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 (목포편)

편집인 | 입력 : 2020/09/13 [05:42] | 조회수: 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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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는 한과 눈물의 땅이다. 일제의 착취와 수탈로 인해 민중들의 한이 스며있는 곳이다. 그곳은 수탈로 유명한 동양척식회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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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가 개항한 것은 1897년 10월 1일로서 인천보다는 15년 뒤졌다. 목포가 개항함으로써 무안군은 1906년 무안부로 승격되었다. 이는 지리적 요인 때문으로 목포는 곡창지대인 호남의 물산을 집결, 유통하기 위해 일본은 목포 개항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개항이 되자 일본인들의 거류지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한편 자치기관이 설치되었고, 일본인들의 거류지는 주로 항구가 바로 앞에 있는 현재의 유달동 일대였으며 국권침탈 전에는 일본 영사관과 동양척식회사도 유달동 인근에 있었다. 이 건물은 훗날 목포 근대 문화원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터무니 없이 비싼 일제의 생필품을 갖고 목포의 땅 매입을 위해 주력했다. 강압에 의해 목포를 개항하고, 곡창지대인 호남쌀을 일본에 가져가기 시작했다. 목포 개항 이후 국내 쌀값은 여섯 냥 하던 것이 1898년에는 14냥으로 뛰었다.

 

1898~1903년에는 목포 부두 노동자들이 자본가에 대항하여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사건의 발단은 일본인이 고용한 조선 부두노동자들이 점심을 물로 채우고 저녁 늦게까지 작업을 해야 하는데 제대로 된 월급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목포는 눈물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1935년 초 『조선일보』에서 향토 노래 현상 모집을 실시했고, 거기서 당선된 가사에 곡을 붙여 9월 신보로 발매된 곡이 있었다. 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이 노래를 한 목포의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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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시 아롱져진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이 곡을 기념하기 위한 한국 최초의 대중 가요 노래비가 목포의 유달산 중턱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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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목포는 눈물이 많은 곳이다. 이러한 눈물을 씻기 위해 이국 멀리 푸른 눈, 오똑 솟은 코와 햐얀색의 피부를 갖고 선글라스만 쓰면 영화배우처럼 보이는 낯선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호남의 선교는 미국의 남장로교선교사들로 부터 시작이 된다.


호남선교의 시원을 열었던 유진벨 선교사는 남장로교회 소속으로 1895년 4월에 제물포로 입국했고, 오웬 선교사가 1898년 11월 6일에 입국했었다.

 

그러나 이들보다 앞선 7인의 선발대는 1892년 9월 7일 미국을 출발하여 데이비스(Miss Linnie Davis)는 1892년 10월 18일, 나머지 6인은 11월 3일에 제물포에 도착했다. 그러므로 유진벨은 이들보다 3년 후에 입국했다. 동학농민항쟁이 끝난 후에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1892년에 입국한 7인의 산발대

 

이처럼 호남의 선교는 1894년 2월 동학혁명이 발생하기 전, 1892년부터 7인의 남장로교선교사들이 들어와 사전답사를 하고 동학혁명이 끝난, 1895년 5월부터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당시 선교사들이 호남에 올 때는 동학혁명이 창궐했을 때였고, 목포는 동학운동이 끝난지 3년이 되었을 때이다.  

 

전남의 동학혁명

 

동학혁명은 전국에서 약 수십만명이 동원된 세계 최대의 농민운동이었고, 1919.3.1 운동까지 영향을 주어 그들의 정신은 계속 이어졌다. 황해도에서 백범김구선생까지 가세하였을 정도로 동학은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었다. 이러한 정신은 훗날 항일정신과 반독재정신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동학운동은 일본에 비해 신식무기의 절대부족으로 인해 충청도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여 동학혁명은 끝을 맺고 만다. 우금치 전투(牛禁峙戰鬪)는 동학운동 때 일어난 대전투로 이 전투에서 농민군이 결정적으로 패배하여 농민군 해산과 진압의 원인이 되었다.

