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답사기(쿠바2)

쿠바에서 발견된 1900년판 성서

편집인 | 입력 : 2023/09/30 [14:48] | 조회수: 492

http://lawtimes.net/4860 (쿠바1)

  

쿠바의 한인교회

 

한인들이 1921년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주하자마자 맛단다스 지방회를 설립한 지 4개월이 되던 1921년 10월 5일에 이곳 까타자스 지역에 ‘한인예수교회’가 조직되었다.

 

한국인 쿠바 이민사를 쓴 이자경에 의하면 쿠바 이주단에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 교회(미슌)의 필요성이 절실해 교회가 문을 연 것은 그해 10월 5일로 바로 맛단사스 ‘한인예수교회’였다고 말한다.

멕시코에서는 노예계약이 해방되는 1908년 최초의 한인교회가 세워졌고 쿠바에서는 당도하는 그 해 1921년에 한인감리교회가 세워졌다.

 

쿠바 지영범 선교사에 의하면 쿠바 한인 후손 2대 할머니 김모(71)씨의 집에서 그의 부친이 1905년 한국을 떠나면서 성경 두권을 가지고 나왔다고 전했다. 이미 한국에서 예수믿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1905년에 멕시코로 떠난 한인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이 쿠바에까지 가서 교회를 설립하는데 중추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성경은 언더우드가 1887년에 설립한 번역위원회에서 만든 신양성서일 것이다. 신약성서는 1900년이 돼서야 모두 번역이 된다. 

 

고신교단에서 파송한 지영범 선교사는 20년 이상 쿠바선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가 한인 후손으로부터 성경책 한권을 발견하게 된다. 1905년 멕시코로 건너한 한인이 한국에서 가져간 성경이다.   

 

 크리스찬 투데이 2009.1.21자

 

 

마가복음 6장

 

이 성경은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세운 성서번역회에서 1900년에 스코틀랜드 로스 선교사나 일본의 이수정이 번역한 한글성경을 보고 개역한 성서일 것이다.

우리나라 성경번역사를 보자. 존로스선교사는 조선인들과 함께 1882년에 누가복음을 번역했다. 

 

  

 1897년에 로스팀은 신약성경을 모두 번역했다. 

 

  

 순서는 다음과 같다. 

 

 

 

로스가 번역한 요한복음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수정은 일본에서 1884년 3월 현토한한신약전서를 번역하고, 5월에는 예수성교 요한복음전서, 1887년 2월에는 예수셩교젼셔를 발간했다.

선교사들이 1885년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1882년에는 중국, 1884년에는 일본에서 성서번역이 이루어진다. 

 

  

 

  

 

  

 

이수정은 1885년 일본 요코하마(橫濱) 미국성서공회에서 1,000부를 간행하였다. 이 번역성서는 최초의 한국선교사 중 한 사람인 언더우드(Underwood,H.G.)가 조선에 들어올 때 가지고 온 책이다.

 

그는 내한한 지 1년여 만에 아펜젤러 선교사와 함께 이수정역의 마가복음서를 고쳐서 1900년에 신약전서 완간을 출간했다.

 

이수정의 번역본은 사투리와 한문 투가 심했고, 오역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 번역본을 일일이 고치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새롭게 번역하는 편이 낫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로스나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그대로 읽기 보다는 1887년 2월에 성경전서를 번역 출판 보급하기 위한 ‘상설성경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해 4월에 ‘한국상설성경위원회’로 개명하고 그 밑에 ‘번역위원회’와 ‘개정위원회’를 두었다.

