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경주편)

편집인 | 입력 : 2022/04/20 [22:10] | 조회수: 422

   

 

 

 

 1. 경주의 지역적 여건

  

경주는 경상북도 동남부에 있는 시로서 동쪽으로 동해, 서쪽으로 영천시 및 청도군, 남쪽으로 울산광역시, 북쪽으로 포항시와 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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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통

 

도로 교통에 비해 철도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편이었으나, 경부고속철도 신경주역 개통과 함께 서울까지의 소요시간이 2시간 초반대로 단축되었다. 하지만 KTX역인 신경주역은 경주 시내와 차로 20~30분 걸리며, 2021년 말에 기존 경주역이 폐역되어 2022년부터는 철도를 이용하려면 건천읍 화천리에 있는 신경주역으로 가야 한다.

 

 2. 경주의 역사성


경주는 찬란한 고대 신라문화가 고스란히 담긴 1000년 이상의 고대도시로서 신라의 살아있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최고의 불교와 관련한 건축과 예술이 발전했던 나라이다.  어려서 한 번쯤은 모두 수학여행을 가보았던 장소이다.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57년 6월 8일에 첫 성읍국가인 사로국이 경주 계림 일대에 세워졌는데, 비슷한 시기에 고조선의 왕검성이 함락되었으니 경주시는 도시 전체가 역사적 무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경주시는 매년 6월 8일을 '경주 시민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다.

 

불국사는 지난 1995년 석굴암, 서울의 종묘, 합천 해인사의 팔만대장경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경주여행을 한 번도 오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경주에 와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고 가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불국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걸출한 문화유산이다. 불교를 국교로 믿었던 신라인들은 그들이 해낼 수 있는 최고의 건축 기법과, 최고의 노력과, 최고의 정성으로 ‘부처님의 나라‘ 불국사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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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식의 "토함산에 올랐어라"에 나오듯이 토함산에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은 경상북도 경주시 토함산 동쪽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 암자이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석불사였다.

 

국보 제24호이며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서 시작되었지만 경덕왕의 원찰로서, 또 나라를 수호하려는 국찰로서 경영되었다.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인공석굴 구조에 본존불상을 중심으로 정교한 계산 속에 배치된 아름다운 불상들은 완벽한 불국토를 연출한다. 종교성과 예술성에서 우리 조상이 남긴 가장 탁월한 작품이자 전세계의 종교예술사에서도 빛나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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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동방박사들이 사용했으리라 짐작되는 천문학도 발달한 곳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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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들이 즐겨 놀았던 안압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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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라의 혈통

 

신라의 문화를 볼 때 단일민족만은 아니다. 신라의 문화는 다민족의 문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는 진시황의 노역을 피하여 마한땅으로 들어와 마한왕에게 거주지를 분양받아 경주지역에 마을을 형성한 사로6촌(6부의 기원)세력이있고, 다른 부분은 부여에서 이주해 온 박혁거세 세력, 그리고 신나라가 망한 이후 멸족을 피하여 해로를 따라 유입된 김일제세력이 있다. 

 

 

박혁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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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9년경, 조선의 유민들이 산곡 사이에 나뉘어 살아 6촌을 이루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한 중에서 경주 지방에는 모두 여섯 개의 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알천의 양산촌, 돌산의 고허촌, 무산의 대수촌, 취산의 진지촌, 금산의 가리촌, 명활산의 고야촌 등이었다.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혹은 소벌도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의 숲 사이에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울고 있었다. 그래서 가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큰 알이 한 개 있어 깨뜨려 보니 한 아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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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벌공은 그 아이를 데리고 와서 잘 길렀는데, 10여 세가 되자 유달리 숙성하였다. 6부 사람들은 그 아이의 출생이 신기했으므로 모두 우러러 받들어 왕으로 모셨다. 진한 사람들은 표주박을 박(朴)이라고 하였는데, 혁거세가 난 커다란 알의 모양이 표주박 같이 생겨서 성을 박으로 하였다. 그는 나정 우물가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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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장들이 조심스럽게 알을 건드리자 껍질이 갈라지면서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촌장들은 하늘에서 임금을 보내주었다고 생각하고 사내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 혁거세란 세상을 밝게 한다는 뜻이다. 박처럼 생긴 알에서 나왔으니 성은 박 씨가 되었다.

