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스와 이스라엘 전쟁의 기원: 알라와 야훼의 싸움(2)

편집인 | 입력 : 2023/10/16 [06:42] | 조회수: 740

http://lawtimes.net/4884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의 기원은 3,000년 전부터(1)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의 기원은 B.C1050년 경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중세에서는 알라와 예수의 싸움이다. 현대는 알라와 야훼의 싸움이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722년에 사이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였고, 기원전 586년에는 남쪽의 유다 왕국이 바빌로니아에 멸망하였다.

 

 앗수르

 

솔로몬 왕국 후반기( B.C 745-B.C 722)에 앗수르는 소규모의 작은 나라였지만 이스라엘과 유다가 나누어 지며 두 왕국간의 혼란한 시기에 강성하여 지면서 두 왕국에 대한 침략이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앗수르 제국은 이스라엘(19대 호세아 왕 9년)을 침략하여 북왕국 이스라엘은 멸망한다 (B.C 722년). 유다 13대 히스기야 왕 6년에 발생한 사건이다.   

  

 

  

  


앗수르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8년 후에 산헤립이 유다 예루살렘을 침략하였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기도로 물러나게 된다.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보내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왕하19:20).....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19:35)

 

앗수르는 B.C 612년까지만 지속되었다. 신흥제국 바벨론이 B.C 612년에서 B.C 536년까지 새로운 패자로 오늘날의 중동을 지배하게 된다. 

 

바벨론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은 B.C606년에 남유다왕국을 정복했고 B.C586년에 예루살렘성전과 성벽을 완전히 파괴했다. 남쪽의 히브리인들은 거의 바빌로니아 왕국의 노예가 되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시137:1-3)

 

보니 엠의 바벨론강가의 추억은 시편 137편을 반영하는 것이다.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지역은 지금의 이란, 이라크, 시리아.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터어키 지역이다. 이 지역은 지금까지 종교, 민족분쟁으로 인한 영토의 각축장이다. 

 

  

 

바벨론(Babylon)은 고대 중동지방을 정복했던 제국들 중 하나로서 바벨탑이라는 지명으로 유명하다. 

 

그 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해석했는데, 왕이 본 거대한 신상의 금 머리는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왕 자신이며, 가슴과 팔은 은이며(페르시아제국),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그리스제국), 종아리는 철(로마제국)이었다(단 2:31-45). 다니엘은 B.C538-536년 다리오가 통치할 무렵 사자굴에 갇힌 바 있다. 

 

페르시아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이후 바벨론은 BC 536년에 페르시아(바사)제국에 왕좌를 내어주게 되었다. 성경에 나오는 에스더 이야기는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가 있었을 때 나오고, 에스라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의 왕의 보냄을 받아 유대로 돌아갔고, 학개, 스가랴, 말라기 모드 페르시아에서 돌아와 예언을 한 선지자들이다. 이처럼 현재의 이스라엘은 과거 페르시아의 빚을 지고 있다.

 

특히 고레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고레스를 통하여 역사하였다는 것을 기술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고레스가 나의 목자라고 까지 했다.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사44:29)

 

페르시아는 BC 536년에서 BC 332년까지 존속했는데, 페르시아의 초대 왕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을 놓아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페르시아는 약간의 자치를 허락해 이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두 번째 성전을 지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 중 일부는 페르시아 제국의 군인이 되었고 나머지는 농업에 종사했다. 

 

그리이스

 

그러나 페르시아제국은 알렉산더가 이끄는 그리스(헬라) 군대에 의해 멸당망한다. 마라톤전투에서는 B.C 490년에 패하고, 다시 침공하여 B.C479년에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이스군에게 패한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은 열강의 각축장으로 인해 A.D70년에 로마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고, 1948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세울 때까지 전세계를 유리방황하게 된다. 

 

로마의 점령

 

기원전 63년부터 폼페이우스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했지만, 헤롯대왕이 로마에 의해 분봉왕이 되면서 로마 제국의 지배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예수가 태어날쯤부터 팔레스타인은 혼란에 빠졌고 이후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았는데, 이는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66년부터 73년까지 계속된 전쟁에서 로마의 황제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통곡의 벽을 제외한 두 번째 성전 전체를 파괴했다.

 

132년부터 135년까지의 바르 코크바의 반란이 실패한 후, 모든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추방되었고, 일부는 팔레스타인 밖으로 쫓겨났다. 로마 제국은 팔레스타인의 지역명을 유다에서 시리아 팔레스티나로 바꾸었다. 