 

우금치 전투 기념탑

 

남접 전봉준은 북접 손병희와 손을 잡고 2만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우금치에서 대항하였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농민들은 대부분 살해되었고, 여기저기 흩어졌고, 일부는 해외까지 도망을 해야 했다. 민중들을 수탈하여 산 기관총이 민중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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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치는 전투가 아니라 일본군들의 사격연습장이었다. 그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잔인하게 학살을 당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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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후반은 조선시대의 내부모순이 표출되고 밖으로는 자본주의를 앞세운 서양열강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봉건사회의 낡은 틀을 무너뜨리며 새로운 사회로의 발전을 모색하는 때였다.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은 청.일 각축장이 되었고, 1882년에는 임오군란, 1884년에는 갑신정변으로 청이 조선을 장악하던 시기였다. 1894년에는 일본이 경북궁을 침입하여 본격적인 침략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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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일본이 교전을 하고, 호남에서는 일본의 수탈이 노골화되어 탐관오리들의 세금착취가 본격화되면서 조선민중들은 물가고와 식량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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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재난지원금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거두어 민중을 착취하고 돈을 받고 관직을 직접 매매하는 매관매직도 성행하였고, 돈을 주고 관직을 산 사람들은 비용충당과 축재를 위해 민중을 수탈하는 방법도 다양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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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주택소유자들에게 부동산보유세를 높이니 임대업자들은 임대세를 높여 서민들을 착취하는 것도 이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서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설 자리가 없다. 

 

 

 

경제적으로 곤핍하거나 피폐해지면 민중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폭동이나 혁명으로 가게되어있다. 러시아의 혁명도 결국은 빵의 문제였다.

 

막스의 노동이론과 레닌의 실천이 맞물려져 빵을 위해 노동자들은 혁명에 나섰던 것이다. 동학교도들의 문제 역시 빵의 문제였다. 그들이 농사한 쌀은 탐관오리들과 일제에 의해 수탈을 당하기 일쑤였다. 쌀을 만든 농민들에게 쌀이 없었다. 모두 외세의 차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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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학의 위대한 점은 빵에 머물지않고 외세침탈에 대한 강력한 저항정신이자 독립운동정신이 있었다. 당시 농민들의 불만은 봉건통치계급의 착취도 있었지만 청.일과 같은 외세의 침략에 대해 저항의식으로 발전하여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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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운동은 훗날 3.1운동에도 큰 영향력을 주었다. 동학운동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1862년부터 삼남의 70여 고을에서 농민봉기가 발생했고, 1892년에는 전국적인 현상으로 나타났고, 농민항쟁의 조직과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최제우의 동학사상이었다.

 

동학은 알다시피 몰락한 양반 최제우가 서학에 대립하기위해 창시한 민족종교로서 순수한 종교운동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운동이다. 그러나 사상적 기반을 물려받은 김개남, 전봉준, 손병희 등을 통하여 저항종교로서 발전하였다. 그들은 막스의 이론을 실천한 레닌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동학은 결국 1년만에 일제의 신식무기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순수민족운동으로서 1919, 3. 1. 반외세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1960. 4. 19 운동 , 1980.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7. 6.10의 반독재투쟁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동학의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동학은 전북 정읍에서 발생하였지만 전남과 충청도, 황해도, 경상도까지 이어지는 전국화 된 운동이었다. 

 

목포와 무안의 청포장수, 배상옥 

 

동학운동은 정읍, 고창, 장성,광주, 동복, 남평, 나주, 함평, 무안, 진도 등 전남까지 퍼져 나갔다. 전북에는 남접의 전봉준이 있었지만 특히 전남의 동학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 배상옥이었다. 충청도의 우금치 전투이외 전남의 장흥항쟁은  동학의 최후 격전지였다. 

 

이들은 전봉준의 오른팔, 왼팔의 역할을 하였다. 손화중, 최경선, 우권선은 나주성을 공략하였고, 배상옥은 무안, 목포에서 활동하였다. 배상옥은 삼향면 대월리(목포시 대양동)에서 1863년에 태어나 함평, 무안지역의 동학군을 관장하여 33살에 죽고 말았다.  

