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의 배경- 해방직후 좌우대립
여순사건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미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여 한국의 기독교를 활성화시킬 무렵, 다른 이면에서는 어두운 세력들이 좋은 밭에 사회주의리는 이념의 가라지를 뿌리고 있었다.
그래서 여순사건을 알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공산주의는 사회적 낭만으로 출발했지만 결국은 혁명의 정신을 앞세우면서 폭력과 폭동, 살상으로 끝나고 말았다. 기독교 정신이 없는 좌파적 이념은 장미빛 환상에 불과했다.
해방직후 좌우대립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장미빛 환상을 갖고 물밑으로 잠재하였던 것이 해방 이후 표면에 드러나면서 피빛으로 변하였다. 서로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이다.
한인의 최초의 공산당 창립 -한인 사회당
한국인의 공산주의 운동은 레닌혁명 이후 시베리아에서 기원적으로 발생하였다. 1918년 5월 13일, 하바로브스크에서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김립, 오성묵, 오와실리, 이인섭 등과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을 창당하였다.
한인사회당은 기관지 발행, 군사학교 설립, 일본군병사들을 상대로 한 반제반전(反帝反戰) 선전, 한인적위대 조직 등을 추진하였다.
상해 공산당과 이르츠크 공산당
한인사회당은 1921년 이동휘가 대표로 있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바뀐다.
반면 1920년 1월 22일 이르쿠츠크에서는 당시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한인 지부인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가 조직되었다. 전자는 이동휘, 후자는 김철훈이 대표하였다. 양자는 근본적으로는 모두 열렬한 독립운동가였다. 이르츠크 공산당은 중국 공산당보다 5년이나 일찍 창건되었다.
그 뒤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서로의 유일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레닌 집단에 경쟁적으로 접근하려는 투쟁 관계에 들어갔다. 이처럼 소련에 귀화된 한인들을 통하여 공산당이 최초로 형성되었다.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나서 한인사회당이 조직되었고 4년이 지나서 고려공산당이 설립되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3일 밤낮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이르크츠크는 무려 블라디 보스톡에서 4,000Km나 떨어진 먼 거리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450Km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거리이다
이르크츠크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세계에서 최초로 봉건체제인 짜르 정부를 무너뜨린 볼세비키 혁명사상에 심취하며 볼세비키 혁명세력인 코미테른과 국제적으로 연대하여 일본에 항거한 얼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우리들의 선조인 독립운동가들은 볼세비키 소련 혁명에 영향을 받아 이곳 이르크츠크는 고려인 독립운동가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정치적 활동무대였다. 지금보다 훨씬 교통이 열악했지만 연해주와 만주벌판을 누비고 이르크츠크까지 활동무대를 넓히며 항일독립운동에 그들은 목숨을 걸었다.
그 결과 1919년 김철훈, 오하묵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 최초의 공산당 조직인 전로 고려공산당 조직을 이곳 이르크츠크에서 설립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여운형, 박헌영 등이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 출신이다. 당시는 일본을 무너뜨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공산주의를 선택했던 것이다.
도구로서의 공산주의와 목적으로서의 공산주의
고려공산당 창건 시에는 지금의 우리처럼 진보, 보수가 없었다. 오로지 독립운동의 일념으로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 소망, 일제에 대한 투쟁만이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수단 공산주의는 목적 공산주의로 변해갔다.
이동휘는 1919년 8월말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이동휘의 상해 공산주의
이동휘는 레닌정권의 힘을 빌려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첫 포석으로서 1921년 봄 상해에서 공산주의자 그룹을 결성한 것이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초대 국무총리가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였던 것이다. 이동휘는 열렬한 기독교인이었고 당시는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창건했던 것이다. 여운형, 박헌영 모두 기독교인이었다. 한국의 공산주의는 기독교인들로 부터 나왔다. 김일성도 기독교 가정이었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대표자회의가 소집되었다. 여기에는 국내와 만주 및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당선언 및 강령규약을 채택하고, 중앙위원회책임위원에 이동휘, 중앙위원 김립·이한영·김만겸(金萬謙)·안병찬, 번역부위원 여운형, 출판부위원 조동호 등의 지도부를 선출하였다. 이 당을 세칭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한다. 여운형은 이동휘와 함께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결성한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이르크츠크 고려공산당이 소련공산당의 적자 경쟁을 하면서 싸우다가 1922년 12월 국제공산당 조직인 코민테른의 주도로 모두 해체되고 새롭게 조선공산당으로 통합되었다.
조선 공산당의 창설
조선공산당의 창설은 1925년이었다. 김재봉과 박헌영은 공산당조직확대와 고려공산청년회원 모스크바 파견훈련을 비밀리에 적극 추진하다가 1925년 11월 22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조선총독부 밀정에 의해 그 계획이 탄로되었고, 김재봉, 강달영 등이 체포되었다.
조선공산당은 일제시대 때 창설되어 해방 이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와같이 1918년부터 남북의 일부 지도자들이 중국과 러시아에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이동휘는 공산당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민족의 독립을 추구하는 방법론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 남한에서는 여운형과 박헌영, 상해에서는 이동휘가 공산주의에 적극 가담하였다. 여운형과 박헌영은 상해와 로시아에서 배운 공산주의를 남한에 주입시키는 역할을 했다. 기독교는 신사참배 거부를 위해 공산주의를 반대했고 일제도 자신의 체제를 흔들까봐 공산주의를 거부했다.
