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하는 주님! 저도 못 다한 기도를 당신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그처럼 사랑스런 언어로 마지막을 장식한 순교자 스데반의 기도를 지금 당신께 바치고 싶습니다.
한 많은 나의 삶을 당신의 사랑으로 감싸 주신 큰 은혜 말로 다할 수 없는데 이렇게 육신의 고통을 넘어 영원한 생명 안으로 저를 인도해 주시니 더할 나위 없습니다. 부족한 내 영혼 당신의 손에 의탁하오니 비천한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전라남도 신안군 증도에 가면 문준경의 기념관이 있다. 그녀는 성결교 출신이지만 신안의 순교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남편은 있었지만 없는 것보다 못한 존재였고, 결혼때부터 사기로 결혼을 하여 이미 다른 여인이 있는 상태였고, 문전도사는 생과부로 일생을 보냈고, 다행히 시아버지가 한글을 가르쳐 주었고 이로 인해 훗날 신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지인으로부터 복음을 듣게 되었고 목포 북교동성결교회로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이 교회는 이성봉목사가 개척한 교회로서 문전도사는 이성봉 문하생이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예수와 결혼하여 1년만에 전도왕이 되었고, 이성봉목사의 추천으로 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여자로서 신학교에 다니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이성봉목사의 간곡한 권유로 인해 1931년 상경하여 경성신학교(서울신대의 옛이름)에 입학했다. 그 때로부터 6년 동안 졸업할 때까지 신안도서지방을 두루다니며 교회를 개척하고 복음을 전했다. 그가 첫 전도지로 택한 곳은 남편과 첩이 살고 있었던 임자도였다.
그녀는 1933년 임자 진리교회를 시작으로 증동리교회, 대초리교회,우전리교회, 병풍교회, 장고리교회, 소악교회, 방축리교회, 기점교회. 염산교회, 화도교회, 증도제일교회 등을 개척해 나갔다. 다도해 773개 섬 중에 122개 섬을 배로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제2의 맥컬리 선교사였던 것이다.
그녀의 전도방식은 섬마을 사람들의 생활을 파고들고, 친인척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었다. 때에 따라서 조산부로서 애를 받아주고,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 염도 해주고, 증풍병자도 기도로 고쳐주고, 먹을 것을 갖다가 주는 등 하여 섬마을의 성녀로서 역할을 하였다.
문준경문하생이었던 한신대 정태기 목사는 "증도가 복음화율이 높은 이유는 전적으로 문준경 전도사님 때문입니다. 문준경 전도사님이 복음을 전하시기 전에 섬 사람들은 미신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문준경 전도사님 때문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미신을 버리게 됩니다"고 말했다.
대학생선교회의 대부인 김준곤목사는 "소화제니 먹으라고 주시고 때로는 아픈 부위를 만지시며 할머니가 손자의 배를 쓰다듬듯 하셨는데. 기도하는 그 모습이 제 마음에 확 박혀 있습니다. “이 자매는 돈도 없고, 약도 없고, 여기 병원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직접 고쳐 주십시오”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게 신기하게 낫습니다. 신자,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치유하십니다"고 했다.
이만신 목사는 “어려서부터 이모할머니 문준경 전도사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늘 가까이에서 뵈면서 그 분의 신앙지도를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제가 목회자가 된 것도, 그 분의 영성이 자리했던 것을 느낍니다.”고 했다.
이러한 문준경의 삶으로 인해 유독 신안에서는 많은 걸출한 인물들이 나왔던 것이다. 정태기목사, 김준곤목사, 이만신목사, 고훈목사, 채영남목사 등이다. 채영남목사의 어머니가 비금도에 살면서 문준경의 설교를 많이 들었다고 했다.
문준경은 섬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외에도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한 사람이었다. 1943년 성결교단이 신사참배로 강제로 해산될 때까지에도 그녀는 굴욕적인 신사참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위기는 막스 레닌사상에 물든 좌익과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왔다.
