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재판은 평범한 인민 대중에게 사법절차에 대한 장벽을 없애고자 함을 목표로 한다. 흔히 우리가 아는 인민재판은 6.25전쟁 당시 북한이 남한 내에서 간단하게 인민재판이란 글씨를 쓰고 소송절차없이 일방적으로 즉결처분하여 사형시키는 재판이다.
에드먼드 머스키 (Edmond Muskie) 국무장관의 주장
이러한 즉결처분의 인민재판이 1980년 광주에서 행해진 의혹이 있다. 시사저널은 머스키 당시 국무장관이 광주에서 인민재판소가 세워져 여러 건의 처형이있었다고 보도했다.
The situation in Kwangju has taken a rather grim turn. The moderate citizens committee has lost control of the situation and the radicals appear to be in charge. Peoples courts have been set up and some executions have taken place. Student demonstrators have been largely replaced by unidentified armed radicals who are talking of setting up a revolutionary government.
김인태의 사망
인민재판이란 518때 광주에서 시민군들이 시민군을 끌고가 총살한 사건이다. 시민군들은 해남 농민 김인태를 끌고갔고 김인태는 닷새후에 시신으로 돌아온다. 그의 아내 심복례는 남편 사망통지를 받았다.
심복례씨는 유족이지만 자신의 남편 김인태씨가 박남선 상황실장 등 시민군들에게 납치되어 끌려간 후 사망하였다고 주장했다.
가해자는 시민군측이었다
김인태의 사망경위는 전혀 알려지지않았지만 구타에 의한 타박사였다. 공수부대에 의하여 맞을 가능성도 있고 사진을 보았을 때 시민군에 의하여 맞아 사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서울에서 대학까지 나온 000은 궐기대회 장소에서 시민군들에게 붙잡혀 도청 안으로 끌려간 후 다시는 아내와 자녀들을 볼 수 없었다. 사망한 것이다.
이외에 다른 시민도 시민군들에 의하여 끌려갔다. 여러명들이 시민군들에 의하여 죽어갔다.
이들은 인민재판에 의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Gleysteen) 주한 미국대사의 주장
윌리엄 글라이스틴(William Gleysteen) 주한 미국대사도 1980년 5월 26일 광주에서 시민군들이 인민재판으로 시민들을 처형한 사건이 있었음을 워싱턴에 보고했다.
광주상황: 5월 25일 일요일에 광주사건은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민간인들로 구성된 기동순찰대(vigilante group)에 대한 보고가 있으며, 며칠전 반납했던 무기를 난동자들이 도로 가져왔으며, 인민재판과 처형이 있었다.
SITUATION IN KWANGJU: DURING THE COURSE OF SUNDAY, MAY 25, EVENTS IN KWANGJU TOOK A SHARP TURN FOR THE WORSE. THERE WERE REPORTS OF VIGILANTE GROUPS, RECOVERY BY RADICALS OF WEAPONS TURNED IN EARLIER, AND EVEN OF PEOPLE'S COURTS AND EXECUTIONS.
그러나 KOREAN SITUATION REPORT NO. 8에서는 인민재판은 충분히 확인되지 않았다고 했다.
PEOPLES COURT AND EXECYTION HAS NOT BEEN CONFIRMED
.
<저작권자 ⓒ 뉴스와논단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