많은 지성인들이 공산주의에 관심을 끌만도 했다. 민주주의를 아직 모르는 상황에서 항일운동을 한 공산주의는 친밀하게 다가웠던 것이다. 한 때 운동원들이 몰두한 주체사상파도 일종의 독개정권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도구적 차원에서의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도구나 수단이 목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김원봉도 항일이라는 투쟁을 위해 도구적 차원에서 공산주의에 접근하였지만 결국 그것이 목적이 돼 북한에까지 들어가 공산당 운동을 펼쳤다.
이처럼 한국의 공산주의는 1920년대 중국, 러시아에 가서 공산주의를 접하게 되면서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정신적 공백을 메우고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위해 조선의 많은 지성인 학생·청년들은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이념을 막스 스레닌주의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상에서 찾게 되었다.
일제가 한국을 점령할 초기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기독교사상을 갖고 와서 민족을 개조시키고 학교를 세워 무지를 일깨우고, 교회를 세워 영적 각성을 시켜주어 많은 한인들의 희망이 되었다.
지금까지 선교사들이 가져다준 업적에 의하여 영향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연대와 이대, 연대 세브란스병원, 전주 예수병원, 광주 기독병원등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해방이후 조선에 공산주의를 소개한 것은 여운형이었고 이를 발전시킨 것은 박헌영이었다. 건준위 초대회장은 여운형이었고 3대 회장은 박헌영이었다. 이미 1920년때부터 조선에서 막스레닌주의 사상이 싹을 피우고 있었다.
이와같이 이념의 선각자들은 공통적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하였고, 해방이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고 노력을 하였던 것이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이 성공을 하였기 때문에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기독교를 통한 국가건설을 하려고 하였다. 기독교 입국론이다.
북한은 막스 레닌주의, 남한은 기독교 사상
불행하게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지 이념의 선각자들을 통하여 35년만에 막스 레닌주의 사상이 한반도에서 기독교를 압도하였다. 그것은 러시아가 신탁통치를 하고 공산당 뒤에는 소련이 있기 때문이다. 폭력을 주장한 막스레닌주의는 소련을 등에 업고 평화를 추구한 기독교를 몰락시켰다.
그나마 남한은 미군의 신탁통치로 말미암아 공산주의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김일성이 1956에 박헌영을 죽인 것도 전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이미 한물간 이념의 논쟁으로 지금까지도 좌우파 논쟁에 시달리고 있는 것도 아직 이념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도구로서의 이념이 목적으로 되어가기 때문이다. 100 여년 전 그들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의 이념 논쟁
변칙 막스 레닌주의의 김일성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청와대 한가운데 있는 것도 이념논쟁을 부추킨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의 신영복 존경발언, 김원봉 서훈발언, 윤이상 묘지 참배 행동 등은 좌우 이념 논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는 대통령의 역사의식 부재이다. 어설픈 역사적 지식이 국론을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1885년에 미국을 통하여 들어온 기독교 사상과 1920년도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막스레닌주의 사상이 한반도에서 지금까지 대립하고 있는 것으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대통령의 말한마디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나훈아의 노래한 구절도 중요하듯이 말이다.
불행하게도 현 정부는 미국보다 중국을 선호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1920년대 여운형과 박헌영은 미국유학이 좌절되자 중국을 선택해서 공산주의 이론을 배웠다. 그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더라면 이승만처럼 기독교정신을 가졌을 것이다.
한국정부가 우환 코로나를 일찍부터 차단하였더라면 한국은 이처럼 고통당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 공산주의를 배운 박헌영은 여운형과 함께 승동교회를 다녔던 사람이지만 결국 공산주의를 선택하게 되었다. 미국대신 중국을 선택하게 되었고 기독교사상대신 막스레닌주의 사상을 선택하게 되었다. 막스레닌주의를 한국에 실현하려고 했던 사람은 박헌영이었다.
박헌영
박헌영은 충청도 예산사람으로서 서자의 아들로 태어났고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다. 그는 1919년 경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미국유학을 시도하였다가 좌절되자, 1920년 중국 상하이에 들어가 당시 임원근, 김단야, 최창식등과 함께 이르츠크파 고려공산당 상해지부에 입당하였다.
그는 정식으로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프랑스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공산주의 선전팜플렛을 번역하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박헌영은 1921년 늦가을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극동 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키 위하여 모스크바로 가, 다음해 1월 고려공산청년동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2년 4월에 김단야, 임원근과 함께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해 귀국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징역 1년 6월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일본의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
일제는 그 당시 공산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러시아혁명의 실상을 착취와 계급이 없는 이상사회와는 반대로 "참담", "통곡", "방황" 등으로 간다고 기사화 했다.
그나마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다 공산주의를 본받아 더럽고 정치는 군웅할거와 같은 과격파 봉기의 무대에 안치되었다는 등의 표현으로 러시아는 생지옥이라고 했다.
