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쿠바1)

카스트로와 혁명동지인 헤로니모 임

편집인 | 입력 : 2023/09/28 [20:53] | 조회수: 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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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은 멕시코 이민사기극에 속아 1905년 1,033명이 멕시코 이민을 떠났다. 

 

"북미 묵서가국은 미합중국에 이웃한 유명한 부강국이니 또한 부지런히 일하면 반드시 큰 이익을 얻을 것이다."

 

 

 

계약서에 노동시간은 9시간 시간이었고 계약 기간은 5년이었고 계약중 본인이 원할 경우는 귀국비용까지 지원한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12시간씩 중노동을 했고 반항할 시 채찍직으로 얻어맞기도 했고, 여러명이 고통을 참지못하여 자살을 하기도 하였다.   

 

  

 

이민자들이 프로그레소 항을 거쳐 메리다 항에 도착한 것은 1905년 5월 15일이었다. 

 

  

 

멕시코 한인들은 16년만에 274명 명이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향하였다.  

 

  

 

  

 

멕시코에서 2살 때 쿠바로 떠난 배이형이라는 사람이 있다.  

 

  

 

 

 

이억만리 떨어진 카리브해안에 있는 사회주의 국가 쿠바에 한인들이 살고 있다. 현재 후손들은 약 1,100여 명이 다.  

 

  

  

 

 

 

쿠바는 110,922 ㎢ 면적으로 카리브에서 가장 큰 영토를 자랑하며 1511년 스페인 제독인 디에고 벨라스께스(Diego Velázquez)의 정복으로 시작된 이래 1898년 4월 미국에 의해 종지부를 찍기까지 387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 통솔받아왔다.

 

제국주의의 한이 많다보니 카스트로가 체게바라와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킨 나라이다.

 

 

 

쿠바 한인의 이민 역사는 1905년 멕시코로 들어온 한인 이민자 가운데 274명이 노예계약 4년이 지나 자유신분이 되자 보다 나은 삶을 찾으려고 1921년 3월 25일에 쿠바의 마나티(Manati) 항구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쿠바에는 설탕붐이 일었고 사탕수수 농장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유카탄 반도의 여러 농장에 흩어져있던 한인들 사이에 쿠바의 노동조건이 멕시코보다 훨씬 낫고 생활수준이 높아 자리잡기가 용이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던 탓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국제 설탕가격 하락으로 작업량과 노임이 줄어들어 다시 쿠바의 하층민들도 꺼리는 에네켄 농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한인노동자들의 꿈은 산산히 깨져버렸다.   

 

  

 

 

 

 

수도 아바나에서 동쪽으로 700㎞ 떨어진 마나띠 항에서 한인들이 2개월 동안 체류한 곳은 A, B, C, D, 4개 등급 건물 가운데 가장 낮은 계층들이 모여 사는 주거지역이었다.

 

설탕 가격의 폭락으로 단숨에 날아간 꿈을 접고 몇몇 한인은 사탕수수 노동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거의 생존 수준의 임금을 받았고, 또 일거리가 부족해 도저히 살 수 없었다. 마나티에서 그들은 다시 애니깽 농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마나띠는 물론 맛단사스에 도착한 이후에도 일본영사관에서 한인 등록을 하려는 소식이 들려와 보석상 박창운은 1921년 6월 14일에 60명이 모여 ‘쿠바 지방회’를 설립하게 되었고 북미총회는 7월 6일 서문경 회장에게 인준장을 발급했다.

 

따라서 맛단사스에 도착한 지 11-14일 만에 지방회를 설립한 것은 지난 3개월 동안 겪었던 정체성의 위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1930년대 엘 볼로 한인촌 맛단사스 지방회관


한인들은 점차 마탄사스(Matanzas), 카르데나스(Cardenas), 아바나 (Habana) 등지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사탕수수를 찾아 멕시코를 떠났지만 다시 신물나는 애니깽 농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에니깽이라면 멕시코에서 경험을 쌓아 작업은 잘했지만 노동 상황은 일급이 1원이 넘지 못하는 데다 주 3일밖에 일이 없어 프론떼라 동포들의 수백 원과 박창운의 수백 원을 합해서 일단 동포들의 어려움을 타개하는 데 공동으로 대처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다시 쿠바에서 멕시코로 돌아간 한인으로 확인된 수는 27명이나 총 50명에 달하였다. 멕시코로 돌아간 사람들 중 40.4%는 멕시코에서 태어났거나 부모 중 한 사람이 멕시코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인들은 낙심하지 않고 정착한 곳마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지방회를 설립하여 권익 보호와 신분 보장을 꾀하는 한편 민족 정체성 확립을 위한 민족 교육 실시와 독립운동 지원 등을 전개하였다. 

