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은 전라남도 남서부에 위치한 다도해로 이루어진 군으로서 2읍 12면에 전체 인구는 약 4만 2천여명이다. 신안은 1004개의 섬들로 이루어졌고 이것을 의미하기 위하여 얼마전에 10.8키로미터의 1004대교를 만들기도 했다.
신안은 동쪽으로는 무안군 해제면과 인접하고, 서북쪽은 모두 서해바다와 직할 섬지역과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압해도를 기준으로 목포와 마주한다.
신안군청은 압해도에 있다. 신라 경덕왕때 신안군은 압해군이라고 불렀고, 이 당시에는 압해도가 중심이었다. 1914년에는 무안군으로 통폐합되었다가, 1969년에는 무안군으로부터 분리되어 새로운 무안이라는 뜻에서 신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008년에 압해읍 본섬에서 목포로 가는 다리가 목포로 가는 다리가 만들어졌다.
2010년에는 지도읍에서 지도읍에서 증도면의 본섬으로 통하는 다리가 놓이면서 최소한의 읍소재만큼은 한반도의 본토와 연결되게 되었다.
신안군청이 압해도로 옮겨가면서 2013년 압해도 북쪽에 김대중대교가 추가로 놓였고, 남쪽의 목포와 북쪽의 무안.양쪽에 도로교통망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는 문준경전도사가 사역을 했던 증도까지 다리로 연결되어 차로 운전해서 갈 수 있게 되었다.
육지와 연결된 압해, 지도, 증도, 암태에서는 시외버스를 타고 광주나 목포, 무안 등지로 나갈 수 있으며, 지도읍 읍내리의 자동차 터미널에서서는 고속버스도 이용할 수 있고, 암태 남강여객터미널에서는 서울남부터미널행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본래는 인터넷 예약이 센트럴 출발편만 됐는데, 현재는 지도읍 출발편도 코버스(kobus)에서 예약도 가능하다. 신안은 더이상 섬이 아니다.
신안은 무안과 목포권역에 속한다.
목포권역에 속하기 때문에 목포의 영향권에 있어서 항일 의식도 뛰어났지만 복음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지역이다. 특히 암태도는 제2의 동학이라 일컬어질 농민혁명이 있었던 지역이다.
암태도는 목포에서 서쪽으로 28.5km, 서남단 해상에 위치한 암태도는 총 40.08km2의 면적 중 유용 농경지가 13.25km2나 되는 작은 섬이다.
암태도는 돌이 많고 바위가 병풍처럼 섬을 둘러싸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9개의 큰 해수욕장을 갖고 있는 이웃섬 자은도와 달리, 변변한 모래사장 하나 없어 내세울 것이 마땅치 않은 암태도는 본래 쌀 한톨 구경하기 힘든 척박한 땅이었다. 그러나 노인들은 넓은 경지를 개간하여 옥토로 만들었다.
이러한 암태도에 1923년부터 1924년 8월까지 동학혁명처럼 소작인들이 벌인 농민항쟁이 있었다.
동학혁명이 끝난지 38년만에 다시 농민항쟁이 작은 섬 암태도에서 발생하였다. 이번에는 소작농이 승리하였던 대표적인 제2의 동학사건이었다.
1920년데 일제의 저미가정책으로 지주의 이익이 감소하자, 지주는 소작농들에게 8할의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하자, 소작농들은 1923년 9월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회를 결성하고 지주 문재철에 대해 소작료를 4할로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친일파 지주인 문재철이 이를 묵살하자, 소작인들은 불납운동을 계속하고, 1924년 문재철을 규탄하였다. 소작인들은 조선노농대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소작문제를 전국민에게 호소하기로 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무산되었다. 문재철은 제2의 고부군수 조병갑이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야기시킨 친일 거대지주 문재철(1883-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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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농민들은 굴하지 않고 여론에 호소하였고, 암태청년회 회장 박복영(朴福永)이 앞장서서 쟁의를 주도하였다. 암태부인회도 참여하였고 암태도 전 주민이 함께 하였다. 소작농들의 항전이었다. 그러는 의미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에 항전한 동학 농민들과 유사한 양상을 띠었다.
조병갑의 증손녀는 노무현 정권의 조기숙 수석이었다.
농민들은 목포경찰서와 법원앞에서도 시위를 하였고, 단식투쟁도 전개하였고, 지주 문재철의 집에 몰려가 송덕비를 허물기도 하였다. 시위를 하다가 일제 경찰에 의하여 26명이 잡히기도 했다.
그러나 암태도 소작농들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격렬하게 투쟁을 하여 소작농민항쟁의 소식은 각계각층의 여론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광주·목포 등지의 한국인 변호사들은 무료변론을 자청하였으며, 서울·평양 등지에서는 지원강연회와 지원금 모금활동이 전개되었다. 또, 목포에서는 시민대회가 계획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암태도소작쟁의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자, 일제는 쟁의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재에 나섰다.
목포경찰서장실에서 일제 관헌측을 대표한 전라남도경찰국의 고가(古賀) 고등과장의 중재로, 지주 문재철과 소작인을 대표한 박복영이 참석한 가운데 다음과 같은 타협을 보게 되었다.
① 지주 문재철과 소작인회간의 소작료는 4할로 약정하고, 지주는 소작인회에 일금 2,000원을 기부한다. ② 1923년의 미납소작료는 향후 3년간 분할상환한다. ③ 구금 중인 쌍방의 인사에 대해서는 9월 1일 공판정에서 쌍방이 고소를 취하한다. ④ 도괴된 비석은 소작인회의 부담으로 복구한다.
이렇게 4개항이 약정되어 1년간에 걸친 쟁의는 소작인측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암태도소작쟁의의 영향은 전국으로 또는 전라남도지방, 특히 서해안 도서지방의 소작쟁의를 자극하였다.
1925년의 도초도(都草島)소작쟁의, 1926년의 자은도(慈恩島)소작쟁의, 1927년의 지도(智島)소작쟁의를 일으키게 하였으니, 한국농민운동사상 의미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학혁명의 연속이었다.
암태도 농민항쟁은 제2의 동학혁명으로서 소작농들이 처음으로 지주에 대해서 승리한 운동이었다.
신안은 목포와 무안의 영향권에 있었고, 목포 부두노동자와 무안의 동학혁명의 정신이 그들의 항쟁의 정신적 토대를 이루었다.
이처럼 신안은 목포의 부두노동자의 동맹정신과 동학혁명의 농민의 항쟁정신이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일제와 지주에 대해 한이 서려있는 곳에 신안의 눈물을 씻겨주기 위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교사들을 통하여 조심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계속).
나의 신앙유산답사기 (목표편 4)
http://www.lawtimes.net/24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