일본은 러시아와 대척점에 있었고 군국주의로 당시 서구 근대의 자본주의 문명을 따라잡아 부국강병을 이룩하고자 했기 때문에 일본이 보기에 반자본주의의 기치를 내건 사회주의 사상은 국가의 근간을 파괴하는 위험한 사상이었다. 당시 한국에 온 미국 선교사들도 러시아 혁명과 공산주의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공산주의
이와같이 일제시대 이미 사회주의 사상은 국내에서 일제도 우려할 만큼 박헌영, 여운형을 중심으로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여운형은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추천장을 받아 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기도 하였다. 여운형과 박헌영은 모두 합동측 승동교회출신으로서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 이념이 신앙을 앞설 때가 많은 것이다.
막스의 석사논문도 요한복음에 대한 것이었다. 현 정권 역시 기독교 정신보다 좌파적 이념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여운형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이미 좌파에 물들어 1945년 공산당이 중심된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박헌영이 3대 위원장을 맡게 된다.
여운형
그는 중국에 유학하면서 공산주의에 젖어 1944년 8월부터 일본의 패전을 예측하고 민족해방을 준비하기 위하여 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공장, 학교, 기업 등에서 대열확대의 조직화를 했고, 내무・외무・재정부문과 지방별 위원을 두었다. 해방직후 정국의 주도권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장악했다.
건준은 초기결성부터 공산당 계열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고 우파세력과도 협력을 모색하였으나 송진우를 비롯한 민족주의 세력이 거부하면서 좌우합작은 불발로 끝났다.
여운형, 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건준위 여운형은 1945년 6월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내부는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주의 세력의 헤게모니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당시 김구를 비롯한 민주주의 세력은 인공수립으로 신국가 건설의 주도권이 좌익에 넘어갈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그만큼 해방직후에는 여운형과 박헌영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공산주의가 뿌리를 내리게 되어 남로당이 전국화되기도 하였다.
김구는 오랜 동안 중국에서 임시정부를 위해 활동함으로 국내 지지기반이 약했다. 결국 김구는 어떤 정치적 역량도 발휘하지 못하고 안두희에 의해서 사살되고 만다.
여운형은 이상사회를 꿈꾸면서 1946년에는 29개의 좌익단체를 결성하여 민주주의 민족전성을 결성하기도 했지만 정책노선이 명확하지 못하여 박헌영을 비롯한 좌익단체에 밀려났다.
여운형은 기독교인이기도 했고 합리적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내부에서도 먹혀들지가 않았다. 이처럼 해방이후에는 사회주의 자체를 잘 알지 못했던 한민족에게 공산주의는 새로운 이상사회실현을 위한 유토피아와 같았다.
김일성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27년에 공산청년동맹에 참여하고, 1931년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함으로 본격적으로 공산주의 이념을 실현시키는데 노력을 하였다. 박헌영과 여운형과 같은 시대의 인물이다. 김일성은 1956년 박헌영을 6.25 전쟁 실패로 몰아 사살했다.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면서부터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정권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급진적인 사회개혁이 추진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1946년 11월 북조선인민위원회 대의원선거가 실시되었고, 1947년 2월에 사실상 정부의 역할을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처럼 해방직후 남한이나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신봉으로 하는 정당이나 국가가 선포된다.
1948년 9월 9일 오전 10시, 모란봉극장에서 6일째 최고인민회의가 열렸다. 아시아지역에서 처음으로 사회 정권 출범을 알리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자리였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치러진 인민공화국 선포식에서 김일성은 인민정권의 성격을 "남북조선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수립된 통일적 조선 중앙정부"라고 규정지었다.
김일성은 1949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장이 되고 1950년에는 군사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1905. 6. 25. 남침을 하게 되었다.
공산주의 사상의 태동
이처럼 공산주의사상은 일제시대부터 새로운 돌파구로서 싹트게 되면서 해방직후 바로 현실화 되었다. 일제시대는 식민지 억압하에 있었기 때문에 한민족이 주체적으로 사회주의를 억압하거나 반대하기 어려웠다.
중국 상하이에 임시정부에서 많은 독립투사들이 중국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손쉽게 공산주의를 맛볼 수 있었다. 김원봉도 독립투사활동을 하다가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김일성과 같이 활동하였던 것이다. 일제시대 사회주의 세력은 오히려 항일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였기 때문에 일부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을 사상이었다.
그래서 해방직후 남한은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서 적대적 감정이 없었다. 일단 사회주의나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이다. 해방직후 남한사회는 정신적 정치적 공황이었고 서로 다른 사상과 문화가 공존하였고 지배적 이념이 없었던 사실상 무정형상태 였다.
남한에서도 지도자들에 따라서 서로의 입장이 달랐다. 여운형과 박헌영도 입장이 달랐고 이승만과 김구도 입장차이를 드러냈을 정도로 그야말로 해방이후의 정국은 제자백가 시대 아니면 춘추전국시대와 같았다.
