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영남편), 한 많은 낙동강

눈물의 땅, 영남

편집인 | 입력 : 2021/04/13 [20:47] | 조회수: 162

 

영남지방이라 함은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와 경상남도, 경상북도를 아우르는 별칭이다. 영남이라는 말은 백두대간에서 이어지는 소백산맥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방으로  특히 경상북도 문경시에 있는 조령의 남쪽에 해당하는 지방이라는 데에서 지명이 유래하였다.

 

즉 ‘조령(, 새재)의 남쪽 땅’을 의미한다. 조령은 높이는 642m 로서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조령은 문경새재라고도 한다. 새재는 새나 넘나들 수 있는 험한 고갯길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

 
1966년에는 문경 조령 관문이 사적 제147호로 지정되었고, 1981년에는 이 일대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각각 지정되었다. 영남에서 과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조령관문을 통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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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 지방에서 거둔 세곡이나 진상품도 문경새재를 거쳐 한양으로 올라갔다. 영남에서 한양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에 과거를 보려는 선비들도,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도 이곳 문경새재를 따라 한양에 오갔다.

 

문경(聞慶)이라는 이름은 과거에 급제한 이들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는다는 뜻에서 생겨났다. 문경새재 옛길은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제2관문 조곡관을 거쳐 제3관문 조령관까지 6.5km 정도 이어진다. 문경새재는 충청도 남단과 경상북도 북단에 위치해 있다.

 

경상북도는 기원전부터 삼한 중 진한이 있었던 곳이고, 삼국을 통일한 천년 왕조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신라의 본토이기도 했다. 호남지역은 마한이었고 영남은 진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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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의 4국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신라가 낙동강 우안 지방과 연해를 차지한 가야(伽倻)의 고을을 멸하고 진한, 변한 두 곳을 병합하였으며 그 후 차차 융성하여 3국을 통일함에 이르러 현 경상북도 지방에 상, 양, 강의 3주를 두게 되었으며  경북지방은 상주, 양주(지금의 양산)의 통치하에 속하였다. 그러므로 영남사람들은 진한과 신라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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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라는 명칭은 고려 충숙왕 원년인 1314년에 처음으로 경상도로 불리어지고, 조선조 고종 33년인 1896년 13도로 재편되면서 경상북도라 불리어졌으며, 1914년 부ㆍ군ㆍ면의 조정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의 행정구역이 형성되었다.

 

1895년 전국적으로 23부제가 실시되면서 지금의 경상북도에는 대구부(23개군), 안동부(16개군)를 두었으나 이듬해인 1896년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종래의 경상도 지역을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분리하였다.

 

1963년 강원도의 울진군이 경상북도로 귀속되었으며, 1981년에는 대구광역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2011년 현재 10개시·13개군·2구를 관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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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처럼 경상북도는 우리나라 동남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동해, 서쪽으로는 충청북도와 전라북도, 북쪽으로는 강원도와 접한다. 남쪽으로는 경상남도와 접한다. 경상도는 도단위로 남한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지역으로 태백산맥·소백산맥과 그 지맥과 동해에 의해 주변지역과 뚜렷이 경계되고, 동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낙동강 유역권에 속한다.

 

낙동강은 강원도 태백시에서 발원하여 경상북도의 중심부를 이루면서 안동호를 이루고 서쪽으로 흘러 하회마을을 지나 내성천과 합류한 후 남쪽으로 흘러 상주시와 구미시·선산읍·칠곡군을 지나 대구광역시와 성주군·고령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경상남도에 유입한다.

 

이처럼 낙동강은 경상도중심을 관통하여 흐르는 거대한 강이다. 거대한 강이 있기에 경상도도 낙동강을 잘 활용하여 경제적으로 성장한 지역이 된다. 그러나 낙동강은 삼국시대부터 현대까지 전쟁으로 인해 피로 물든 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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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은 전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강이었다. 1950년 8월 왜관의 철교다리가 한강철교처럼 폭파되기도 했다.