 

이스라엘이 A.D70 년에 로마에 멸망당할때까지만 해도 아랍은 없었다. 아랍의 등장은 이스마엘 후손들의 등장이었다. 그 후손들은 무하마드를 통하여 나타난다.

 

오늘날 이스라엘과 아랍의 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분쟁이기도 하지만, 혈연적으로 이복 아들들의 후손들의 분쟁이다. 즉 본처 소생인 이삭과 첩의 아들인 이스마엘의 분쟁이다. 아랍 사람들은 이스마엘이 아랍으로 쫏겨났다고 보고 있다.     

 

중세 아랍의 등장

  

고대 히브리어에서는 Arav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는 사막을 의미한다. 

 

​아랍인(عرب 아랍)은 주로 사막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의 아랍 국가에 거주하는 셈족 계통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랍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며, 인구의 90% 이상이 무슬림이고, 5~6%는 기독교 신자이다.

 

아랍인의 역사는 이슬람이 태동했던 7세기부터 시작된다. 7세기 이전의 아랍 지역은 아라비아 반도 지역을 가리켰으나, 이슬람 문화권이 확장되면서 중동과 그 인근의 이슬람 문화권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또한 아랍 지역은 역사적인 세력으로 볼 때 아랍 제국을 뜻하게 되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아랍 연맹이나 아랍 세계를 뜻하기도 한다.

 

무하마드와 이슬람

 

무하마드는 40세 되던 610년 경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느님 알라의 계시를 받은 뒤 마지막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띠고 포교에 나섰다. 이 때 알라로부터 받은 계시를 기록한 것이 『꾸란』이다. 창시 후 아라비아지역이 하나의 조직으로 통일되었고, 무함마드 사후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아랍은 대부분 이슬람교도이다. 이슬람교는 610년 무함마드가 창시한 종교이다. 이슬람이란 ‘유일신 알라에게 절대 복종한다’는 뜻이며, 이슬람신도를 무슬림이라 한다. 여성신도는 무술리미이다.

 

하느님 앞에 완전평등을 주장한 이슬람교는 형제애를 강조하며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삶을 연결함으로써 신에 대한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및 다른 인간과의 관계까지 강한 공동체적 성격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슬람은 주로 중앙아시아, 터키, 사하라 일대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 이슬람을 전파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중세유럽 암흑기에는 그리이스 · 로마의 고전문명을 훌륭하게 보존하여 르네상스주시대가 도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도 했지만 근대 이후 서구제국주의 세력에 대처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점차 종교적 · 정치적 · 사회적 제도간에 갈등을 빚게 되었다.

 

특히 13세기에 출현한 터어키의 오스만 제국은 이슬람을 표방하였고, 15세기 말까지 지상에서는 발칸과 아나톨리아의 거의 모든 땅을 평정하고, 19세기 러시아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세계 1차대전에서는 대패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로 인해 이슬람세력은 공고하게 되었다.  

 

이슬람 세력들은 20세기 후반 식민종주국으로부터 얻은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일과 이슬람공동체를 현대화하는 일로 인하여 서구엘리트와 종교전통고수자 사이에 많은 마찰이 발생하였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 예수와 알라의 전쟁 

 

특히 중세의 십자군 전쟁은 예수와 알라의 전쟁이기도 했다. 십자군 전쟁은 1095년부터 1291년에 걸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간헐적으로 발생한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이슬람 원정을 가리킨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예루살렘 왕국을 수립하였다. 예루살렘 왕국은 100년 가까이 팔레스타인 전역을 통치하였으나, 1187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흐 앗 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였다. 이후 예루살렘 왕국은 아크레와 그 인근 갈릴리 호수 북쪽 지역에서 다시 100여년 동안 명맥을 유지하다가 1291년에 맘루크 왕조에 의해 멸망하였다.

 

결과적으로 십자군 전쟁은 9차까지 이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예상과 달리 성지인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함으로써 교회가 패배한 전쟁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도들과 이슬람의 싸움이었다.  

