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항쟁시, 북한의 월북 선동 삐라와 월북자들

윤기권 등은 삐라를 보고 의거 월북

편집인 | 입력 : 2024/05/11 [00:45] | 조회수: 567

518 광주항쟁시 북한이 뿌린 월북선동 삐라를 보고 실제로 월북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 중의 한 삐라는 의거 월북하는 국군장병들에게 3억원씩 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군인들보다는 고정간첩으로 의심되는 여러 민간인들이 실제로 월북하는 사태가 드러났다. 윤기권, 지영준, 리선필, 강대승, 김권희가 있었다.  

 

윤기권

 

윤기권은 보상금 2억을 받자마자, 바로 월북을 한다. 

 

▲    윤기권

 

  

[평양 1991년 2월 28일발 조선중앙통신]은 다음과 같이 방송했다. 

 

남조선인민들속에서 공화국북반부에 대한 동경심이 날을 따라 높아가고있는 가운데 남조선동포들이 공화국북반부로 련이어 의거해오고 있다.

 

올해에 들어와 강대승,지영준,리선필,김권희 동포들이 의거해온데 이어 남조선 광주현대극장 미술원이었던 윤기권(29살) 동포가 얼마전에 삶의 길을 찾아 공화국북반부로 또 의거하여왔다. 관계부문 일군들이 그에게 꽃다발을 안겨주고 동포애의 정으로 따뜻이 맞이하였다. 

 

윤기권동포는 전라북도 정읍군 립암면 신면리에서 태여났으며 의거하기전까지 광주시 북구에서 살았다.

 

그는 광주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간 돈벌이를 위해 남조선의 여러곳을 돌아다니다가 군에 징집되여 2년간 괴뢰군살이를 하였다.그는 의거동기를 묻는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오래전에 이북방송을 들으면서부터 이북의 현실을바로 알게 되였다.

 

나는 이북방송을 통하여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항일무장투쟁을 승리에로 령도하시여 이북에 로동자,농민의 진정한 인민정권을 세워주시였을 뿐아니라 민중중시의 참다운 정치를 펴나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특히 이북에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령도밑에 근로민중이 모두가 다 나라의 주인이 되여 나라와 민족의 번영을 위하여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수 있었다.

 

이 과정에 나는 이남통치자들이야말로 나라와 민족도 안중에 없는 매국역적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럴수록 나는 이남사회에서는 더이상 나의 희망을 꽃피울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였으며 이북을 희망의 등대로 더욱더 동경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나는 오래전부터 월북의 길을 모색해오다가 얼마전 해외에 나간 기회를 리용하여 참된 삶의 길을 찾아 공화국북반부로 의거하여 왔다.

 

 

  

 

윤기권은 5.18 당시 10-15명의 경찰을 구타하여 인질로 잡은 댓가로 포상이 인정되어 2억원을 받았다.  

 

윤기권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5월 18일 일요일이어서 오후에 시내에 나왔다가 가톨릭센터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그곳으로 갔을 때는 페퍼포그차를 앞세운 수많은 경찰들과 5백∼1천 명 가량의 시위군중들이 서로 대치해 싸우고 있었다. 시위대는 돌을 던지고, 페퍼포그차는 시민들을 향해 질주해 오면서 최루가스를 뿜어댔다. 최루탄을 얼마나 많이 쏘아대던지 숨이 막혀 질식할 지경이었다.

 

시민들은 빠져 나가려고 서로 밀고 넘어지는 소동이 벌어졌다. 누군가가 사람 죽인다고 소리를 질렀다. 어느 청년이 외쳤다. "좁은 골목으로 여러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다치니까 천천히 갑시다." 최루탄을 보아대면 그렇게 흩어졌다가 조금 후에 다시 대열을 지어 격렬하게 시위하였다. 매운 최루가스와 경찰들에게 밀려 현대극장 쪽으로 쫓겨갔다.

 

그곳에서 다시 대열을 정비하여 천변을 통해 동명동에 있는 동산파출소로 쳐들어가 파출소를 쳐부수고 최규하 대통령 사진을 떼어낸 다음 짓밟아버렸다. 파출소 안에서 근무하던 경찰 둘은 우리들의 기세에 눌려 뒷문으로 도망가버렸다.

