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안동4)

퇴계, 죽어서도 말하다

편집인 | 입력 : 2022/06/12 [05:35] | 조회수: 249

 

안동의 기독교

 

안동의 유림들이 기독교를 접했을 때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읍내에 나갔다가 선교사나 조사들이 이 전한 복음을 듣고 예수 믿는 사람들, 3.1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잡혀가 그 안에서 기독고 애국지사를 만나 복음을 알게 된 사람들을 통한 기독교의 선교는 폭발적이었다.
 
이원영, 이광호목사는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유림들이 기독교를 접촉했을 때, 유교는 더이상 사회를 지탱하는 목적이 아니라 근대화를 가져다 주는 기독교를 위한 수단으로서 작용했다. 

 

1899년 대구에 선교부가 설치되었을 때 안동지역은 그 선교부의 일부였고, 1902년 안동지역을 최초로 방문한 선교사 아담스(J.A Adams) 이미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정도로 복음이 준비된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한국 최고의 양반족이 살고 있는 지역이고 복음이 전해지지 않는 지방의 하나이다. 다만 이 지역에서 이미 신자가 되었다고 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얼마 전 나의 대구 집까지 방문한 적이 있다"


안동 교회들

 

안동의 선교는 18930년 부산의 베어드(배위량, William M. Baird), 1902년 대구의 아담스(안의와, James E. Adams) 등이 지방을 순회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은 1902년에 안동을 순행하면서 시장에서 전도차 성경을 판매하게 된다.

 

복음을 들은 신도들은 자발적으로 자신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가서 교회를 세운다. 국곡교회와 풍산교회도 지역민들이 대구나 안동에서 복음을 듣고 자발적으로 세워진 교회들이다.

 

그래서 영남은 직접적으로 선교사들이 세운 교회도 있지만 대부분 선교사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교회를 세운 사례가 많이 있다. 

 

1903년에는 베럿(Rev.W.M.Berrett), 1906년에는 부해리(Rev.H.M.Bruen) 선교사가 방잠(현 와룡면 나소동)에서 집회를 개최하자 참석했던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1906년에 김성복과 이승훈 가문의 후손으로 천주교 박해를 피해 온 이호명 등이 삼산에서 고가(古家)를 매입하여 예배당을 세우면서 방잠교회가 시작되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천주교도에 의하여 교회가 설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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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잠교회가 부흥하자, 1907년 이후로 방잠교회 교인들에 의해 인근 마을별로 녹전교회, 방하교회, 안흥교회, 의일교회, 동교교회, 지내교회, 마동교회 등 많은 교회가 설립되었다.

 

방잠교회는 안동 지역에서 세 번째로 세워진 교회로 많은 지역 교회들의 설립에 기여하였다. 영주 지곡에도 1907년에 교회가 세워졌다.

 

안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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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활발한 전도활동으로 안동인근지역에 교회가 생겨나고 안동읍에도 믿는 자들이 발생함에 따라 1908년 북장로교는 쑈텔(Rev.C.C.Sawtell)선교사를 파송하여 안동지역의 주재 선교사로 임명된다. 안동은 점점 믿는 신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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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1908년 대구의 안의와 선교사가 내안하여 풍산교회 교인 김병우씨를 매서(당시 복음서를 짊어지고 팔러 다니는 사람)로 파송하여 서문외(현 대석동 대석상화 자리)에 있던 초가 5칸을 사들여 서원을 개점하고 교인들을 모아서 예배를 인도하게 했다.


1909년 8월 둘째 주일 처음으로 예배드린 감격스러운 이 날이 안동교회의 창립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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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예배드린 교인은 김병우 외에 강복영, 원화순, 원홍이, 권중락, 박끝인, 정선희, 김남홍 등이었다. 1909년 8월 18일에 최초의 학습교인 15인, 1911년 3월 2일에 최초의 세례교인 9인, 1911년 8월 17일에 최초의 유아세계 교인 3인을 세우고, 1911년 9월 김영옥 목사가 초대목사로 취임, 1913년 7월 20일 초대 장로로 김병우 장로가 장립함으로 경안노회에서 처음으로 당회가 조직되었다.


이후 같은 해 11월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오월번(A.G.Welbon) 과 김영옥 조사가 정착해 교회를 인도했고, 선교사들의 임시주택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니 (1910년) 장소가 현 교육관 자리에 있었던 한옥집이었다.

 

당시 양반문화의 본고장에서 서원 간판을 건 책방은 효과적이었다. 김영옥목사는 안동이 아닌 황해도 소래출신이었다.

 

그는 1909년 11월 웰번(Arthur G. Welbon)과 함께 들어와 안동에서 전도를 한 것이 계기가 되어 안동교회 초대목사가 된다. 1913년의 교회모습은 함석지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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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는 대구제일교회가 있었다면 안동에는 안동교회가 있었다. 1913년에 함석으로 지은 예배당이 교인의 증가로 비좁아지자 1937년 석조로 증축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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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목사는 황해도 소래출신 김영옥이었고 2대는 이대영목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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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안동교회는 급성장하여 서부교회, 동부교회, 도원교회, 용상교회, 수상교회, 송현교회 등이 분립됨으로써 안동교회는 안동 지역 어머니교회가 되었다.

