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전남편은 전남에서 100 여년전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걸어간 길을 추적하고 있다. 신안군 답사를 하다가 운전부주의로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교사들의 행전을 쓰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다. 동학혁명과 좌우이념의 격변속에서도 선교사들은 교리가 아니라 생명을 전했다.
이들은 교리를 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전했고, 생명을 바쳤다. 그러나 한국은 언젠가부터 이단감별사들에 의하여 기독교를 생명의 종교에서 교리의 종교로 탈바꿈 시켜 자신들의 근본주의적 신학적 성향을 갖고 자신들과 신학적 성향이 다른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교리가 아니라 생명의 복음을 전했다.
선교사들은 근대의식과 항일의식을 일깨웠고, 개인의 영혼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문맹퇴치와 질병퇴치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최근의 한국교회는 교리와 윤리 위주의 종교로 변해 유대의 율법주의를 방불케 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가 기독교에 침투하여 기독교가 기독교사회주의로 변해가고 있다. 기독교가 이념의 노예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때 아닌 주사파논쟁과 좌우익의 이념논쟁으로 사회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1920년도에도 이동휘나 박헌영같은 사람은 공산주의를 활용하여 한국을 독립시키고자 하였다. 이동휘는 볼세키비가 목숨을 구원해 준 이후부터 볼세비키에 심취하여 공산주의 당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이동휘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이자 절실한 기독교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공산주의를 등에 업고 항일 운동을 하였고 박헌영은 볼세비키즘을 통하여 한반도를 사회주의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이미 이념의 문제는 1920년대에 선교사들이 염려하는 바였다. 코잇 선교사는 "당시 반기독적이며 반서구적인 볼세비키가 한국의 남쪽에 확산되고 있었다"고 하면서 "일본이 볼세비키즘을 억제하고 있었다"고 하여 이미 1920대부터 공산주의가 한반도 남쪽에 확산되고 있었음을 염려하였다(Rev. R.T.Coit, "The Situation in Korea, " The Presbyterian Survey, 1926).
한인사회당과 고려공산당
순수 한인들이 조직해서 1921년에 만든 상해 고려공산당은 1918년 4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창립한 한인사회당을 모체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였던 독실한 기독교인 이동휘가 1921년 5월 중국 상해에서 조선 국내, 중국, 만주, 일본 등지의 공산 단체 대표들을 소집하여 조직한 공산당이다.
여운형, 안병찬, 박헌영 등은 이후 1920년에 설립한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가담하지만 본디 상해파 출신이었다. 소련 공산당의 완전한 하부조직이길 원했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비해 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레닌으로부터 자금 지원은 받되 소련 공산당과는 독립된 조직을 유지하길 원했다.
상해 고려공산당은 볼세비키로부터 생명을 구한 이동휘가 러시아의 힘으로 항일투쟁하기를 원했다.
상해 고려공산당은 어느정도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부 요인들이 독립운동에 관여하기도 했다.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이 터지자 고려공산당은 분열되었고, 이동휘는 국무총리직을 사임했다.이미 1920년부터 고려공산당의 세력은 호남까지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코잇 선교사가 볼세비키즘의 파급에 대해서 우려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쪽에서는 성령의 씨앗이 뿌려져 복음사역이 활발했지만 다른 한 곳에서는 사탄이 공산주의라는 가라지를 뿌려 땅밑에서부터 자라나고 있었다.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물과 기름같아서 공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뿌린 가라지는 훗날 독버섯처럼 자라, 해방전후 한반도를 이념으로 점령하게 된다. 교회는 파괴되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들의 힘에 의해서 죽어갔다.
김익두, 문준경, 조만식, 손양원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문준경, 손양원은 좌익사상을 가진 남한 사람들에 의해서 순교를 당한 것이다. 동인이와 동신이는 공산당이 아니라 좌익사상을 가진 안재선이 죽인 것이다. 여동생 손동희 권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북한은 사회주의 이념이 기독교사상을 누르고 앞섰지만 남한은 한 때 가라지가 알곡으로 될 뻔한 세상을 맞이하였지만 복음의 힘으로 사회주의 이념을 물리쳤다. 이러한 좌우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여순사건, 제주 4.3사건, 대구폭동사건 등이다.
