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영남편)

영남의 유대인 출현가능성 여부

편집인 | 입력 : 2021/03/24 [23:16] | 조회수: 726

나의 신앙유산답사기는 영남에 온 유대인의 흔적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중국왕래와 일본왕래에 대해서 먼저 관심을 갖는다.

 

서구 학자들은 북이스라엘왕국이 앗시리아에 멸망당하면서 그 중의 단지파가 한국에 들어왔다고 믿고 있다. Mclead 는 일본과 한국이 잃어버린 하나의 지파후손이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http://lawtimes.net/2766

이스라엘의 10지파중 한 지파가 한국에 왔다

 

가야토기의 도부호가 페니키아문자로 쓰여있는 것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유대인의 왕래를 추정하게 한다. 한민족이 단지파의 후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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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시대의 유물을 통하여 페니키아(히브리어)문자의 전래가능성도 유대인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너무 앞서나간 추정일까? 

 

 게셀의 달력에 있는 문자들과 유사한 모습을 띤다.

 

게셀의 달력  B.C 10세기의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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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바위의 히브리 문자표현도 유대인의 왕래라고 표현한다면 무리한 표현일까?

 

  도마바위

  

 

그렇다면 영남에 유대인이 왕래했을 가능성은 없는가?

 

유대인이 한국에 왔을 확률이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최근에는 염동옥씨가 그의 저서에서 가야시대의 토기문자를 갖고서 유대인의 한국왕래설을 주장했다. 그는 언어와 문자를 통해서 접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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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임미영 히브리대 고고학 박사는 의아해 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은 이후 히브리문자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물만을 갖고서 보았을 때, 유대인들의 한국왕래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학교수인 윤사무엘박사는 개연성은 충분히 열어놓아야 한다며 유대인의 한국왕래  가능성을 두둔하고 있다.

 

A. 유대인들의 중국왕래

 

유대인들은 이미 주전 10세기 솔로몬왕때부터 중국과 무역을 하였다. 그리고 바벨론에 주전 586년에 멸망당한 후, 주전 2세기 중국의 주 왕조시대에 중국까지 왕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최근에도 2016.9.24. 뉴욕타임즈에서 중국유대인을 조명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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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수도였던 개봉(카이펑)에는 명청시대 건립한 3개의 석비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존숭도경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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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하나는 명나라 홍치2년(1489년)에 건립한 중건청진사기이다.

 

 

“Record of the synagogue reconstruction”. A large original rubbing from Jewish stele in Kaifeng of China in 1489, Judaica documents the history of Judaism and Jewish people in China.

 

내용은 유태교의 원류, 교의, 교구등을 기록하고, 개봉유태교사의 연혁을 기록했다. 청나라 강희 2년(1663년)에 건립한 비석도 이름은 동일하다. 

 

강희문비문에 따르면 "교는 천축에서 기원했고, 주나라때 중주에 전해졌다"고 했다.

 

비석에는 유태인이라는 칭호가 나오지 않았고 단지 일사낙업(이스라엘)인이라고 했다. 유태인이라는 말은 주전 6세기 이후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을 보았을 때, 유대인들은 그 이전에 중국에 왔을 가능성이 있다.이는 6세기 이전에 이스라엘을 떠났을 가능성이 있다.

 

개봉(카이펑)유대인들은 모세오경을 성서로만 인정한다.

 

  중국의 유대인들

 

모세오경은 기원전 9세기에서 4세기에 완성된다. 그들이 중국에 들어왔을 때는 구약이 완성되기 이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다가 개봉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종교를 천축교라고 불렀다. 그들의 조상이 인도에서 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에 인도에서 성서가 발견되었는데 인도서북부에는 이미 유태인의 성서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모세오경만 있었기 때문에 개봉유태인들은 '교경교'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다. 교경교는 바로 모세오경의 교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다가 개봉유대인들은 유태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면 기원전 3세기 이전의 주나라에 유대인들이 건너왔을 확률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유대인들이 주나라 보다는 중국의 한나라(기원 34년)때 왔다고 보고 있다. 한나라는 기원전 205년부터 기원 220년까지 계속된 나라이다. 

