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여수편 2)

편집인 | 입력 : 2020/10/22 [02:44] | 조회수: 358

 

여수 애양원 병원에 가면 세 명의 동상이 있다. 윌슨 선교사와 토플 선교사의 동상이 병원마당에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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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외 손양원목사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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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의 두 사람은 나병환자들을 위한 치료를 위해 헌신을 다했고, 손양원목사는 나병환자들의 영혼을 위해 사역을 한 사람이다. 모두 애양원병원과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다.

 

애양원 병원의 전신은 1909년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윌리 포사이트(Wiley Hamilton Forsythe1873-1918) 가  길가에 쓰러진 한센병 환자를 치료한 것이 계기가 돼 윌슨이 광주에 한국  최초로 세워진 광주나병원이었다. 

 

당시 광주에 있던 병원은 전국에서 나병환자들이 소문을 듣고 치료를 받기 위해서 몰려오니 광주 주민들이 거센 항의를 하자, 조선 총독부가 후원까지 하면서 여수로 이전시키게 했다. 이에 따라 1928년 환자 600명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애양원 병원을 세우게 되었다.

 

 

  초기 애양원 병원

 

초기에는 전기불도 없어서 수술실 천장에 빛이 들어오게 해서 수술을 했고, 또한 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아서 물을 길어다가 사용을 했다. 전기와 수도도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의료 선교사들의 사랑과 헌신적인 치료로 인해 놀라운 치료의 효과가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은 나환자들을 위한 세계적인 병원이 되었다.

 

애양원의 영문 명칭은" Wilson Leprosy Center and Rehabilitation Hopsital" 이며 윌슨의 이름을 따서 윌슨나환자 센터 이며 재활병원이다. 전국에서 나병환자들이 광주병원으로 몰려들었다.

 

  전국에서 광주로 몰려든 나병환자들

 

나병원은 처음에는 비더올프 나병원으로 불리워지다가 1935년 3월 병원 이름을 애양원으로 개칭하였다. 1948년 4월에는 미국 남 장로교 한국 선교회로 운영권이 이관되었다.

 

 

 

 

 

1966년에는 한센병(나병) 이동진료반 운영을 시작하여 한센병 관리 직원을 여수시,·순천시,·여천시,여천군,·승주군, ·광양군,고흥군,·보성군에 파송, 한센병 교육과 재가 환자 진료 및 새로운 환자 발견에 힘쓰게 하였다.

 

1967년 8월 여수 애양 재활병원으로 개칭하고 현대식 병원으로 건축, 일반 지체장애자와 나환자를 함께 재활 수술하게 되었다.

 

1988년 3월 사회복지법인 여수 애양병원으로 변경하였다. 이제는 한센병의 좋은 치료제가 발명되어 새환자는 거의 없다시피하고 완치할 수 있는 병이 되었다. 한국의 애양원은 수많은 나병환자들의 치료와 임상을 통하여 기술면에 있어서 세계적인 나환자 병원이 되었다. 

 

이 병원을 성공적으로 이끈 사람이 윌슨과 노르웨이 출신의 토플 부부 였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수많은 나환자들이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갔을 것이다.

 

1908년에 오웬의 우연한 죽음으로 나병환자를 치료하게 되면서 부터 20년만에 여수로 이전하여 병원은 성장하게 되었다. 오웬은 죽어서도 말하였던 것이다. 결코 헛된 죽음이 아니었다.  

 

이와같이 한 쪽에서는 나병의 접촉성균이 한민족을 괴롭히고 죽였지만 다른 한면에서 볼세비키의 영이 한민족을 괴롭혔다. 1917년 러시아혁명을 이룬 볼세비키의 영이 대한민국에까지 침투하여 민족을 괴롭히고 살상을 하는데 까지 갔던 것이다.

 

지금까지 공산주의는 독버섯처럼 퍼져나갔다. 손양원목사의 가족이 대표적인 희생양이었다. 손양원목사는 애양원교회에서 5년 정도 밖에 사역을 못하였지만 짧고 굵게 살았다.  

 

애양원교회는 1908년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서 월슨 선교사에 의해 봉선리 교회로 시작되었다.

