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지방에서 활동했던 남장로교 선교사만 해도 무려 450인이었다. 450인이 흘린 피와 땀은 복음선교, 의료선교, 교육선교, 문서선교, 문맹퇴치, 구제 등을 통하여 나타났다.
그들은 역사의식도 있어서 항일에 대해서도 도외시 하지 않았고, 철두철미 한국입장에서 일을 하였다.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동학혁명속에서도 굴하지 않았고 일부 선교사는 그들을 숨겨주었고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피난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호남선교에 영향을 끼쳤던 전킨, 레이놀즈, 해리슨, 테이트, 잉골드, 유진벨, 서서평, 오웬, 포사이드, 맥컬리는 오늘의 호남에 교회와 학교, 의료병원을 설립하게끔 한 복음의 선교사들이라기 보다는 근대문명의 선각자들이었다.
그들은 한센환자의 고름까지 빨아 주었고 의족이라도 만들어 그들을 조금이라도 편리하게 해주었다.
이들은 단지 종교사업에만 머물지 않았고 문맹을 퇴치하고 여성의 인권을 신장시키고, 놀음과 술주정에서 벗어나게 했고, 국제적인 감각을 일깨웠고, 교육을 통하여 무능과 무지를 일깨워주었고, 의술을 통하여 전염병과 한센병을 비롯 수많은 병을 퇴치하는데 앞장섰고, 특히 의료인을 육성하여 근대병원을 세워 오늘날 한국의술이 코로나를 극복하는데 절대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이들은 손수 자가용배까지 구입하여 낙도에 복음을 전하는데 굴하지 않았다. 그러한 연고로 오늘날 도서지역에 학교가 없는 곳이 없어 문맹퇴치에 앞장섰던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역사의식도 철두철미하여 한국이 제국주의 일본에서 벗어나도록 근대교육을 하여 제국주의와 인간의 권리에 대한 의식을 깨웠고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나오게끔 하였던 것이다. 동학의 반외세투쟁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항일의식으로 이어졌다. 그러므로 특히 호남에서 이들의 자취를 추적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450여명의 선교사들이 호남에서 행한 사역을 일일이 거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표적인 선교사들의 사역을 통하여 이들의 사역을 점검하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호남을 극진히도 사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은 종교 교리만 전파한 것이 아니었다. 유진벨의 사역을 보면 알수 있다.
유진벨 선교사는 목포지역에 양동교회를 개척하였지만 도중 1901년 아내 로티 벨의 죽음으로 두 자녀 헨리와 샬롯을 누이에게 맡기기 위해 일시 미국으로 귀국을 한다.
1902년 10월 30일 유진벨 선교사가 재입국하여 1904년 광주로 떠날 때까지 목포에 머물렀다. 유진벨은 재입국하여 한옥 기와집을 증축하여 '로티 위더스푼 벨 기념교회당'을 봉헌하면서 활기를 다시 찾았고, 1903년에는 교인 300여명 중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101명이나 되었다.
유진벨은 의료선교사 오웬과 함께 사역을 했고, 스트레퍼 등과 함께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세우는 등 하여 목포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그가 1904년 광주로 이전한후 스트레퍼, 존 프레스톤, 해리슨, 맥컬리 등의 선교사들이 계속 그의 선교사역을 이어 나갔다.
유진벨이 1904년에 목포를 떠나자, 4대 당회장으로 존 프레스톤(John F. Prestom JR 한국명 변요한)선교사가 뒤를 잇고, 이후 양동교회 5대 당회장으로 해리슨(W.B.Harrison, 하위렴)선교사가 취임했다.
그를 이어 최초의 한인당회장 윤식명목사는 1910년 교인들과 함께 오늘날 양동교회가 위치한 양동 127번지 864평 대지에 121평의 석조건물을 지었다.
한국인 자립적으로 세운 호남지역 최초의 자립교회가 된 것이었다. 1917년 양동교회에 부임한 이경필목사는 정명학교, 영흥학교학생들과 함께 1919년 4월 8일 목포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양동교회는 그야말로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신도와 학생들 200여명이 검거되고 100여명이 구속되었다. 이처럼 그의 사역은 한인들을 통해서 항일운동으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특히 도서지역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목포에 최초의 복음을 전한 사람이 유진벨이었다면 목포인근도서지방에 관심을 두고 포교활동에 앞장을 선 사람이 맥컬리(한국 이름 맹현리)였다.
