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목포
조선시대 수상 운송의 요지였던 목포시는 1897년 개항 이후 호남 최대 무역 중심지이자 농수산물 집하의 주요 요충지로 부상했다.
목포부사(木浦府史)에 따르면 1897년 한국인 2600명, 일본인 206여명이었던 인구는 1910년 한국인 7076여명, 일본인 3494여명으로 늘어났고 1930년에는 한국인 2만3488명, 일본인 8003명이었다.
당시 목포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대다수 관리, 자본가들이었고 한국인들은 토지를 빼앗겨 어쩔 수 없이 모여든 항구 노동자들이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임금은 일본인에 대한 저항을 불러왔다. 3·1운동 이전에도 동맹파업, 반십장운동 등 생존권·항일투쟁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었다.
목포는 눈물이 없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목포는 풍요로운 땅과 개항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노동과 경제적 착취로 인해 일제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내부적으로는 탐관오리들, 친일파, 외부적으로는 일제로 인해 민중들은 동학혁명이후 숨하나 고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부두노동자들의 파업, 동양척식회사의 수탈, 일본인들의 농촌 이주로 인해 경제적 곤궁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향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후손이 오늘날 조선족이 되었다. 모두 힘없는 민족들이 통과의례처럼 통과해야만 하는 의례와 같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동학혁명이후 목포는 일제의 수탈로 바로 이어져 서민들은 숨술틈조차 없었다.
근대화와 개항을 한다고 좋아했지만 얼마 안가서 일제의 경제적 침략의 야심이 드러나면서 민중들은 정든 고향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다. 삼학도의 파도는 멈출줄 모르고 쉴새없이 쳐왔다.
이와같이 희망없는 땅에 호남선교의 거장 유진벨이 도착해서 목포를 떠날때까지 엄청난 일을 했다.
유진벨은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4대째 연속해서 사위를 통한 사역세습을 하고 있다. 유진벨의 딸이 살아남아 그의 남편인 인돈이 다시 장인을 이어 한국 선교사역에 헌신했다.
유진벨의 사위인 인돈은 한남대학교를 세웠고, 유진벨의 외손자인 인휴는 결핵요양소와 진료소를 세웠고, 인휴의 부인은 남편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 그의 의료사역을 이어나갔다. 손자 며느리까지 한국사역에 헌신하였다.
현재는 어린 시절 여순반란사건이 발생한 순천지역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유진벨의 증손자인 스티브 린튼(인세반)이 재단이사장직을 맡으면서 아버지의 사역을 이어받아 북한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고 있다.
무등산의 사역이 북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유진벨가족은 할아버지 사위, 손자, 며느리까지 한국선교의 일등공신이었다. 할아버지는 교회, 사위는 학교, 손자는 병원을 세워 한국선교의 주춧돌을 마련하였다.
선교하는 유진벨
유진벨이 처음 사역을 한 곳은 목표였다. 그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씻어주기 위하여 내한하여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에 안간힘을 썼다. 그는 복음을 통하여 목포의 기쁨이 되게 했다.
유진벨을 말하지 않고서 목포, 광주를 말할 수는 없을 정도로 유진벨이 광주 선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컸다. 그는 죽어서도 말을 하고 있었다. 그의 사역은 한국에서 앞으로 몇대까지 이어갈지 모른다.
미국남장로교는 1892년 7인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그로부터 3년 후 유진벨을 파송하게 된다.
동학혁명이 발생하던 해 하나님은 선교사들을 뒤로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유진벨도 그 중의 한명으로서 그는 남도 선교의 주역이었다.
1895년 서울에 들어온 유진벨은 한국어를 익히면서 선교를 준비하다가 1896년 2월에 레이놀즈와 함께 목포로 내려가서 선교지부를 개척하기 위하여 토지를 매입했다. 그러나 1897년 10월 개항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 이전에 정도전이 유배한 나주로 가려고 하였지만 보수적 유생들의 반대에 부닥쳐 목포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나주는 유학의 대가 정도전의 유배지가 있는 곳으로서 골수 유교신자들이 많은 곳이다. 정도전은 죽어서도 말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이 훗날 선교사의 발길이 닿지 못하도록 했다.