 

봉선리교회가 1928년 여수시 율천면 신풍리로 이전하여 신풍교회로 불리웠으나 교회가 너무 초라해서 미주 교포인 석은혜 성도가 헌금을 보내와서 건축하여 잠시 '석은혜 교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봉선리교회, 신풍교회, 석은혜교회, 애양원교회, 성산교회로 개명하면서 발전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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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양원이라는 이름은  윌슨(Robert M. Wilson, 禹日善) 박사가 병원의 이름을 환우들에게 공모했다. 많은 공모 이름 가운데  사랑 애(愛), 기를 양(養), 동산 원(園) 으로 사랑으로 돌보는 동산이라는 뚯의 '애양원'으로 선택했다. 그래서 교회이름도 자연스럽게 애양원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애양원 교회는 1982년에 다시 성산교회로 개명했다. 손양원목사는 1939년에 부임했고 부임하자마자, 1940년에 신사참배로 투옥되어 광주 형무소와 청주구금소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손양원목사의 아버지도 독립투사였기 때문에 독립투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손목사의 아이들은 손목사의 신앙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5년을 복역하고 해방과 함께 출소하여 1946년에 경남노회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2년만에 안재선이라는 좌익에 의하여 두 아들을 잃게 된다.

 

1918년부터 형성된 고려공산당의 영이 호남까지 코로나처럼 퍼져 해방의 기쁨도 맛보기 전에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들에 의하여 교인들이나 목회자들은 피해를 당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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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순교기념관 앞마당에 12명의 순교자를 기리는 비석이 있다. 대부분이 좌익이나 공산당에 의하여 순교를 당했다. 1920년에 시작된 고려공산당의 씨앗이 호남에까지 뿌려져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념의 영은 예수의 영과는 달리 상대편을 적으로 판단, 죽이는데 앞장을 선다. 


1.김정복 목사(1882.6~1950.9.27) 68세에 공산당에 순교하심

2.손동신 성도(1930.0.18~1948.10.21)여순 반란 사건때 18세로 복음을 전하다가 총살당함

3.손동인 성도(1925.11.8~1948.10.21) 여순반란때 형 동신과 함께 23세로 순교함.동신 동인 손양원 목사의 아들이다.

4.안덕윤 목사(1897~1950.8.7) 교회 뒷산에서 공산당원에게 죽창으로 찔려 향년 53세로 순교함.

 

5.양용근 목사(1905.10.14~1943.12.5)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르던 중 38세로 감옥에서 순교하심.

6.이기풍 목사(1865.1.25~1943.6.20)신사참배 거부로 모진 고문 끝에 결국 향년 77세로 순교하심

 

7.이선용 목사(1908,10,21~1950.12.9)6.25때 훼손돈 교회를 복구하기 위해 노회를 찾아 가던중 공비들의 총격으로 향년 43세로 순교함.

8.윤형숙 전도사(1898~1950.9.28) 3.1 운동때는 여고생으로 시위주도를 하다가 왼팔과 오른쪽 눈을 실명했고 고문 후유증으로 시달리다가 여수 제일교회 전도사 시절 한국전때 미평동 과수원에서 향년 52세로 순교함.

9. 조상학 목사(1877~1950.9.28) 일ㄹ제때는 신사 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렀꼬 6.25때 교회를 지키다가 공산당에 의해 73세로 순교함.

10.지준철 성도(1930/6.10~1950.9.28)퇴각하던 공산당원들에게 아버지 지한영강도사와 함께 집단학살로 향년 20세에 순교함.

11.지한영 강도사(1908.5.16~1950.9.28)독실한 기독교인이란 이유로 아들과 함께 총살로 향년 44세로 순교함.

