기氣에 올라타서 그것을 제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사단칠정논쟁은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 1509~1561)이 지은 「천명도(天命圖)」의, “사단은 이로부터 발하고 칠정은 기로부터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政發於氣).”라는 한 구절로부터 시작된다.
정지운은 이 책을 저술한 뒤 근처에 살고 있던 이황에게 검토를 부탁했다. 이황은 이 구절을 발견하고서 이와 기의 역할이 수동적으로 서술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四端理之發 七政氣之發).”라고 고쳐주었다.
이렇게 고쳐진 구절의 의미에 대해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일명 사칠변론이 시작되었다. 기대승의 입장은 이가 무형무위인데 어떻게 발하여 움직이냐는 것이다.
즉 리는 무형무위하여 움직이지도 않는데 발하여 움직인다고 해석하면 모순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이황은 기대승의 질의에 혀가 찔렸다.
두번째, 주희는 리와 기는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이황은 사단(인의예지)과 칠정(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을 어떤 이유에서 따로 분리하는가 이다. 사단과 칠정은 모두 감정인데 어떻게 분리할 수 있느냐 였다. 기대승은 사단과 칠정은 분리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기대승의 질의를 요악하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질의에 대해 이황은 당황했고, 결국 "사단(인의예지)은 리가 발하여 기가 따른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하여 리가 올라탄 것"이라고 궁색한 답변을 하였다.
이황은 주자의 수동적 이(理)를 움직이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이(理)로 바꾸었다. 이황은 사단과 칠정은 둘러 나누었지만 기대승은 사단은 칠정안에 포함된다고 했다. 이율곡은 기대승의 입장을 따라 이기일원론을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황은 이를 중시했고 기대승은 기를 중시했다. 이를 강조하면 주리론이고 기를 강조하면 주기론이 되었다. 경남에 영향을 준 남명 조식도 기대승의 입장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같은 영남일지라도 영남좌도인 경북은 주리론을 중시하고, 영남우도인 경남은 주기론을 중시하였다.
주기론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경험론을 중시하기 때문에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다. 손양원, 주기철, 한상동목사, 고신파는 모두 경남사람들이었다. 주리파를 중시하는 경북사람들은 이상근같은 성서학자와 이원영, 김광현, 김기수, 김진홍, 김삼환, 이성헌목사와 같은 좋은 목회자들이 많이 나왔다. 주기론을 중시하는 영남사람들은 절개를 중시하였다.
이황은 이와 기가 다르다고 판단, 두개의 실체를 인정하여 이기이원론이라고 하였고 기대승이나 이율곡은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다. 한국의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이와 기에 대한 해석을 주체적으로 함으로서 주자의 성리학을 한국적 성리학으로 발전시켰다.
이를 중시한 사람들은 퇴계의 영향을 받은 영남중심의 사람들이었고 기를 중시한 사람들은 기대승과 이율곡의 영향을 받은 호남 중심의 기호학파였다. 영남은 이론을 중시하고 호남은 실천과 경험을 중시했다. 동학의 이론은 영남에서 나오고 실천은 호남에서 이루어졌다.
성리학의 고장, 영남
안동은 영남에서도 가장 성리학이 발달한 성리학의 본고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안동을 보면 한국의 정신사를 볼 수 있다. 안동은 성리학이 발달한 곳이고, 이러한 성리학은 훗날 영남뿐만아니라 한국의 기독교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기독교는 성리학적인 기독교였다. 특히 성리학적인 기독교가 되는데 영남사람들은 큰 영향력을 미쳤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상적으로 가장 영향력을 행세하였던 사람들이 모두 영남좌도출신이다. 원나라까지 가서 벼슬을 했던 고려시대의 목은 이색은 장사리전투가 있었언 영덕 출신이고, 조선시대 정신사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기초를 닦았던 정도전은 경북 봉화출신이고, 주자학을 처음 들여온 안향과 이방원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된 정몽주는 영주출신이다.
중국의 성리학을 한국식 성리학으로 완성한 이황과 21세 때 퇴계 이황에게서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받은 징비록의 유성룡도 안동출신이다.
이들은 모두 한국의 정신세계를 장악한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성리학의 대가였다. 특히 안동의 이퇴계와 유성룡은 조선이 성리학적인 나라가 되는데 절대 영향을 미쳤다.
영남인물고에서 나타났듯이 141명이 안동출신으로서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다. 이퇴계의 제자들이 200여명 이상되었다.
성리학은 조선조를 설립하는 이론적 도구가 되었고 국가의 통치철학이 되었다. 한국은 성리학이라는 이론의 토대위에서 성립되었던 것이다. 기독교도 이미 성리학으로 만연된 땅에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양반 사회의 통치이념화
성리학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기호학파와 영남학파를 통하여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조선조를 개창하였던 당시 역성혁명의 주체는 대내적으로는 왕씨 정통의 문란을 비판하고 대외적으로는 배원친명의 외교 정책을 추구하였는데 여기에서 성리학의 춘추대의적 의리관(義理觀)을 엿볼 수 있다.