 

  

 

1893년에는 ‘상설성경실행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중심이 되어 세운 성서번역위원회는 레이놀즈도 가담하여 1900년에 신약전체를 번역하게 된다. 1911년이 되어서야 구약과 신약정체의 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레이놀즈

 

레이놀즈는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 노포크의 기독교인 집안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1887년 6월 햄든시드니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레이놀즈는 언어에 대한 재능을 살려 고전 언어 분야의 교수가 되기 위해 볼티모어의 존스 홉킨스대학 라틴-그리스-산스크리트어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는 미국 남장로교회 출신으로서 호남선교의 개척자이다. 그는 자신을 늘 전주 이씨 이눌서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는 뛰어난 언어적 능력으로 한글 성서번역 사업에 많은 공헌했다. 특히 그는 게일과 함께 한글 성경 번역을 끝까지 마무리했다. 1906년 한글 신약성경 공인역을 완성하였고, 그 후 구약성경 번역도 진행하여 1910년 4월 완성했다.

 

그 결과 1911년 ‘한글 성경전서’가 인쇄된 것. 10년 이상 소요하며 한글 신구약 성경전서를 완성한 그의 공로는 대단한 것이다. 또한 그는 한영사전도 편찬했다.

 

한일합방과 한예합병

 

한일합병이 있기 4개월전, 1910년 4월 2일 오후 5시, 레이놀즈는 구약의 마지막 구절 번역을 마치자마자 서울에 있던 영국성서공회의 대리인인 휴 밀러(Hugh Miller)에게 번역을 모두 마쳤다고 전보를 보냈다. 외적으로는 일본과의 합병이지만 내적으로는 성경번역 완간을 통하여 조선은 예수와 합병이 되고 있었다. 한예합병이었다.  

 

성경번역은 한글보존으로 이어져


한일합병이후 성서번역 완간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예수가 계신 하나님나라와의 합병이 더 중요했다. 대한민국은 성서를 통하여 예수와 합병했던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한국이 예수와 합병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서울대 교수는 교회를 통하여 한국어가 보존될 수 있었다고 했다. 예수와 합병하니 한글이 보존되어 민족혼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노아의 방주와 같이 구원선의 역할을 하였다고 했다. 

 

  


한글학회 성기지 학술부장은 한글에 대한 이해와 한글에 대한 적극적인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계층이 바로 기독교인들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도 남대문에 있는 상동교회 교인이었다.

 

  


주시경의 국어강습이 이루어졌던 곳도 교회였다.  

 

  

 

성기지 한글학술부장은 한글의 보존이 일제 강점기에 한글의 불꽃을 사라지지 않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선교사들의 성경번역은 한글을 보급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이 예수와의 합병을 통하여 얻어낸 결실이었다. 한일합병( 韓日倂合)은 한글철폐였지만 한예합병은 한글살리기 였다.

 

한글을 통하여 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된 것이다. 우리말 성경은 민족을 구원하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한예합병이 민족을 살린 것이다. 성서번역회는 1900년에는 신약전서를, 1911년에는 구약까지 완간을 한다. 

 

 

 

 

멕시코로 떠난 신도들은 1900년의 번역 성경을 들고 들어왔을 것이다.
 

지영범 선교사는 그는 당시 쿠바 한인이 갖고 갔던 찬송가도 공개했다. 

 

  찬송가

 

지영범 선교사의 편지  

 

고신교단이 파송한 지영범 선교사는 1904년의 성경과 찬송가를 쿠바에서 발견하고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부언하면 지영범 선교사는 필자가 2000-2004년 플로리마 마이애미에 있을 때 교회 사역을 한 고신교단출신으로서 필자와 함께 낙스신학교 D.Min에서 공부를 했고, 쿠바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이전에는 스페인에서 한인목회를 하여 스페인에 능통한 사람이다. 

그와 헤어진지 20년이 넘었지만 그의 2008년 서신을 알게 되어 소개를 한다.  이 서신은 제일 먼저 플로리다 한인주간에 공개된 것이다.  필자는 이 신문사의 편집장을 지낸 바 있다.
 
지 선교사는 지난 2008년 마이아미 코랄리치한인장로교회(담임 이우호 전도사, 마이아미 재외동포동포신문 발행인) 앞으로 보낸 선교편지에서 이 사실을 밝혔다.이 서신은 미주 크리스찬 투데이, 국내 뉴스파워에 공개되었다.
 