 

박혁거세는 촌장들의 손에서 무럭무럭 자라 기원전 57년에 나라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라고 지었는데, 서라벌은 신라의 옛 이름이다. 박혁거세는 약 61년간 나라를 다스리다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하늘로부터 와서 하늘로 사라졌다.

 

예수처럼 하늘로부터 왔다가 하늘로 사라진 것이다. 신라만이 갖고 있는 승천신화였다. 히브리어의 하키세 ( הַכִּסֵּא  왕좌, 보좌, 자리) 는 혁거세와 유사하여 유대인의 왕래 가능성을 추측하게 했다.  

 

김일제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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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11월 방영된 KBS 1TV ‘역사 추적’에서 신라 문무왕릉비 비편에 새겨진 9자(字)를 근거로 신라 김씨 왕의 조상이 흉노족인 김일제(金日磾)이며, 더 나아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역시 망명한 김일제의 후손이 세운 것이라는 취지의 내용이 방송되면서 학계의 쟁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그러므로 신라까지 흉노의 후손들이 왔을 가능성을 무시하지 못한다. 대왕암에있는 문무왕비에는 "우리 조상 김일제는 흉노의 조정(용청)에서 왔다"고 적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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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비석에도 신라김씨의 조상 김일제는 흉노인이라고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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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였고, 아버지는 무열왕인 김춘추이며,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다. 그러므로 문무왕은 순수한 신라 김씨가 아니라 수로왕의 혈통이 섞인 왕이다. 신라 김씨 왕족은 자신의 조상을 중국 한나라 때 투후를 지낸 김일제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구려와 전연과의 전쟁과정에서 고구려군에게 쫓겨 동해안을 따라 유입된 흉노계 선비족이 있다. 이처럼 흉노족은 알게 모르게 신라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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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라의 외교관계


신라는 당나라관계를 하면서 서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지중해 지역과 많은 교류를 하게 된다. 고대 한국의 교류 상대는 동북아시아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북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등 넓은 범위에 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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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인들은 유라시아까지 진출을 한다. 유라시아를 가는 길은 크게 북방의 초원길, 오아시스와 사막을 잇는 비단길(좁은 의미의 실크로드), 그리고 바닷길로 삼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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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신라는 주로 초원길과 비단길을 통해 외부세계와 소통하였고, 백제와 가야는 바닷길로 소통하였다. 따라서 고구려와 신라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북아시아(몽골과 러시아 남부),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서아시아(이란,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고, 백제와 가야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5. 당과의 교류

 

신라방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부터 점차 해상 활동을 활발히 벌려 당 · 일본과 무역할 뿐만 아니라 해상 무역 활동이 편리한 곳에 이민하여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당나라의 해안 지방에 있는 집단 거주지를 신라방이라고 하는데, 그 중 신라인을 다스리기 위한 총관까지 배치한 산둥성 등주(登州)의 것이 유명하며, 산둥성에서 장쑤성에 걸쳐 존재했다.

 

당나라로 건너간 신라 사람들은 남쪽으로는 대운하, 회수유역의 내륙지역과 북으로는 산둥반도의 등주 문등현 적산촌이나 모평현의 유산포에 이르는 중국 연해안을 따라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신라인들이 살고 있다 하여 ‘신라방’이라 하였다. 신라방을 관리하는 장은 ‘총관“이라 하였으며, 신라방을 관리하는 관청이 ’신라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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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원

 

 법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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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복음의 징조

 

당나라에 왕래하면서 외국의 문물물들이 많이 들어오게 된다. 당과 교류하면서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들어왔던 서역의 물건들도 신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의 로마나 아라비아에서 만들어진 유리병이나 유리잔, 녹색의 터키산 보석을 박아 만든 금팔찌, 서역 사람이 새겨져 있는 은잔 등이 바로 그러한 물건이었다. 이외에도 경교를 통한 돌십자가가 경주에까지 들어오게 된다. 경교는 중국에서 845년까지 번성했다. 돌십자가는 복음의 신호탄이었다.