유진벨은 정도전의 영향으로 유교성이 강한 나주선교를 포기하고, 1898년 3월 목포로 내려가 정착준비를 하여 5월에는 임시거처를 마련하고 1989년 9월초순에 서울에서 가족을 데리고 목포로 내려와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목포양동교회의 출발이었다. 동년 11월 목포에 도착한 의료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의 진료 활동으로 교회는 더욱 성장하였다.
유진벨의 목포행전
유진벨은 목포에 오자마자, 폭포 선교스테이션의 일한으로 교회부터 세웠다. 그리고 바로 남녀중등학교(1903년), 프렌치 기념병원을 세웠다. 불행하게도 병원은 사라지고, 교회와 학교회는 여전히 남아있다.
이처럼 남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전략은 개척교회부터 세워 부흥시키는 것보다 우선 교회, 병원, 학교라는 선교기지를 세워서 점진적으로 선교화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스테이션은 선교사들의 주거와 전도, 의료, 교육의 기능이 하나의 유기적인 조합을 이루는 복합선교지구였다. 남장로교회는 한국뿐만아니라 전 세계 어디를 가서 선교를 해도 항시 먼저 스테이션을 주축으로해서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스테이션의 선교방법은 일제의 수난과 핍박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교회도 오늘날까지 존재한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양동교회이다. 양동교회를 통하여 많은 목포인들이 예수를 믿게되었다. 처음에는 약 30여명으로 개척을 시작하였지만 신사참배전 1936년에는 6,400여명이 예수를 믿게 된다.
세례교인은 3,177명이 었다. 1898년에는 한 개의 에배당이었지만 131개의 예배당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유진벨의 선교행전은 기적을 창출하였던 것이다. 그는 정말 기쁨의 복음을 통하여 목포인들의 눈물을 씼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1900년 8월 첫 세례식이 있었고, 1903년에는 300여 명의 교인들이 힘을 합쳐 예배당을 건립하였다.
1906년 목포 부흥운동의 결과 교세가 확장되자 교인들이 다시 교회당을 짓게 되면서 1911년 석조예배당을 완공하였다. 유진벨의 목포에서의 첫 신화가 시작되었다. 유진벨의 호남행전이 시작되었다.
유진벨의 한국의 첫인상은 더럽고 밥맛이 없고, 싸움을 잘하는 민족으로 인상이 안좋았지만 그는 선교를 결심하면서 한국에 대한 인상은 바뀌기 시작했고, 눈물의 목포를 희망의 목포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누구나 그렇듯이 선교사들이 가장 힘든 것은 사랑하는 가족들이 현장에서 죽는 것이었다.
마틴 잉골드의 자식이나, 다른 선교사들의 가족들이 이름모를 풍토병으로 어려서부터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다.
이러한 것은 유진벨도 예외가 아니었다. 목포에 온지 3년만인 1901년에 그의 아내가 갑자기 심장마비로 죽게 되었다. 어린 다섯살 난 아들과 두돌이 채 되지 않은 딸 샬롯을 남기고 떠났다.
다행이 하나님은 자녀들을 그루터기로해서 사위와 외손자들이 그의 사역을 이어가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진벨의 행전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유진벨은 선교를 중단하고 두 자녀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가 1년 동안 안식년을 갖고 1902년에 다시 목포로 돌아와 1904 광주로 갈 때까지 목포스테이션을 확립하였던 것이다.