새해 인사드립니다.  절망 중에도 소망이 있습니다!  새 일이 보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일가로서 쿠바에서 생을 마친 스데반 안의 장례식  2008년 12월 18일 쿠바 아바나 공동묘지에서 하관을 한 후에 고별사(la palabra de despedida)에 대하는 말씀을 지 선교사가 전한 후에  유가족과 함께. 왼쪽에서 한인회장 안토니오 김, 지선교사,  한인후손 미망인, 아들, 손녀 )
 
스데반 안( 88세 ) 그의 조부  안순필은 도산 안창호의 사촌이었습니다. 그는 쿠바 혁명 이전에 사업가로서 크게 성공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피델 카스트로의 게릴라 혁명이 독재정부 바띠스따를 전복시 킨 후에 공산정부가 들어서고 가진 자들이 대부분 쿠바를 떠나야 할 때에  그는 현역군인으로 있던 아들을 차 마 홀로 남겨 둘 수 없어 쿠바를 떠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 후 그의 모든 재산은 국가 소유로 귀속되었고 그는 낡디낡은 3층 옥탑방에서 일년 내내 여름뿐인 쿠바의 살인 더위와 함께 살아야했으며, 말년에  당뇨로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고,  불편한 몸에 넘어져 한 쪽 눈을 잃은 불구의 몸으로 한 많은 생을 마쳤습니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의 일가로서 쿠바에서 생을 마친 스데반 안의 장례식 2008년 12월 18일 쿠바 아바나 공동묘지에서 하관을 한 후에 고별사(la     ©뉴스파워
 
그는 생전에 부모에게서 듣고 배운 우리말을 내가 방문할 때면 기억을 떠올리며 연습하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를 방문하던 어느 날,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혼자서 오늘 너무 말을 많이 했지요? 

다음 방문 시에는 제가 선생님 말씀을 많이  듣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더 이상 이 땅에서 복음을 들을 기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복음을 전한 이들로 인하여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받고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삶에 복음이 없었다면 그는 절망뿐인 인생이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쿠바에는 1905년 제물포를 떠난 멕시코 이민자들의 후예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후손의 통계가 정확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출판된 책자에는 8백 여명으로 알려져왔습니다.

그런데, 지난 12월 쿠바 중부, 동부의 한인후손들을 방문하는 길에  아직 알려 지지 않은 한인들의 역사와 한국기독교 선교역사에 기여할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2008년 12월 29일 오전 11시경,  100년이 훨씬 넘은 구 한글성경과 찬송가를 쿠바 섬에서 발견한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이 어찌 놀라운 보물이 아닌가요!
 
콜롬부스가 인도로 가는 길을 찾다가 1492년 10월 27일 쿠바 섬을 발견하고서 가졌던그 기쁨이 어찌 저의 기쁨과 같다고 하겠습니까!
 
이 보물을 발견한 곳은 쿠바한인후손 2대(?)  할머니 김 모씨(71세)의 집입니다.  그의 부친이 1905년 한국을 떠나면서 성경 두 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1884년도에 한국에 기독교 전래가 되었으므로 , 그후 21년 뒤에 위의 성경들은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지고 나온 성경은 적어도 한글로 성경이 발간된 초기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초기의 한글성경을 가지고  나온 것은 그가 초기의 기독교 신자였다는 증거입니다. 

 
김 모씨의 기억에 의하면, 그의 부친의 한국이름은 알지 못하고  스페인어로 알론소 김 이었고, 104세 를 살면서 멕시코 여자와 결혼하여 자녀를 16명을 두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51년이 맞다면, 그는 1847년 서울 출생이 됩니다. 
 
