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영남3)

성리학위에 세워진 기독교

편집인 | 입력 : 2021/03/09 [14:12] | 조회수: 269

정조는 "나라의 의리가 영남에 있다"며 영남의 의리론을 강조하였다. 경상도 사람들이 가장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의리이다. 이들은 조폭들보다 더 의리를 중시한다. 

 

대표적인 의리문화 : 영남만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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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만인소는 영남의 대표적인 의리문화를 말하고 있다. 만인소()는 1만명 내외의 유생들이 연명해 올린 대규모 집단상소를 가리킨다. 1792년 윤 4월 27일 정조 16년, 영남유림 10,057명은 사도세자모함의 사실관계를 따져 의를 밝혀달라는 만인소를 죽음을 무릅쓰고 조정에 올리게 된다.

 

이는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도 입을 열지 못했던 사도세자의 죽음을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1855년(철종 6)과 1868년(고종 5), 1875년(고종 12), 1884년(고종 21)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만인소가 행해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1881년(고종 18)에 개화정책에 반대해 이루어진 것을 '영남만인소'라고 부른다. 영남의 만인소는 대표적인 영남의 의리문화라고 볼 수 있다.

 

만인소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오호라, 臣들이 한가지 의리를 가슴속에 간직한 채 살아온지 이미 30여년이 지났습니다.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가슴만 치면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역적들을 반드시 다스리는 일은 하늘이 허락하고 신명이 굽어본 바이니 이들을 극형으로 벌해야만 의리가 밝혀질 것입니다. 臣들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청리길을 와서 호소하는 것은 사도세자의 무고함이 지금까지 해명되지 않음이 통탄스럽게 때문입니다"

  

이러한 義理 문화는 기독교가 들어와도 여전히 계속된다. 그래서 영남의 교회분쟁에는 목회자대 장로의 싸움은 있을지언정 전임자와 후임자의 싸움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영남 출신자들은 후임목사가 전임목사를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이는 의리론이 지금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의리의 사례

 

포항중앙교회사례를 보면 신도들이 전임자를 비판해도 후임자목사는 끝까지 전임자를 비판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포용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서임중목사와 손병렬목사

 

안동교회의 후임자 목사들은 영원한 부목사의 자세로서 전임자를 섬기는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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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은 영남의 의리문화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므로 영남의 기독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리문화를 저변으로 깔고 있는 영남의 성리학 사상부터 이해해야 한다. 영남의 기독교는 유교적인 기독교이다. 그러므로 유학에 대한 이해없이 영남의 의리문화와 기독교를 이해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리학은 잊혀진 학문이고, 더이상 현실적 가치를 갖지 않는 역사적 유물로 이해되고 있지만 이 땅에서 살아가며 활동했던 우리 조상들에게는 글자를 알던 모르던 정신적 기반이었다. 

 

영남은 여전히 지연적 의리문화의 영향권에 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의리를 지킨 자들에게 포상을 하다는 뜻에서 정려문을 세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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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신적 기반은 기독교가 들어온지 100년이 지나도 계속되고 있다. 성리학은 600년의 정신사를 지배했던 학문이자 정신세계였기 때문이다.  

 

이씨 조선이 성리학으로 시작되기 전에 이미 통일신라 말기부터 유학이 들어와 민족의 정신사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성리학은 유학을 철학화 한 이념으로서 성리학과 관련한 지식없이 우리민족의 삶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남의 신앙유산을 답사하기 전에 영남의 성리학적 학맥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 말로 영남을 통일신라부터 조신시대말까지 지배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는 기껏해야 130년 정도 되었지만 유학은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왔지만 주자학은 고려말에 들어와 구한말까지 약 600년 이상 한민족을 지배한 정신사상 이다.  

 

안향

 

영남지역은 고려말 성리학이 도입되던 시기부터 그 중심축으로 작용하여왔다. 성리학을 도입하는데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인물이 안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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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이 주자학을 수용한 시기는 주희(1130-1200)가 사망한 지 약 90년 이후이며 남송이 멸망한 지 10년이 지난 후였다. 안향이 주자학을 수용할 당시 고려의 정세는 약 90년간의 무신정권에 의한 정치, 경제, 문화적 혼란이 극심하였으며, 고려의 정신적 이념이었던 불교 역시 종교적 권위와 문화적 구심점 역할을 이미 상실한 시기었다.  

 

대외적으로는 약 39년 동안 7차례에 걸친 몽고와의 전쟁에 의해 전국토는 황폐화 되었고, 끝내는 몽고에 복속되어야 하는 위기에 처해있었다. 정부는 무신란의 의한 무신들의 세습, 귀족계급의 토지겸병, 불교의 부패에 의한 이념적 구심점의 상실, 몽고의 침입에 의한 국권의 상실은 새로운 이념내지는 새로운 종교의 신호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구한말 유림들이 서원의 부패와 정부 탐관오리들의 부패, 일제의 국권침탈이 새로운 종교의 기대를 두는 것과 같았다. 