12.허상용 집사(1906.12.25~1950.9.28) 교회를 지키다가 둔덕 과수원에서 공산당에 의해 향년 44세로 순교함 

 

손양원 목사는 4년동안 애양원교회를 시무한 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1950년 9월 여수 미평동에서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목사안수를 받고 4년간 목회를 하고 하늘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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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양원 전도사는 1938년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신사참배 반대자라는 이유로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애양원 교회가 그를 담임교역자로 청빙하였는데 부임하고서도 손 전도사는 1940년 신사참배 반대를 이유로 투옥되어 목회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해방 후 출옥하여 손양원 전도사는 다시 애양원 교회에 부임하고 1946년 2월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1948년 10월 21일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이 안재선을 중심으로 한 좌익 학생들에게 순교를 당하는 고통을 겪었다. 손목사는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받아들여 사랑의 원자탄의 닉내님을 얻었지만 본인은 정년 고통의 원자탄이었을 것이다. 손양원목사가 순교당하자 안재선이 상주노릇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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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목사는 아들이 죽은지 2년 후 1950년 한국전쟁 땐 환자들과 함께 있겠다며 피난을 거부하고 교회에 남아 있다가 1950.9월에 공산군에게 순교했다. 공산군의 특징은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서고 무력과 폭력을 행한다는 것이다.

 

당시 이석기의 통합진보당과 공산주의는 한 끝 차이 였다. 그는 폭력으로 내란 음모를 꾸며 결국 구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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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시 사노맹 출신인 조국은 내란음모기소 자체가 우습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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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독교와 공산주의 역시 한 끝 차이 이다. 공산주의는 최근까지 독서벗처럼 뻗어 나갔다. 좌익이나 공산주의는 근원적인 면에 있어서 별 차이가 없다. 좌익사상과 공산주의 역시 한 끝 차이 이다. 뉴스앤조이와 CBS는 기독교 사회주의 이다.

 

공산주의는 아니지만 기독교의 본질을 훼파하고 적당하게 기독교를 표방하면서 이면에는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띠면서 대형교회 파괴운동을 하고 있다. 교회파괴운동은 유물론을 토대로 하는 막스 레닌주의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전유물 이다. 

 

최근에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 들어간 곳마다 기독교를 파괴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개혁이고 진보, 역사라고 말을 한다. 막스도 당시 "노동자여 일어나라"며 개혁과 진보를 동시에 외쳤다. 기독교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공통점은 기독교와 교회를 파괴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는 점이다.  

 

1919년부터 시작된 공산주의는 1920년에 한반도에 상륙하여 일제하 지식인들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인 이동휘는 1919년 고려공산당을 창설했고, 여운형은 1945년 조선건국위위원회를 창설했다. 

 

박헌영은 1945년 이후 해방 정국에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뒤 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 민족전선 등에서 좌파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1948년에 월북했으며, 같은 해 4월에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였으나 남한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이후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뒤에는 부수상 겸 외무장관 등을 지내며 남침을 하는데 앞장을 섰다. 수백만이 죽어갔다. 이처럼 이념은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뉴스앤조이나 CBS는 기독교 사회주의적 언론

 

특히 뉴스앤조이나 CBS같은 기독교 사회주의적 언론은 교회를 파괴하거나 죽이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사회주의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전쟁이 끝났어도 좌파 이념논쟁은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다. CBS는 기독교만 표방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의 공산주의는 1919년부터 이동휘에 의하여 시작이 된다. 1945년 해방이후에는 여운형, 박헌영같은 사람들이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를 배워 건국준비위원회를 세워 좌파활동을 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사노맹에서 할동했던 조국과 같은 사람들이 청와대에 입성하게 되어 좌익의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임종석, 이인영, 우상호, 신영복 등은 모두 좌익활동을 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구속된 이석기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공산주의

 

한국의 공산주의는 일제 강점기, 해방정국, 분단시대로 나뉘어 볼 수 있다.

 

한인사회당으로 시작한 공산주의는 해방정국때 여운형이 주도가 된 건국준비원회, 박헌영의 남로당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1950년이 되어서 북조선 공산당을 세운 김일성이 남침을 하게 되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살상을 가져왔다. 분단이후에 민주정권에서도 공산주의 활동은 계속 되었다.