양동교회 설립
유진벨은 미국으로 가기 전에 1898년 봄, 목포 양동에 임시주택을 짓고 한국인들과 함께 예배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목포양동교회의 출발이었다. 1898년 6월 경, 유진벨의 임시주택에서 주일에배를 드린 한국인의 숫는 30여명에달하였을 정도로 동학이후 공허한 가슴을 메우기 위해 많은 목포인들이 한의 눈물을 씻고자 교회를 찾았던 것이다.
1900년 8월 첫 세례식이 있었고, 1903년에는 300여 명의 교인들이 힘을 합쳐 예배당을 건립하였다. 1906년 목포 부흥운동의 결과 교세(敎勢)가 확장되자 교인들이 다시 교회당을 짓게 되면서 1911년 석조예배당을 완공하였다.
하와이로 떠나는 교인
이 중의 한 여성교인은 선교사들의 정보로 인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구한말 당시 의료선교사 알렌이 주선하여 고종을 설득시켜서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을 모집했다.
고종은 1902년 이민허가를 허락했고, 이민업무를 관장할 수민원을 설치했다. 처음에는 이민 희망자들이 거의 없자, 인천내리교회인 존스목사를 통하여 모집하였던 것이다.
내리 교회 교인이 50명 지원했고, 인천 부두노동자 가 20여명, 배를 타는데 익숙했던 강화도와 교동의 사람들이 이민대열에 합류했다. 주로 인천과 강화도, 교동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광주, 전주, 목포 출신의 호남 사람들이 4명이 합류했다. 조선인 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2명이 1902년 12월 22일 조선 최초의 이민단이 일본 화물선 겐카이 마루를 타고 제물포 항을 떠나, 일본에서 미국 상선 S.S 겔릭(Gaelic)으로 갈아타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롤루에 도착하게 되었다.
여기서 목포사람들이 누구인지 주목해 보자. 정인수라는 사람은 영어를 잘해서 이민업무를 보게되었고 통역을 맡았다. 아마도 한인 최초의 통역사일 것이다.
정인수(17세)는 유진벨로부터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이처럼 유진벨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한인들의 중간역할을 하게됱 통역사까지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다른 한명의 여인(23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여인도 유진벨로부터 영향을 받은 교인이었다. 이 여인은 최사라로서 조정래가 쓴 아리랑에도 나오는 인물이다.
작가 조정래 역시 그의 소설 <아리랑>에서 최초의 사진신부 최사라를 전남 목포출신으로 그리고 있다. 조정래는 <아리랑>에서 하와이 조선이민노동자와 사진신부들의 삶을 그렸다. 조정래 작가는 최사라를 강인한 생활력을 지녔으며 가족을 돌보면서 한편으로는 하와이 조선여자들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한 여성으로 묘사했다.
이와같이 목포 사람들은 항구도시면서 유진벨의 영향을 받아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었으며 국제적인 감각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배를 타게 된 것이다.
이 여인은 사진신부였다. 사진을 통하여 결혼을 하였다. 최사라라는 여인은 1977년 동아방송 프로그램에서 자신은 사진신부이고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안녕들 하시오. 나는 사라 최, 아니 최사라라고 합니다. 아마 많이들 낯설 거외다. 내 이름을 듣고 아 그 사람 하면서 무릎을 칠 사람은 천에 하나도 안 될 테지요. 조금은 긴 설명이 필요합니다. 나는 남편을 사진으로 처음 만났소. 그때 남편은 태평양 건너 하와이에 있었고, 나는 망해버린 조선 땅에 있었지. 무슨 얘기인지 짐작하시겠지?