신안선교의 대부, 캡틴 선교사 맥컬리
그는 1907년에 한국에 와서 1930년 귀국할 때까지 23년간 한국에 머물면서 사역을 한 열정적인 선교사였다. 그는 신안 앞바다 도서지방과 진도, 완도, 해남, 강진, 장흥 등지를 순회하면서 수많은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다.
그가 23년동안 세운 도서지방과 내륙의 교회는 해남의 이진, 의야리 교회, 신안의 대척, 장고, 예리, 자라교회, 장항의 지천교회 등이며 위임받아 성숙시킨 교회는 해남의 선두리, 우수영, 논송리, 맹진, 고당리, 남창리, 예략, 원진, 연당, 진목리, 삼금리, 여수의 우학리, 진도읍교회, 분토리교회, 비금 덕산교회 등이다.
그는 텍사스에서 모래유전으로부터 많은 돈을 거뭐진 거부 아버지로부터 자가용 배를 요청하여 간호사인 그의 아내 에밀리(Mrs. Emily Cordell McCallie, 맹부인, 1873-1931)와 함께 도서지역에 복음을 전했다. 그야말로 캡틴 선교사였다.
의료기술을 지닌 아내는 미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섬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치료의 구세주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맥컬리는 도서선교의 대부로서 교회 개척 및 서남해안 일대 도서 선교사역을 했다. 목포 정명여학교(현 목포 정명여자중고등학교)도 선교사 매칼리의 협조로 미국 매칼리의 본가에서 기부금을 받아 석조 건물 3층으로 2백 40평을 신축한 것이다.
이들 매컬리 부부는 헌신적으로 신안 선교에 임하였으며, 주방장, 대서인, 개인비서 등 4, 5인이 자가용 배를 타고 목포 앞 바다에 있는 도서(島嶼) 지역을 순회 전도했다.
이 지역은 남서쪽으로 160km, 북동쪽으로 240km 이내 지역으로 인구만 해도 10만명 이상이었다. 그가 보고했던 1910년의 보고서를 보면 95개의 섬, 5백여개의 마을에서 교회가 3개나 생겨났으며, 임시 예배 처소만 해도 25개처나 설립한 것으로 나타났다.
맹 선교사가 범선에 몸을 싣고 장장 10시간이란 긴 시간을 기도하면서 항해해 어느덧 비금도(비금면) 월포리 촌전에 정착하여 예배드린 것이 비금 덕산교회의 출발이었다.
이때 강낙언이라는 사람이 첫 신자가 되었다. 월포리 촌전에 사람들이 모여들자 맹현리 선교사는 곧 자신의 조사인 마서규를 파송하여 예배를 인도케 하였다.
“무안군(분군에 의해 현 신안군) 덕산리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본리인 강낙언이 믿고 전도하여 신자가 초진(稍進)하여 예배당을 신건하고 선교사 맹현리와 조사 마서규, 이행언, 김경운, 김봉현 등이 차제(次第)에 시무하니라.”
당시 맹선교사의 복음선은 섬사람들의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섬사람들에게 그는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그러므로 직접 본인이 산 배를 갖고서 도서지역에 선교를 한 맥컬리 선교사는 섬선교의 일등공신이었다.
맹 선교사는 처음에는 돛단배 한 척을 빌려 1전씩 하는 쪽복음과 수천 장의 전도지를 싣고 조수의 흐름에 따라 섬들을 방문하여 전도를 했다. 기간은 2주에서 6주 동안으로 다양했다.
나중에는 자신이 직접 자가용 배를 운영하면서 섬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다녔다. 그래서 신안지역 선교의 일등 공신은 맥컬리선교사이다.
그 이외 맥컬리는 신안섬에 있는 여성들을 목포에 유학시켜 신교육을 받게하기도 하였다. 원래 그의 가정은 미국에서 유전(油田)을 갖고 있는 석유 재벌 자녀였기에 선교비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넉넉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배를 타고 다니면서 성례전을 앞두고 문답을 실시하고 사역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부를 선교에 최대한 활용하였다.