 

십자군 전쟁은 당시 유럽 각지에 살고 있던 수십만 명의 유대인들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종교적 광기로 이성을 상실한 병사들, 민중들이 게토로 쳐들어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일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 이후 12세기와 13세기 초까지 빈번히 일아났다. 중세에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들에게도 박해를 당했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 (1516년 - 1920년)

 

1516년, 이 지역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팔레스타인'이란 명칭을 공식적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19세기부터 급격히 국력이 쇠하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함께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패전함으로써 현재의 터키를 제외한 중동 지역 대부분을 영국과 프랑스에 내주게 되었다.

  

팔레스틴은 1947년까지 영국이 점령하게 되었다. 

  

영국의 지배와 제1차 중동전쟁 (1920년 - 1948년)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제안하였다. 영국이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팔레스타인이라는 명칭이 공식적으로 다시 쓰이기 시작했고, 영어, 히브리어와 아랍어가 이 지역의 공식 언어가 되었다. 이 당시 팔레스타인은 라파(가자 지구 남부 도시)부터 리타니 강(레바논 남부의 강)까지의 지역을 가리켰다. 다만, 네게브 사막(이스라엘 남동부의 사막)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19세기 말 동유럽에서 시작된 포그롬과 유럽 전체에서 악화된 반유대주의는 시온주의의 발단이 되었다. 이 시기부터 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은 유대인들의 귀환을 더욱 부채질했다.

 

유대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해서 팔레스타인인들과 분쟁을 일으켰다. 영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시온주의자들을 키프로스에 있는 난민촌 등으로 보내는 등 유대인의 이 지역 이민을 제한하기도 했으나 대체로 아랍인들보다 유대인들과 보다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고, 이 지역에 10만명의 군대를 두는 것은 경제적으로 무리였기 때문에 철수를 서둘렀다.

 

결국 1947년 초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 통치를 끝내겠다고 선언했고, 팔레스타인의 운명을 유엔에 떠맡겼다.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사이가 점점 악화되자 1947년 유엔은 주민 투표로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채택했다. 유대인들은 이 결의안을 환영했으나, 아랍인들은 이에 반대하여 예루살렘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유대인 밀집지역을 공격하였다.

 

1948년 5월 14일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고, 다음 날 영국의 통치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이스라엘의 독립 선언 이후에 아랍 연맹의 공격으로 제1차 중동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로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중동전쟁

 

 

 



  



오늘날의 중동분쟁은 영국에도 그 책임이 있다. 영국이 아랍권과 이스라엘이게 애매모호한 결정을 하였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을 보자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직후까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다스리던 영국이 1948년에 이 지역의 통치권을 포기하고 철수하면서, 무주공산의 영역을 누가 선착순으로 접수하느냐에 대한 충돌이 발생했다.

 

중동의 갈등의 원인은 영국의 이중 플레이

 

실제로는 1917년의 밸푸어 선언에 영국은 유대인들의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방침을 약속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영국이 1915년의 맥마흔 선언으로 해당 지역에 아랍인들의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구상도 약속하였다.

 

1917년 11월 2일 영국의 외무장관 A.J 벨푸어기가 팔레스타인에 유대민족 국가 건설을 지지한단느 벨푸어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영국은 앞서 맥마흔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수백년동안 오스만이 지배해 온 팔레스타인지역을 미끼로 아랍인과 유대인에게 각가가 지지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벨푸어 선언은 훗날 이스라엘 국가 건설의 초석이 되었지만 아랍인들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영국의 배신이 되었다. 그래서 중동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100년 전, 1917년 11월 2일, 영국 외교장관 아서 벨푸어가 영국의 유대계 유력 인사 라이어널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보내는 서신이 공개됐다.

 

  

 

  



벨푸어 선언은 이스라엘에는 건국 열망이 실현되는 계기이고, 영국에게는 외교·군사적 선택이지만, 팔레스타인에게는 고난의 시작이었다. 역사적으로는 중동지역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유혈사태와 분쟁의 씨앗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처럼 영국의 정리되지 않은 이중계약으로 인하여 해당 지역의 소유권에 대하여 아랍인 공동체들과 유대인 공동체들의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하였다. 

  

1949년 정전협정에 따라 예루살렘은 반으로 나뉘었고, 동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 지구는 요르단에, 가자 지구는 이집트에 귀속되었다.

  

그러나 당시 아랍인들은 연대하여 영국이 철수하자마자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다. 이것이 제1차 중동전쟁이다. 1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다.  