좌파의 힘이 거셀수록 기독교의 사상은 탄압을 받을 것이고, 기독교의 사상이 거세지면 좌측의 이념은 약화될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기독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막시즘과 기독교사상을 더불어 공유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를 거부하거나 유사기독인을 자처하는 사람들은 기장출신의 기독사회주의자들이 많이 있다.
한신대 출신의 도올 김용옥은 예수의 사상아론을 주장하고, 기장교단의 윤미향 권사는 정의연 문제로 조사를 받고있고, 공정거래위원장 김상곤도 한신대 출신 교수이고, 동성애를 주장하는 임보라목사도 한신대 출신이다.
친동성애 반기독교로 언론으로 전락한 뉴스앤조이의 이용필 기자도 한신대 출신이다. 개신교목사들의 고소고발을 일삼는 평화나무 김용민도 한신대 출신이고, 모두 기장교단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은 현정권과 코드가 맞기 때문에 언론을 통하여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있지만 기독교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파괴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교단은 현재 16만명밖에 안되는 군소교단이지만 정부와 언론을 독차지 하고 있어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기장교단 소속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기독교가 폄하를 당하고 있다. 이들의 교단의 주류사상은 민중신학이었다. 민중이 예수라는 것이다.
기장 교단은 이동휘처럼 처음에는 순수복음으로 시작하였지만 독재정권에 항거하면서 안병무, 문익환, 문동환목사 등 많은 민주인사들이 가열차게 투쟁을 하여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앞장을 섰고, 나름대로 한국최초의 민중신학을 만들어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였지만 순수기독교보다 기독교 사회주의를 추구하였기 때문에 교세는 군소교단으로서 거의 기울어 가고 있다. 영성이 없는 교회는 망하듯이 영성이 없는 교단도 몰락하게 되어있다.
기독교사회주의는 1830~1840년대에 유럽의 노동운동이 고조되고, 특히 1848년에 혁명적 투쟁이 가열찰 때 발생한 운동이다. 당시 공상적 사회주의자 생시몽은 『새로운 기독교』(1825)를 저술하여 당시 부패해 있던 기독교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 가르침의 정신을 새롭게 한 입장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 후에 나타난 기독교 사회주의는 자본 대 노동의 계급투쟁의 경험으로부터, 기독교의 '만인 형제' '이웃 사랑'의 가르침에 의해 자본주의 사회의 '물질만능주의'를 개혁하고, 조화로운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사회주의자들은 순수 복음운동에서 벗어나 해방신학이나 동성애 대해서 과감하게 수용함으로서 남미의 교회처럼 가고 있는 경향이 있다.
최근의 기독교사회주의는 영성이나 종교개혁의 순수정신보다 인권와 윤리, 역사, 제도, 진보, 개혁을 강조함으로 교회를 파괴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뉴스앤조이, NCCK, 평화나무는 대표적인 예이다. 정의기억 연대는 앞에는 정신대의 아픔을 노래하면서 뒤로는 자신들의 이기적 야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예장통합교단의 1000인 선언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지지하고 있다. 모두 기독교 사회주의 게열이다.
예수를 겉에 내세운 기독사회주의자들은 정상적인 순결대신 동성애를,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지지하고 있다. 겉으로는 인권이고 개혁이지만 이면으로는 세속주의와 율법주의, 윤리주의, 유물론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신을 감각하지 못하고 영적인 체험이 없고, 신이 안보이다 보니 유물론, 인권, 차별금지법, 윤리 등을 앞세우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사회가 영적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좌익의 힘은 결국 막스레닌주의의 유물론내지는 보이는 것을 토대로 하고 있고, 기독교의 힘은 보이지 않는 유신론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영원히 대립할 수 밖에 없다. 카톨릭은 보편을 중시하고 개신교는 개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대립할 수 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다.
신과 영적으로 교통이 되지 않는 집단들은 이성, 보편성, 상식, 유물론, 인권, 가이사법, 제도, 민주를 중시한다.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보편보다는 개체, 이성보다는 신앙, 상식보다는 초상식, 유물론보다는 유신론, 인권보다는 신권, 가이사법보다는 성경의 법, 제도보다는 정신, 민주보다는 양심을 중시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잇은 한국사람들이 양질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교회내 최초로 초등학교를 설치하여 교육장려운동을 벌였다. 로버트 코잇은 미국 남부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으로 데이비슨 대학을 나오고 1909년 3월 목포에 도착을 했고 광주에서 사역을 처음 시작했다. 1920년대부터 좌익사상을 염려한 바 있다.