 

1950년 8월 폭파된 왜관 철교다리

 

그 이후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왜관철교는 2011년 물폭탄으로 인해 다시 무너졌다. 일명 '호국의 다리'는 1905년 경부선 개통때 건설된 100년이 넘는 억사를 가진 다리이다. 1950년 8월 한국 전쟁 때 미군이 북한 인민군 남하를 막으려고 폭격해 다리 일부가 폭파되었다가 1993년 복구하면서 낙동강 수호상징으로 여겨 '호국의 다리'로 명명되었지만 이번에는 물폭탄으로 무너졌다. 이처럼 낙동강은 아픔이 있는 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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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투

 

낙동강 최대의 전투인 다부동 전투는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대구의 운명은 촌각에 달렸다. 김일성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을 뚫기 위해 4개 사단을 대구 축선에 집중, 국군 1사단을 공격했다. 안동, 구미까지도 이미 점령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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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일부는 이미 점령당했고, 대구와 부산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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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부동의 1사단장 백선엽장군이 구사일생으로 북한군을 막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1사단은 다부동을 사수했다. 다부동은 대구에서 불과 20㎞ 떨어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 지역으로 유학산(839m)과 팔공산(1193m) 사이의 큰 골짜기다. 다부동이 뚫리면 부산까지 삽시간에 점령을 당할 판이었다.  
  

다부동 전투는 1950년 8월 1일∼9월 24일 사이 55일 동안 벌어진 낙동강 최대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북한군은 5,690여 명이, 국군과 미군은 3,500여 명이 전사했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부상자까지 더하면  남북이 2만75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다부동전투에서 승리하지 못하였다면 남한은 이미 적화통일 되었을 것이다. 
  
다부동 전투는 한반도의 마지막 남은 영남을 사수한 전투로서 인천상륙작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전투는 참혹하고 치열했다. 다부동전투의 주역은 백선엽장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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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백 사단장은 부하들에게 “내가 등을 돌리면 나를 쏴라”고 말한 뒤 백 장군은 굶고 지친 장병들에게 “여기서 물러서면 바다뿐이다. 후퇴하면 나라가 망한다. 내가 앞장서겠으니 나를 따르라”고 한 말은 지금까지 회자되는 명언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다급한 상황에서 백선엽 장군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하나님, 이번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번의 위기에서 우리를 구해주신다면 앞으로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따르겠습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백선엽 장군은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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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다부동 패전으로 낙동강 전선 돌파에 실패했다. 반면 유엔군은 낙동강 전선을 고수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었다. 남한이 다시 부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 전투였다.


유엔군이 상륙하고 전쟁에 사용될 물자가 들어왔던 부산항을 지키기 위해서도 부산을 방어할 교두부의 위치로서 다부동은 적절했고 그 다부동을 지키기에는 유학산이 중요했다. 유학산 전투는 1950년 8월 13일부터 8월 23일까지 칠곡군 가산면 다부리와 학산리 일대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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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치열해지자 민간인들은 낙동강을 건너서 피신을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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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이미 모든 지역이 적화되었지만 영남은 유일하게 남은 마지막 보루였다. 다부동전투에서 패배하였다면 인천상륙작전은 불가능했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도 소멸되었을 것이다. 주사파들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

 

처녀뱃사공

 

임진왜란 때 호남이 조선을 살렸다면 6.25전쟁 때는 영남이 대한민국을 살렸다.  그러나 전쟁의 후유증은 상당했다. 잃어버리고 죽은 사람들 천지였다. 낙동강 처녀뱃사공은 군에 간 오빠를 기다리는 애절한 노래였다.   

 

황정자가 부른 처녀 뱃사공은 낙동강에서 노를 짓는 한 여인의 가련함을 1953년 9월 유랑극단 단장인 윤복희씨의 아버지 윤부길씨가 작사하고 한복남이 작곡한 곡이다. 이 노래는 6.25 전쟁 이후 어려운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1953년 9월 유랑극단 단장인 고 윤부길(가수 윤항기, 윤복희의 부친)씨가 유랑극단과 함께 함안군 가야장터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 장터로 가기 위해 남강을 건너다 악양 나루에 머무르게 되었다.

 

함안 악양나루

 

악양나루에는 처녀 뱃사공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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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나루터에는 군에 간 뒤 소식이 끊긴 박기준(6·25때 전사)씨를 대신해 여동생 등 두 처녀가 교대로 노를 저어 길손을 건네주며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애절한 사연을 들은 윤부길씨가 노랫말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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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윤부길씨 일행이 강을 건널 때 '왜 어린 처녀가 뱃사공을 하느냐' 묻길래 부끄러워서 '오빠는 군에 갔고, 군에서 제대하면 어머니가 시집 보내줄 거라고 했어요'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그는 "노래 가사 중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어머님 그 말씀에 수줍어질 때'는 이 대화에서 나온 것이다.

 

목포에는 이난영이 일제의 탄압속에 목포의 눈물을 불렀지만 경상도에는 황정자가 6.25전쟁의 이후의 애절한 상황을 노래로 그려냈다. 경상도인들에게 낙동강은 전쟁으로 인해 슬픔과 한이 많은 강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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