성리학이 조선의 개창을 합리화하는 토대가 되면서부터 조선시대 사상의 중심부로 부상하였다. 조선 초 성리학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성혁명의 주체인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의 활동이다.
정도전의 성리학
정도전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조선조의 기틀을 확립해 나가면서 철저히 불교를 배척하였다. 일찍이 고려 초의 최승로(崔承老)나 고려 말의 이제현·이색 등도 불교를 배척하였지만, 그것은 사원의 폐해와 승려들의 비행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정도전은 <불씨잡변 佛氏雜辨>·<심기리편 心氣理篇>을 저술하여 불교신앙의 허구성·미신성 및 불교이론 자체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불교를 비판하였다.
정도전은 불교의 비인륜성·반사회성 등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배척하였다.
불교도 중에는 기(器)를 버리고 도(道)만을 추구하여 사회를 멀리하는 반윤리적 폐단에 빠지거나, 도와 기의 의미를 무시하고 아무 것에도 구애됨이 없고자 하여 자유방관의 폐단에 빠지는 부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불교에서 윤회를 주장하여 현실을 벗어나 사후 세계를 논의하는 것과 도만을 중시하는 도교까지 비판하면서 성리학이야말로 이러한 현실을 부정하는 불교와 도교의 폐단을 시정하여 사회 윤리를 강화하고 국가에 이로움을 줄 수 있는 참된 학문(實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뜻에서 그는 성리학을 가리켜 “옛사람들의 덕을 밝히고 국민을 새롭게 하는 실학이다”고 까지 하였다. 이러한 실용적인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초기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조하고 측우기, 인쇄술의 발달 등 과학문명을 창달하는 쾌거가 있었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하여 새로 태어나고 있었다.
이기이원론에서 삼위일체로
그러나 성리학은 훗날 사림파가 되면서 점점 관념적인 학문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관념학에 몰두하다보니 임진왜란을 만났고 구한말에는 나라까지 일제에게 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것이 관념철학의 한계였다. 개신교는 인격신의 개념을 갖고 주리론과 주기론을 모두 포함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이치가 기를 통하여 다시 재현되게 하였던 것이다. 동양철학은 이기이원론이었지만 개신교는 삼위일체였다. 하나가 더 많았다. 그것은 인격신이라는 개념이 포함된 것이다.
인격신을 갖고 있는 개신교는 인격신이 하늘의 이치와 땅의 기를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기호발론의 재현을 삼위칠체를 통하여 새롭게 한 종교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만일 불교가 국교였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여전히 한자문화권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하늘 天 땅 地, 검을 玄, 누루 黃을 계속 암송하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사림파의 성리학
조선조가 기틀을 완전히 잡은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 말까지는 사림파(士林派) 성리학자들의 활동이 크게 돋보인 시기이다.
특히 사화가 많았던 15세기 중엽에서 16세기 중엽 사이에는 의리(義理)와 대의(大義)를 중시하는 성리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이들의 의리관과 도학 정신은 도덕·정치·역사 등의 모든 영역에서 발휘되었다.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慈)-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계통이 사림파의 계보로 공인되었다.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절의를 내세워 조선조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정신은 김숙자를 통해 이어졌다.
사림파 학자들은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등 많은 사화(士禍)를 받으면서도 성리학의 의리 정신을 실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의리정신은 지금까지 영남사랍들의 자연법사상처럼 되어 그들은 전임자, 선배의식, 장유유서의 질서를 중시하고있다. 영남출신자들은 후임자가 전임자를 몰아낸 사례가 없을 정도이다.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판하였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死六臣)은 죽음을 당하면서도 절의를 밝혔고 김시습(金時習) 등의 많은 절사(節士)들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이러한 절의의 자세는 훗날 일제시대에 많은 순교자를 내기도 하였다. 손양원, 주기철, 한상동목사는 좋은 예이다.
조선시대 천재학적 학자이자 개혁자인 조광조는 의와 공을 살리는 길을 선비(士)에게서 찾았고 선비야말로 멸사봉공(滅私奉公)의 모범이 되는 나라의 원기(元氣)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도학 정신에 근본하여 국정 개혁에 힘쓰던 중 기묘사화를 만나 죽음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공(公)과 의리를 지켰던 도학 정신은 길재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하나의 학통관을 형성하였고 한국 성리학이 대의·의리·명분을 중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달리 영남은 의리, 절개를 중시한다. 영남에서 일제시대 때 순교자가 많이 나온 것도 사림파들의 절개와 의리의 성리학에 근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