해방후 공산주의에 대한 우호적 입장
과거 일제는 공산주의에 대해 "인류의 공적이요 세계상의 악마적 존재"로 평가했다. 그러나 해방직후 많은 한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탈선비행은 나쁘지만 그 이념만은 알고보면 국민의 대부분이 참으로 환영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도 있었다. 오히려 미국에 대해서는 감사와 우호의 시선을 보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경계와 적대의 이중적인 입장도 있었다.
1945년 12월 말 '신탁통치 파동'이전에 남한에서 조선공산당과 좌익에 대한 비난은 있었지만 공산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공식적 논의는 거의 없었다. 공산주의도 항일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공산주의에 대해서 그렇게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공산주의는 착취를 근절해서 노동 대중을 잘 살게 하는 이념으로 농민과 노동자를 위한 이상적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해방 이후 정신적 공황에 빠져있던 한민족은 우선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사상에 연대했고 점차 소작인이나 농민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여순사건이나 제주 4.3 사건은 일부 남로당 출신 사람들이 봉기하거나 이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을 전혀 알지못하는 무지몽매하거나 소작인들이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가지면서 아무것도 모르고 가담을 했거나 좌익(빨치산)들을 도와주면서 도매급으로 좌익으로 몰려 대규모 학살을 당했던 사건이다.
제주 4.3 사건도 우연잖게 말에 탄 경찰이 아이에게 부상을 입히면서 이에 항의하는 민중들을 향하여 경찰이 총을 쏴서 6명을 학살하자, 경찰과 민중의 싸움으로 시작한 것이 좌우의 극한 대립으로 몰고가 민중들이 좌익으로 몰리면서 무참하게 희생을 당했던 것이다.
제주 4.3 이 없었다면 여순반란은 없었을 것이다. 제주 4.3도 처음부터 남로당이 주도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이 폭동을 이용하였을 뿐이다. 남로당과 좌익들은 당시 많은 기독교인들을 죽이고 교회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념앞에 자신과 다르면 모두 적이었다. 이도종목사는 좌익에 의하여 생매장 당했다.
박헌영과 여운형은 모두 기독교인이었고 승동교회에서 영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박헌영이 미국유학이 좌절되지 않았더라면 공산주의에 물들지 않았을 것이다. 여운형과 박헌영은 중국에 유학함으로 공산주의 사상을 맛보고 러시아 공산당 대회에 참여함으로 본격적인 공산주의자가 되었던 것이다.
순천 스테이션
순천스테이션(선교기지)는 호남의 5개 스테이션 중에서 가장 성공한 스테이션 중의 하나 이다. 그러나 1948년 10월에 갑자기 여순반란사건이 발발하면서 좌익이 판을 치면서 많은 사람들이 목회자와 교회를 때려부수고 죽이는 등 하여 수많은 피해가 발생하였다.
지금까지의 선교사들의 피와 땀이 물거품이 되는듯 싶었다. 다행이 9일만에 반란이 압도되었지만 민간인들의 피해는 너무나도 컸다. 좌익으로 인한 우익들의 피해도 컸다.
이념전쟁은 서로 사상이 다르면 인권이나 생명, 자유 같은 인도주의 사상은 아랑곳없이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이념전쟁은 반대편 사상을 가진 사람은 모두 적이었고 죽여야 직성이 풀리는 전쟁이었다. 그러나 기독교는 모두 살리는 종교였다. 안재선은 이념으로 손양원목사의 두 아들을 죽였지만 손양원목사는 기독교정신으로 사형수 안재선을 살렸다. 이념과 기독교정신의 차이였다.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한 일은 한민족을 살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동학교도들까지 살리는데 앞장을 섰다. 사탄은 이념논쟁을 통해 좌익, 우익 양측을 이용하여 서로 살상을 하도록 했다. 적어도 무장을 하지 않은 민간인들은 살상을 하지 말아야 했다.
순천은 선교스테이션으로 어느 지역보다 복음을 안정적으로 많이 전했다. 병원을 세우고, 매산학교를 설립하고, 교회를 창립하는 등하여 가장 안정적인 선교를 하게 되었던 지역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미국에서 가져온 차까지 타고 다닐 정도였다.
여수.순천 반란사건
여수· 순천 10.19 사건 또는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에 여수에 주둔 중이었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로 출동하여 자국민을 진압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일으킨 반란 사건이다. 김지회는 중위였고 지창수는 특무상사였다.
좌익의 도발
군대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은 1948년 국방경비대(대한민국 국군의 전신)는 모병제였고, 다양한 방법으로 입대 시 신원조회를 하는 지금과 달리 신원조회가 허술했기 때문에 경찰의 탄압을 받았던 좌익계열과 친일 지주에 반감을 품은 소작농, 빈곤 노동자의 자식들이 신분상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입대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건군 초기 미 군정은 군인이 정치적 견해를 갖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제재를 가하지 않고,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익들도 군대에 입대하는 것이 가능했다. 여운형, 박헌영이 세운 남한의 공산주의 세력인 남로당에서 군을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위장입대시킨 요원들도 많이 있었고 이들이 군대에서 많은 동조자를 포섭한 것도 사실이었다. 초기 많은 군인들이 동원된 것만 해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같은 공권력을 가진 경찰과 군이 무장충돌을 벌일 정도였다.