 

고려시대는 무신란과 불교의 폐단을 극복할만한 새로운 철학사상이 요구되면서 려말 주자학의 도입으로인한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조선왕조를 주창하면서 정도전이 성리학의 이론적 체계와 더불어 실천을 통한 국가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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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망할 즈음 새로운 기독교가 들어올 때까지 성리학은 조선왕조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모든 인간을 유교적 인간으로 만들었고, 기독교는 이러한 정신사적 토대위에서 들어왔다. 영남의 기독교는 성리학적 기독교, 신학은 성리학적 신학, 교회는 성리학적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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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불행하게도 안향의 주자학의 사상은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안향은 주자학을 통한 새로운 정치질서와 이념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고, 당시의 시대상황을 인식하여 주자학적 이념을 기반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고려말의 개혁과 조선의 역성혁명, 조선의 건국과정, 조선건국후의 지속적인 활동에서 그 변화를 주도하고 시대를 이끌어 갔던 인물들 역시 대부분 영남 지역 출신이다.

 

정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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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와 함께 조선의 새왕조를 건립한 정도전(1342-1398)도 경북의 봉화출신이다. 그는 성리학적인 삶을 실현하려고 하였지만 이방원의 칼에 의하여 그의 꿈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학자지남도(學者指南圖)』·『심문천답(心問天答)』(1375)·『심기리편』(1394)·『불씨잡변』(1398) 등의 철학서를 차례로 저술해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사회적 폐단과 철학적 비합리성을 비판, 공격하고, 성리학만이 실학(實學)이요 정학(正學)임을 이론적으로 정립해 유교 입국의 사상적 기초를 다졌다. 이승만이 기독교입국을 펼치려 하였다면 정도전은 유교입국을 펼치려 하였다. 

 

정도전은 성리학적 기초를 국가의 핵심사상으로 정립하였다. 조선 500년동안 정치, 학문, 경제, 사회, 문화예술을 주도해 온 성리학의 흐름속에서 영남학맥이 차지하는 위치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성리학의 문화는 서원을 통하여 성립되었다. 

 

소수서원: "무너진 유학을 다시 닦게 했다"(소수)

 

영남의 성리학을 주도한 세력은 고려말 안향부터 정도전, 주세붕, 이황까지이다. 주세붕은 안향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을 세웠다. 

 

 

 영주 소수서원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이 곳 순흥에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것이 효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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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붕

 

소수서원(紹修書院)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1541년(중종 36)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1542년(중종 37) 8월에 이곳 출신의 성리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配享)하는 사당을 설립하기 위해 공사를 시작하여 1543년 8월 11일에 완공하여 안향의 영정을 봉안하고, 사당 동쪽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같은 해에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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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은 정부가 후원을 하여 세운 조선 최초의 사액(賜額)서원이 되면서, 조정에 의하여 서원이 성리학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사액을 내려 국가가 서원의 사회적 기능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서원이 갖는 중요한 기능인 선현의 봉사(奉祀)와 교화 사업을 조정이 인정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백운동서원이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고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48년 10월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노력 덕분이었다. 퇴계는 1549년 1월에 경상도관찰사 심통원(沈通源, 1499∼?)을 통하여 백운동서원에 조정의 사액(賜額)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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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 1484∼1555)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하여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뜻을 담은 '소수'로 결정하고 1550년(명종 5) 2월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고 쓴 현판을 내렸다. 서원을 통하여 성리학은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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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도입과 전개

 

상술하면 성리학의 도입기에는 안향과 우탁, 이색이 있고, 절의파와 관학파의 분화기에는 정몽주, 길재, 이승인, 정도전, 하륜 등이 있고,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기에는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김일손, 정여창 등을 꼽을 수 있고, 마지막으로 퇴계학을 준비하는 성숙기에는 이현보, 이언적, 주세붕이 있다. 

 

이처럼 성리학은 고려시대 안향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재현,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이언적, 서경덕, 조광조, 이황, 이이, 기대승, 정약용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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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선교사들이 오기까지는 성리학은 조선의 사상과 민간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조선의 철학이었다. 여기에 영남사람으로 안향, 정도전, 주세붕, 퇴계는 성리학을 국가주도이념으로 확립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영남출신자들이 조선조의 정신사조를 확립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도 성리학의 정신속에 살아가는 한인들을 선교하기 위하여 한복을 입고 선교했다.      

 

언두우드의 아들인 원한경과 에델부부


잉골드 여사는 한복을 입고 진료를 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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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양유산답사기(영남편1)

 http://www.lawtimes.net/2675

 

나의 신양유산답사기(영남편2)

http://www.lawtimes.net/26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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