 

  © 편집인



중동전쟁

 

  

 

1차 중동전쟁

 

마침내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 52% 지역에 유대국가를 세우고, 나머지 48%는 아랍국가를 수립하는 분할안을 제시했고, 이듬해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됐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이집트·요르단·시리아·레바논·이라크 등 아랍 5개국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1차 중동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대반격으로 팔레스타인 영토의 70%를 점령했고, 팔레스타인인 100만명이 강제 추방되면서 무장단체를 결성해 게릴라 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 전쟁의 결과는 예상과 달리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 이스라엘 국가의 실체가 확인되었다(지도 왼쪽에서 두 번째).

 

  



제2차 중동전쟁(1956년 10월 29일~1956년 11월 3일)은 이른바 ‘시나이 전쟁’이다. 이집트에서 낫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폐지하고 친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언한 후 아랍연맹을 강화하면서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하였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운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하여 아랍연맹을 견제하고자 하는 이스라엘과 함께 이집트를 공격한 전쟁으로 마지막 제국주의 전쟁의 성격이 있다. 이집트는 전쟁에서는 참패하였으나 수에즈 운하 국유화의 공인 등 정치적으로 완승하여 나세르의 입지가 강해지고 오히려 아랍연맹이 강화되는 결과가 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1967년 6월 5일~10일)은 이른바 ‘6일 전쟁’이다. 아랍연맹을 강화해나가고 있던 나세르의 이집트와 시리아, 요르단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선제타격으로 단기간에 대승을 이룬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관할하던 가자(Gaza) 지구뿐만 아니라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하였고, 요르단이 관할하던 동 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이하 서안 West Bank)을 점령하였으며, 시리아가 관할하던 골란(Golan) 고원을 점령하였다(지도 왼쪽에서 세 번째).

 

  


제4차 중동전쟁(1973년 10월 6일~10월 25일)은 이른바 ‘욤키푸르(대속죄일)전쟁’이다. 나세르의 뒤를 이은 사다트가 제3차 중동전쟁의 패전을 설욕하기 위하여 치밀하게 준비한 끝에 시리아와 함께 이스라엘과 벌인 전쟁이다.

 

전쟁 초반 이집트와 시리아의 선전이 두드러졌으나 미국이 이스라엘을 적극 지원하면서 반전을 이루었다. 이후 오랜 협정 끝에 1978년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 완전히 반환하였다.

 

  

 


팔레스틴의 영토는 중동전쟁을 하면 할수록 중동이 패배하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연전연승한 이스라엘의 영토는 점점 넓어졌다. 

 

 


제1차 중동 전쟁 때문에 70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들이 이스라엘에서 추방당하거나 피난하여 요르단 등 인근 아랍국가로 이주했으며, 무슬림 국가에 거주하던 80만 명의 유대인들 중 대략 60만명이 이스라엘로 이주하고 나머지는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주했다.

 

이스라엘은 제3차 중동 전쟁(1967년)에서 승리한 뒤 요르단 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점령하였다가, 2005년에 가자지구에서 완전 철수했다.

 

그러나, 요르단 강 서안 지구는 현재까지도 이스라엘이 지역의 절반 가량을 점령 중에 있으며, 1993년부터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가 존재한다. 가자지구에는 고압전류방벽을 세웠고,

 

  

 

서안지역에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 정착촌 확대와 8m 높이의 분리 장벽 설치를 강행해 국제적 비난을 받고 있다. 

 

  


이처럼 중동전은 성서의 역사부터 거슬러 올라가야만 해결이 된다. 아브라함의 이복형제인 이삭과 이스마엘의 혈통적인 싸움에서 시작되어, B.C 10세기 경에는 다위과 블레셋 출신의 골리앗이 싸우고, 중세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싸우고, 1948년 현대에 들어서 무주공산이 된 땅을 중동이 차지하려다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함으로 팔레스틴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게 된다.

 

예수없는 야훼와 알라의 싸움

 

땅을 빼앗긴 팔레스틴 세력들은 대부분이 이슬람이다. 그러므로 중동분쟁은 종교적으로는 알라와 야훼의 대결이고, 혈통적으로는 이스마엘과 이스라엘의 대립이고, 영토적으로는 팔레스틴과 유대인의 갈등이다.

 

요약하면 중동분쟁은 민족, 혈통, 종교의 싸움이며 특히 두 종교가 예수없이 야훼와 알라만 강조하기 때문에 극한으로 치닫는 것이다. 예수만이 중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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