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3개월 동안 전남지역을 답사하고,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전남편을 발간하였고, 이미 약 500 여권이 판매되었다.
책을 읽는 사람마다 많은 관심을 가졌다. 전남의 각 도시마다의 사건과 특성, 인물을 전개하면서 선교사들의 흔적을 들추어내어 그 이면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한과 눈물많은 호남을 치료하고자 하나님은 오래전부터 선교사들을 보내 호남을 치유하기를 원하셨다.비록 호남에는 전쟁과 수탈, 착취, 이념논쟁을 통한 죽음이 있었지만 선교사들을 통한 예수의 행전은 호남을 새로운 지역으로 바꾸어갔다. 100년 이상된 교회가 세워진 곳마다 인물이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제 영남으로 가보고자 한다. 영남은 넓은 평야는 없고 산과 강밖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수많은 한국의 인물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영남은 영남사림에서 보듯이 한국의 정신사를 끌고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남은 오늘날 민주화에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영남은 한국의 정신사와 경제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병철, 구본홍, 박태준 등 성공한 경제관료들은 대부분 영남출신이다. 이처럼 호남은 한국의 정치발전에, 영남은 한국의 경제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다가 유달리 종교천재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김수환, 조용기, 김진홍, 김삼환, 손양원, 주기철, 한상동, 이상근, 이성헌 목사 등이다.
특히 영남은 정치사에 있어서 삼국시대에는 신라가 중심적 역할을 하였지만 고려가 개경을 수도로 함으로 인해 영남은 중심에서 주변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나 유학의 영향으로 인해 영남은 조선의 정신사를 장악한다. 그러므로 영남의 정신사조는 유학이기 때문에 유학을 알지 못하면 영남을 바로 이해하기 어렵다.
유학의 기원
유학의 한국전래시기는 삼국시대이전부터이다. 이이를 비롯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기자동래설을 바탕으로 기자가 동쪽 한반도로 왔다는 은.주교체기(기원전 12세기 무렵)를 유학의 전래시기로 믿기도 했고, 이병도는 진.한시대에 유학이 유입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여 유학사상은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면서 전해졌다고 하였다.
김충열은 연나라와 한반도와 긴밀하게 접촉했던 기원전 4세기에 유학이 전래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단순히 유학의 전래시기보나 중요한 것은 유학의 수용과 성격의 문제일 것이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에서 이미 유학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유학사상은 정치원리. 예속. 법제. 교육. 제도등 삼국시대의 사회생활에 폭넓게 영향을 미쳤다. 삼국은 개인윤리와 사회. 국가윤리에서 당면한 사회와 국가질서를 확립하고 체계화하는데 필요한 원리를 유학사상으로부터 원용하였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교육기관으로서 태학을 건립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제제를 정비하고,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하여 인재를 길러내기도 하였다.
동명왕이 "도로써 다스리라"고 후왕에게 유언한 것도 유학의 가르침을 따른 것으로 힘으로 백성에게 군림할 것이 아니라 이치에 맞게 왕도정치를 하라는 것이었다.
신라시대는 진흥왕 순수비에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로서 유학적 정치이념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 경덕왕 때 충담사가 지은 [안민가]중에 "임금은 임금, 신하는 신하, 백성은 백성 구실을 다할 양이면 나라는 태평에 멱감으리라"는 말은 [논어]의 '군군신신부부자자'라는 정명사상에 부합한다.
즉 명칭그대로 임금이 임금의 역할을 하고, 신이 신의 역할을 하고,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아들이 아들의 역할을 다한다면 이 나라는 태평하다는 것이다.
백제의 경우에는[구당서]에 " 그 서적에는 오경과 제자서및 역사서가 있으며, 표나 소는 중국의 법식에 의거하였다"고 하여 유학에 백제에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백제에는 왕인을 박사라고 불렀는데, 이는 중국한무제의 오경 박사제도가 그대로 백제에 전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인 박사는 백제 고이왕 52년(285)에 일본으로 ‘논어’, ‘천자문’을 가지고 가서 백제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시켜 일본 고대 문화 형성에 크게 기여한 학자이다.