한국의 최초 선교사로 이기풍 목사는 제주도로 파송받아갔습니다.  그 해가 1908년입니다. 알론소 김은 이기풍 목사보다 3년이나 앞선 1905 년에 성경을 품고 멕시코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한국의 이민사를 보면, 최초의 이민은 하와이로 1902년 12월 22일 이었습니다.

이 때에 이민선에 오른  이들 가운데  인천내리교회의 교인들이 50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을 위해서  모 교회는 하와이로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그가 한국최초의 해외 선교사로 홍승하 전도사입니다.  홍 전도사가 하와이로 가면서 한글성경을 가지고 갔다면 그것은 1900년 7월에 국내에서 최초로 제본이 된 신약성경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글 신약성경이 최초로 완간이 된 것은 1887년 중국 심양에서 였습니다. 그것은  존 로스 선교사와  그의 매제 맥켄타이어 선교사에 의해서 였습니다. 

그후에 본국에서 완간이 된 것은  13년이 지나서 이루어졌는데 이때에 성경번역회장은 언더우드 선교사였습니다. 그것이 1900년 7월이었고, 그 해 1만 부가 발행이 되면서 한국 기독교의 영적 부흥에 말씀으로 불길이 붙게 된 것입니 다. 

1900년에 완간된 신약성경의 수정본이 1904년에 나왔고, 1906년에 공인된 신약성경이 출간되었고, 구약은 1911년에 완간되어 비로소 성경전서가 완성된 것입니다.

 
이러한 한국기독교 전래와 성경번역의 역사를 고려해보면, 1905년에 한국을 떠나서 멕시코를 경유하여 쿠바에 성경을 반입한 알론소 김이 소지한 성 경은 이미 낡아 겉표지가 없으므로 연도를 알 수 없지만, 1900년판이 아니면 1904년 개역판으로 사료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알론소 김은 두 권의 성경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한 권은 작고 신약성경과  찬송가를 합본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보다 배나 큰  A4용지를 반으로 접은 듯한 크기로 신약전서입니다. 그래서, 당시 두 종류의 다른 크기 성경을  그가 소지했다는 점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않습니다.
 
그는1905년 한국에서 가지고 나온 두 권의 성경을 16년간 멕시코에 서 사용하면서 잘 보관했고, 그후 1921년 쿠바로 재 이민을 떠 나 30여년을 살면서 성경을 읽고 자녀들의 증언에 의하면 가정에서 교회절기를 지키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쿠바에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소중히 간직하고 읽어왔던 성경이 쿠바공산화 된지 50년 만에 묻혀있다가 금번 필자의 방문을 기해서 세상에 다시 그 모습을 고인의 신앙과 함께 드러냈습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쿠바한인교회, 1921년에 설립

 

성경을 품에 지난 한인들은 전세계 어디를 가든지 한인들은 교회부터 설립을 하였다. 중동에 근로자로 파송된 사람들도 먼저 교회부터 세웠다. 한인들은 중동의 사막을 가든지, 멕시코와 쿠바의 선인장밭을 가더라도 교회부터 세웠다.


미주한인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민자들은 교회부터 나가야만 그 사회의 정보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한인들은 1905년 멕시코로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예수를 믿거나 멕시코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이 쿠바에 가자마자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쿠바는 1959년 사회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교회는 모두 사라지게 된다  

 

1921년의 쿠바한인교회는 감리교인과 안식교인이 자신들이 속한 교단을 주장하지 않은 한인 독립교회였으나 한인감리교회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인감리교회로 하나로 뭉친다. 그래서 쿠바에 최초로 세워진 한인교회는 감리교회였다. 

 

멕시코에서는 1908년 노예상태에서 해방되자 한인들은 신앙생할을 하기 시작했다. 1908년 10월 5일 메리다 시내에서 감리교 첫 속회를 열었는데 교인 수는 1909년이 되면서 70명, 그리고 3월에는 300명에 달한다고 하였다.

