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페어맨 프레스톤(John Fairman Preston, Sr., 1875-1975)) 선교사는 남장로교 출신으로서 북장로교 학교인 프린스톤신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받아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추방되는 1940년까지, 목포, 광주, 순천 등지에서 활약했다.
유진벨과 오웬, 맥컬리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활약한 선교사였다. 순천의 유진벨이었다.
프레스톤이 내한할 무렵, 1901년은 한반도에 대기근이 발생하여 경제적 파탄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1904년은 러일전쟁이 발생하여 정치사회적 불안과 경제적 불안이 가중되던 시기였다.
그러나 영적인 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1903년은 원산부흥운동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1903년에는 강원도 철원 근처 원산에서 1890년 캐나다 남감리교에서 온 의료선교사 하디의 회개 기도에 의하여 영적 각성이 시작되었다.
1903년 8월 하디 선교사는 매년 열리는 외국인 선교사 연합 기도회를 준비하다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않은,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자기 죄를 회개하는 성령체험을 하게 된다.
하디 선교사로 인해 연합 기도회에 참석했던 외국인 선교사 모두가 성령체험을 하게 되고, 각자 돌아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이러한 푸른 눈을 가진 외국인들의 성령체험이 한국인들에까지 전이되어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다.
한반도의 성령의 역사는 장로교 목사가 아니라 감리교 의료선교사에 의하여 나타났다. 장로교에서는 1907년에 이러한 영향으로 대부흥운동의 역사가 발생하였다. 하디의 회개운동은 대부흥운동의 서곡이었다.
이때 일어난 선교사들의 성령체험을 감리교회에서는 ‘1903년 원산대부흥운동’이라 부르고 있다. 뜨거운 성령 체험을 한 하디 선교사는 그 후부터는 원산, 철원, 개성., 서울, 인천, 평양, 부산 등 대도시에서 부흥회를 계속해 인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기독교 신자로 만들었다.
이 당시 순천에서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다기 보다는 호남지역 선교의 대부 유진벨과 오웬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프레스톤에 의하여 선교기지를 통한 선교의 역사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선교기지(스테이션)의 새로운 장을 쓸 정도로 남감리교출신 하디 선교사 이상의 역사가 나타났다.
성령체험으로 인한 영적인 역사라기 보다는 스테이션 건립을 통한 선교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이다. 프레스톤은 순천 선교의 대부가 되었다. 순천 선교기지를 가장 발전된 형태로 구축하면서 선교활동을 벌여 성공적인 선교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 자취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한인들도 약 2만명이상 전 세계에 나가서 선교사로 활동하지만 120년전의 프레스톤처럼 선교기지를 확립하고 선교를 하는 선교사들이 많지 않다. 거의 생계형 선교사들이 대부분이다.
생계형 선교사들의 활동만을 갖고서는 그 나라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다. 통합적인 선교가 구축되지 않는 한, 선교는 대부분 실패로 끝나게 된다. 특히 선교사들의 자녀교육이 잘 되기가 어렵다. 그러나다 보니 한국에서 오는 선교자금의 대부분은 자녀들의 영어교육을 위해서 쓰여진다.
그러므로 한국장로교회도 선교기지를 통한 선교활동을 장려해야 한다. 선교사들이 120년전에 만든 스테이션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한국선교사들이 해외로 나가서 스테이션선교를 하는 선교사들은 거의 없다. 일단 한인 선교사들까리도 단합이 되지 않고 일치운동을 벌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온 120년전 미국 선교사들보다 더 열악한 정책을 구사하여 선교의 진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해외선교에서도 대학을 세우는 선교사, 병원을 세우는 선교사들이 지역주민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순천스테이션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눈물의 목포와 기쁨의 선교 스테이션
불행하게도 강원도 원산은 성령을 통한 눈물의 회개 씨앗 역사는 있었지만 미래선교를 위한 선교스테이션은 없었다. 원산은 눈물의 회개는 있었지만 기쁨의 스테이션이 없었다. 그러나 목포는 이난영의 눈물의 노래가 있었지만 기쁨의 선교 스테이션도 있었다.
기쁨의 스테이션
기쁨의 스테이션은 양동교회를 통하여 항일운동이 발생하고, 많은 신앙인들이 이 교회를 통하여 기쁨의 예수를 만났다. 예수는 한민족에게 기쁨이었다. 목포에는 학생들에게 기쁨의 근대 문명을 가르쳐 주는 영흥학교와 정명학교가 있었다.