 

1956년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경교 돌십자가’.


돌십자가뿐만아니라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관음보살상에서는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을 느낄 수있는데 신라불교와 중국의 경교의 혼합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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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신라에서 십자가 장식품들이 발견되었다. 모두 1,300 여년 이후에 들어오게 될 복음의 상징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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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역 물품의 출현

 

황금보검

 

경주의 신라 적석목관분에서 발견되는 각종 유리그릇과 황금보검 그리고 서역인으로 추정되는 석인상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의 고대국가들이 중앙유라시아 지역의 여러 정치체와 활발한 문화 교류를 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의 관련 학계에서도 고대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교류와 관련한 여러 주제에 대해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황금보검(신라) 우측은 스키타이 보검

 

 

유리잔의 출현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리잔들은 대부분이  로마나 서남아시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신라에까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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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있는 비석은 서역인들이 경주에까지 와서 무역을 하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서역 상인들은 유리, 진주, 호박, 향료, 카펫 등 귀한 물건을 싣고 중국 당나라를 거쳐 신라에 왔다.

 

8. 서역인들의 왕래와 서역 문화의 도래

 

물건을 팔러 온 서역인들에게 땅이 기름지고 물이 많은 신라가 사막으로 가득 찬 자신들의 나라보다 더 살기 좋은 곳으로 생각되어 일부 서역인은 신라에 남았다. 경주 원성왕릉(괘릉)이나 구정동 방형 무덤의 무인상은 이때 남은 서역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 괘능

 

이들은 신라의 금과 은, 비단, 인삼 등을 사서 돌아갔다. 신라가 당과 연합해 삼국을 통일한 이후 신라와 당의 교역은 더 늘어났다고 볼 수 있다. 한때 신라인 장보고는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신라-일본 사이의 중계 무역을 장악하기도 했다. 장보고의 청해진 시기 이후에도 더 많은 서역 상인들이 신라를 찾아왔다. 당시 서역의 한 학자는 신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나라가 있는데 금이 풍부하다. 이슬람교도가 이 나라에 상륙하면 그곳의 아름다움에 끌려서 영구히 정착하고 떠나려 하지 않는다."

 

적석목곽분


천마총에서 발견된 금관이나 적석목관분도 스키타이나 중앙 아시아의 적석고분과 유사한 면이 많이 있다.

 

가야와 신라.일본의 적석목곽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유럽지역의 스키타이.아시아 흉노문화와 동일함으로 이들은 본래 아시아 시베리아 지역에서 발원한 유목민들임을 알 수 있다. 그리이스에서 이들을 스키타이라 불렀고, 한국은 흉노족이라고 불렀다. 몽골족이 유럽과 한반도까지 진출한 것이다.

 

신라의 문물을 볼 때 북방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에 스키타이는 전쟁을 잘하는 민족이었고, 토기와 문물, 유리잔, 금동잔, 금관, 돌비석, 적석분 등을 보았을 때 당나라를 통하여 서역과 스키타인의 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스키타이족

 

'스키타이인'은 흑해 북쪽의 유목민들을 가리키며, 카스피해의 북쪽에 거주했다. 스키티아(고대 그리스어: Σκυθία)는 기원전 8세기부터 기원후 2세기까지 남부러시아등 유라시아에 거주한 호전적인 유목민이다. 중국에 흉노가 있었다면 유럽에는 스키타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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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족(히브리어: סקיתים 스퀴팀, 고대 그리스어: Σκὐθαι, Σκύθης, 영어: Scythia)은 사카(Saka), 사카이(Sakae), 사이(Sai), 이스쿠자이(Iskuzai), 아스쿠자이(Askuzai)라고도 불리는 주로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한 이란계 민족에 속하는 유라시아 유목민들이다. 오늘날로 보면 이란과 우크라이나 민족이다. 이들은 호전적이다. 이란은 미국에 대항하여 싸우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대항하여 싸울 정도로 대단히 호전적인 민족이다. 체첸도 스키타인이다.  