 

 

 

한인들은 미국의 대한인국민회와 연결하여 쿠바 맛단사스 청년지부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1936년 3월 10일 맛단사스 지방회는 ‘국민회 맛단사스 청년지부’를 조직하고 임원을 선정했다. 총장 이승택, 총무 임천택이었다. 

 

  맛단사스 지방회 청년부(1946) 일동

 

대한인국민회는 청년학원 당시의 원장 겸 교사 임천택과 박창운에게 이 기구의 조직과 규칙 제정을 위임하여  ‘지․덕․체’ 등 삼육(三育)을 중심으로 한국혼 한국심 함양의 인격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박창운은 아바나에서 보석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의 자금은 한인들과 독립운동을 위해 쓰여졌다. 

 

  보성상 박창운


1937년까지 쿠바 지방회는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야학을 회복해 교육에 진력하고, 체조 및 군사교련도 하고, 강연회․토론회․동화회․독서회 등도 복설해서 교양의 근본을 삼았다.

 

  

 

그러나 쿠바의 외국인 노동자 배척 경향이 심해지는 바람에 자금난에 봉착해 1년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공헌자는 강사 임천택, 교사 이세창, 이승택, 그리고 임경옥, 박선녀, 장천뢰 등이다. 

 

그들은 고된 노동속에서도 독립군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백범 김구도 쿠바에서 독립자금이 들어왔다고 말하였을 정도이다.

 

 


쿠바한인들의 지도자는 임천택이었다. 임천택이 없었다면 쿠바 한인회는 조직되지 않았으며 지금까지 그 명맥이 유지 되지 않않았을 이다. 그래서 임천택과 그의 아들 헤로니모임을 조명해 볼 필요성이 있다.  

 

 임천택

 

  

 

  

 

임천택의 원적은 경기도 광주이나 고향은 경기도 양주이다. 자신의 어머니가 멕시코로 가는 배를 탔을 때 2살이었다.

그는 16세가 되던해 멕시코를 떠나 쿠바에 도착했다. 자신은 쿠바에서 26세까지 있다보니 배울 기회가 없었으며 불가 1년 정도만 배웠다고 했다. 멕시코에서 기독교이 입문하였지만 신앙은 없었다고 한다.   

 

  

 

임천택은 1954년 2월 태평양주보사 발간으로 32쪽의 쿠바 이민사 마지막 ‘부기’장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기자가 묵국 이민으로 건너갈 때 배에서두 돌을 맞이하였고 소년에 메리다 한인 국어 학교 생도로 몇 달 간 있은 외에는 전문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금에 글자나 쓰게 된 것은 오로지 자수 자습에 불과하며 겸하여 뇌신경쇠약증에 본병으로 매양 신고를 면치 못하는 중에서 적어도 우리 동포가 쿠바 이민으로 와서 33년 간 지낸 정형에 사실을 기록하는데 불완전할 것이 사실이며 또한 적당한 재료를 수집할 수 없고 특히 까르데나스와 아바나 양 지방의 것은 그 지방 동포에게 예탁한 일이 있었으나 여의치 못하였음에 부득이 기억에서 대략 윤곽만을 초할 수밖에 없고 더욱 자가자찬에 느낌조차 없지 않은 것임에 독자는 이상 여러 가지 불비한 점을 양해하시기를 바라나이다.”

 

임천택은 멕시코에서 한인교회를 다녔다가 1928년 천도교에 입문하게 된다. 1928년 ‘신인간’ 제24호(48-49쪽) 6월 1일에 ‘내가 천도교를 믿게 되기까지’라는 글을 쓰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다.

 

나의 원적지는 광주(廣州)군이나 나기는 이로부터 26년 전 계묘 3월 19일 양주군 외가에서 낳았습니다. 그리하여 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말도 배우기 전 을사년 3월에 어머니께서 묵국(墨西可) 유카탄 이민축에 들어서 멀리 태평양을 건너시게 됨에 나도 어머니를 따라 그곳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 하다가 조선의 어린 몸이 묵서가 생활을 한 지가 이렁저렁 16년 성상이 되었습니다. 그리하다가 어찌 어찌하여 신유년 3월에 제2 고향이라 할 만한 묵서가를 떠나 쿠바라는 이곳으로 오게 되어 지금까지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나이는 어언 26세가 되었습니다. 나이는 비록 26세나 남달리 불우한 가정에 태어나서 해외 만 리에 표박하는 몸이 되고 보니까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배울 것은 하나도못 배우는 불쌍한 신세였습니다. 26년 간 배운 시간을 통틀어 계산하면 불과 1년밖에 안 됩니다. 그러니까 나의 지식여하는 말은 하지 않아도 독자 여러분이 짐작하실 줄 압니다. 그러니까 먼저 말씀과 같이 내가 기독교를 믿었다 해도 그곳은 모두 무의식적이었음이 사실입니다.

