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황에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는 막고굴이다. 물론 사막에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초승달처럼 생긴 월아천도 신비의 명소이다.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가 있으며 지금까지 마르지 않고 있다.
막고굴이 만들어진 시기는 오호 십육국 시대 전진(前秦)의 지배하에 있던 355년 또는 366년으로 추정되며, 승려 낙준이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한 것을 시작으로, 그 후 원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1,000년에 걸쳐 조성되었다.
동굴 735개, 벽화 총 연장길이 45km, 각종 불상 2,415좌가 있는 거대한 유적으로, 현존하는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유물도 가장 풍부한 불교 미술 유적이다. 유럽과 달리 기독교 유적은 거의 없다시피하다.
막고굴의 오아시스 17호
이 문서중에는 헤초의 왕초천축국전이 있고, 원효의 대승기신론이 있었다.
원효의 대승기신론은 돈황불교에도 영향을 끼쳤다. 원효의 저술이 돈황 문서에서 발견된 것이다.
당나라에 경교 전파
635년에 알로펜(아라본)선교사가 당나라 수도 장안에 도착을 해서 경교에 대한 포교활동을 했다.
당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선교사들은 중국언어의 단어와 사상을 따라 중국식으로 전도책을 저술하였던 것이다.
돈황의 기독교 벽화와 문서들
돈황동굴에서는 세례하는 벽화도 발견이 되었다.
기독교 문서
유태종의 논문집에 의하면 돈황에서 발견된 기독교문서들을 정리하고 있다.
불교의 형식을 빌린 돈황 기독교 문서들
이 책(서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경교의 경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는 하나님을 뜻하는 '신'(神)자를 사용해야 하는데 대신 '불'(佛)자를 사용하여 중국인들이 알기 쉽게 하였다. '불'자는 '상제'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고, '제불'은 천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책은 알로펜 선교사가 635-638년 사이에 태종황제에게 바친 최초의 저작이다. 이 책은 돈황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기독교서적으로서 십계명을 소개하고 마태복음을 인용하고 있다.
'일신론'의 내용은 만물이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서만 나온다는 것, 유일신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을 창조하였다는 것 등으로 되어 있다.
'대진경교서원지본경'은 요한복음 1장 1절에 근거하여 천지창조의 근원이 되는 말씀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
'지현안락경'은 800년경 아담이 거룩한 평안과 기쁨에 관하여 불경형식으로 썼다.
'삼위몽도찬'은 서기 781년에 전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쓰여졌다.
'준경'이라는 책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기독교 위인들을 칭송하고 있다.
'통진귀법찬'은 720년에 제작하였는데 변화산에서 보이신 예수의 영광을 찬양하는 책이다.
이처럼 단어는 불교와 유교, 도교의 형식을 빌었지만 내용은 성경에서 나오는 것들이었다. 경교는 중국인의 언어를 사용하여 그들에게 다가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나님을 천존, 예수를 세존, 중생, 법왕, 법당, 공덕, 대시주, 승가 등의 불교식 용어가 경교의 문헌에 들어있다. 당시 경교 선교사들은 불교의 용어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마태오리치와 천주실의
천주실의는 예수회 신부 마태오 리치는 경교 서적의 영향을 받아 이번에는 보편화된 유교의 관점에 따라 유교의 언어를 빌려서 1593년이나 1594년에 기독교교리서를 저술했다. 중국 북경에서 1603년에 한역으로 간행되었다. 천주교 교리서로서 중국의 선비와 서양의 선비가 대화로 토론하는 형식으로 꾸며졌다.
이 책은 유교 교양을 바탕으로 천주교의 입장을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천주교 신앙의 몇 가지 중요한 교리, 특히 본질적인 문제만을 다루어 신앙과 계시에 도달하도록 이론을 폈다. 중국언와 사상의 형식을 띠고 성경의 내용을 전달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수많은 중국인들이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교의 상제(上帝)는 기독교의 하느님(天主)이며, 유교의 기초적 교리를 인정했다. 나아가 마태오리치는 하늘나라의 존재를 언급하고, 인간의 영혼 불멸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영혼이 신령스러움을 중국 고전들을 통해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이외에도 창조론과 사후 천국과 지옥을 언급하였고, 성선설을 지지하였으며 모든 행위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고 했다. 그는 철학자 피타고라스까지 언급하였다.
상권의 제1편에서는 인간 지능을 설명하고, 인류의 공통사상과 운동력과 질서의 논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한편, 인간은 신과 그 속성에 대한 소극적 인식을 가졌음을 논하였다.
제2편에서는 불교·도교를 논박하고, 유교에 대하여는 제1질료라 할 태극설을 제하고는 대체로 찬동하는 논리를 폈다. 실체와 우연을 설명하면서 신은 모든 완전성을 지닌 실체임을 역설하고,
제3편에서는 천국의 필요성을 말하고 식물의 생장력, 동물의 감각력, 인간의 지적 영혼의 차이를 명확히 규정하고, 그것의 단성·영성·불멸성을 논증하고 있다.
제4편에서는 중국 고전에서 예를 지적해 가며 고대신령에 대한 신앙을 논증하여 인간 영혼이 신령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능과 불능의 차이를 보여주고, 악마와 지옥의 기원에 대한 범신론적 일신론을 논박하였다.