 

이들은 약 기원전 9세기에서 4세기까지 중부 유라시아 스텝의 넓은 지역들에서 거주했다. 우리나아에는 스키타이의 적석묘의 고분문화가 들어왔다. 스키타이족에 속하는 투바공화국의 쿠르간은 신라의 왕묘처럼 적석분이다. 돌과 나무로 이루어진 적석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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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적석분에도 이스탄불이나 키프로스, 그리고 서유럽 등지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형태의 유리그릇이 발견된 바 있다.

 

신라의 천마총

 

신라 천마총에도 스키타이족의 영향을 받은 적석목곽분이 있다. 쉽게 말하면 나무로 된 관을 돌무더기로 쌓아올린 무덤이다.   



  천마총

 

  천마총 적석목곽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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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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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과 금장식은 중앙아시아나 몽골의 문화에서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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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문화는 유대인과 유사하기도 하다. 왕관은 나무가지에 새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다.

 

 

출처, 염동옥, 새로운 이스라엘 왕국, 신라와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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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왕관에도 새의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과 솔로몬이 썼던 왕관이다. 

 

출처, 염동옥, 새로운 이스라엘 왕국, 신라와 가야


한국의 왕관에도 이스라엘 왕관처럼 새의 모습이 나온다.

 

 

 

토기의 출현 

 

이스라엘 토기와 신라시대의 토기도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에 있는 고대의 토기도 가야 박물관에 있는 토기와 유사하다. 가야의 토기는 이스라엘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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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가야시대의 토기는 굽다리 토기이다.

 

  신라와 가야의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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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신라에는 스키타이, 흉노, 몽골, 로마, 지중해, 중국, 유대의 문화적 요소들이 다양한 유적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스키타이의 적석고분, 흉노와 몽골의 혈통, 지중해와 로마의 유리잔, 유대의 왕관과 토기, 경교의 십자가 등이 나타나 국제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랄산맥의 스키타이와 알타이산맥의 흉노족 문화가 그대로 이전되었다. 지중해의 유리공예가 들어온 것만을 보더라도 유대인이 왕래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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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외 경주는 고분의 도시이기도 하다. 경주시에는 많은 신라왕족들의 고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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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분이 경주지역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부산 복천동 고분군, 함안 도항리·말산리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창녕 교동 고분군, 공주 송산리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 서울 석촌동 고분군,등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유적지다.
 
이들 무덤 역시 고대 역사를 복원하고, 문화적 특징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자 유산이다.
 
신라는 당을 통하여 삼국통일을 하면서 국제관계가 원할해져 당나라에 가서 장사도 하고 살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외국문물을 맛볼 수 있었다. 신라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외교관계가 원할했다.
 
9. 신라의 이두
 
이두란 한문을 신라어(조선어)에 맞게 개작한 한문어휘+조선어순+조선어 토(또는 어미)이 이다.  신라는 자체적인 한자음에 신라어를 포함시켜 원할한 읽기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언어는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것이 설총이 만든 이두였다.
 
이두는 당시 신라사람들이 창조한 새로운 서사방식이기는 하나 한자어를 많이 개작한 것은 아니다. 노란색으로 칠한 부분이 새로이 한자를 삽입하여 당대로서는 읽거나 이해하기 편리하게 만든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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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이두에 쓰인 한자어는 세가지로 볼 수 있다. 1) 한자 차용어이고, 2) 한국인이 만든 한자어로 신어이고, 3) 고유어를 한자의 음이나 훈을 이용해 표기해서 만든 한자이다. 중국어순은 동빈구조(동목구조)로서 동사가 목적어보다 앞선다. 동빈구조는 동사와 빈어(목적어)가 결합된 구조의 형태를 말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 讀論語 : 논어를 읽다.
◇ 滕文公問爲國 : 등문공(滕文公)이 나라 다스리는 방법(爲國)을 물었다.
 