유진벨의 사망과 코잇의 사역
코잇이 광주에 도착할 무렵, 유진벨과 빛과 그림자처럼 함께했던 오웬이 광주에서 127키로미터나 떨어진 장흥에서 선교하다가 1909년 3월 18일 급성폐렴에 걸려 4월 3일 사망하자, 그는 1913년까지 4년 동안 오웬이 선교하던 지역을 맡아서 선교했다.
장흥에 100년 이상 된 교회는 오웬과 유진벨의 작품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교회회가 없었을 것이다. 장성읍교회, 진목교회 등은 모두 100여년 이상되어 오웬과 유진벨의 전도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였다.
오웬은 남평, 화순, 능주, 동복, 장흥, 보성, 낙안, 흥양, 돌산, 여수, 순천, 곡성, 광양등 남부지역을 맡아 선교한 열정의 선교메이커였다.
순천에서는 제일 먼저 1907년 4월 15일 금곡동 양사재에서 순천중앙교회가 세워졌다. 이미 유진벨의 영향을 받은 한인들이 교회를 설립하고 프레스톤을 제1대 목사로 세웠다.
프레스톤으로 부터 은혜를 받은 조일환, 조의환, 이기홍 등이 1907년에 여수 장천교회를 설립하였다.
보성읍교회는 유진벨과 오웬의 영향을 받은 신도들이 교회설립을 하였고 광주에서 오웬과 유진벨과 접촉하면서 순천에서는 오웬의 조사활동을 하였던 이형숙(1917-1918 사역)이 초대조사로서 사역을 하였다.
벨은 나주, 영광, 무장, 고창, 장성, 담양, 순창, 장평, 구례 등을 담당하였다. 당시 광주스테이션은 모두 150개의 그룹을 관리하고 있었다.
호남에서 100여년 된 교회는 어디를 가나 많이 있다. 다음은 모두 100년 이상된 교회들이다. 유진벨(배유지)과 오웬(오기원)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98년 목포부 陽洞교회 (배유지, 변창연)
1899년 나주군 三道里교회 (정원삼, 이문오, 윤상삼)
1900년 함평군 文場里교회 (박찬익, 임봉춘, 정기선)
1901년 광주군 松汀里교회 (배유지, 오기원)
1902년 장성군 寶生里교회 (배유지)
화순군 大浦里교회 (이경래)
해남군 右水營교회 (배유지), 先頭里교회 (오기원, 변창연)
1903년 장성군 栗谷里(永信)교회 (오기선, 도정희)
黃龍里교회 (봉덕거, 김도인, 지원근)
영광군 大田里교회 (김문삼, 변창연, 표익선, 문양삼)
나주군 廣岩里교회 (김윤환, 김치묵, 김영환, 최치삼, 김동섭, 이유장)
1904년 광주군 楊林里교회 (배유지, 오기원, 김윤수)
영광군 新川里교회 (노응표, 강사홍)
곡성군 玉果里교회 (배유지)
나주군 德林里교회 (김영숙, 박문삼)
완도군 冠山里교회 (오기원, 노학구, 정만일)
1905년 보성군 武萬里교회 (김일현, 조상학), 新泉里교회 (오기원, 배경수)
광주군 三所旨교회 (김권명, 백부근), 堯基里교회 (김윤수, 장창화)
장성군 小龍里교회 (배유지, 김문삼, 이계수)
나주군 芳山里교회 (박창학, 오기원)
영광군 武靈里교회 (배유지, 김문삼, 박인원)
함평군 龍成교회 (서경구, 정도련, 최치문)
강진군 萬德里교회 (김두찬)
장흥군 都廳里교회 (방천일, 이낙서)
해남군 新德里교회 (배유지, 이귀현)
보성군 新泉里교회 (오기원, 배경수)
진도군 粉土里교회 (도정의)
1906년 장성군 大岳里교회 (김장화, 신치삼, 문학삼, 문태원, 임화일, 최경중)
나주군 上村교회 (이윤삼)
강진군 鶴嗚里교회 (변요한)
장흥군 眞木里교회 (오기원, 안덕화, 이자일, 이원방, 장내성)
朔金里교회 (이성재) 大里교회 (구성숙, 김인운)
해남군 古堂里교회 (김성우, 조병선, 김익천)
고흥군 玉下里교회 (오기원, 오태욱)
순천군 平村교회 (지원근, 박응삼, 이원백)