 

쿠바에 오기 전에 많은 한인들은 이미 교회에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2살에 멕시코에 도착한 쿠바의 한인지도자 임천택도 자신은 원래 천도교인이 아니라 기독교인이었다고 증언한다.

이러한 고백으로 보았을 때 그는 멕시코에서 기독교에 입문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앙은 없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천택 가족

 

나의 원적지는 광주(廣州)군이나 나기는 이로부터 26년 전 계묘 3월 19일 양주군 외가에서 낳았습니다. 그리하여 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말도 배우기 전 을사년 3월에 어머니께서 묵국(墨西可) 유카탄 이민축에 들어서 멀리 태평양을 건너시게 됨에 나도 어머니를 따라 그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 하다가 조선의 어린 몸이 묵서가 생활을 한 지가 이렁저렁 16년 성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다가 어찌 어찌하여 신유년 3월에 제2 고향이라 할 만한 묵서가를 떠나 쿠바라는 이곳으로 오게 되어 지금까지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나이는 어언 26세가 되었습니다.

 

나이는 비록 26세나 남달리 불우한 가정에 태어나서 해외 만 리에 표박하는 몸이 되고 보니까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배울 것은 하나도못 배우는 불쌍한 신세였습니다. 26년 간 배운 시간을 통틀어 계산하면 불과 1년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나의 지식여하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독자 여러분이 짐작하실 줄 압니다. 그러니까 먼저 말씀과 같이 내가 기독교를 믿었다 해도 그곳은 모두 무의식적이었음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훗날 그는 천도교 최린이 친일파로 전락하자. 자신도 천도교를 버리고 다시 감리교도가 된다.  

 

1921년 쿠바한인교회는 처음에는 감리교인과 안식교인이 섞여 있었으나 감리교 미션을 설립했는데 관청에서 인가를 받기는 1929년 10 월에 와서야 가능했다. 맛단사스는 1923년 인구는 62,638명이었고, 아바나로부터 518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한국인을 찾은 미국 여선교사

 

1921년에 한인들 스스로 교회를 설립하였는데 1924년에 말미라 B. 터커 여선교사가 한인 예수교회를 찾았다.

터커 여선교사는 1922년에 맛단사스의 중앙기독학원에 파송된 미국 남감리교 여선교사였는데 1912년에 내한하여 1922년까지 한국에서 사역했으므로 한국어에 능통했다.

 

터커 선교사는 한인 동포를 사랑했고, 친절하게 한인교회를 섬겼다. 이듬해 2월에 미국인 선교사가 주례하여 한인 예수교회에서 부경조와 김용복이 유아세례를 받았다. 

 

이우식은 한인예수교회 전도사로 활동하였다. 이우식(李雨植)은 1868년에 황해도 개성 대원에서 출생하여 부인 열례와 함께 1905년에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하였다.

 

  이우식 전도사


그는 1909년 멕시코 유카탄에서 한인동포 권리확보 운동을 지원했다. 1918년 메리다 지방회 경찰원, 산타페 지방회 재무로 활동하기도했다.

 

1923년에는 쿠바 마딴사스 민성국어학교에서 한인동포 국어보급운동을 전개하고, 1929년 조선국어사전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0년에는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했으며, 1930년부터 1933년경까지 대한인국민회 마딴사스 지방회 회장, 재무로 활동했다.

 

그리고 마딴사스 한인감리교회 전도사로서 재쿠바 한인사회 단결을 도모하며 1919년경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 독립금 62.36달러를 지원했다. 정부는 201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29년 10월에 맛단사스 한인감리교회가 조직되던 때까지 이우식이 전도사로 활동했을 것인데 1926년 3월에 터커 여선교사가 전도부인으로 활동할 때부터라면 약 3년간으로 보인다. 

  

베르타 터커(Berta Turker) 미국인 전도부인

 

쿠바한인교회 성자에 공헌을 한 사람은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담당했던 터커(대허)부인이다. 그녀는 대허 부인으로 불렸다. 