 

미북장로교는 호남의 남장로회도 그랫듯이 안동 선교기지(station)를 만들었다.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워 선교의 도구로서 활용하였다. 선교사들은 선교정책으로서 항시 병원을 설립하였다.

 

안동선교의 개척자인 웰번 후임으로 안동에 들어온 선교사들로는 의료선교사 플레처(Archibald G. Fletcher)와 크로더스(John Y. Crothers)가 있다. 플레처는 1909년 성소병원을 시작했고, 크로더스는 그 후 40여 년간 안동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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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병원 의사는 별위추(Archibald Fletcher) 의료선교사였다. 별위추 선교사는 1930년대 대구광역시 동산병원을 이끈 인물이다. 113년의 역사를 가진 안동성소병원은 명성교회가 인수함으로 인해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였다. 척추수술만해도 2만건이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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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교회는 의료선교에 이어 1911년에는 계명학원을 세워 교육선교도 시작했다. 계명학원은 여학생도 받아들이는 초등과정의 학교였다.

 

이처럼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서점, 의료, 교육을 앞세운 덕분에 안동교회는 자리를 잡아 나갔다. 1919년 3·1운동 당시 안동장터 시위는 김영옥 목사를 비롯해 안동교회 교인들이 주도적으로 준비하기도 했다.  안동교회는 안동의 중심교회로서 안동이 발전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선비목사 이원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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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목사는 이퇴계 14대손으로 영남의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독립투사이면서도 목회자였다. 퇴계의 후손들은 독립투사로 변한다. 

 

서부교회에서 출발해 도산서원을 지나면 원촌 마을과 함께 그의 생가가 눈앞에 펼쳐진다. 친척인 이육사의 생가와 기념관 부근에 봉경의 생가와 묘비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이원영 목사 생가는 지난 2019년 통합교단이 제36호 한국기독교사적으로 지정했다.

 

이원영목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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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퇴계 14대 후손이라는 유교집안의 교육전통에 따라 4, 5세부터 16년 동안 한문을 사숙했고 20대엔 향촌에 설립된 사립학교 '봉성 측량강습소'와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서양문물)을 배웠다.

 

그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신학문을 배웠고, 이후에는 신학을 하여 기독교에 막강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이원영의 목회정신의 영향 하에 영남에서는 훌륭한 목회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김광현, 김기수, 김진홍, 김삼환, 이상근, 정성구, 이광선, 이성헌 목사 등은 좋은 예이다. 

 

이원영은 1919년(기미년) 3·1독립운동 기간에 유생(儒生)으로서 예안의 만세시위를 이끌다가 체포되었고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동안 복역하던 중에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였다.

 

이원영은 1919년 3·1운동 당시 안동군 예안 장날인 3월 16일 예안선명학교와 예안보통학교 학생들을 동원,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잡혀 1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수감생활을 하면서 장로 이상동(李尙洞)을 만나 감화를 받아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출옥 후 그는 향촌에 돌아와 세례받고 섬촌교회 설립자의 한 사람으로서 안동의 '인노절 기념성경학교'를 졸업했고(제 1회, 1925) 1926년에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서 1930년에 졸업했다(제 25회). 이목사는 193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곧 경안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영주중앙교회에 취임하였다.

 

영주와 안동에서 그는 담임 목회자와 지역 교회의 지도자(경안노회장)로 일했고 일제의 황민화정책(조선교육령개정(1938), 창씨개명, 신사참배)을 끝까지 몸으로 항거하면서 시무하던 교회를 사면하고 노회에서 면직되는 일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는 광복 후 안동서부교회를 시무하면서 안동성경학원을 개원하여 청소년교역자 양성에 진력하였다. 안동 서부교회에 가면 이원영목사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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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목사는 신사참배가 강요된 1938년 이후 이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서너 차례에 걸쳐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1945년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의 대표직을 맡았다.

 

이목사는 신사참배 결의의 아픈 역사를 되돌리는 일에 앞장섰으며 불의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무너진 한국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신사참배를 부인한 출옥성도였으나 신사참배에 응한 동역자를 비판한 바 없고, 특히 성경강해교수법이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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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과 여운형


이원영목사는 신앙에 대해서는 단호했고 종교와 정치를 분리하였다. 이목사는 8.15 광복 후, 여운형 선생이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부를 설립할 무렵이었다.

 

여운형 선생은 직접 이원영 목사에게 안동지부를 맡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나는 목사요 목사는 교회에 있어야 되고 강단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해야 되지 교회 밖에 나가서 정치하면 안된다"며 여운형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기도 했다.

 

한경직목사의 시

 

이원영 목사는 총회장을 마치고 4년 후 1958년 소천했다. 이 목사가 세상을 떠나신 후에 한 경직 목사가 시를 썼다.