 

유태인들은 상인이므로 실크로드를 통하여 광무제 건무10년(원34년)에 바빌론에서 유태인 대 학살이 있었을 때 중국으로 도망쳤다고 본다. 

 

1900년 뉴욕에서 발행된 "중국 유태인"의 저자 Jhon Etrer에 의하면 기원 3-4년 후 곧 바로 다른 유대인 이민이 중국에 들어왔다고 말한다.

 

당시 이주민들의 증언이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과 바벨론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되었다는 증거와 일치하고 있음을 들고 있다.

 

또한 역사학자인  Parl Grace에 의하면 기원 231년경 바벨론의 혹심한 유대인 박해를 피해 다수의 유대인이 중국에 들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1926년 프랑스인 Prevost는 낙양에서 히브리어 비석조각을 발견한다. 이는 낙양에 유태인들이 살았다는 흔적이기도 하다. 

 

 

개봉( 카이펑)시에 있는 유대인들

한자와 히브리어를 사용한 유대인들


아랍작가 압자이드가 쓴 [동유기]에 따르면, 당희종 건부 5년(878년) 황소의 난에 회교도, 유태인, 조로아스터교도, 경교를 믿는 신자들이 12만명 살해되었다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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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나라때 유태인들이 중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말해준다. 프랑스 고고학자 Paul Pelliot(1878-1945)가 당나라때 돈황석굴에서 히브리어 기도문을 발견하기도 했다. 

 

  돈황 막고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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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황석굴에서는 신라의 혜초가 쓴 왕오천국전이 발견되기도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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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초는 신라에서 인도까지 2만키로를 행군한 승이다. 그는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 맞먹는 왕오천축국전을 쓰기도 하였다. 그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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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치비의 비문에 따르면 유태인들은 인도에서 송나라때 많은 사람들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송나라의 수도는 개봉(카이펑)이었고, 인구는 약 100만명이었다.

 

당시 유태인들은 서양무기인 포를 바치고, 통상을 희망했다. 그러자 송나라 황제는 환영하여 유태인들이 정착하게 해주었고 유대교 회당까지 지을 수있도록 해주었다.

 

 

 

개봉에는 페르시아지역의 유태인들과 인도의 유태인들이 이주해 머물게 되었다. 개봉의 유대인 정착은 1127년 이전부터 이루어졌고, 인도와 페르시아로부터 왔고 약 1,000여명 정도였고, 1163년에는 회당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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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학자들은 개봉(카이펑) 유대인들이 잃어버린 10부족의 후손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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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펑박물관에는 유대인들의 유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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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중국 송나라 시대 개봉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아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황소의 난 때 많은 핍박으로 많은 사람들이 몽골제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황소의 난(黃巢-亂)은 당나라 희종 연간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으로 875년~884년사이에 일어났다.

 

당나라 말기에 시작된 환관의 횡포와 인민의 수탈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토호나 상인층이 반당나라 경향으로 돌아선 것과 기근도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초의 유대인 유입설

 

이상,  유대인들이 중국에 들어간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최근의 비교적 충분한 자료를 가지고 있는 중국 측 문헌에 의하면 중국에 유대인이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기원전 995년경으로 보고 있다.

 

솔로몬 왕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지난 때로서 다윗 왕을 거쳐 이스라엘의 영광이 최고에 달했던 때 중국과 무역을 하였던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시님은 중국의 도시를 말한다.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이사야 49:12)

 

시님은 오늘 날 중국 남부의 '광동성'(廣東省), '복건성'(福建省) 지역을 가리키는 말로서 고대 중국 대외무역 기지였다.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까지 감

 

주나라 시대 유입설


두 번째 중국에 많이 들어간 시대는 기원전 580년경으로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을 때이다. 당시는 주나라 후기이다.  

 

유대민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던 시기(BC586년에 포로에서 석방)이므로 일단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의 박해를 피하여 비단과 황금의 나라를 찾아 중국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한나라 시대 유입설

 

세 번째가 기원 58년에서 75년경 소수의 유대인이 중국에 들어왔고 기원 103년에서 117년 사이 한나라때 (후한의 화제, 안제) 중국 대륙의 혼란을 틈타 상당히 많은 유대인들이 중국 땅 깊숙이 들어온 것으로 보고 있다.

