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는 일본 제 2의 도시로서 한인들이 약 5만 여명이 살고 있다. 해방 전부터 제주도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도일한 한인들의 집중 거주지였다. 그들은 이카이노와 그 주변에 거주하며 오사카 지역에서 발달된 고무공업의 하청 노동에 다수 종사하였으며, 그 외 토목 노동자, 노점상 등도 적지 않았다. 1930년대 말에는 이미 이카이노에 조선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고, 명태, 고춧가루 같은 식료품부터 혼수 용품까지 거주 한인의 생활 용품을 파는 점포가 약 200여 개에 달할 정도였다.
일본이 패전한 이후, 일본거주 한인들은 대거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한 반면, 고향에 생활의 근거가 없는 사람들은 계속 이카이노에 잔류하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이쿠노구를 포함한 오사카 지역에도 한국인 “뉴커머”들이 서서히 유입하였다. 이후 2세, 3세의 동포들이 중심이 되어 이쿠노 조선시장을 활성화하자는 새로운 시도가 일어났다. 그 결과 한인상가는 상당히 발달했다. 특히 오사카에는 일본 전국을 통일하여 임진왜란대 조선을 침공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그는 임진란이 발생하기 9년 전 1583년 오사카 성을 건설했다. 그 이후 계속 재건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란 패전 이후 1598년 바로 사망하게 된다.
그러나 오사카에 가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자취가 오사카 성을 통하여 그대로 남아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인 포로들을 약 15여 만명 일본으로 끌고가 장본인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나폴레옹으로 부활한 채로 있다. 그는 일본의 신이 되었다. 그에 대한 신사도 있을 정도이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죽고 정권을 잡은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83년 수도 교토의 외항이자 상업 도시인 오사카의 중심부에 거대한 성을 건설하여 자신의 거점이자 히데요시 정권의 수도로 삼았다.
오사카 성 부지는 혼간지가 노부나가에게 10년간 대항할 정도로 지리적으로 유리한 입지였다. 히데요시가 건설한 오사카 성은 지금 남아있는 오사카 성과는 다른 것으로, 훨씬 규모가 큰 성이었다. 대규모의 이중 해자가 성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는 정유재란시 이순신에게 패배하면서 바로 사망을 하게 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에게는 적이지만 일본에서는 일본의 나폴레옹으로 추앙을 받는다.
사방이 물로 둘러싸여 있고 높아서 적이 침투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토요토미의 범죄
일본을 천하 통일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넘보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선조 25년) 전국시대 토요토미 정권 치하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두 차례의 침략 중 1597년의 제 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왜군이 쳐들어온지 두달만에 평양이 함락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인구는 최소 100만 명 이상 감소했으며, 경작지의 2/3 이상이 황폐화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15만명이 일본에 포로로 끌려갔으며, 12만여 명 이상의 코가 베워졌다.
일본의 1192년에 세워진 무신정권인 가마쿠라 막부 이후에 14C초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에서 고묘 천황을 옹립하면서 무로마치 막부(1336~1573)를 개창했다.
당시에 고묘 천황을 옹립하고 교토에서 개창한 북조(무로마치 막부)와 고다이고 천황이 요시노(現 나라현)에서 남조를 수립하면서 남북조시대(1336~1392)가 전개되었는데. 60년간의 남북조시대를 북조인 무로마치 막부가 통일시킨다.
그리고 무로마치 막부는 명과 조공 무역을 통해 왜구를 단속함과 동시에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했는데 점점 무역의 실권이 쇼군이 아닌 다이묘들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와 같았다. 다이묘는 장군(쇼군)밑에 있는 영주와 같은 사람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국 통일
15C 후반 오닌의 난(쇼군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발생한 내란,1464~1475)이후로 사무라이들의 세력 다툼이 발생하면서 전국시대(일본이 100년간 분열된 시기로 각지의 다이묘들이 일본의 최고가 되기 위해 발생된 내란,15C후반~16C후반)가 시작했다.
16C에 오다 노부나가가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다음, 16C 후반에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통일을 시키면서 전국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전국시대 당시에 포르투갈의 조총이 들어 왔고 크리스트교(기독교)가 유입되었으며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총을 이용해 일본을 통일했고 심지어 조선까지 통일하고자 원했다. 처음에는 다이묘들에게 전리품을 줄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했다.
오사카는 일본이 개신교를 수용하면서 메이지 7년(1874년) 오사카 가와구치 거류지(오사카시 니시쿠 혼다우메모토초)에서 일본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성공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로마네스크양식으로 붉은 벽돌 건물은 다이쇼 11년(1922년)에 건축가 W.M. 보리스에 의해서 설계되었다. 일본 오사카 교회이다.
일본인들은 가는 곳마다 신사를 세우지만 교회도 세웠다. 한인들은 구한말 개신교를 수용한 이래 하와이, 멕시코, 쿠바, 러시아. 중앙아시아, 독일 , 중동 등 전세계 어디를 가나 교회부터 세웠다. 재일대한 오사카 교회
재일대한 오사카교회는 2023년 백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1923년에 설립했다. 당시 공업단지로 이주한 여성들을 위해 고베신학교에서 신학을 하던 유학생 김우현과 박상동은 1921년5월 오사카 지역에서 한인 동포들을 위해 사역을 했다.