명분은 동족상잔이 싫다고 말했지만 사실 김지회와 주창수는 남로당 소속 세포 조직의 조직원들이었다. 이미 박헌영을 통한 남로당의 세력들이 전국에 퍼져있었다. 여순사건은 최종적으로 9일만인 10월 27일에 진압된 사건으로, 반란군과 진압군 양측에서 저지른 민간인 학살로 논란을 빚었다. 학살당한 피해자 대부분은 실제 반란군이거나 좌익인사이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우익에게 지명되면 확인 과정 없이 즉시 총살되었으며, "죽은 후에 좌익으로 분류"되었다.
한때는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단지 두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일으킨 사건이라고 해서 공식 명칭에서 반란이라는 단어가 삭제되었다. 다른 명칭으로는 '여순 14 연대 반란사건', 또는 '여순군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려수군인폭동'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2013년 기준 우리민족끼리에 적혀있던 내용이다
순천이 장악당한 20일 오후 5시께 구법원 앞에는 농업학생 50여명, 사범학생 60여명, 순천중학생 50여명, 매산중학생 30여명이 모인 것을 계기로 점차 무장반란학생조직으로 변해 갔다. 이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기독교 사상을 갖고 세워진 매산중학생들까지도 반란군에 연대하였다.
9일 천하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제주 반란군 토벌을 명받은 국군 14연대의 지창수 상사와 김지회 중위 이하 40여명의 좌익 분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장교 22명을 포함해서 40여명의 영내 군인들을 죽이고, 미리 내통해 둔 여수 시내 600여명의 남로당 분자들과 여수를 장악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 커졌다.
좌익은 남녀 학생들을 동원하여 인민공화국 깃발을 세우고 벽보를 붙여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남진중이다”, “이승만은 일본으로 도망갔다”, “조국해방이 눈앞에 왔다”고 민심을 선동, 동요시켰다.
인민군은 우익계 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한 인민재판을 열어 “인민의 피를 빨아먹은 아무개를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한다”고 선고하면 여기저기서 “옳소”라는 응답이 나왔다.
우익의 정복
순천의 경우도 죽음의 도시였다. 반란군은 순천을 장악한 후 벌교와 광양 등 인근지역 경찰관서를 습격하고 경찰관과 행정기관 및 우익계 인사들을 한정없이 학살했다. 정부는 송호성 장군을 반란군 토벌 전투사령관으로 임명 순천을 탈환했다.
여수 탈환 1차 시도가 실패했을때 15연대장 최남근 중령과 중대장 김남근 중위의 이적행위가 드러났다. 최중령은 반란군 김지회 부대와 접전시 사살할 기회가 있었지만 함경도 동향이라는 이유로 살려줬다. 그는 곧 군법회의를 통해 총살형이 집행됐다. 김중위도 곧 사살되었다.
순천 탈환후 순천지청 박창길(朴昌吉) 검사도 좌익으로 드러나 총살됐다. 박검사는 황해도 출신으로 8·15후 월남한 우익계 였지만 남로당 간부의 호주머니에서 명단이 나와 본인은 억울하다고 호소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순천 출신 제헌국회의원 황두연(黃斗淵)도 인민재판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여수와 순천이 탈환되자 반란군은 지리산과 덕유산으로 도주하여 수시로 출몰하며 무장저항했다. 12연대장 백인기(白仁基) 연대장은 반란군과 접전하다 혼자 남아 탈출이 불가능해 지자 25세의 젊은 나이로 권총 자살했다. 김지회와 홍순석도 토벌군 앞에 최후를 맞았다. 김지회의 처는 쌍권총 여두목으로 불리며 신출귀몰했지만 그녀도 처형됐다.
우익의 살상
무고한 청년들이 단지 학생복을 입은 죄, 흰 운동화를 신은 죄, 국방색 런닝셔츠를 입은 죄, 머리를 짧게 깎은 죄, 과거에 좌익단체에 가입한 적이 있다는 죄, 가족과 친구 가운데 좌익에 가담한 사람이 있다는 죄 아닌 죄로 학살되었다.
여순의 반란자, 김지회
여순 반란은 끝내 진압되고 계엄령도 해제됐지만 그들의 잔당은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로 잠입하여 6·25 직전까지 준동했다. 이렇게 더듬어 보면 김일성의 남침은 남한내의 남로당의 총파업과 폭동과 반란과 뿌리를 같이 한다고 믿어진다
홍순석, 지창수,김지회는 여순사건 주모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상사 지창수는 반란의 총책임자로 굳어져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지회와 홍순석이 병사들을 지휘하였다. 당시 정부가 인식하는 반란의 주모자는 김지회를 비롯, 홍순석, 이기종, 등 제 14연대 3명의 중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들은 국방경비사관혁교 3기 동기생이다. 국방부 발표와 언론에서는 김지회를 '적군의 수괴', '반란의 참모장', '총사령관'으로 불리면서 현상금까지 붙은 사람이었다.
당시 1948년 11월 3일 서울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반란군의 주모자 김지회는 국군사관학교 3기 졸업생으로서 나이는 26세이고 계급은 육군중위로 14연대 중대장이었다고 한다. 경항신문 1948년 11월 4일 자에 의하면 김지히를 체포하는 사람에게는 50만원을 주고, 사살하는 사람에게는 25만원의 현상금을 줄 것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악명이 놓았다.