 

민요 ‘파랑새야’ 가사에 나오는‘청포장수’가 실존인물로 무안지역에서 대접주로 활동했던  배상옥 장군을 가리킨다는 흥미로운 주장이 있을 정도로 배상옥장군은 용맹무쌍한 사람이었다. 고향은 오날날의 목포였고 그는 무안과 함평, 장흥에서 활동하였다. 

 

배상옥장군은 함평·무안지역의 동학군을 관장했고 일부 사학자들은 그 세력이 정읍의 손화중 포(包)와 맞먹고 전봉준이나 김개남보다 더 컸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농민봉기와 농민군 지도부의 성격」박찬승).

 

배상옥장군은 호남의 동학군거물로서 전봉준 장군과 더불어 1천냥의 현상금을 걸려 수배가 있을 정도로 그의 몸값은 전봉준과 맞먹는 것이었다.

 

현상금 수배가 내려질 만큼 무안에서 그의 위세는 상당히 컸지만 결국 해남 윤규룡에 의해 신고되어 체포돼 처형됐다. 전봉준처럼 같은 동학군에 의해 밀고 되어 체포가 되었던 것이다. 윤규룡은 일제로부터1000냥을 상급으로 받았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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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교과서 등에서는 전봉준의 별명이 ‘녹두장군’이었기 때문에 ‘녹두밭’은 농민군을, ‘녹두꽃’은 전 장군을, ‘파랑새’는 청나라 군대 혹은 당시 푸른색 군복을 입었던 관군이나 군모를 썼던 일본군을, ‘청포장수’는 백성들을 의미, 전 장군이 죽으면서 백성들이 울고 지낸다라는 뜻으로 해석돼 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전봉준의 세력이 무너지면서 무안지역 창포만 일대에서 활약했던 청포장수’ 배상옥이 절망에 빠진다는 내용의 노래라고 주장하기도 했을 정도로 배상옥장군의 기세는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목포출신으로서 무안의 거괴, 하도연해지역의 괴수라고 불리웠고, 그 세력의 형세와 동학군 2만명을 이끈 전봉준의 2배, 김개남의 5배에 달한다고 하였다. 그는 청포장수가 되기에 충분히 적합한 인물이었다. 

 

무안.목포의 배상옥장군과 무안동학농민혁명군은 1894. 11. 15. 나주서쪽 지점은 현 함평군 학교면 고막리인 고막포와 현 나주시 문평면 옥당리의 고막원 일대에서 집결하기도 하였다. 

 

배상옥이 중심된 무안동학혁명군은 고막원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영광, 해남, 강진 등의 동학혁명군과 함께 참전하여 장흥전투를 벌이기도 하였고, 완도까지 후퇴하기도 하였다. 

 

장흥전투는 동학혁명전투중에서 석대혈전, 최후혈전이라는 불리는 우금치 못지않은 최대의 동학군의 전투로 기록되었다.  

 

배상옥장군은 장흥전투에 패배한 후, 해남에서 체포되어 예수 태어나기 전날, 1894. 12. 24.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위패가 청천사에 봉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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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옥장군과 무안농민군은 고막원전투 패배 이후 패배주의에 빠져 부대를 해체하고 각지로 비겁하게 은신한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동학혁명군의 최후격전인 장흥전투에까지 참여하여 사기를 불살렀다. 배상옥은 무안과 목포의 전봉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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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은 고창이나 정읍과 달리 남쪽 동학혁명이 발생하였던 지역으로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당시 농민군 2천여 명이 참여하한 서남권지역 동학운동의 중심지였다. 