 

 "훌륭한 가문 / 고귀한 명성 / 영광스러운 성직 / 실로 값진 것을 한몸에 지닌 / 자랑스럽던 한 인물의 생애 / 그는 일제의 폭정아래 / 수없이 투옥을 당하시며 / 오로지 나라를 사랑하고 / 하나님만 바라보며 걸어가셨다 / 그 독실한 믿음 / 고결한 인격 / 온유 겸손한 성품 / 충성된 하나님의 종 / 늘 우러러 존경합니다.


이원영 목사가 한국교회에 남긴 역사적 공헌은 항일운동과 교회성장운동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는 총회장이 되면서 우선 신사참배 취소 성명을 발표했다.

 

이원영 목사가 제39회 총회장에 취임한 후에 보여줬던 행보는 △총회 기간 중 일정한 기간을 정해 통회자복하고 사죄하심을 위해 기도 △신사참배 주동자 약간인을 심사한 후 당 노회를 통해 시벌 △전국 각 교회가 같이 연보해 신사불참배로 순교한 성도 유가족 위문금을 드릴 것이라고 명시돼 있다.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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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도선서원 근처에 가면 “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유명한  이육사 문학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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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이육사도 이원영목사처럼 퇴계후손이다. 퇴계는 죽어서도 말했다. 그는 퇴계 이황의 13대 손인 진성이씨 이가호와 허길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육사가 아니라 이원록이다.

 

그는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대구 교남학교에서 잠시 수학했다. 육사는 1925년 독립운동단체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그 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의열단의 사명을 띠고 북경으로 갔다.

 

1926년에 일시 귀국, 다시 북경으로 가서 북경사관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이듬해 가을에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3년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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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그의 수인(囚人) 번호가 264번이어서 호를 육사(陸史)로 택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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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인이기에 앞서 애국운동을 하는 독립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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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 가진 고문을 받고 출옥하여, 이듬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북경대학 사회학과에서 수학하면서 만주와 중국의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정의부(正義府)‧군정부(軍政府)‧의열단(義烈團) 등 여러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3년 9월에 귀국하여 이 때부터 시작(詩作)에 전념, 육사란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첫 작품은 1935년 『신조선』에 발표한 「황혼」이었다. 그는 중국 의열단에서의 무력투쟁을 하고, 귀국하여서는 저항시인으로서 시를 써내려갔다.   

 

1934년 신조선사 근무를 비롯하여 언론기관에 종사하면서 시 외에도 한시와 시조, 논문, 평론, 번역, 시나리오 등에 손을 대어 재능을 나타냈다. 천재적인 문인이었다. 이는 이퇴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는 1937년에 『자오선』을 발간하여 「청포도」, 「교목」, 「파초」 등의 상징적이면서도 서정이 풍부한 목가풍의 시를 발표했다. 시를 쓰면서 독립운동에 투철한 행동시인이었다. 전 생애를 통해 17회나 투옥되었다.

 

시를 쓰는 독립투사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광야」와 「절정」에서 드러나듯이 그의 시는 식민지하의 민족적 비운을 소재로 삼아 강렬한 저항 의지를 나타내고, 꺼지지 않는 민족정신을 장엄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시를 쓰는 독립투사였다. 이육사는 독립정신이 시를 통하여 평생 남기를 원했다.

 

안동 퇴계의 피는 이원영목사뿐만아니라 이육사에게도 흐르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퇴계의 피를 이어받은 두 사람은 개신교도 였다.

 

퇴계의 후손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 한 명은 영남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목사가 되었도 다른 하나는 저항시인이 되었다. 청운교회를 담임하는 이필산 목사 역시 이원영목사의 친인척이다.

 

이육사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갔던 수많은 문인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애국, 독립 운동을 한 인물이다. 39여년의 인생동안 옥살이만 17번을 했다는 사실이 애국심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그의 삶을 대변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육사는 1941년 폐병을 앓아 성모병원에 입원, 잠시 요양했으나 독립운동을 위해 1943년 초봄 다시 북경으로 갔다. 그 해 4월 귀국했다가 6월에 피검되어 북경으로 압송되어 수감중 북경의 감옥에서 옥사했다. 그의 생가는 가보지도 못했다.

 

그는 백마타고 오는 초인과 청포입고 찾아오는 손님을 보지 못하고, 1943년 해방을 맛보지 못하고 북경 감옥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한편의 시집도 발간하지 못했다. 그의 동생이 감옥에서 쓴 시를 모아서 1946년 『육사시집』을 발간한 것이다.

 

이육사의 절정이라는 시를 보면 그의 애국사상이 잘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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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는 '광야'라는 시를 통하여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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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감옥속에서도 '내고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 고향의 정서가 담긴 목가적인 시를 통하여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님이 오시는 희망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육사는 백마타고 오는 초인과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시를 통하여 민족이 독립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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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칠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 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처럼 유교가 예수를 만났을 때 안동은 두 명의 거장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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