이들은 비밀조직원이었던 김지회 중위에게 지휘권을 주고 열차편으로 북상해서 같은 비밀 남로당원인 홍순석이 지휘하던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순천까지 접수하여 좌익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국군의 반격으로 10월23일 순천, 10월 27일 여수가 탈환된 뒤 대부분 지리산으로 도주해서 여순사건은 9일 천하로 끝나게 되었다.
좌익과 우익들의 살상
여순사건에서 반란군은 며칠 사이에 경찰관 공무원 등 우익인사들 800여명을 살상하는 대학살을 자행했고, 반란군을 토벌한 국군과 경찰들의 보복적 살상도 극심해서 무고한 양민 역시 2,500 여명 이상 희생되었다.
양민들은 우익이 강하면 우익에게 피해를 당하고 좌익세력이 부상하면 그들로부터 학살을 당하여 이중적으로 피해를 보았다. 이 반란사건을 기회로 국군의 숙정작업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서 군내의 좌익계 인사가 다수 검거되고 처형되었다.
미약한 좌익들의 반란
한국전쟁에 반대했던 북한의 지도자 최용건이 미군 참전으로 후퇴하던 당시 내뱉은 말은 다음과 같다. 인민군은 재빨리 남으로 휩쓸고 내려갔다. 그러나 처음 몇발의 총성만 울리면 남한내에서 민중이 궐기해서 이승만을 타도할 것이라고 입버릇 처럼 장담한 김일성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후루시 초프는 남한내에서 자발적인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김일성과 박헌영의 확신은 여러문서를 통하여 확인될 수 있었다. 무력통일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가 주를 이루었고, 연안파의 지도자 김두봉 역시 김일성과 박헌영과 비슷한 생각을 가졌다. 박헌영의 전국적인 민중봉기설이 예측을 빗나가자, 김일성은 전쟁패배의 원인을 박헌영에게 돌리면서 그를 죽였다.
우익진영의 살상
우익진영은 좌익이라고 생각되는 민중들에 대해서 엄청난 살상을 가했을 정로도 좌파를 척결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군인들이나 일반 사회가 판단한 소위 빨갱이는 도덕적으로 파탄난 비인간적 존재, 국민과 민족을 배신한 존재로 죽어도 되는 존재, 죽여야만 하는 존재였다.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와 논리와 다르지 않았다. 좌우익이 판치던 시대, 빨갱이는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당하였다.
빨갱이사냥에 나선 국가폭력은 정당화되었고 정부 진압군은 빨갱이만 죽여야 하는데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까지 빨갱이로 취급하여 대량학살을 한 것은 큰 문제였다. 여순사건이나 제주4.3의 문제는 많은 민중들이 빨갱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빨갱이 취급을 당하여 무고하게 생명을 잃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짜 빨갱이들이 행한 행위는 군인과 성직자, 경찰, 교회에 대한 박해도 무시하지 못한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북한에서 공산당들에 의해 죽어갔다. 종교는 아편이기 떄문에 막스레닌주의 사상에 찌든 사람들은 교회를 이해하지 못했고 파괴되거나 사라져야할 존재들이었다. 불행한 것은 해방이후 좌우이념이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은 상태에서 분명한 것처럼 대량학살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구폭동, 여순반란사건, 제주 4.3사건은 좌우익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좌우익의 확신을 가진 상부지도자들에 의해서 민간인들이 대규모 희생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해방이후 6.25 이전의 사건들은 애매한 민중들만 희생되고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상처로만 남아있다.
제국주의의 적에서 이념의 적으로
동학이나 3.1운동은 일본이라는 분명한 제국주의 적이 있었지만, 해방이후 분명한 적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념을 통한 적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같은 민족이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적이 되었다. 더군다나 미군정은 해방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경제정책은 실패를 하고 만다. 경제의 불안정은 민중의 큰 위협이 되었다.
특히 경찰의 치안유지는 민중으로서는 참으로 감당하기 역겨운 부분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군 제복을 입고 완장을 차고 일본인의 앞잡이 역할을 했던 친일파가 여전히 권세를 부리고 있었다. 해방이후에도 친일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좌익은 해방되기 이전부터 소련과 중국의 영향을 받아 민중을 조직화하면서 적절한 시점에 민중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미국선교사들은 공산주의자들이 판을 치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는 막스레닌 사상이 대한민국을 휩쓸고 갈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기도 하였다.
이미 일제시부터 공산주의자들이 민중사회에 전염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운형과 박헌영은 하루아침에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제시대부터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제국주의 식민세력에서 벗어나 많은 지식인들과 민중들이 좌익의 정치적 모험주의에 반응하였다. 이들은 민주주의를 맛보지 못한 상황에서 정치적 주체로서 이념에 대한 이해는 매우 낮았지만 좌익의 편에 서서 강력한 정치투쟁에 나섰다.