6/25 남침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목포와 신안 증도까지 쳐들어 왔다. 구체적인 이데올로기도 모르는 무식한 섬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들이 인민공화국의 이름으로 안장을 채워주니 그들과 한 통석이 돼 대나무 죽창을 들고 예수믿는 사람들이나 우익 인사, 지주들을 죽이고 다녔다.
일제시대 친일파가 일제 경찰이상으로 못된 짓을 하였고, 공산정권안에서는 보도국 안장을 찬 자들이 공산당 이상 못된 짓을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들에 의해서 죽어갔다. 영광의 염산교회, 야월교회는 서울수복으로 후퇴하는 공산당과 이들의 앞잡이들이 신도들을 물속으로 생매장을 시켜서 죽였던 것이다.
살길을 마다하고 순교를 자처한 문준경
6.25전쟁으로 쳐들어 온 공산주의자들이 문준경을 체포하여 즉결 처분하지 않고 목포 정치보위부로 이송 수감시켰다. 그러나 이미 목포에는 국군의 상륙으로 인민군이 철수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풀려난 그녀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마지막 발악하는 인민군들이 교인들을 해칠 것을 생각하여 “나는 우리 성도들을 지키러 가야 한다.”며 다시 증도로 귀도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성봉목사가 목숨이 위태로우니 돌아가지 말 것을 만류하였으나 문준경은 자신의 수양 딸인 백정희와 증동리교회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풍선(돛단배)을 타고 목양지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미처 철수하지 못한 인민군들과 이들이 앞잡이인 좌익분자들이 신도들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1950년 10월 5일 새벽 2시경 체포되어 인민군들에게 끝내 죽임을 당하였다.
새끼줄에 묶여 끌려가 발로 차이고 창에 찔리고 총대로 후려침을 당하고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는 죄명으로 죽음을 맞는 순간에도 양딸 백정희와 성도들은 살려 달라 부탁하였다. 그는 다음와 같이 기도하고 눈을 감았다.
“아버지여 저들에게 죄를 묻지 마시고, 죄 많은 내 영혼을 받으소서.”
문준경 전도사는 마지막 기도를 남기고 59세를 일기로 순교하였다. 당시 이 장면을 지켜본 고 박복엽 권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을 했다.
“머리에 창을 찍어 쭉 찢어졌습니다. 이마가 찢어졌어도 목이 멀쩡하니 얼마나 소리를 지르셨겠습니까? 소리를 지르시니 목부분에 총을 쏴서 이마와 목에서 피가 막 쏟아져서 버선까지 흠뻑 젖어 옷을 벗길 수가 없었죠. 그리고 모래사장에 방치된 시신을 8일 만에 수습하라고 허락해서 갔는데 무더위와 가뭄 때문에 햇볕에 익어서 시신의 얼굴 껍질이 다 벗겨졌고 피와 옷과 살이 말라붙어 옷도 못 벗겼습니다.”
야월교회를 은퇴한 최종환 장로는 당시 신도들을 죽이는데 앞장선 유격대(좌익의 후손)들이 여전이 야월교회 근처에 살고 있다고 증언했다.
기독교의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데 안간힘을 썼지만 막스레닌주의가 기초된 공산주의 사상은 편을 가르고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스탈린은 약 2,000만명을 죽였다.
미국의 선교사들이나 문준경을 통하여 볼 때 예수의 사상은 사람을 살리는데 안간힘을 쓰지만, 일제의 제국주의 사상이나 막스레닌주의를 기초로 한 공산주의 사상은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을 서는 것이 드러났다.
http://lawtimes.net/2395 (전남편)
http://lawtimes.net/2436 (목포편1)
http://lawtimes.net/2438 (목포편2)
http://lawtimes.net/2446 (목포편3)
http://www.lawtimes.net/2448 (목표편4)
http://lawtimes.net/2488 (신안편1)
http://www.lawtimes.net/2489 (신안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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