선교의 실패를 통한 회개각성운동이었다. 그러나 남장로교회의 호남선교는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 모두 성공하였다. 더군다나 전주의 탐관오리의 수탈을 통한 동학혁명, 목포의 노동력 착취를 통한 부두혁명, 신안의 소작농의 착취를 통한 농민혁명, 광주의 인권을 유린한 광주학생혁명 등의 눈물어린 항쟁과 혁명사건이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산과 같은 회개운동이 없었어도 선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안정된 스테이션을 통한 선교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호남선교가 기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눈물을 통한 심령의 부흥운동이라기 보다는 선교스테이션을 통한 선교의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스테이션의 선교운동은 교회, 병원, 학교를 통한 영적 각성, 문맹 퇴치, 육체 치유, 항일운동을 통한 입체적인 선교활동이었다. 물론 예배시에는 통회자복을 통한 눈물의 회개운동도 있었다.
특히 목포와 광주와 순천은 남장로교 전남 선교와 이 지역 기독교 발전의 시발점 이요 주요 중심지였고 이 한가운데 프레스톤이 있어서 전남지역 기독교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 그의 선교는 남장로교 한국선교와 전남지역 기독교의 발전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길잡이가 되고 있다.
프레스톤은 1875년 미국 조지아에서 출생하여 남장로교선교사이지만 유일하게 북장로교 신학교인 프린스턴신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안수를 받아 1903년에 내한하여 변요한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일제에 의하여 강제출되는 1940년까지 목포 광주 순천 등 호남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그는 선교사와 교육자로 약40년간 활동하며 호남지역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민족의 광복을 5년 앞두고 도미하였다.
프레스톤 선교사의 처음 사역지는 눈물많은 목포였다. 그는 목포를 중심으로 해남과 강진까지 교회를 개척하였다. 유진벨과 오웬이 1903년에 목포를 떠난 이후 프레스톤은 교육선교로는 1905년에는 목포에서 영흥학교 교장으로 학교건물을 건축하기도 하였으며, 교회선교로는 강진의 학명리교회, 매곡교회, 해남의 원진, 맹진, 남창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프레스톤의 장점은 후원금을 많이 끌어오는 것이었다. 미국에 귀국할 때도 오직 하는 일은 한국선교를 위해 후원금을 모으는 것이었다. 이러한 후원금 덕분에 순천스테이션을 확립할 수 있었다. 전주 스테이션도 잘 확립되었지만 순천스테이션이 가장 잘 확립되었다.
1907년에 광주에서 의료선교를 맡고 있던 오웬이 별세하였다. 광주에서는 한국말을 구사할 수 있는 선교사가 유진벨 선교사 뿐이어서 부득이 사역지를 다시 광주로 옮겨 오웬 선교사의 후임자로 사역을 해야만 했다.
프레스톤은 광주에서도 교육선교에 헌신하여 1908년 광주에서 숭일학교 초대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10년에는 학교건물을 건축하였다.
1912년, 프레스톤 부부선교사는 순천지방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1913년 4월에 순천에 선교사 주택이 완공되자 순천으로 이사하였다. 순천은 필요한 인적 물적 장비를 모두 갖추어진 상태여서 선교지로 개설한 한국 최초의 유일한 선교 거점 도시였다.
프레스톤은 크레인과 힘을 합하여 순천에 매산학교를 설립하기도 하여 명문학교로 발전시켰다. 티몬스와 함께 순천 알렉산더 병원을 설립하고, 농촌교역자와 지도자를 양성하기도 했다.
또한 순천에서 프레스톤은 가곡리교회와 평중리교회, 사룡리교회의 설립에 기여하였다. 1918년에는 순천읍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교회역사 수집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프레스톤은 여수지역에서 여수, 장천, 봉양, 우학리교회와 여수서교회, 봉전리교회, 서정교회에서 동사목사로도 시무하는 등 그의 사역은 쉴 틈이 없었다. 신안의 맥컬리와 목포의 유진벨과 광주의 오웬 이상이었다.
또한 그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순천노회장을 지내는 것을 비롯하여 여수와 순천지역 여러 교회의 설립과 당회를 조직하는 등 폭넓은 활동을 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외에도 완도 관산리교회를 설립하였고, 나주 삼도리교회, 덕곡교회, 해남 고당리교회, 무안 성남등에서에서 시무하고 삼별초 항쟁과 세월호사건이 있었던 눈물많은 진도에서 분토리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프레스톤이 교육과 교회, 병원설립에 재정까지 후원받고 열정적으로 사역할 수 있었던 것은 남장로교의 선교스테이션 정책때문이었다.
미국 남장로교회의 선교스테이션정책의 성공으로 인해 호남의 전도율은 약 30%까지 달할 정도였다. 그는 열정적인 선교를 마치고 일제의 강제 탄압으로 인해 1940년 광복을 5년 앞두고 한국을 떠나가야 했다. 그는 미국에서 1975년에 '대한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영원히 떠났다. 그것은 선교여행이 아니라 안식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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