 

그가 기독교에서 천도교를 믿게 된 이유에 대해 "그런데 무의식이고 유의식이고 수십 년 믿던 기독교를 버리고 천도교를 믿게 되기는 그 이유가 극히 간단합니다. 처음 말씀과 같이 첫째는 이선생의 그 간곡한 성의에 감복하였고, 둘째는 교회에서 발행하는 여러 가지 잡지에서 많은 지식과 아울러 크게 감사를 느꼈고, 셋째 시대사상을 따라 천도교의 인내천 주의에 자연 감동이 되는 동시에 천도교는 절대로 천체를 시인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천도교도로서 쿠바에 종리원을 세웠고 앞장서서 포교활동을 하기도 하였고 한인들을 위해 1923년부터 한인회를 조직하고 한인들의 교육을 위해 애쓰고 한인회를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쿠바 한글 모국어 학교 

 

  

 

임천택은 한인들의 정체성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그러나 훗날 천도교 최린이라는 사람이 친일행동을 한 것이 밝혀져 1938년에 감리교도 다시 입문하게 된다. 

 

임천택은 신한민보 1941년 4월 3일자부터 7월 17일자에 ‘쿠바 재류 동포의 이주 20년의 역사’라는 제목의 글을 11회에 걸쳐 게재하였다. 

이를 통해 쿠바 한인들이 겪었던 고난과 역경, 이를 극복해 나간 모습들을 생생히 전하면서 민족 자부심을 잃지 않기를 희망하였다. 그 뒤 이글을 보완하여 1954년 2월에 하와이 동지회 중앙부에서 운영하는 태평양주보사에서 발간한 책이 바로 『쿠바이민사』이다. 주로 마탄사스에 대해 다룬 책이다. 

 

 

대부분의 내용은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민 간 그의 가족사나 ‘쿠바 국민회 설립동기와 제반사업’, ‘교육방면’, ‘청년학원’, ‘쿠바한인천도교’, ‘쿠바한인예수교회’, ‘대한여자애국단’ 등 그가 추진하며 활동하였던 여러 행사를 위주로 정리하였다.

 

  

 

헤로니모 임

 

임천택의 대한민국독립을 위한 그의 정신은 아들에게 이어졌다. 그 사람이 영화 헤로니모 임의 주인 공 임은조이다. 

그는 카스트로와 함께 아바나대학 법대를 다니면서 쿠바혁명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의 이름음 임은조 이며 영화 헤로니모 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한인으로서 처음 쿠바 아나바대학 법대에 입학한 사람이다. 아바나 법대에서 카스트로와 친구가 된다. 훗날 1959년에 카스트로 체게바라와 함께 쿠바혁명에 참전을 한다.  

  

 

 

  

 

  

 

쿠바혁명과 헤로니모 임

 

1953년 7월 26일, 피델 카스트로와 165명의 청년들이 쿠바 제2의 도시인 산티아고에 자리 잡은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지만 실패하여 카스트로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는 특별사면으로 2년간 수감생할을 마치고 멕시코로 망명하여 1955년에 체게바라를 만나게 된다.  

 

카스트로가 멕시코에서 혁명군을 창설할 때 당시 헤로니모임(임은조)은 아바나에서 바티스타 정부에 대해 7.26 무력운동에 합류하여 지하투쟁을 하였다. 

 

  

 

헤로니모가 지하투쟁을 지속하던 1956년, 피델과 체 게바라는 그란마함선을 타고 쿠바에 상륙했다. 쿠바 정부군 제17보병대대가 막았지만 이들의 혁명 의지를 꺾지 못했다.

 

쿠바 혁명군은 험준한 산악지대인 시에라 마에스트라에 혁명기지를 구축하고, 주기적으로 도시에 내려가 혁명 참가를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바티스타정부의 압제와 실정으로 쿠바의 경제난은 악화하였고, 쿠바인들은 점점 산악지대에 있는 혁명군에게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1958년 가을, 산악지대에 있던 혁명군은 일제히 도시로 진격했다. 전세는 급격히 기울었고, 그해 12월 바티스타는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쿠바혁명은 성공했다.

 

1959년 1월 8일, 피델이 이끄는 혁명군이 수도 아바나에 도착했다. 혁명 당시 피델과 헤로니모는 33살, 체 게바라는 31살이었다.

피델은 쿠바통일사회당을 수립해 사회주의 일당체제를 구축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해 개혁을 추진했다. 헤로니모는 혁명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하투쟁 메달을 받았다. 

