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장흥편)

편집인 | 입력 : 2020/10/27 [13:32] | 조회수: 211

1894년 동학농민들이 전주성을 점거하자, 조선 정부는 스스로의 힘으로 동학농민봉기를 진압하는데 어려움을 깨닫고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일본도 조선에 들어왔다. 그러자 다시 동학이 봉기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외세척결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1894년 9월 중순 전봉준은 전주에서, 손화중은 광주에서 척왜(斥倭)를 부르짖으면서 기포(起包)하자, 이에 호응하여 각처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다.

 

10월 말을 전후하여 전라도 삼례역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는 11만에 가까웠으며, 이는 집강소를 통해 연락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후의 우금치 전투를 하기 위하여 1894년 11월 하순에 전봉준이 거느리는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근거지인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였으나 상당수가 이탈하여 북상한 수는 겨우 1만여 명 밖에 되지 않았다.

 

전봉준이 이끄는 남접 1만명,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 1만명 도합 2만명이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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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우금치의 공방전은 동학농민군으로서는 운명을 건 일대혈전이었다. 그러나 6, 7일간에 걸친 40∼50회의 격전을 치르는 공방전 끝에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참패하고 논산 방면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동학민의 무기는 주로 창이었던 반면, 일본군은 이미 신식무기로 무장해 있었다. 일본군은 1명이 동학군 500명을 상대할 수 있었다.  

 

 동학농민들의 무기

 

 

  © 일본인의 무기

 

동학농민과 일본군의 화력의 비교는 250:1 또는 500: 1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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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처음부터 게임이 안되는 전투였다.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1만여 명의 병력 중 겨우 살아남은 500여 명으로 항전을 거듭하면서 전주·태인을 거쳐 금구·원평까지 후퇴하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모두 해산하였다.

 

이들중 일부는 장흥까지 내려갔다.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우금치전투에서 패하자, 장흥까지 내려와 함께 투쟁한 결과 1894년 12월 4일 벽사역 점령, 12월 5일 장흥읍성 점령, 12월 7일 강진현 점령, 12월 10일 전라병영을 점령하여 승승장구하였지만 근대식 무기를 가진 일본의 침투로 1894년 12월 12일~12월 15일 장흥석대들 전투는 잔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장흥 동학논민운동을 이끈 대접주는 이방언이었다. 이방언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장흥지역을 대표하는 농민군 지도자였다. 전주와 정읍에 전봉준이 있었다면 장흥에는 이방언이 있었다. 그는 원래는 유학자였는데 드믈게 동학지도자가 되었다. 전봉준도 유학자였다. 둘다 조선의 지식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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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언은 동학 입도 후 장흥 동학도와 농민들을 규합해 전봉준의 주력부대로 활동했다. 이방언은 우금치 전투 이후 최대 규모인 장흥 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후 은신해 있다가 부하의 밀고로 관군에 체포돼 처형당했다. 이방언은 장태를 무기로 해 공격을 하는데 이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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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는 이방언이 고안 제작한 것으로, 대나무를 쪼개서 엮은 둥우리모양을 거대하게 만든 다음 안에다가 솜, 짚단 등을 채워 넣고 낫과 칼을 꽂아 겉으로 날붙이가 튀어나와 부딪힌 적이 상처를 입게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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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동학농민들은 장태를 굴리면서 적을 향해서 전진했다. 장태는 당시 사용되는 탄환을 막아내는 데는 충분한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사용했던 화승총의 사거리가 관군의 신식총보다 짧았기 때문에 장태로 탄환을 방어하며 전진했던 것이다. 
 
장태는 황토현 전투에서 처음 등장해 관군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고, 이후에도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도 쓰이는 등, 동학군이 전주를 함락할 때까지 계속 이용되었다.
 
2차 봉기 때에도 우금치 전투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동학군이 장태를 굴리면서 우금치 언덕을 오르기를 시도했으나 능선에서개를링건을 쏴대자 속수무책이었다고 한다.   
 