 

송나라 시대 유입설

 

네 번째 유입 시기는 기원 1000년경부터 1200년경 송나라 시대 때 인도와 동남아를 거친 유대인들이 중국에 들어왔다. 송나라는 중국문화의 꽃이라고 할 만큼 문화가 발달했고 유럽과도 많은 무역을 하였다.

 

원나라 시대 유입설

           

다섯 번째, 기원 123O년경 많은 유대인들이 육로를 통해 중국 북경까지 진출했다. 이때는 몽고가 동서양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한 시기로 역사상 동서양이 처음 만나는 시기였다.

 

몽고의 원이 송을 무너뜨리고 중국을 지배할 때였다.  유명한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들어 온 것도 이 때이다. 이 시기는 중국에서도 이스라엘에 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B. 몽골의 유대인들

 

1329년 몽고 왕은 국교에 따라 외국인에게 세금을 무겁게 할 것을 명하였다. 장부에는 세금을 많이 내어야 할 사람의 명단과 세금을 잘 내지 않아서 처벌을 해야 할 사람의 명단이 나오는데 그 대부분이 유대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은 세금을 안 내려 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또한 1340년에는 남편이 죽었을 때 그의 처가 자식이 없는 때는 죽은 자의 형제가 취하는 의무를 가진다는 유대율법에 의한 관습을 금지하는 법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 대한 무수한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그 만큼 많은 유대인이 몽골에 많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심지어 원나라 태종(쿠빌라이 칸) 왕비는 평생 소원이 그리스도가 태어난 예루살렘에 한번 가보는 것이 꿈이었다고 마르코폴로에게 말했다고 동방견문록은 적고 있다.


몽고제국인 원나라는 지방관리에도 많은 유대인을 등용하였고 유대인의 뛰어난 장사 능력과 행정, 수리, 재정능력으로 오랫동안 제국의 제정관리 등의 총리직을 유대인에게 맡기기까지 했다.

 

그리고 몽고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학문적 바탕이 없는 유목민인 몽고가 오늘날의 프랑스, 독일, 스페인, 터키 등 서구 깊숙이 침략하여 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의 도움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였다고 본다.

 

유대인들은 중국의 박해를 피하여 몽골제국까지 들어갔다.대륙 깊숙이 도망친 유대인들은 징키스칸을 도와 몽고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정치적 성공을 거두었다. 몽고왕조의 부흥은 중국에 있어서 다른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몽고 대제국의 유대인세력은 대단했다. 마르코 폴로 자신도 당시의 유대인이 커다란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분명히 유대인들은 몽고를 도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몽고사에 보면 몽고조정의 주요관리 명단에 중국이나 몽고사람이 아닌 수많은 외국인(한문표기)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고려침공 때 한국에 들어왔을 가능성 커

 

몽골에 들어가서 세력을 가졌던 유대인들이 고려침공 때에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확률이 높다. 이와같이 몽골과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정착을 한 유대인들은 한국까지 흘러들어왔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일찍부터 중국으로 진출한 유대인들이 신라와 가야까지 흘러들어가 언어와 유적에 영향을 주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신라와 가야시대에 이미 근동의 유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경주 괘릉을 보면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경주에 온 서역인들

 


C. 일본의 유대인들

 

일본 메이지 시대, 무역상인으로 방일한 스코틀랜드출신 노먼 맥레오드는(Norman McLeod)는 일본과 고대 유대가 유사하다고 생각하여, 조사를 진행하여 처음으로 일본와 유대인이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일유동조론으로 부를 만한 주장을 구체화했다.

 

그는 유대인의 조상을 추적하기 위하여 일본과 한국에서 수십년 동안 머물기도 하였다. 일유동조론의 역사는 그의 일본에 관한 저작인 《일본 고대사의 요약 ( Epitome of the ancient history of Japan , 부제: Japan and the Lost Tribes of Israel)》라는 책에서 시작되었다.

 

1901년에는 《유대대백과사전》의 뉴욕 출간판에 있는 사라진 10지파에 대한 항목에 인용되었다고 한다.