나는 사진을 보고 신랑을 정하고, 혈혈단신 태평양을 건너갔던 천 여 명의 사진신부 가운데 1호 사진 신부였어요. 1978년께였나 하와이 초대 이민들에게 왜 이곳에 왔느냐는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껏 살아남아 있던 사진 신부들은 이런 대답을 했었지요. “예수쟁이라고 놀림 받는 것이 싫어서, 남자들 횡포 때문에, 시부모를 안 모실 것 같아서, 하와이에는 빗자루로 돈을 쓸기 때문에 그걸로 친정을 돕기 위해서…” 1910년 11월 28일 내가 하와이에 발을 디뎠을 때 ‘남편’이 마중 나와 있었지. 내 나이 스물 셋. 그 당시 풍습으로는 혼기를 놓친 과년한 처자였지만 신랑 얼굴을 보니 고개를 들 수가 없더군. 부끄러워서였냐고? 아니 너무 기가 막혀서 그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신랑 이내수는 나이 서른여덟. 조혼 풍습 남아 있던 조선으로 따지자면 아버지와 딸이라고 해도 이상할 일이 없는 부부 아니었겠소. 그래도 나는 사진 신부들 가운데 나이가 많은 편이었고, 신랑은 신랑 후보군 가운데에서는 평균치였어요. 어떤 처자는 대놓고 신랑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였소. 출처 : AI타임스(http://www.aitimes.com) 정인수, 최사라 이 두 사람의 경우에서 유진벨의 영향을 받아 영어를 배우고, 국제적인 감각에 눈을 떴던 것이다. 구한말 시대 목포사람들은 이처럼 유진벨의 영향을 받아서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었다.
17살의 남자가 미국이민선의 통역이었고, 23살의 처녀가 생면부지의 남자에게 시집을 가기로 결심하고 혈혈단신 미지의 땅 하와이로 떠났다는 사실은 목포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지역이었으며 목포사람들이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한다.
동년 11월 목포에 도착한 의료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의 진료 활동으로 교회는 더욱 성장하였다.
목포 양동교회는 남도 근대문화의 1번지를 상징하는 문화공간으로 목포의 개항이 예견되자 유진벨은 이 교회를 통하여 목포스테이션을 구축하였다. 이 교회는 항일운동의 본산지가 되기도 하였다.
현 양동교회 건물의 원래 구조는 장방형의 단순한 단층석조였다. 1982년에 정면 중앙부에 5미터 돌출시킨 고단부(4층구조)를 추가로 설치하여, 지금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그 가치가 인정되어 2004년에 등록문화재 제14호로 문화재청에 등록되었다. 양동교회는 종교적인 면에서뿐만 아니라 목포의 근대문화 발달과정과 항일운동에도 많은 관련이 있다.
선교사들의 활동 가운데 의료 및 교육 활동은 목포의 근대문화 형성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들의 사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의료선교가 함께 동행하였기 때문이다.
목포의 유관순 정명학교
선교사들이 개척지역에 주민들과 친숙해지는 방법으로 의료나 교육을 통한 방법이 효과적이었으며 이에 1914년에 프렌치 기념병원이 생겼고 동시에 교육분야에서는 1903년 미션스쿨이라고 할 수 있는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양동교회와 함께 두 학교는 항일운동의 본산지였다. 정명학교는 여학교인데도 만세운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목포에도 유관순이 많았던 것이다.
목포 정명여학교는 1903년 미 남장로교의 선교에 일환으로 세워진 학교로서 전라남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다. 정명여학교는 1919년과 1921년 만세 시위를 벌인 학교로 유명하다. 목포의 유관순들은 비밀리에 거사를 준비하고 실행에 옮겼다.
정명여학교는 1937년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 당했다가 1947년에야 재개교했다. 선교사 사택은 1905-1910년 사이 지어진 석조 건물이다.
목포 산지의 화강암으로 지어진 선교사 사택은 2채다. 현재 정명여학교 100주년 기념관으로 쓰이는 사택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정명학교 여학생들은 양동교회 교인들과 영흥교회 남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펼쳐나가는 신근대여성들이었다. 그들은 1919년 3·1만세운동 때 양동교회의 이경필 목사를 비롯한 교인들이 같은 선교 구내의 영흥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준비했고, 3월 21일 일어난 목포만세운동은 이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선교사로부터 근대문명을 배운 여학생들이 조국의 주권을 되찾고자 목숨을 각오하고 운동을 하였던 학교였다. 그러나 1937년에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자진폐교를 한다.