 

4시경 우리는 다시 법원 쪽으로 갔다. 산수동으로 가는 도로에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파출소를 깨부순 기세로 우리는 쫓아가 돌멩이와 각목으로 마구 두들겼다. 그안에 타고 있던 10∼15명의 경찰들을 인질로 붙잡았다.

 

그들은 두꺼운 진압복을 입고 있었는데 무기를 들고 있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곳에서 우리는 투사의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리랑, 봉선화 등을 불렀다. 또 훌라송에 맞추어 '전두환이 물러가라, 좋다 좋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좋다 좋다' 등의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쳤다.

 

  


윤기권은 광주 5.18 유공자 명단에 있는 사람이다. 

 

 

  

 

 

윤기권은 5.18 당시 총상을 입어 적십자 병원에 입원을 한다. 

 

  

 

  


그러나 보상금을 타자마자 바로 월북한다.  

 

  518 전자자료 총서 20권, 247P 

 

대동고교 출신 고 전영진 열사의 친구 윤기권씨(29)는 5.18 부상자 동지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지난해 광주 보상금  수령직후 홀연히 월북을 한 것으로 알려져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송영길의 동창 윤기권은 아래와 같은 공적으로 5.18유공자가 되었고 보상금을 2억이나 받아내었다.

 

 "산수동으로 가는 도로에 경찰차 한 대가 서 있었다. 파출소를 깨부순 기세로 우리는 쫓아가 돌멩이와 각목으로 마구 두들겼다.  그안에 타고 있던 15명의 경찰들을 인질로 붙잡았다. 그들은 두꺼운 진압복을 입고 있었는데 무기를 들고 있었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곳에서 우리는 투사의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아리랑, 봉선화 등을 불렀다. 또 훌라송에 맞추어 '전두환이  물러가라, 좋다 좋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좋다 좋다' 등의 노래를 부르고 박수를 쳤다." 

 

위의 증언을 하고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아 보상금 2억원을 받아챙긴 윤기권은 1년동안 월북을 계획하고 고정간첩의 안내로 91년 북한인민에 의거월북하였다. 그러자 그에게 정신병자 프레임을 씌웠다.  

 

"그 친구는 평소에 약간 정신이 이상했습니다. 물론 그와 썩 가깝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제가 알기로는 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좀 엉뚱한 면이 있었지요. 광주 항쟁의 충격으로 정신이상증세가 있다고 해서 보상금도 남달리 더 많은 금액을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윤기권은 YMCA에서 탈출하였다고 구술하기도 했다. 

 

  

 

윤기권은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아 보상금 2억원을 받아챙겼다. 그는 미국만행을 규탄했다.  JTBC에서도 윤기권의 월북을 다루었다.  

  

 

  

 

북한매체 민주주선 1991. 3.1자로 '윤기권동포가 공화국북반구로 의거하였다'고 주장했다.  

 

  민주조선, 1991. 3. 1

 

민주조선 5. 25.자는 '공화국 북반구로 의거하여 온 남조선의 현대극장 미술원이었던 윤기권동포가 기자들과 회견'을 하였다고 했다.  

 

 민주조선 1991. 5. 25

 

그는 북한에서 광주봉기의 잊을 수 없는 최후의 밤을 쓰기도 했다.  

  

광주봉기의 잊을수 없는 최후의 밤/의 저자

 

1991년 평양 5월 25일발 조선중앙통신은 "남조선 광주에 살고 있다가 1991년에 의거입북하여 현재 평양시 교수강습 및 학생답사견학소에서 지도교원으로 사업하고 있는 윤기권이 광주인민봉기 20돐에 즈음하여 <광주봉기의 잊을수 없는 최후의 밤>이라는 제목의 수기를 발표하였다"고 했다.  

 

수기는 다음과 같다.

 

1980년 5월 26일 밤은 하나의 고장으로 생겨 난이래 광주가 맞은 가장 긴장한 하루 밤이였다.

 

전두환일당에 의해 5.17폭거가 터지자 광주시민들은 항의시위에 떨쳐 나섰다.그때 나도 같은 또래의 고등학교 동무들과 함께 시위대오에 뛰여 들었다.

 

파쑈광들은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댔었는데 이것은 애국시민들에 대한 참을수 없는 모독이였다.폭도는 광주시민들이 아니라 바로 총칼을 마구 휘둘러 댄 그들이였다.

 

<유신체제>의  철폐를 절규한 시민들의 평화적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발톱까지 무장한 계엄군을 투입하여 학살만행을 마구 자행한 자들이 폭도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겠는가.