 
이에 반해 이두는 한국어 어순인 목적어+ 서술어의 구조를 갖고 있다. 빈동구조(ㄴ목동구조)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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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의 일본 전래
 
이러한 초기의 이두는 주로 불교의 경을 읽는데 쓰이고 이러한 방법은 일본어 가타가타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한 일본학자는 일본의 가타가나는 신라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 일본학계가 발칵 뒤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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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히로시마대 명예교수는 가타가나의 기원이 신라의 불경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했다.
 
몇개의 글자를 넣음으로 인해 한자어를 당시 신라어로 읽기 위해 발음기호가 적혀있었는데 이런 발음기호가 현재의 일본의 가타가나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즉 신라인 승들은 어려운 불경을 읽기위해 발음기호를 표기하였는데 이러한 발음기호가 그대로 가타가나에 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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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가타가나는 어려운 한자의 약자만 떼어내서 만든 언어이다. 이러한 방법은 이미 신라불경책에 있었다는 것이 고바야시 교수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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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신라의 이두는 일본 가타가나의 기원이 되었다. 일본의 히라가타도 모두 한자에서 비롯되었다. 중국도 원래의 한자대신 약어로 표현하고 있고, 일본도 원래의 한자를 간자로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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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이 한자에서 새로운 글자인 한글를 창조적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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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일본언어의 가타가나가 히브리어와 유사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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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유대인들이 일찍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한자어를 차용하면서 히브리어와 유사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유대대백과 사전은 McLead의 글을 보고 유대인이 일본에 들어와 잃어버린 지파로서 일본과 유대인은 공동조상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유동조설이다.

 

  유대대백과사전에 유대인의 일본에 대한 행렬 내용이 실림

 
 
10. 경주의 동학
 
최제우는 동학의 교조로서 경주 용담정에서 1860년 동학을 창도하였다. 경주는 동학난이 발생한 곳이라기 보다는 동학의 교조 최제우가 도를 처음으로 세상에 전파한 곳이다. 최제우가 살던 시절은 농촌경제는 관리들의 수탈로 인해 파산상태였고, 국가는 열강의 침입으로 민심이 흉흉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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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는 '사람은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의 도를 설파하자, 많은 민중들이 그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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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년 여름 최제우는 천성산에 들어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면서 시작된 그의 구도 노력은 그 이듬해 적멸굴에서의 49일 정성, 그리고 울산 집에서의 계속된 공덕닦기로 이어졌고, 1859년 10월 처자를 거느리고 경주로 돌아온 뒤 구미산 용담정에서 계속 수련하였다.
 

▲  용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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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860년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게 되었다. 하느님에게 정성을 드리고 있던 중 갑자기 몸이 떨리고 정신이 아득하여지면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왔다.
 
이러한 체험을 통하여 그의 종교적 신념은 결정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하여 1년 동안 그 가르침에 마땅한 이치를 체득, 도를 닦는 순서와 방법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1861년 포교를 시작하였고, 곧 놀라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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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경주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도 있지만 기존의 유교질서를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새로운 동학이 창도된 곳이다. 그러나 핍박도 새로운 질서를 흔든다고 하여 박해도 만만치 않았다.
 
최제우는 일단 피신하였다가 1862년 3월 경주로 되돌아갈 때까지의 남원의 은적암 피신생활 중 동학사상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고, 「논학문」·「안심가」·「교훈가」·「도수사」 등을 지었다.
 
경주에 돌아와 포교에 전념하여 교세가 크게 확장되었는데, 1862년 9월 사술(邪術)로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이유로 경주진영에 체포되었으나 수백 명의 제자들이 석방을 청원하여 무죄방면되었다.
 
이 사건은 사람들에게 동학의 정당성을 관이 입증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신도가 더욱 증가하였으며, 포교방법의 신중성을 가져와 마음을 닦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이적만 추구하는 것을 신도들에게 경계하도록 하였다.
 