 

 

유대 대백과사전 Jewish Encyclopedia

 

유대대백과 사전은 McLead의 글을 싣고 있다. 유대인이 일본에 들어와 잃어버린 지파로서 일본과 유대인은 공동조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유대대백과사전에 유대인의 일본에 대한 행렬 내용이 실림

 

한국은 단지파의 후손?

 

그는 또한 한유동조론(韓猶同祖論)도 주장한 바 있는데, 10지파의 주요 부족이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단 지파 등 일부 지파는 한반도에 남아 한민족의 조상이 되었다고 한다.

 

일부는 이 단 지파를 단군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한민족이 단지판의 후손이라는 것은 얼토당토한 이야기는 아니다.

 

D. 한국의 유대인의 왕래 가능성

 

북이스라엘이 앗시라에 의해 기원전 720년에 망함으로 10부족이 사라졌다. 여기저기로 흩어졌을 것이고 일부는 중국, 카이펑에 거주하기도 하고, 일부는 사할린이나 한국으로부터 건너가 일본에 거주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 일부가 들어와 가야의 토기문화나 신라의 왕호나 국호에 영향을 주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몽고가 고려를 공격할 때도 유대인들의 장수가 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몽고로 들어간 유대인들이 고려에 침공을 하여 고려 여인들과 피를 섞었을 수도 있다.  특히 세종이 한글을 만들었을 때에 처음으로 페니키아언어에서 시작한 모음과 자음으로 형성된 한글 알파벳이 페니키아와 산스크리트어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이미 알파벳은 페니키아 언어에서 발달되었다.

 

"페니키아문자 이후 형태만 바꾼 다른 알파벳과 달리 독창적 형태의 과학적 문자인 한글의 우수성을 아는 것은 한국인의 기본이다. 동시에 페니키아 문자 이후 알파벳이라는 개념이 지구촌 전역에 전파되면서 조선사회까지 들어왔다는 배경을 아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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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결론

 

결론적으로 북이스라엘왕국의 10지파가 전세계로 흐터진 것은 사실이며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나 신앙적, 민족적 색채를 그대로 갖고 있다.

 

유태인들이 중국, 일본까지 왕래한 것은 역사학적으로, 고고학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어디를 가나 제사를 드렸고 회당을 지었다.  

 

중국처럼 유대인들이 한반도에 왕래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어도 우리나라의 토기나 문자, 언어, 알파벳은 페니키아(히브리어)언어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을 보았을 때, 유대인이 한반도까지 왕래하였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중국과 일본까지 왕래한 유대인들이 한반도까지 왕래하였을 가능성은 추정할 수 있다. 그러기때문에 한민족이 야곱지파의 한 부분이기 때문에 야훼하나님의 복음을 그 어떤 민족보다 일찍 받아들였다고 판단할 수는 없을까?

 

그리고 한민족도 유대인 이상으로 전세계로 디아스포라처럼 흐터져 있다. 이것은 유대인의 속성은 아닐까? 

 

특히 유일신에 대한 종교적 신앙과 모계중심의 교육열, 상술, 근면성 등은 유대인과 유사한 면이다. 특히 수난속에서도 살아남은 저력은 전세게에서 유대인과 한민족밖에 없다. 

 

우리민족도 오래전부터 하눌님, 환인을 추구했고, 민간신앙에서 신을 경배하는 사상이 있었고, 유교를 통한 제사제도도 익숙했고, 서학이 들어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인격신에 관심을 기울였고,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유일신 사상과 기독교복음을 전하자 복음에 대한 수용력이 컸다. 

 

한민족들은 선교사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교회(소래교회)를 세웠고, 이미 번역된 성경을 갖고 있었고(이수정), 한민족이 전세계에 머무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회당을 세운 것처럼 교회를 세운다. 

 

이는 유대인의 속성이다. 유대인은 유일신이지만 성부하나님만을 선택했고 한민족은 유일신이지만 예수그리스도를 수용했다. 한민족은 개신교적 유대인의 속성이 있는 것이다. 

 

예수를 수용한 개신교적 유대인인 한민족은 유대인들처럼 점점 세계에 으뜸민족으로서 등단하고 있다.

 

특히 유달리 신앙적 천재를 많이 육성한 영남은 여전히 개신교적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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