 

사실 나는 자신이 속해 있던 시위대오가 <향군회관>앞 거리에서 처음 파쑈계엄군과 맞다 들었을 때 설마 총을 쏘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러나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이였다.느닷없이 귀청을 째는 듯한 총성이 울린 순간 지끈하며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모진 아픔을 느꼈다.흉탄에 맞았던 것이다.정신이 아찔해지는 바람에 나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푹푹 쓰러지는것도 미처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오는 주춤한 것이 아니라 더욱 노호하였다.이런 사태가 광주의 이거리,저거리에서 일어 났다.말하자면 계엄군이 울린 폭압의 총성은 평화적시위자들을 놀래운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을 봉기에로 불러 일으킨 신호성으로 되였다.

 

 광주봉기는 이렇게 해서 일어 났다.

 

시간이 흘러 자정이 되고 27일 새벽에 접어 들자 <도청>일대에는 긴박감이 한층 감돌았다.그러나 시민군들의 얼굴들은 근엄하면서도 랑만에 넘쳐 있었다.

 

최후의 순간을 내다 보면서도 그들은 투쟁가를 부르고 가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며 서로 고무하였다.

 

그런속에서 갑자기 파쑈계엄군의 도시 재진입을 알리는 다급하면서도 침착한 녀성방송원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거듭 울려 나왔다.

 

시민군은 저마다 총의 안전장치를 풀고 격발기를 당기며 위치를 차지하였다.좀 있더니 땅크,장갑차의 무한궤도 소리가 울리고 총소리,폭음소리가 정신이 나갈 지경으로 울리기 시작하였다.계엄군이 <도청>일대를 포위하고 총공격에로 넘어 간것이였다.

 

총소리가 콩볶듯한속에서 도간도간 계엄군측에서 확성기로 투항하라는 위협적인 소리가 울려 나왔다.시민군측은 이에 <유신체제를 철페하라>,<전두환을 찢어 죽이라>라는 구호의 웨침으로 대답하면서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도청>건물에서도 항전의 총탄이 뿜어 졌고 내가 있던 기독교청년회관에서도 복수의 불줄기가 계엄군을 향해 뻗어 나갔다.

 

<도청>일대에서의 총격전은 새벽 4시부터 시작되여 아침 7시가 넘도록 계속되였다.참으로 가렬한 항전이였다.

 

그 최후의 결전으로부터 20년 세월이 지나가고 있다.그러나 광주애국렬사들은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그것은 그간 남조선에서 <문민>의 간판을 달았던 <정권>도 나왔고 <국민>의 명판을 단 <정권>도 나왔으나 달라진 것이란 아무것도 없기때문이다.

 

이에서 얻게 된 심각한 교훈은 과연 그 무엇이겠는가.그것은 미제침략군이  남조선에 둥지를 틀고 있는 한 <정권>이 열번,백번갈려도 변화란 있을수 없으며 반미가 없이는 자주도 민주도 통일도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진리를 깊이 깨달았기에 민중은 반미자주화와 반파쑈민주화의 기치를 더욱 높이 추켜 든것이다.민중은 반드시 원쑤들로부터 피의 대가를 받아 내고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앞당겨 올것이다. 나는 광주사태의 증견자로서 이것을 굳게 확신하고 있다.

 

지영준
 
중앙일보 1991. 2. 5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를 하였다. 
 
【광주=연합】 북한관영 중앙통신이 4일 월북한 것으로 보도한 지영준씨(29·전남 고흥군 봉래면 외초리)는 지난달 10일 근무처인 광주 무등산온천관광호텔에 사표를 낸 뒤 소식이 끊긴 것으로 밝혀졌다.
 
이 호텔 관계자는 『지씨는 지난해 9월 이 호텔 종업원으로 채용돼 영업부 프런트주임으로 일해왔으며 이 호텔 노조설립추진위원장을 맡아오다 지난달 10일 사표를 내 수리됐다』고 말했다.
 
 

  


이선필
 
통일뉴스 2002. 4. 19 자에 의하면 이선필이 1991년 2월 승용차를 몰고 의거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윤기권과 유사한 때에 월북한 것이다. 
 
 

 

  

  

이들은 의거월북하는 자에게 보상금을 많이 준다는 선동 삐라를 보고 의거월북하였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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