백제가 한자와 유학을 중국으로부터 수용하여 독자적인 유학으로 토착화시킨 뒤 이를 다시 일본에까지 전파하여 일본의 고대문화를 발전시키기도 했다. 일본 학자들은 백제의 왕인 박사를 일본 문화의 시조로 생각하고 있다.
고려시대
한국유학사의 흐름으로볼 때 삼국시대에 유입된 유학은 정치이념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고려시대에는 그 지위가 강화되었다. 고려시대는 종교사상등에 있어서 여전히 불교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정치와 사회 윤리분야에서는 유학의 현실적이고 경세적인 특성이 그 기치를 발휘하였다.
고려초기의 유학사상은 수기치인 이상을 실현하는데는 역부족이었고 학문으로는 체계성이 없었다. 그러나 유학적인 천명, 민본사상은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기초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왕건이 훈요십조를 남겼는데 이 가운데 5개조가 유학적 정치이념을 반영하고 있다.
광종에서 성종에 이르는 동안 유학은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는데 터전을 확립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최승로는 시무28조를 써서 민생문제에 근원을 두고 왕에게 정책을 간언하기도 하였다. 성종은 시무28조를 적극 반영하였다. 시무28조에서 8조는 불교에 관계된 것으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성종은 최승로의 28조를 정책을 반영하여 인정을 폈고,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국자감을 설치하고, 경학박사를 두어 유학을 장려하였다. 고려중기에서는 유학 원전 자체의 초보적 이해와 수용이 단계를 넘어 경전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상당한 정도로 확산되고 심화되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단순한 사실의 기록단게를 넘어서 유학적인 역사의식과 역사서술의 원칙및 체계를 갖춘 현존하는 최고의 역사서이다.
고려후기에는 무신통치가 되면서 유학은 급격히 쇠퇴하였다. 그러나 원으로부터 주자학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송대 유학자들의 논리를 주자(朱子)가 집대성하여 도통론에 기초한 경학(經學) 체계와 유학 우위의 입장에서 불교의 선사상과 도교의 자연사상의 장점을 포용한 유교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학풍을 중국에서는 주자학(朱子學), 정주학(程朱學), 이학(理學), 도학(道學), 신유학(新儒學) 등으로 불렸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성리학(性理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으로 불렸다. 주자학은 기보다 더 근원적인 것으로서 리(理)를 강조하고 리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행위의 원리이다. 주자학에서 도덕실천의 주체는 사람의 마음이고, 경은 도덕실천 과정에서 사람이 지녀야 할 중요한 태도이다.
성리학이라는 용어는 ‘성명과 의리의 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성리(性理), 의리(義理), 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였다는 의미다. 주자학은 변형된 유학으로서 유학을 형이상학적인 입장에서 접근한 일종의 유교철학이다.
주자학의 도래
주자학은 안향과 백이정에 의해서 처음으로 전래되었다.
1289년 11월 안향은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을 수행하여 원나라의 수도 연경을 방문했다. 주자(朱子)의 저서를 필사하고 공자의 초상을 모사하여 1290년(충렬왕 16년) 봄에 귀국했다. 이에 따라 1290년을 한국 성리학 역사의 출발점으로 잡기도 한다.
또한 1298년부터 연경에 10년 간 머무르며 성리학을 공부한 뒤 서적을 갖고 귀국한 백이정(白頤正)의 역할도 중요했다. 백이정은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성리학을 연구하며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충목왕 즉위년(1344년)에는 성리학의 핵심 텍스트인 사서(四書)가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되기도했다. 초기 성리학의 맥은 다시 이곡, 이색 부자(父子)와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등으로 이어져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이루었다. 안향은 이러한 흐름의 선구자였다. 백이정의 일생을 정리한 행장에는 그가 권보, 우탁 등과 함께 안향 문하에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제현(1287~1367)은 안향을 그 시대 유학의 으뜸이자 대표 격이라 언급했다. 안향은 이미 자신의 시대에 높은 평가와 존경을 받았다.
주자학으로 건국된 조선
조선의 통치철학은 주자학이었다. 조선이 건국과 함께 주자학을 통치이면으로 표방하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조선의 통치기반인 주자학을 끌어들인 학자는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경상도 봉화출신으로서 이성계 역성혁명의 개혁공신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