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은 유학의 본고장이다. 안향, 정몽주, 주세붕, 정도전, 이황, 유성룡, 조식이 모두 영남출신이다.
안향은 경북 영주시 풍기출신으로서 고려시대 1260년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량이 되었고, 이어서 직한림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1270년 삼별초 난때 강화에 억류되었다가 탈출하였으며 1275년 충렬왕때, 상주판관에 부임하여 무당을 다스려 미신을 타파하기도 하였다.
1289년 원나라에 가서 주자서를 손으로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은 그려가지고 고려로 돌아왔다. 그 이후에도 안향은 수차례 원나라를 오가며 그 곳의 학풍을 견학하고, 주자학의 국내 보급을 위해 노력을 경주함으로써 안향은 고려시대 최초의 주자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안향이 일찌기 불교의 폐단을 인식하고 당시 고려의 시대 상황을 자각하고 주자학이 가진 이념이나 주자학 성립의 사회·역사적 배경을 의식하여 당시 고려의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대안점으로서 주자학을 적극 장려하고 교육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안향은 소극적 의미의 '주자학 전래자'라기 보다는 적극적인 ‘주자학 수용자’로 볼 수 있다.
안향은 1392년 별세하였고, 1418년 충숙왕은 안향의 공적을 기리기 의하여 원나라 화공에게 안향의 화상을 그리게 하였다. 현재 국보 제111호로 지정되어 있는 안향의 화상은 모사한 것을 조선 명종 때 다시 고쳐 그린 것이다
풍기군수 주세붕
풍기군수 주세붕이 1541년에는 풍기(오늘날 영주) 군수로 발령을 받게 되면서 1542년(중종 37)에 영주군 순흥면 내죽리(內竹里)에 송나라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주세붕은 안향에 대해 주계지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려의 사관은 주자학에서 말하는 도나 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기 때문에 그의 공적은 말할 수 있어도 그의 학문에 대해서는 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고려사를 읽을 때마다 [안문성공전]에 이르러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역사는 그가 섬학전을 설치하고, 사후 문묘에 배향된 사실만을 들먹이는데 식견의 비루함이 이와같다.
이후 안향의 이념을 계승한 학자들이 끊임없이 배출됨으로 고려후기나 영남의 학맥뿐만아니라, 전체 조선 500년의 학풍을 열어가는 계가가 되었던 것이다.
안향의 학풍은 우탁과 권보로 이어지고, 권보로부터 다시 이제현을 거쳐 이색으로 이어졌으며, 이색의 문하에서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길재 등 고려 말위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고, 이러한 주자학적 이념을 기반으로 정도전은 이성계와 역성혁명을 하여 조선조의 통치이념을 주자학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남의 정신사는 영주출신인 안향으로부터 시작되어, 영천출신 정몽주에게 이어지면서, 봉화출신 정도전이 조선왕조를 창건하면서 주자학적 실천을 하였고, 안동출신인 이퇴계를 통하여 주자학적 이론이 체계화되었고 체계화된 주자학은 의성출신 제자 유성룡을 통하여 임진왜란에 그대로 실천되었다. 이러한 주자학적인 이론은 유불선을 통합해서 만든 경주출신인 최제우에게 영향을 미쳐 동학이 태동하게 된다.
영남의 체계화된 주자학적인 이론이 없었다면 동학은 없었을 것이고, 기독교도 쉽게 수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자학의 이와 기의 이론은 훗날 우주와 자연의 이치와 근원인 기독교의 인격신을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유교의 옷만 갈아입으면 기독교의 진리와 공통적인 것이 너무 많아 영남의 유림들이 기독교를 수용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동학에 대해서는 유림들은 사문난적, 이단이라고 항전하였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수용적이었다.
이퇴계의 14대 손인 유림 이원영목사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특히 유교에서 상제라고 표현하는 기독교의 신을 설명하기에 너무나도 적합한 표현이었다. 주자학의 理와 氣의 개념은 이와 기의 근원인 기독교의 신을 수용하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훗날 영남이 복음화되면서 영남의 기독교는 주자학적인 기독교가 된다. 이처럼 영남은 이조 500년동안 거치면서 주자학적인 지역이 되었다.
소수서원
영주에 세워진 주자학의 이론을 가르친 소수서원만을 보도라도 잘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유학이 사립학교인 서원을 통하여 발전되어 나간 사립학교이다.
소수서원은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을 한국적 상황에 맞게 개발한 것이기도 하다. 주세붕이 만든 백운동서원이 이황에 의하여 소수서원으로 명칭을 얻게 되었다.
백운동 서원은 1549년(명종 4) 훗날 풍기군수 이황(李滉)의 요청에 따라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명종 친필의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사액은 서원이 사립이지만 국가가 지불한 돈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소수서원에서는 성리학이 가르쳐졌다.
서산서원
조선영조 47년(1771)에 목은(牧隱)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목은영당(牧隱影堂)인 서산사(西山祠)를 세웠고, 1976년 사림(士林)의 공의로 서원으로 승격하여 목은 선생을 배향하고 선생의 10대손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1595∼1660)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묘우인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이색 영정을 보관하고 있으며 이색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이홍조의 위패를 봉안했다. 강당인 명교당은 서원의 각종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는데,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옆에 협실을 배치하였다. 향사 때에 동북쪽 방은 대신(臺臣)들이 사용하고 서쪽 방은 유사들과 집례, 축관이 사용하였다. 향사 때 사용하는 제물은 장만하여 전사청에 보관하였다.
성리학의 정의
성리학은 선진(先秦)의 근원 유교나 경서 주석을 주로 한 한(漢)ㆍ당(唐)의 훈고학(경학)과는 성격을 달리 한다.