신도가 늘게 되자 그 해 12월 각지에 접(接)을 두고 접주(接主)가 관내의 신도를 다스리는 접주제를 만들어 경상도·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와 경기도에까지 교세가 확대되어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3개 소를 확보하였다.
 
1894년에는 전봉준이 동학난을 일으켜 수만명이 그를 따르기도 하였을 정도로 동학의 초기 영향력은 대단했다. 동학은 백범 김구까지 신도가 되었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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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는 19세에 이미 황해도 해주에서 동학의 지역 포교책임자로 접주로 임명된 바 있는 동학교도였다. 어린 나이에 수백의 교도를 거느렸기에 아기 접주라고 불렸다고 한다.
 
그가 쓴 백범일지에는 당시 동학이 어떻게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전국으로 퍼져갔는지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백범은 1893년 나이 열여덟이 되던 해,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에게 입도한 최도명이란 동학 선생을 마을 인근에서 만났던 적도 있었다

 

그때 최도명이라는 사람과 백범은 서로 오가는 말 끝에 백범은 동학에 입도해 열심히 공부했고, 드디어는 2대 교주인 최시형을 직접 만나 접주로 임명되었다. 또한 해주 지역의 동학 대장으로 700명의 동학군을 지휘하며 동학농민전쟁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러한 동학운동은 쿠바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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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택씨는 천도교도이다. 그는 1903년 경기도 광주시에서 태어나 두살 때인 1905년 3월 어머니와 함께 멕시코 유카탄으로 이민을 갔다. 이곳에서 16년을 보낸 뒤 1921년 쿠바에 들어가 마탄사스에 정착했다. 1922년 대한인국민회 서기로 활동하며 1923년에 마탄사스 지역에 민성국어학교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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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쿠바 한인들에게 조국의 언어와 풍습을 잊지 않도록 노력했다. 1930년에 카르데나스 지역에 천도교 쿠바종리원을 열고 교리사업과 민족혼 심기에 노력을 기울였다. 1932년에는 청년학원을 설립했다.

 

이 무렵 김귀희 여사와 결혼해 생활이 안정되자 본격적인 광복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쿠바의 3개 지방에 흩어진 한인지방회를 규합해 수도 아바나에 `재쿠바 한족단'을 만들었고, 1934년부터는 상해 임시정부와도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며 독립자금 모금 등 광복운동 후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대한인국민회의 쿠바지회 회장이자,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전달하며 한인을 위해 살아온 그의 독립자금 송금기록은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기록돼 있다. 성금은 천도교 식이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 199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임천택 선생의 아들이자 임대한 씨의 종조부인 임은조(1926∼2006·헤로니모 임) 선생은 체 게바라 등과 함께 쿠바 혁명의 전면에 섰고 쿠바 산업차관을 지냈다. 동학혁명의 정신이 쿠바에서까지 이어졌다. 헤로니모 임은 쿠바 한인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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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한 씨는 "내 한국 뿌리와 조상들의 애국적인 행동이 정말 자랑스럽다. 선조들은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조국을 위해 희생했다"며 한국이 자신의 모국이나 마찬가지라고 강조했다.

 

임천택(1903-1985) 선생의 3녀인 마르타 임(임은희)은 아바나대학을 나와 마탄사스종합대학에서 33년간 철학 교수를 지낸 임 여사는 쿠바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마탄사스 시에 아직 살고 있다.

마르타 임

 

 

요악하면 경주는 박혁거세의 승천신화, 불국사의 돌십자가 등은 실제로 예수의 승천사건으로 이어졌다. 예수의 승천사건과 일치하는 박혁거세의 신화는 2,000여년이 지나서야 역사적 사건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신라 불국사의 경내까지 침입했던 돌십자가는 1,300여 년이 지나서야 선교사들을 통하여 십자가 구원의 복음이 들어왔던 것이다.

 

경주에는 신화의 구체적 사건을 위하여 현실화 된 100여 년 된 교회가 여럿이 있다. 이 교회를 통하여 항일운동과 신교육운동이 있었다.     