당시만 해도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고 있었고, 미군정 지배정책의 무능함과 권위주의적인 태도에 좌익은 이를 이용했고, 많은 지식인들과 가난에 찌달린 민중들은 좌익이 제시하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고 있었다. 좌익은 토지와 평등을 통한 신천지 세계를 부각시켰고, 민중들은 이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해방후 사회주의의 대한 환상
1948년 미군정청에서 서울 시민들을 상대로 조사에 의하면 시민의 77%가 장차 수립될 정부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경제력도 북한이 남한을 압도했고, 북한은 농지개혁정책에 성공을 했고, 친일파를 청산했다.
그러나 남한은 농지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았고 경제도 실패했다. 당시 경제력에서도 북한은 농지개혁에도 성공을 하여 경제력에 있어서 남한을 압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지지했다.
북한의 사회주의
북한에서도 공산당은 급속도로 성장했고 조직은 물론 인원면에서도 여타 정당을 압도했다. 1945년 12월 2만 6천명이었던 당원이 단 1년만에 40만명으로 불어나게된다. 농민,노동자를 비롯한 전국단위의 직업총동맹은 전국화되었다.
조직면에 있어서 남한의 다른 정당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남한에서도 조선공산당을 조직한 박헌영의 연안파는 미군정때문에 약세를 면치 못하였지만 북한에서 김일성과 갑산파는 맹위를 떨쳤다.
그만큼 좌익은 일제시대부터 민중속을 파고 들었던 것이고, 해방이후 혼란한 시기에 그들의 활동은 민중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북한 내부자료에 따르면, 남한에서는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은 7월 초에 이미 조선의용군 본부가 조직되었다.
조선노동당은 ‘의용군 추모사업에 관하여’라는 결정을 통해 1)의용군은 18세 이상의 청년으로 하되 빈농, 청년들을 많이 끌어들일 것, 2)각도에 할당된 징모수는 책임완수할 것, 3)전 남로당원으로서 변절자(보도연맹가입자)도 의무적으로 참가시킬 것 등을 규정하였다.
많은 젊은이들이 북한을 동경하여 지원하였던 것이다. 종교의 시대가 물러나고 이념의 시대가 돌입하였던 것이다.
막스 레닌주의 앞에 무릎꿇은 기독교
그 이전에 기독교가 근대화문명을 필두로 북한과 남한, 전국민에 퍼져있었지만 막스레닌주의 앞에 그만 무릎을 꿇고 북한을 내주고 말았던 것이다.
막스레닌주의는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 폭력을 가리지 않았지만 기독교는 보이지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기 때문에 평화이외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는 없었다. 막스레닌주의 앞에 기독교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현대도 마찬가지이다. 막스레닌주의 사상이나 주체사상으로 물든 사람들은 기독교를 폄하하거나 반기독교정책을 일삼고 있다.
막스레닌주의 사상의 약점은 편을 가르거나 국민대통합을 하지 못하고 자신들끼리 단결하고 조직화하여 전국을 통차하는 것이다. 그들도 인민이나 민주주의를 앞세우지만 자신들의 약점은 가리고 상대편의 약점은 침소봉대하여 부풀려 상대방을 매장시킨다.
그러나 서부유럽이나 북부유럽, 미국처럼 기독교가 뒷받침된 사회주의는 국민 개개인의 인권과 남녀 평등을 중시하여 상식이 통하는 제도적으로 성공한 나라가 되었다.
여성도 평등화 되어 여성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일 정도로 양성평등화가 실현된 나라이다. 때아닌 좌우논쟁이 되고 있지만 이미 일제시대이후 해방전후로 부각되었던 이념논쟁이었다. 좌우할 것 없이 민중들만 이념논쟁의 희생자가 된다.
좌익의 살상 알려져
한국전쟁 이후 좌익에 대한 여론도 달라졌다. 전쟁 전후를 맞이하여 좌익들에 의한 많은 학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다섯 살의 나이에 미숫가루와 소금으로 채워진 헐거운 배낭을 메고 엄마, 누나, 형, 동생들과 하루 세 끼 미숫가루 물로 허기를 채우면서 온종일 걸었다. 너무도 배가 고파 개울에서 피라미를 잡아 날로 삼켰고 이름 모를 열매를 따먹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죄다 먹었고 쥐어짜는 배앓이와 설사로 어린 나이에 죽음의 공포를 맛 보았다. 밤에는 공터에 모여 빨갱이 노래를 배워야 했다. 너무 힘들어 빠지려 하면 ‘놈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죽는다’며 아홉 살배기 형이 귓속말로 타일렀다.
동네에서 인민재판이 벌어지면 맨 앞줄에 앉아 사람 때려죽이는 것을 보아야 했고, 경찰 출신이라 하여 붙잡혀 총살당하는 것도, 내 또래로 보이던 그의 어린 아들이 죽창에 찔려 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도 겁 없이 지켜보았다.
특히 일부 좌익의 친일파보다 못한 반인륜적 행위는 점점 좌익들이 실체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실체를 가치판단으로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역사는 해석이지만 실체가 없는 해석이라면 소설이 되고 말 것이다. 공산주의와 좌익들의 수많은 사실적인 행위는 결코 한국사회에서 용납되기는 어려운 행동이 었다. 물론 좌익을 척결한다고 해서 무고한 민중들까지 대량학살한 것도 국가로서는 큰 실책이었다.