1907년 화순군 和順邑교회 (오기원, 신나열), 漆井里교회
광주군 中興里교회 (이방언, 서천년, 조능주, 김맹동, 김우치, 하순이)
순창군 雙溪里교회 (배유지, 변창연)
보성군 雲林里교회 (오기원, 배경수)
함평군 月奉里교회 (김윤섭)
해남군 院津교회 (변요한, 임성옥, 진인범, 이치도)
장성군 華湖里교회 (강응삼)
여수군 長泉里교회 (정태인, 지원군, 박응삼)
牛鶴里교회 (채진영, 명창순)
고흥군 新興里교회 (한익수, 선영흥)
광양군 新黃里교회 (조상학, 한태원))
순천군 龍塘교회 (김대수, 김혁주, 정운창, 정동섭)
1908년 순천군 新坪里교회 (이눌서, 마여현, 허성오), 二美교회 (정태인)
고흥군 錦山 新坪里교회 (오석주, 박수홍)
구례군 읍교회 (배유지, 장현중, 박양진)
광양군 光陽邑교회 (오기원, 지원군, 배경수), 熊洞교회 (조상학, 서병준)
大芳里교회 (서한봉, 한태원, 박희원)
보성군 陽洞교회 (오기원, 배경수)
영광군 염山里교회 (문영국, 정정옥)
순창군 九龍里교회 (변상순, 박성택) 金城里교회 (조석일)
나주군 西門町교회 (변창연, 배유지) 內山里교회 (오기원, 지원근)
화순군 水里교회 (타마자)
무안군 德山里교회 (강낙언,), 大尺里교회(맹현리, 이장호)
城南里교회 (김서규, 황봉삼, 주덕유)
강진군 瑞山里교회 (박창인, 신도우)
해남군 草松里교회 (원봉수, 원사기, 원명오)
제주도 錦城里교회 (이기풍, 김재원)
1909년 나주군 德谷里교회 (김대홍)
무안군 星岩里교회 (강익수, 박화일)
함평군 永興里교회 (이계완)
해남군 孟津里교회 (변요환, 임성옥), 大月교회(박영호, 원덕찬, 서중일)
광주군 日谷교회 (이주상, 배유지)
고흥군 玉下里교회 (박용섭)
광양군 栢岩里교회 (김평장, 장석지), 蟾巨里교회 (장주환)
旨郞里교회 (강대오)
순천군 大峙里교회 (지원근), 九上里교회 (정동섭), 邑內교회 (최사집)
제주도 朝天里교회 (이기풍)
1910년 보성군 文陽里교회 (고라복, 배경수),
大峙里교회 (이형숙, 조규혁, 신성일)
함평군 鄕校里교회 (서화일) 水湖里교회 (김홍식)
무안군 九井里교회 (강인숙, 이화민)
강진군 鶴掌里교회 (김두천, 강자선, 이성현, 조승일)
해남군 邑內교회 (하위렴, 김영진),
南倉里교회 (변요한, 김영진, 이경일, 김태언)
장성군 月坪교회 (이중화, 강태양)
순천군 月山里교회 (김군옥)
고흥군 舟橋里교회 (손대회, 박덕만, 최세진, 전창수)
구례군 大由里교회 (장옥규)
제주도 城內교회 (이기풍)
1911년 여수군 西町교회 (박바우)
코잇은 오웬이 담당하였던 광주사역을 마치고 1913년 순천스테이션을 세우는데 건설책임자로 있으면서 스테이션을 확립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 당시 스테이션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은 성지가 되었다. 병원, 학교, 교회가 현대식으로 세워졌다. 매산고는 순천에서 최고의 학교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건물이 세워지기까지 총책임자로서 활동한 사람이 코잇이었다. 코잇은 프레스톤이 미국에서 후원한 기금을 갖고 최고의 스테이션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그 덕분에 순천스테이션이 가장 발전한 형태로 지금까지 현대식으로 탈바꿈하여 보전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코잇은 왕성한 전도활동을 하여 교회를 여러 곳에 세우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