 

무안지역의 동학 참여 후손은 20여명으로 청계면 청천리에 배상옥 장군이 집강소(執綱所)로 활용했던 제각이 현존하고 있으며, 특히, 지난 2007년 3월 무안읍 교촌리 김광용 씨(전 무안농협 조합장)의 집에서 동학 2대 교조 최시영의 북접법헌(北接法軒) 날인이 찍힌 동학 관리임명장인 첩지(牒紙)가 발견됨으로 무안의 동학혁명이 활발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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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첩지는 1894년(갑오년) 8월에 작성한 것으로 김길권 씨를 동학 중정(中正. 육임 중 하나)에 임명하고, 2개월 후 교수(敎授) 직으로 승차 시킨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동학 육임六任 :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강都執綱,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  

    

무안의 영역에 있었던 목포는 2019년, 목포근대역사관에서 '목포 독립운동 특별전 영웅, 그날의 기억을 걷다'라는 특별전을 개최하면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수탈과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목포를 소개하며 제2부 '항거의 역사, 영웅이 등장하다'에서는 목포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과 항일의병 활동에 대해서 전시하기도 했다.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된 운동은 구한말 의병활동, 4.8 만세운동, 노동자투쟁, 1920~1930년대 독립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진 자주독립을 향한 목포사람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이러한 목포의 저항과 항전의 정신은 훗날 민주화의 투사  김대중 대통령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김대중 생가

 

 

김대중대통령의 고향인 하위도는 농민항쟁이 일찍부터 발달했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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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정신이 무안을 통하여 목포에까지 흘러갔던 것이다. 특히 목포에 가면 근대문화유적지를 볼만하다.

 

 근대 역사관

 

일제시대때 수탈로 유명했던 동양척식회사가  지금은 근대역사관(별관)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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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벨이 목포에 들어온 것은 동학의 후유증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1897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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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전까지 목포는 무안에 속해 있었다. 일찍이 목포는 삼한 중 마한에 속해 있었으며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물아혜(勿阿兮)군, 통일신라시대에는 무안군으로, 고려시대에는 물량군(勿良郡), 또는 무안군으로 불리웠다.

 

이러한 이름들은 지금의 목포시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안군, 신안군과 함께 더불어서 불렀으며, 오랜 세월동안 이 고장의 행정구역은 여러번 바뀌었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나주목의 속현으로 이어왔다.


목포 앞바다는 곡창지대이자 중국과도 멀지 않은 거리여서 고대부터 영산강 물줄기를 거슬러 나주에 이르는 교역로로 각광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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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라는 이름은〈고려사〉라는 역사책에서 처음 나오는데 나무가 많은 포구라 하여 목포(木浦)라고 불렀다고 하고, 목화가 많이 난다하여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으나, 서해로부터 육지로 들어가는 길목이라고하여 목포라고 불렀다고 하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조선 세종21년 1439년에는 「목포만호진」이 설치 되었으며, 임진란 때에는 목포 고하도에 이순신장군이 친히 수군진을 설치하여 108일 동안 머무르기도 했다. 

 

 충무공 이순신 동상

 

1897년 10월 1일 목포항이 개항 되었다. 그후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던 해의 10월 1일「무안부를 「목포부」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목포의 유명한 인물로는 동학혁명때에는 배상옥장군, 최근에는 김대중대통령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유진벨의 사역

 

군산의 전킨과 전주의 테이트는 동학혁명이 발생하였을 때, 잠시 서울로 후퇴하였다가, 동학항쟁이 끝난후, 5월에 도착하여 교회와 학교, 병원을 개설하여 갔다.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1868-1925년)유진벨이 1897년 목포에 들어와 목포선교기지를 세우고 본격적인 병원, 학교, 교회를 세워 동학의 후유증이 청궐한 목포를 치유하여 갔다.

 

목포는 특히 근대문화유적지가 있는 곳으로 일제의 수탈과 착취가 가장 심했던 지역이기도 했다.  유진벨은 이러한 목포를 치유하여 갔던 것이다.

 

 정명학교

 

유진벨의 한국이름은 배유지이다. 그는 한국명 배유지. 1895년 4월 8일 한국에 파송되어 광주·목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20여 개의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는 1897년 목포에 들어와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세워 두 학교가 3.1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그는 양동교회도 세워 오늘에까지 이르게하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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