예수없는 좌익과 우익은 파탄
예수가 빠진 사회주의는 결국 공산주의 일당독재로 가기 때문에 쿠바나 남미처럼 국가가 경제파탄이 나거나 멕시코나 엘살바도르처럼 인권착취가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게 된다.
인권과 권리, 평등,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를 일지 못했던 민중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념의 갈등과 대립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고 미군정과 우익은 공권력을 사용하여 좌익과 민중봉기를 탄압했다.
특히 경찰은 공권력을 갖고 민중을 압박했고, 물리력으로 살상까지 감행했다. 경찰 대 민중, 친일파대 좌익이라는 두가지 정체성이 혼재한 상태에서 힘을 가진 자들이 약자들을 처참하게 살상했다. 좌익이 힘이 있을 때는 우익을, 우익이 힘이 있을 때는 좌익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은 핵심 좌익이라 판단, 대중 살상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미군정과 우익은 이러한 현장의 심각성을 무시한 채 오직 이념 투쟁, 정치투쟁에서의 승리만을 목적으로 국가를 운영한다. 민중에 대한 인권이나 생명은 안중에도 간 곳이 없다.
이념은 좌우 할 것 없이 폭력으로 이어져
이는 여전히 국가가 민주주의를 모르거나 이념에 치우친 나머지 민주주의의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우익적 이념을 앞세운 나머지 백성들의 인권은 사라지고, 생명보존 또한 경홀히 여기게 된다. 그러나 보니 어느 순간부터 진압이 아닌 학살, 좌익의 승리를 넘어 민간인을 도륙하는 끔찍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는 미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미군들은 충북 영동의 노근리 사태 때 피난가는 민중들을 좌익이 침투했다며 '묻지마' 사격을 가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었다.
성서의 정신, 가라지와 알곡
제주 4.3 사건 때도 미군은 80%가 민중들안에 좌익이 있다며 척결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3:27-29절에 보면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하자, 주인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한다. 그러자 주인이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고 하면서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고 하여 가라지를 뽑지 않는 이유는 알곡까지 뽑을 까 염려했다.
여순사건이나 제주 4.3사건, 광주 518 사건은 가라지를 뽑을려고 하다가 너무나도 많은 알곡이 뽑힌 케이스였다. 좌익 몇사람 척결하겠다고 수많은 민중들을 척결한 것은 국가의 과오였다. 동학혁명부터 4.19 의거, 광주 518 민주항쟁, 제주 4.3사건은 국가가 공권력을 동원하여 민중을 학살한 케이스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사건
여순사건 역시 남로당이 많이 있었고 우익인사들을 많이 학살한 사례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무고한 우익이 이념을 명분으로 하여 좌익과 더불어 많은 민중들을 학살한 것도 사실이다. 민중들은 좌우이념도 알지못한 채 군경에 의하여 좌익으로 몰려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당했다.
반공이라는 이념의 합리화로 인명살상
군인과 경찰은 더욱 잔혹하게 진압작전을 주도하고 반공이라는 명분으로 모든 것을 합리화하였다. 물론 좌익도 완장을 채워주니 죽창을 들고 많은 지주와 군인, 경찰, 종교인사들을 죽였다.
좌익은 경찰이나 군인, 성직자는 적으로 간주, 죽이는데 앞장을 섰고, 완장을 거뭐진 사람들은 친일파 이상으로 악독하여 지주와 종교인, 경찰, 선생, 자본가 등을 학살하는데 열을 올렸다. 지금도 순천과 여수교회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자손들이 살고 있다.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가 이념을 넘어서 사랑으로 치유해야
여수와 순천지역의 목회자들은 여전히 여순반란사건에 대해서 설교조차하기 어렵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후손이 여전히 동일한 교회에 다니기 때문이다. 좌우구분없는 신도들은 모두 피해자였다.
거창양민학살이나 노근리 양민학살, 제주 4.3 학살, 여순양민학살, 광주 518 양민 학살사건은 세월이라는 약을 통하여 자연적으로 치유되어야 할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해방이후 남한은 우익보다 좌익들이 조직적으로 활동하였다.
다행히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와 병원, 학교가 여순사건의 피해자들을 위하여 정신적, 신체적, 영적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기독교는 죽이는 종교가 아니라 살리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좌우익의 이념논쟁을 통하여 지금까지 서로를 죽이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역사적으로 예수정신이 사라진 종교전쟁이나 이념전쟁은 죽음 뿐이다.
http://lawtimes.net/2395 (전남편)
http://lawtimes.net/2436 (목포편1)
http://lawtimes.net/2438 (목포편2)
http://lawtimes.net/2446 (목포편3)
http://www.lawtimes.net/2448 (목표편4)
http://lawtimes.net/2488 (신안편1)
http://www.lawtimes.net/2489 (신안편2)
http://www.lawtimes.net/2491 (신안편3)
http://www.lawtimes.net/2493 (순천편1)
http://lawtimes.net/2494 (순천편 2)
<저작권자 ⓒ 뉴스와논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