대허 부인은 28세인 1911년 8월에 미국 선교사 6명과 한국에 파송되어, 경성 사직골의 김목사에게 한국 말을 반년 동안 배웠다. 그 후 수표교 다리 예배당에서 아동 교육을 하는 동시에 세례문답 같은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 원산의 시골을 다니면서 3년 동안 성경을 가르치고 또 춘천으로 가서 1년동안 전도하였다.

 

1916년 10월, 미국의 모친이 신병으로 위중하다는 급보를 받고 귀국하였다. 그녀는 미국으로 돌아와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다시 쿠바 선교를 떠나 거기서 한인노동자를 발견하고 교회를 도운 것이다. 이처럼 한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미국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녀는 1924년 맛단사스 감리교 이레네 또란드 신학교(Colegio Irene de Toland)에 합류하고,기독교 신학원(Centro Cristiano)을 창설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후에 이 신학교는 복음신학교(Seminario Evangélico de Teología)로 발전해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맛단사스 기독교 모임은 이레네 또란드 학교의 장학금으로 민성학교를 지원했다. 그녀는 또 쿠바에서 유명한 두 학교인 맛단사스의 이레네 또란드 학교와 까르데나스의 프로그레시바(La Progresiva) 학교에서 한인 자녀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수여했던 것이다. 당시 한인 교인은 50명이고 학생 수는 25명이었다. 

 

대허부인은 엘 볼로 한인촌을 정규적으로 방문하고 장영기(Angel Chang) 목사를 교육시켰는데 결국 불미한 사건에 휘몰려 결국 1932년 2월에 교단의 연차회의를 플로르 레이나(Flor S.Reyna) 목사에게 맡기고 그곳을 떠났다. 장영기도 그 사건으로 목사직에서 쫓겨났다.(이자경, 쿠바한인사)

 

이러한 영향으로 아바나에는 최근 낮아짐이라는 한인교회가 설립되고 쿠바한인들후손과 쿠바인들의 선교를 하고 있다. 

 

 

결론

 

이처럼 멕시코로 입성할 때 한인들은 조선에서 이미 기독교인이었으며 이들이 바로 교회를 설립했고, 쿠바에서도 이들은 교회부터 세웠다. 기독교인이었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1900년판 성경을 가방에 넣고 떠났던 것이다. 

 

한인들이 지금까지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한인교회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이민자들은 고된 삶들을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통하여 극복한 것으로 사료된다. 

 

한편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한독립, 쿠바혁명 그리고 꼬레아노라는 정체성을 이어 온 임천택, 임은조가족은 생생하게 쿠바의 한인역사를 문자로 남겨 '꼬레아노'의 꿈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행히 한인교회가 전혀없었던 쿠바 아바나에 최근 한인교회가 설립되어 꼬레아노의 진정한 꿈을 이루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 교회가 설립되고 지영범 한인선교사들이 지금까지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한인들의 장족의 일보였다.   

언더우드가 주도한 한글번역성경이 쿠바에까지 가서 위력을 발휘했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대로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한글번역 성경의 위력이었다. 감리교 이덕주 교수는 1900년 성경번역을 통하여 드디어 하나님이 헬라어, 히브리어, 라틴어가 아니라 조선말을 통하여 조선백성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쿠바에서도 하나님은 한 권의 조선말 성경을 통하여 쿠바 한인들에게 말씀을 하셨고, 그 성경을 갖고 그들은 한인교회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교회설립이 가능했다.  

 

 

http://lawtimes.net/3910  (하와이1) 

http://lawtimes.net/3912 (하와이2)  

http://lawtimes.net/4074 (독일편) 

http://lawtimes.net/4098 (독일2)  

http://lawtimes.net/4102 (중동)

http://lawtimes.net/4822 (일본12)

http://lawtimes.net/4823 (멕시코1)

http://lawtimes.net/4839 (멕시코2)

http://lawtimes.net/4860 (쿠바1)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관련기사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