때로는 열악한 위생시설을 갖춘 어촌에서 먹고 자고 해야 하는 일은 그에게 큰 고통이기도 하였지만 복음을 전한다는 기쁨에 모든 것을 이겨낼 수가 있었다. 그는 완도까지 가서 배를 타고 복음을 전하는 캡틴선교사였다.
맹 선교사는 덕산교회에서 마서규 조사를 첫 교역자로 파송했으며, 당시 마 조사는 해남출신으로 목포 선교부에서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해남 일대에서 활동했으며, 비금에는 첫 조사로 부임했었다.
1911년 비금덕산교회 관리당회장이었던 맹 선교사는 3명에게 첫 번째 세례식을 거행했으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김경운 서리집사다. 교회는 계속 교인이 늘었으며, 신안군의 첫 어머니 교회의 집사로 임직한 김경운은 제3대 교역자로 비금교회 강단을 지켰다. 당시 덕산교회이다.
비금도 사역
비금도는 목포항에서 45키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서쪽으로는 도초도와 마주하고 동쪽으로는 자은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조시대는 지도군에 일제시대때는 무안군에 속해 있었지만 1969년 1월 신안군으로 편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금도라는 이름은 섬의 모양이 마치 날아가는 새와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훗날 1908년 비금 덕산교회와 1907년 완도 약산제일교회의 당회장이 되기도 했다. 완도 약산제일교회는 1905년 오웬선교사가 완도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웠다. 2대 당회장으로서 맹현리선교사가 담당하였다. 오웬선교사는 진도까지 가서 분토리교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비금 덕산교회
비금도에는 지금으로부터 108년전 ‘비금덕산교회’가 세워졌다. 예장통합 100회 총회장을 지낸 채영남 목사와 그의 모친도 이 교회출신 이다.
맹현리 선교사(M. D. Mccallie) 부부가 1907년 목포선교부에 부임해 자가용배를 갖고서 주로 신안 도서지방을 비롯하여 해남, 강진, 장흥, 진도, 완도 해안 등지를 순회하면서 교회를 설립했다.
맹 선교사가 신안군 비금도에 입도하기 전 목포에서 비금출신으로서는 최초로 기독교를 믿었던 강낙언 씨가 맹현리 선교사와 함께 1908년 3월 비금도에 입도하기 위해서 10시간이나 걸리는 배를 타고 비금도 해변가에 있는 월포리 촌전에 천막을 치고 전도하다가 사람들이 모여들자 그 해 4칸짜리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것이 덕산교회의 시작이었다.
이 비금 덕산교회를 통하여 많은 복음의 씨앗이 비금도에 퍼져나갔다.
신안선교, 박도삼 장로
맥컬리 선교사는 처음에는 마서규를 비금 덕산교회 초대 전도사로 파송했고, 맥선교사가 전도한 박도삼도 이 교회에 참여하게 되었다. 박도삼은 덕산교회를 왕래 하면서 맥컬리로부터 순회전도인으로 임명을 받아은 1915년 흑산도 예리교회를 처음 개척하였다.
이후 대둔도, 다물도, 상태도, 하태도, 가거도까지 교회를 세우고 자신의 고향인 도초에 중앙교회(1922), 지남교회(1930), 수다교회(1933)을 설립했다.
시인 고훈목사가 도초중앙교회 출신 이다. 이후에도 박도삼을 통한 많은 전도인들이 계속 복음전파를 하여 섬이 있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박도삼은 목포선교부에서 인정받은 일군이 되어 1943년 도초중앙교회에서 초대 장로로 임직을 받게 된다. 박도삼 장로는 거부였다가 부를 포기하고 전도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박도삼의 전도를 받았던 최명길은 훗날 목포 연동교회를 사역하였고, 6.25 전쟁때 순교한 인물이기도 했다. 박도삼 장로의 아들인 박요한 목사는 훗날 합동교단의 총회장이 되기도 한다.