당시 여공으로 이주한 김의생 자매와 신남수 자매 등이 신앙적으로 전도모임을 추구하여 오사카교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1922년에는 김이곤목사가 순회하며 예배를 인도하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면서 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그 당시 오사카의 조선인 총수는 약 4만 명에 달했을 정도이다.
현재는 약 200여 명이 출석하고 있다.
교오토
인근 교오토(경도(京都)는 오사카에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일본 교토부 중남부에 위치한 시로서 교토부청의 소재지이자 교토부 최대 도시이다.
794년 헤이안 시대가 시작한 이래 메이지 시대 초기인 1869년까지 1075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고도(古都)로 별칭이 '천년수도(千年の都)'이다.
교오토는 청수사와 금각사라는 유명한 사찰이 있는 우상의 도시이다.
금각사는 황금으로 만든 사찰이 있다. 그래서 금각사이다. 동지사 대학
오사카를 가면 반드시 고대도시인 교오토를 방문할 필요성이 있다. 특히 교오토에는 윤동주와 향수의 정지용이 다녔던 대학이 있다. 동지사 대학은 니지마 조가 설립한 기독교 대학으로서 명문대학이기도 하다.
신학부
이 학교에는 신학교도 있다.
채플실에는 파이프오르간도 있다.
윤동주와 정지용의 비석
이외에도 동지사 대학교 채플실옆에는 윤동주와 정지용의 돌비석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그의 친필시는 일어가 아닌 한글로 쓰였다. 윤동주는 일본어로 시를 쓰는 것을 거부하였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윤 동 주
채플실 맞은 편 윤동주 비석 우측에는 향수로 유명한 정지용의 비석이 있다. 정지용은 6.25가 발생하면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윤동주는 1941년 일본 유학을 가기 전에 평소 써두었던 19편의 시를 정리하여 정병욱교수에게 넘겨주고 일본으로 떠났다. 떠난지 4년만에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일본에서 사망했다.
윤동주의 시집은 친구 정병욱 교수의 마루밑에서 발견되었다.
1941년에 윤동주는 정병욱에게 시를 맡아달라고 했고, 1945년 2월 일본 형무소에서 생체실험 주사로 옥사했고, 1948년 출판되었다. 정병욱 교수 어머니가 윤동주의 시를 마루밑에 넣어 두었다가 훗날 발간이 된 것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시가 발간이 되기 전에 서거했다. 윤동주는 1921년 생으로 27살에 생체실험으로 뇌일혈로 요절했다. 생리 식염수 개발을 목적으로 바닷물을 주사하여 뇌일혈로 사망했다.
그의 시도 친구가 독안에 시를 넣었다가 세월이 지나서 공개된 것이다.
일본은 매년 윤동주 추모행사를 갖는다. 많은 일본인들이 찾고 있다. 윤동주는 문익환목사, 김형석교수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는 장로의 아들로 태어나 기독교인으로서 애국운동을 한 민족시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교오토에는 윤동주 시인과 한인교회를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이 서려있다. 교토의 한인들은 기독교의 정신에 따라 1926년에 교회를 세웠다. 이것이 교토 한인교회이다.
성경은 한국어 일어가 함께 있는 것을 사용한다. 설교도 두가지 언어를 사용한다. 그만큼 한인들이 일본화 되어가고 있었다. 이처럼 한인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애국하는 정신과 신앙의 정신으로 사찰대신 98년 전에 교오토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이 교회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우상의 도시 교오토에 흐르고 있다. 오사카 역사 박물관
오사카 역사 박물관에 가면 우리에게 낯익은 물건들이 보인다. 삼국시대에는 우리의 문화가 오사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장신구, 기와 등이다. 일본도 삼국시대와 백제, 가야시대에 들어온 것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구한말이후 에는 명치유신을 일찍 단행한 일본의 근대화 물품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재봉틀, 전화기 등은 우리에게 낯익은 물품들이다. 문화 도래인 오사카, 쿄오토에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정신, 일하러 간 한인 노동자의 정신, 공부하러 간 유학생의 정신,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인들의 정신, K-POP을 전하는 청년들의 정신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
일본에 가면 더이상 사들고 들어올 선물이 없다. 전자상가나 백화점을 가면 한국제품들이 훨씬 뛰어난 부분들이 많이 있기때문이다. 일본인들의 핸드폰은 대부분 카메라 렌즈가 두개 이며 세개가 있는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한국은 핸드폰 문화, POP 문화, 조선과 제철, 반도체, 전기 밧데리, 원자력 기술은 앞서있다. 자동차도 거의 따라 잡기 일보직전이다. 전기차가 일본보다 더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인들은 가는 곳마다 사찰이나 신사대신 교회를 먼저 세웠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조만간에 이교신으로 얼룩진 일본을 따라 잡을 것이다. 하나님은 광야같은 세상에서 교회를 통하여 기적을 베푸는 분이기 때문이다.
오사카는 한인들이 일찍부터 교회를 세워 교회를 중심으로 일본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오사카에서 일하는 한인들은 거의 차별은 찾아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2세나 3세들은 일본의 주류사회에 진출하려면 일본으로 귀화를 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했다.
교회를 통한 한인들의 일본정착은 대한민국에도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이 경제적으로 일본을 따라잡는데 많은 도움을 얻었을 것이다.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고국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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