성리학은 말 그대로 '성'(性)이나 '이'(理)를 논하는, 일종의 철학적 이론의 학문이다.
성리학은 주역이나 사서와 같은 경서의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이기론'(理氣論 ) '심성론'(心性論) '수양론'(修養論) 등이 전개되었다. 유학은 철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이 주자학이고 성리학이다.
성리학은 자연·인간·사회의 존재와 운동을 이와 기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만물이 생성·소멸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이다.
한편 이는 만물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의 기의 운동법칙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와 기는 성리학에서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명제로 ‘이와 기는 서로 떠날수 없으나, 서로 섞이지도 않는다(理氣不相離 理氣不相雜).
조선의 이기론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말 주자학의 영향으로 이기론이 등장한 이후 조선시대에 서경덕(徐敬德)의 태허설, 이언적(李彦迪)의 태극설을 거쳐 이황(李滉)·이이(李珥) 등에 의해 보편적 사회사상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이를 더욱 중요시한 이황은 이와 기의 차별성, 즉 이기불상잡(理氣不相雜)을 강조하는 주리론(主理論)을 편 데 반해, 이이는 이를 객관적 실재라기보다는 기의 법칙성으로 이해하여 이와 기의 통일성, 즉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를 강조하는 주기론(主氣論)을 전개하여, 이후 성리학의 커다란 두 흐름으로 계승·발전되었다.
이황(퇴계)는 理를 강조해서 주리론이라는 학설을 발전시켰고, 이이(율곡)는 기를 강조해서 주기론으로 발전시켰다. 주기론은 주로 경험과 실용을 중시하는 학설로 기호지방에서 발전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훗날 동학이라는 혁명을 낳기도 했다. 동학은 영남에서 이론이 확립되었고 호남에서 실천이 되었다. 영남은 이퇴계의 영향으로 이를 중심하여 주로 이론을 중시한 반면, 호남은 이율곡의 영향으로 경험과 실천을 중시하게 되었다. 호남의 기독교는 복음화울이 30%까지 될정도로 상당히 실천적이다.
이외에 영주에는 선비촌이 있다. 선비촌에서도 주로 선비들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도산서원
영주에는 주세붕이 세운 소수서원이 있었지만 안동에는 이황이 세운 도선사원이 있었다.
도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서원이다. 이 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에 퇴계 이황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문인과 유림이 중심이 되어 창건하였으며, 이듬해에 선조에게서 편액(扁額)을 받아 사액 서원이 되었다.
이 서원은 훗날 조선 후기에 영남 유림의 정신적 중추 구실을 하였다. 2019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적 제170호이다.
현재의 도산서원은 퇴계가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퇴계 사후에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크게 나뉜다.
서원 전체 영역의 앞쪽에 자리잡은 건물들은 도산서당 영역에 속하고, 그 뒤편에 들어선 건물들은 도산서원 영역에 속한다.
병산서원
안동 병산서원(安東 屛山書院)은 서애 류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1978년 3월 31일 사적 제260호에 지정되고, 2010년 7월 31일과 2019년 7월 10일 각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영남은 호남과 달리 주자학이 뿌리를 내리면서 서원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영남은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면서 유학의 본고장이 된다. 서원문화는 훗날 조선인들의 정신세계를 장악하게 된다.
옥동서원
상주에 가면 옥동서원이 있다.
옥동서원은 1518년(중종 13) 황맹헌(黃孟獻), 황희(黃喜), 황효헌(黃孝獻)의 학문과 덕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였다.
1580년(선조 13) 백화서원으로 이름짓고 영당(影堂)을 지어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다가 1714년(숙종 40) 추가로 전식(全湜)을 배향하고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었다.
1783년(정조 7) 황뉴(黃紐)가 배향되었으며 1789년 ‘옥동’이라는 사액을 받아 옥동서원으로 개칭되었다.
이러한 서원은 성균관, 행교와 함께 조선의 대표적인 사립 교육기관으로 교육과 교회가능을 갖고 있었다. 교육의 기능에 대해서는 소학에서부터 사서삼경을 가르쳤고, 성리학에 관한 내용도 가르쳤다.
교화가능은 주로 선현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서원은 사학이라는 특성때문에 문중과 관련한 인물들 가운데 뛰어난 인물을 배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과 가을에 두 차례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서원은 1542년 주세붕이 안향을 추모하기 위해 백운동세원을 세웠지만 훗날 풍기군수로 발령받은 이황이 국가의 지원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명칭까지 바꾸었다.
명종이 친필로 소수서원이라 사액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그 이후 전국적으로 서원운동이 일어나 명종 대에는 17개에 불과허던 것이 선조대에는 100개가 넘었으며 18세기 중엽에는 전국에 700여개 이상 건립되었다. 안동 한 곳에만 서원이 40여개가 있었다.
그러나 서원은 당대의 사립대학이었기 때문에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었다. 숙종은 서원의 폐단에 대해 손을 대기 시작했고, 영조는 본격적으로서원을 정리하였다.
고종대에는 흥선대원군의 섭정으로 인해 사원정리의 속도가 빨라 졌다. 고종대에는 서원의 원장을 고을 수령이 맡게 하고, 병역 기피자들을 모조리 군역에 넣는가하면 면세혜택을 없앴고, 서원의 특혜를 모두 없앴고, 관의 통제하에 두었다.
서원은 목조건물로서 한국전쟁 때 상당수가 파괴되어 북한에는 11개의 사원이 남아있고, 남한에 36곳이 남아있다.
훗날 서원의 유교문화는 기독교의 문화로 그대로 이어져 공부하는 많은 유생출신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서 영남에는 유교적 기독교가 발생하게 된다.
유교에서 공부하고 연구하는 습관이 그대로 기독교문화에 유입되어 유교적 기독교로 탈바꿈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