하권의 제5편에서는 윤회설의 창시자가 피타고라스(Pythagoras)이며 불교가 그것을 채용하여 윤회설을 중국에 전한 것이라고 하고, 만물이 모두 인간을 위하여 창조된 것이므로 불교에서 살생을 금함이 옳지 않음을 밝혔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동기와 본질을 설명하였다.
제6편에서는 참된 뜻에서의 소망과 두려움의 정당성을 밝히고, 그것은 사후의 상벌로만 옳게 실현됨을 강조하고, 지옥·천국 및 연옥에 관한 교리를 설명하며 이에 대한 비방을 논증적으로 반박하였다.
제7편에서는 천주에 대한 인간성과 선악, 자유의지와 인간의 목적을 설명하고, 천주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주축으로 하는 그리스도교설을 펴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가장 확실한 지식이고, 사랑은 가장 고귀한 덕행임을 설명하고, 종교적 무관심주의의 오류를 갈파하였다.
제8편에서는 유럽의 관습과 천주교 성직자들의 독신제를 설명하고, 중국에서의 잡다한 종교생활을 개탄하면서 중국 고대는 사정이 달랐음을 밝히고 있다.
끝으로, 원죄를 말하고 천주강생과 신법공포를 설명하고, 진리의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천주교해략 天主敎解略 Doctrina Christiana≫으로 공부하고 천주교에 귀의하여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이처럼 천주실의는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고, 유교를 긍정하면서 유교의 형식적인 틀갖고서 복음으로 접근하는 책이다. 중국인들은 이 책을 보고 그리스도를알게 되어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에 귀의하였다. 경교는 불교와 도교의 언어갖고서 중국인들에게 접근하였으며 당대 수 많은 사람들이 경교에 입문하게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다.
막고굴과 신라인들
막고굴에서 이러한 경교의 기독교 서적들이 대량 발견되었다는 것은 복음이 불교에 가리워져 있었지만 언젠가 빛의 종교인 경교가 복음의 빛을 발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통일신라시대에 많은 학생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하여 당나라 학문을 배웠으며 거기서 이러한 서적을 접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당나라 유학생 혜통, 경교를 알았을 가능성 커
헤통은 신라인으로서 당나라에 유학한 유학생이다. 삼국유사에 보면, 7세기 말의 고승 혜통(慧通)이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수도에서 멀리했다’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의 ‘외도’란 불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뜻하는데, 당시 새롭게 접다른 종교란 경교일 가능성이 높다.
혜통은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 들어가 밀교의 조사를 스승으로 섬겼는데, 그의 천거로 고종 딸의 병을 주술로 치유해준 덕분에 고종과 가까웠다고 전한다. 그런데 고종은 경교를 정식으로 받아들인 태종에 이어 당에서 경교를 중흥시킨 장본인의 한 사람이다.
혜통과 고종의 친분관계
그는 모든 주에 경교사를 짓도록 할 정도로 경교에 경도된 군왕이었다. 이러한 고종과 친분관계를 맺고있는 혜통으로서는 당에 전파된 경교와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고, 그 내막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신라의 경교 유물
다음의 유물들은 모두 경주에서 발견된다. 이미 신라에 경교가 들어왔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마리아 관음상
특히 불교의 모양을 한 마리아관음상이 있다.
마리아 관음상이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바테렌(선교사)추방령 및 에도시대 기독교 금지정책으로 탄압을 당하던 기독교 신자들이 만든 관음보살의 모습을 한 마리아상을 일컫는다.
이들은 막부와 비기독교인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마리아 성상을 불상과 비슷하게 개조하여 가쿠레다 기리시탄으로서 1873년(메이지 6년)에 신앙생활의 자유를 인정하는 해교령이 선포될 때까지 계속 유지했다고 한다. 일본 그리스도인들이 만든 마리아 관음상이다.
이러한 마리아관음상이 통일 신라시대에 발견이 되는 것은 신라가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를 국교로 선택하였기 때문에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가 두려워 그리스도인을 숨기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신라인들은 돈황까지 간 흔적이 있고 기독교의 내용이나 유물이 경주까지 흘러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돈황에 신라인들이 온 흔적이 벽화를 통해서 나타난다. 새 깃털이 세 개 달린 조관을 쓴 것은 신라인이었다.
회화에서도 조우관의 모습이 많이 남아있는데 고구려의 쌍영총과 무영총 고분 벽화에서 조우관을 쓴 사람이 말을 달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고구려나 신라의 사신들이 수천킬로나 떨어진 중앙아시아의 우주베키스탄 아프로시압 벽화에서 조우관을 쓴 사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벽화는 우주베키스탄 아프로시압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신라에서 당에 보낸 사신도 조우관을 썼다.
이외에도 둔황 막고굴 61굴의 벽화에 신라승탑 그림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신라인들은 돈황이나 장안까지 사신이나 유학생 신분으로 왕래하여 기독교 유물이거나 기독교신앙, 기독교 문서를 갖고 신라까지 왔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 유물을 접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라의 사람들은 일찍이 돈황까지 진출했다. 헤초의 왕오천축국전이나 원효의 대승기신론, 새의 깃털을 한 조관을 쓴 신라 사신들이 돈황 벽화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거기까지 진출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상 돈황에서 발굴된 기독교의 문건들이 대부분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서 제작된 것으로 당나라의 박해를 피하여 막고굴에 숨겨 놓았을 것이다.
7세기 말의 고승 혜통(慧通)이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수도에서 멀리했다’라는 내용은 경교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의 복음인 경교가 경주에까지 침투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합리적 의심을 가질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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