박요한 목사는 <비금기독교 100년 역사>에서 "비금 기독교의 모 교회인 비금 덕산 교회는 원래 덕산리 망동부락 뒷산에 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내 나이 여섯라 무렵 선친 박도삼 장로를 따라 비금 덕산교회를 가 본 기억이 납니다. 당시 예배당은 기역자 모양으로 남자와 여자의 좌석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나는 선친을 따라 남자석에 앉아 예배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 고 말하기도 했다.
교회를 통한 근대화
비금덕산교회에서 강단을 맡았던 김경운 서리집사의 둘 째 딸은 정명학교를 나와서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기독교학교인 훼리스 여학교를 졸업하고, 원산 마르다 월신신학교, 평북에 있는 선천보성여학교, 광주 수피아여학교 등지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1943년 병고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이와같이 신문명과 개화의 물결이 섬지방인 비금을 비롯, 신안 일대에 이르기까지 퍼졌고 섬주민들이 근대교육을 맛보게 되고, 교회당이 설립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이 복음의 힘이었던 것이다. 비금 덕산교회를 필두로 인근 섬지역에 복음이 전파되는 놀라운 순간들이 계속 찾아왔다. 하나님은 선교사들을 통하여 목포뿐만 아니라 신안의 눈물까지 씻어주었던 것이다.
덕산제일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소속인 덕산제일교회는 비금도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해변인 수림마을에 37년 전 세워졌다. 교회는 예수를 믿지 않는 마을 주민들의 요청으로 건립되었다.
당시 교회가 있던 인근 마을에서 교육이 이뤄지고 가정과 마을이 행복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본 수림마을 유지들이 교회 건립을 요청해 왔다.
당시 비금도는 염전을 통하여 돈을 번 40-50대 사람들이 술과 노름에 찌들여 살았다. 그로 인해 병들어 사망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소금으로 돈을 번 젊은 아버지들이 허망하게 죽는 것을 보면서 마을 어른들이 교회의 필요성을 직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워진 교회가 덕산제일교회였다. 비금 서부교회
비금의 기독교는 도초뿐만아니라 1925년 비금서부교회를 설립하는데도 일익을 담당한다. 1925년 설립된 비금서부교회 역시 비금덕산교회에 출석하던 장영헌 신도 등이 중심이 되어 장영현의 가정에서 창립된 교회로 1915년부터 지역 내 주민들은 비금덕산교회로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오던 중 신도수 증가하자 서부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분립 후 교회를 설립했던 것이다.
교회는 복음을 전한 역할도 했지만 양동교회처럼 항일운동과 근대 문명의 잉태지이기도 했다. 복음화의 물결은 거대한 파도가 되어 문명퇴치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여성들은 한글을 가르치던 ‘야학’을 통해 한글을 깨우쳤고, 성경을 읽게 되면서 삶에 전환점을 만들 수 있었던 시기였다.
교회와 항일운동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은 민족의 근대문명을 일깨웠고 항일정신이 투철하게 되어 일제에 대해서도 조직적인 투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19년 3.1운동의 여세로 1920년 고금도에서는 정학균(당시 17세), 이현열(20세), 홍철수(19세). 이수열(21세), 배명순(19세), 김천녕(20세) 등이 고금학교 학생들에게 격문과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고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는데, 불온한 사상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을 실행하였다고 이들을 검거하고 재판에 부쳤다.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은 1920년 5월 3일 공판에서 안녕질서를 방해하는 행위 라고 규정, 대정 8년 제령을 위반하였다고 판시, 정학균 징역 4월, 이현열 징역 3월에 처하기도 하였다.
맹현리 선교사로 시작된 헌신적인 선교사역은 비금도와 신안을를 축복의 땅으로 만들었다. 비금덕산교회는 신안군의 모교회로 성장했으며, 1915년에는 박도사을 통하여 흑산도 예리교회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증도를 통하여서는 문준경이라는 전도사가 순교하여 한국교계에 많은 영향을 주고, 하의도에서는 김대중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태어나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하게 된다. 이것이 위대한 기독교의 복음의 산물이었다.
나의 신앙유산답사기(신안편1)
http://lawtimes.net/2395 (전남편)
http://lawtimes.net/2436 (목포편1)
http://lawtimes.net/2438 (목포편2)
http://lawtimes.net/2446 (목포편3)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목표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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