일제강점기
(1919-1945)

 

의열단
고려공산당 → 분열 한인사회당 → 공산주의그룹 → 고려공산당 상해파
사회혁명당 → 중립파 → 고려공산당 상해파
전로한인공산당 →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 → 중앙총회 →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조선공산당 서울파 → 춘경원/엠엘파
화요회 → 제1차 조선공산당
무신자동맹회 → 제1차 조선공산당
북풍파 → 북성회 → 제2차 조선공산당 → 일월회
조선노동당 → 제1차 조선공산당
정우회
엠엘파 → 제3차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일본총국 (3차공산당)
조선공산당재건동맹
장안파 조선공산당

경성트로이카 → 조선건국동맹/경성콤그룹
연안파 → 조선신민당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민족혁명당 → 인민공화당
조선민족해방동맹 → 통합
조선민족전위동맹 → 통합
조선혁명자연맹 → 통합
조선의용대

 

기타 단체:
타도제국주의동맹 → 반제청년동맹 · 조선청년총동맹 · 삼월회 (일월회 자매단체) · 조선여성동우회 · 고려공청 · 고려혁명당 · 전남노농협의회 · 조선노동동흥회 · 흑우연맹 · 조국광복회 · 동북항일연군 · 서울청년회 · 조선노농총동맹 · 조선의용군
 

해방정국
(1945-1948)

 

건국준비위원회 (좌파)
조선독립동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조선공산당 → 남조선로동당 → 조선로동당 (남로당파)
조선신민당
사회로동당 → 근로인민당/조선로동당 (연안파)
민전
북조선공산당 → 북조선로동당 → 조선로동당
 

분단시대
(1948-현재)
국보법에 따라 이적단체로 지정된 단체들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 인민혁명당 · 통일혁명당 · 남조선해방전략당 ·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 민주구국학생연맹 · 전국학생총연합 (민족통일민주쟁취민중해방투쟁위원회) · 반제동맹당 · 전국노동자연맹추진위원회 · 민족해방노동자당 · 안산민족해방노동자당 ·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부산경남 · 대구경북 · 강원) →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 노동자해방사상연구회 · 반미청년회 ·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 기독교문화노동운동연합 · 혁명적노동자계급투쟁동맹 · 자주민주통일그룹 · 코리아연대 · 반제반파쇼민중민주주의혁명그룹 · 조국통일촉진그룹 · 반제청년동맹 · 관악자주파 · 노동자계급해방투쟁위원회 · 노동자정치활동센터 ·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 · 구국전위 · 혁명적국제사회주의노동자투쟁동맹 · 남한프롤레타리아계급투쟁동맹 ·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 자주대오 · 관악노동청년회 · 민주민족혁명당 · 백두청년회 · 서울민주노동자회 · 한국청년단체협의회 · 민중정치연합 · 진보와 연대를 위한 보건의료연합 · 새세대청년공산주의자붉은기 · 남북공동선언실천연대 · 사회주의노동자연합 · 통합진보당 · 통일대중당 · 새시대교육운동

 

이념의 영과 사단의 영

 

손양원목사의 아들은 해방정국시대 좌익계 학생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완장을 채워주니 죽창을 들고 목회자, 지주, 경찰, 군인들을 학살했다. 여순사건 역시 14연대가 반란을 하지 않았더라면 민중의 참극은 없었을 것이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 건드렸던 사건이었다.

 

제주의 4.3 사건, 노근리나 거창 양민학살도 마찬가지이다. 죄없는 시골사람들이 좌익의 이름으로 죽어갔던 것이다. 서북청년단들에게 사단의 영이 임하니 모든 사람들이 좌익으로 보여 좌익을 쳑결한다고 하면서 집단 학살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좌우익을 떠나 이념을 통한 사단의 영이 들어오니 한민족을 집단학살하는데 희열을 느꼈던 것이다. 이러한 집단학살극은 광주민중항쟁에서도 잘 나타난다. 안재선에게 임한 좌익의 사단의 영이 손양원목사의 두 아들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이념의 영은 좌우익 할 것 없이 죽이는 영이다. 

 

손양원목사의 두 아들은 순천경찰서 앞에서 또래 청년들에게 끌려가 몽둥이와 총자루로 무수히 맞은 뒤 총살을 당했다. 완장을 찬 청년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빠진 좌익청년들이었다. 좌익청년들은 동인과 동신, 두 아들에게 ‘미제의 앞잡이’라는 죄목을 붙여 순천경찰서 앞에서 처형했다.
 