정명학교 출신 박화성이란 여류작가는 개교80주년을 맞이하여 정명학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시를 쓰기도 했다.
"당신이 길러내신 어린 딸들은/가지각색의 꽃으로/울긋불긋 곱고 아름답게/활짝 피어나 산지사방으로/그 향기를 풍겨내고 있습니다/그리고/그 향기는 앞으로도 길이길이/이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는 유진벨이 세운 목포 최초의 근대학교로서 일제강점기 일본인 주입교육이 우선시 되는 상황속에서도 교사들에 의해 민족정신 주입이 가능했기에 목포의 3.1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4.8 만세운동이나 이후 목포의 항일운동에 두 학교가 앞장서게 되었는데 이는 양동교회와 연관이 깊다고 볼 수 있다. 모두 유진벨의 작품이다.
영흥학교
영흥학교는 남학교로서 같이 목포의 항일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영흥학교는 1903년 9월 9일 민족학교인 영흥서당으로 개교하였으나 1937년 9월 30일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었으며 1952년 3월 21일 영흥중학교로 복교되었다. 1954년 3월 1일 중학교와 분리되어 영신고등학교로 개편되었으며 1980년 8월 23일 상동 55번지(현재 삼각로43번길 9)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80년 11월 3일 목포영흥고등학교에서 영흥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으며 1999년 3월 1일 남녀공학을 실시하였다
김경종교장은 영흥학교가 1903년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학교로서 신사참배로 폐교된 아픔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오웬선교사. 병원설립
전북에 잉골드가 있었다면 전남에는 오웬이 있었다. 오웬이 있었기에 유진벨의 사역이 가능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 같은 사람들이었다.
오웬은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고 의학석사를 마치고 1898년 11월 6일,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내한하여 목포 선교부에 의료선교사로 부임했다. 1년 뒤 오웬은 1899년 현대식 의료센터인 목포진료소를 개설하여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했다.
그러나 리딩햄(한삼열)이 병원장으로 근무하던 1914년 목포 진료소 화재 사건이 있었다. 병원 전체가 전소되었으며, 한국인 조수 윤병호가 안타깝게도 순직하고 말았다.
10년 후인 1909년에는 191평 규모의 번듯한 석조양옥의 ‘부란취(富蘭翠)’ 병원을 개원시켰다. 그때 당시 동료였던 의학박사 윌리엄 해밀톤 포사이드가 ‘프렌치 메모리얼’의 기부를 받아 병원을 개원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었다.
오웬은 의료선교의 여세를 몰아 1904년 12월 19일 유진벨과 함께 광주로 이주하였고, 광주지역에서는 제중병원(현, 기독병원)의 시작이 있게 한 장본인이다.
비록 현재의 기독교 병원 건축은 오웬이 숨진 3년 뒤인 1911년에 이루어졌지만 호남선교사에 지울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오웬과 포사이트가 활역했던 일제 강점기 동안 목포에는 목포부립병원이 있었지만 이는 주로 일본인들을 위한 병원이었다.
부란취 병원은 조선인들을 위한 병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매년 7~8천명의 환자들을 진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프렌치 병원에 1931년까지 의사를 파송하여 진료 치료했다. 그러나 그 이후엔 의사 선교사를 보내지 않았으며, 한국인 의사들로 병원을 운영했으나, 일제 치하에서 인력 부재와 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0년까지 지속되긴 했는데, 일제 치하와 해방을 지나면서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병원 건물이 소리 소문없이 소멸되었다.
http://lawtimes.net/2395 (전남편)
http://lawtimes.net/2436 (목포편1)
http://lawtimes.net/2438 (목포편2)
http://lawtimes.net/2446 (목포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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