 개를링건

 

장흥농민군은 1,500명 이상이 죽었으며, 수성군 역시 장흥부사 이하 부민 500명이 사망하고 관민가(官民家) 3,700호가 불탔다.

 

장흥농민군은 승승장구하던 12월 초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지도자들이 차례로 체포되거나 살해되었고 주력부대 역시 속속 해산하여 장흥지역 농민군은 급속히 고립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장흥석대들 전투

 

▲ 장흥 석대들. 1894년 12월 15일 이곳에서 이방언, 이인환 등이 이끄는 장흥의 동학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싸웠으나 크게 패했다. 이로써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항전이 끝을 맺었다. 사진의 왼쪽 아래 주차장 위에 동학농민혁명 기념탑이 있다. 주차장과 기념탑 일대가 석대들 전투에 희생된 동학농민군의 유골을 안치한 곳이다.(출처: 장흥군청)


장흥석대들 전투는 1894년 11월 11일 공주 우금치에서 패한 동학농민군, 이방언을 중심으로 한 장흥지역 동학농민군과 전남지방 동학농민군 3만 여명이 장흥석대들에 집결하여 12월14일~12월 15일 수성군과 일본군에 대항하여 벌인 전투였다.

 

그 주력부대는 이방언지도자가 이끄는 동학농민군 이였다. 처음에는 농민군들이 장흥읍성과 전라병영, 벽사역, 강진현을 점령하였지만 12월 13일 신식무기를 갖춘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동학농민군들을 공격하여 농민군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처럼 동학의 패배로인해 상당한 후유증이 있는 가운데 12년이 지나서 장흥에 선교사들을 통하여 복음이 찾아왔다. 이복음은 장흥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하여 찾아온 것이다.   

 

오웬선교사와 장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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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은 유진벨과 동고동락했던 오웬선교사가 마지막까지 복음을 전하던 곳이었다. 전남 동남부는 오웬선교사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의료선교사로 와서 유진벨사역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본인이 하루에 12시간씩 말을 타면서까지 전남 전역으로 복음을 전하고 다녔다.

 

처음에 오웬은 의료선교사로서 유진벨과 함께 목포에서 사역을 하다가 광주로 사역지를 옮겨 1909년 4월 광주에서 127km 거리 떨어진 장흥까지 와서 전도를 하던 중 과로에 쌓여 급성 폐렴에 걸려 3일동안 가마를 타고 광주로 왔지만 오는 도중 사망을 했다.

 

이처럼 장흥은 열정의 전도 메이커 오웬이 마지막 복음을 전하던 곳으로 의미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웬의 영향하에 장흥에 여러 개의 교회가 세워졌다. 그 중 제일 먼저 세워진 곳이 1905년 장흥군 도청리 교회이고, 1906년에 진목리 교회가 세워진다.  

 

이 교회는 안덕화, 이자일, 이원방 등이 방천일의 전도를 받고 안덕화집에서 1년간 개척을 하면서 설립하게 되었다. 선교사 오웬과 맥컬리가 시무하기도 한 유서깊은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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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906년에는 삭금리 교회가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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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이전부터 장흥읍 남동리 83번지의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1910년 10월 21일 조하퍼(Rev.J.Hopper)선교사가 전남노회의 허락을 받아 당회를 조직하고 정식으로 교회 설립의 절차를 마무리 하였다. 이 교회가 장흥읍교회이다.

 

장흥읍교회는 시대의 아픔을 주민들과 함께하는데 앞장서 왔는데, 제5대 담임목사였던 (고)임기준 목사는 유신독재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성명서를 낭독함으로 구속되는 등 장흥읍교회는 역사의 격변기마다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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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읍교회는 1934년 10월 21일 정기신과 박병곤이 장로가 되어 당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해방후 박병곤장로는 6.25전쟁이 발생하여 공산당한테 총살을 당한 아픈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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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년 전의 동학혁명 당시 들어온 복음은 근대 문명을 가져오게 되었다. 근대문명은 한민족에게 반제국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유와 평등을 깨닫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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