 순천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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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 동인과 차남 동신은 늦은 나이에 학교를 다녔다. 여순사건이 일어난 1948년 동인은 24살이었다. 순천사범학교 6학년생이었다.  동신은 19살로 순천중학교 2년생이었다. 동인은 당시 기독학생회 회장이었다. 좌익학생들로 이뤄진 ‘조선민주애국청년동맹’은 동인을 ‘반역죄’로 붙잡았다. 동신도 끌어왔다. 10월 21일이었다.
 
좌익학생들은 두 형제를 마구잡이로 때린 뒤 순천경찰서 뒷마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 앞에 두 형제를 세워놓고 총살을 시키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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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안재선(상단), 동인, 동신(하단)



손양원목사는 두 아들을 잃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손 목사는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아들을 죽인 이를 회개시켜 아들로 삼겠다고 말했다. 아들을 죽인 ‘좌익청년 안재선’은 국군에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사형을 선고받았다. 손 목사는 안재선에 대한 구명운동을 벌였다.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안재선을 석방되게끔 했다. 그리고 그를 양아들로 삼았다. 친아들 둘을 죽게 한 살인범을 아들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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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선의 아들(안경선)은 목사가 되었다. 손양원목사가 안재선을 아들로 삼았기 때문에 안재선도 전도사의 길로 갔고, 그의 아들 인경선도 목사의 길을 선택했다. 

 

 출처 CBS 새롭게 하소서

 

손양원목사의 사랑과 용서의 정신이 살인자의 아들을 목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김대중대통령도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을 용서하였고 기념관도 세워주었고 살인마를 청와대로 초청하기도 하였다. 

 

김대중대통령에게 살리는 예수의 영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중대통령의 인생은 수난과 고통과 죽음의 삶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3년 일본에서 중앙정보부를 통하여 김대중을 납치하여 바닷물에 빠뜨려 수장시키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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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대통령은 물에 빠져 죽는 것을 생각하는데 갑자기 예수의 환상이 나타났고 했다. 예수가 자기를 도왔다는 것이다. 그 이후 그는 예수를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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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물에 빠지기 전에 하늘에 헬기가 정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그를 도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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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고, 예수의 정신대로 살려고 하였다. 2000년에 대통령이 된 이후 김대중은 용서의 정신을 갖고 살았다.

 

"우리가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내가 선하고 의롭기 때문이 아니다. 나도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기 때문이다. 용서는 따지고 보면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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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용서와 화해의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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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박정희 기념관을 만들고, 전두환을 청와대로 초청하여 국정을 논의하였다. 전두환은 "김대중 대통령 재임때가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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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김대중을 납치하여 죽이려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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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내란음모죄로 김대중전대통령을 죽이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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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대중대통령은 보복정치를 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두 전직대통령을 용서하여 보복정치를 마감했다. 2000년에는 남을 용서한 김대중 대통령을 하나님이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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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수칙 16조항에는 "나는 할 수 있다. 하느님과 같이 계시다"고 하여 하나님이 항상 옆예 계심을 확신하고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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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만난 김대중 대통령은 남을 죽이기 보다는 살리는 정치를 한 것이다.  좌우 이념에 매인 사람들은 사람을 죽이고 교회를 파괴시키는데 앞장을 서고 있지만 손양원목사나 김대중 대통령처럼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보복을 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나의 신앙유산답사기(여수편1)

http://www.lawtimes.net/2519

 

 

 

http://lawtimes.net/2395  (전남편)

 

http://lawtimes.net/2436 (목포편1) 

 

http://lawtimes.net/2438 (목포편2)

 

http://lawtimes.net/2446 (목포편3)

 

http://www.lawtimes.net/2448 (목표편4)   

  

http://lawtimes.net/2488 (신안편1)

 

http://www.lawtimes.net/2489 (신안편2)

 

http://www.lawtimes.net/2491 (신안편3) 

 

http://www.lawtimes.net/2493 (순천편1)

 

http://lawtimes.net/2494 (순천편 2)

 

http://lawtimes.net/2499 (순천편 3)

 

http://www.lawtimes.net/2506 (순천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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