 

미국은 1961년 쿠바 망명자 1,500명으로 특수부대를 조직하고, 쿠바혁명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피그스만을 침공했다.

그러나 이 침공계획은 사전에 소련에 입수되었고, 미국의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쿠바와 미국은 완전히 적대국이 되었다.

쿠바와 소련의 관계도 1962년 이른바 ‘쿠바미사일위기’를 계기로 전변했다. 피델은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을 철수시키라는 케네디의 압력에 굴복한 흐루시쵸프를 더는 믿지 않았다.

 

쿠바혁명 직후, 헤로니모는 지하투쟁의 경력이 고려되어 쿠바 경찰조직에 배치되었지만 오래하지 못하고 훗날  체 게바라가 장관을 맡고 있던 산업부의 고위관료로 임명되었다.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 후 경제개혁을 전담했다. 그는 가장 먼저 쿠바의 토지개혁을 주도했다. 그리고 1959년에는 쿠바국립은행 총재, 1961년에는 산업부 장관을 맡았다.

체 게바라는 1959년 쿠바 통상사절단을 이끌고 일본을 방문하기도 했다. 쿠바는 1960년 북한과 수교했는데, 체 게바라가 1960년 12월에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직접 회담했다.

 

 

  1960. 김일성과 체게바라

 

그러나 1965년 4월, 체 게바라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쿠바에서 갑자기 사라져 아프리카 콩고로 가서 콩고 반군과 함께 군과 함께 콩고혁명을 추구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다시 아바나로 돌아왔다가, 1966년 중남미혁명을 위해 볼리비아의 정글로 들어갔다. 볼리비아 정부군은 1967년 10월 8일 치열한 교전 끝에 체 게바라를 체포했다.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 불린 게바라는 10월 9일 총살되었다.

 

헤로니모는 1961년부터 체 게바라와 함께 4년 동안 쿠바의 국유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후 헤로니모는 쿠바 산업부와 식량 산업부에서 경제 관료로 활동했다. 헤로니모는 1988년 식량구매 국장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은퇴했다.

 

 

 

 

그는 퇴임 후 아바나 인근의 키테라스 시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동아바나 지역 인민위원장도 역임했다. 쿠바 정부는 이 은퇴한 노 혁명가에게 은퇴선물로 1965년산 소련제 라다 승용차를 선물했다.

그러나 헤로니모는 연금만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워지자, 라다 승용차를 몰고 택시 운전을 시작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자 사회주의경제블록도 해체되었고, 쿠바의 혁명가는 아바나의 택시운전사가 되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운전이 힘들어진 후에는 차를 빌려주고 거기서 나오는 임대료로 생활했다.

 

헤로니모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1995년부터 한인사회에 관심을 가져 지도자 역할을 한다. 1995년, 헤로니모는 쿠바 한인 대표로 ‘정부 광복 50주년 세계 한민족축전’에 초청됐다. 그의 부친 임천택이 그토록 갈망하던 한국 땅을 밟았다.

 

그가 결심한 것은 1) 쿠바에 처음 정착한 최초 한인들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여동생 마르타를 도와 ‘쿠바의 한인들’이라는 역사책을 발간하는 것.

결국 마르타임이 책을 썼다.

 

  

 

  



2)  고향 한국의 소식을 듣고, 쿠바 내에 한국의 문화와 역사,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학교를 운영하는 것. 3) 쿠바 내 한인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쿠바 내 한인회 설립’하는 것.이었다. 

 

임은조는 쿠바한인회 건립을 위해 노력했다. 사회주의 국가이다 보니 북한과 적대적인 남한의 한인회를 공식적으로 설립하는 것이 정부정책상 어렵다는 것이다.   

 

  

 

쿠바한인 80주년 기념비는 헤로니모임이 직접 연필로 디자인 했다. 

 

  © 편집인

  

  

  

  

 

  

 

쿠바에는 한인후손들 4,5세대가 약 1,100여명이 살고 있다. 한인후손문화회관까지 설립되었다   

 

 

  

 

  

 

 한 쿠바소녀는 "나는 한국사람이다"고까지 했을 정도로 한국인의 정체감이 높은 상태이다. 

 

  


후손들은 한글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음식을 나누기도 한다. 

 

  

 

헤로니모 임은 조국이란 지역적 경계를 넘어선다고 했다. 

 

  

 

 


헤로니모임의 영화감독 전후석씨는 쿠바 한인자손들의 한국인의 자부심과 정체성이 확고하다고 했다.  

 

  


그 이하 다른 사람들도 한인의 교류를 통하여 정체성을 갖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 

 

  

 

  



  

 

계속

 

http://lawtimes.net/4863 (쿠바2)  쿠바의 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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