  

11. 100년 이상된 교회

 

경주제일교회

 

경주제일교회는 1902년 고종 36년 5월 10일에 안의와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 10 여 명이 성건동 197번지 초가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된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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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와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대구, 경북지역 전역을 다니며 순회전도와 교회개척, 대구 지역 기독교 학교를 세워 현대교육에 앞장섰으며, 대구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각 지역의 장날을 택해 노방전도를 해왔다.

 

 

 안의와 선교사

 

안의와 선교사의 노방전도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이남상 외에도 이봉기, 박금철, 손월성, 최태연, 윤두희, 윤마리아, 김치안, 김영교, 김순명, 박수은, 박영우 등 많은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중심이 돼 당시 경주읍 성건동 187번지의 초가를 마련해 임시 집회장소(노동리교회, 현 경주제일교회)로 정하고 안의와 선교사의 인도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1902년 5월 10일 이다. 그날을 기점으로 교회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1919년, 당시 경주제일교회 박영조 목사는 전국 적으로 확산돼가고 있는 3.1만세운동에 대해 경주에서도 동조해 줄 것을 제의받았다. 당시 교회의 중진들과 젊은 청년들의 뜻을 모아 3.1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3월 11, 12일 밤 교회가 운영하는 계남학교 사무실에 모여 13일 경주읍 큰 장날 거사할 것을 계획했지만, 당일 13일 새벽 일본 경찰의 습격을 받고 발각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은 이들은 15일 작은 장이 열리던 노동리 봉황대에서 청년 밖봉록, 서봉룡, 박무홍, 최성렬 등이 선봉에 서고 수많은 애국 청년들이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시민들과 합세해 거리를 누비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이 쉬도록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3.1만세 운동을 감행했다.


이 사건으로 박영조 목사를 비롯해 박문홍, 김학봉, 손석봉, 최성렬, 김성길, 박봉록 김성필, 김철 등이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상당기간 옥고를 치러야했다.

 

건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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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천제일교회는 1915년 방내에서 맹의화 선교사의 인도로 여신도 수인과 함께 설립 후, 건천리 박방옥씨 댁으로 이사하여 1920년에는 김봉달ㆍ석천대 등 20여명이 초가삼간을 구입해서 예배를 드렸고, 그 후 32년에는 36평의 성전 건축, 39년에는 48평의 성전 증축을 했으며, 66년에는 72평의 성전을 봉헌하고, 81년에는 총 건평 406평의 새 예배당을 기공해서 82년에 준공, 2007년 본당 리모델링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게 되다.

 

장산교회

 

장산교회는 영수 장병호에 의하여 1902년에 세워졌다. 장산교회(손영춘목사)는 일제시대에 탄압의 산고를 겪는 한편 농촌에 자리잡고 있음에도 동내 신문명의 선도적인 기화운동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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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제일교회

 

안강제일교회는1906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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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4월 8일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21년 만인 1906년 4월 부활절 아침 창 마을 신석호씨 사랑방에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본교회의 시작이다.

 

경주의 인물로는 영화감독 강우석, 전국방부장관이었던 권영해, 시인 박목월은 경남 고성출신이지만 어린 생활을 경주에서 보냈으며, 황수관교수도 경주시 안강읍에서 성장했다. 

 

12. 결론

 

경주는 2,000년 이상된 고도이며, 찬란한 신라의 문화가 여전히 살아있는 곳이다. 경주는 다른 도시와 달리 한국의 학생들이 가장 많이 수학여행을 가는 유적지로서 유명하다. 다른 지역은 유학의 정신이 있다면 경주는 화랑도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으로 이 정신을 갖고서 삼국통일을 한 지역이다.

 

신라의 삼국통일로 신라는 국제화되었다. 당나라에 신라방을 세우고, 서역에 있는 사람들이 경주에까지 들어와 머물면서 돌십자가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서역인들의 왕래, 몽골인들의 왕래, 당나라의 왕래 등으로 자연적으로 서구와 지중해 지역의 물품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간접적인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더군다나 토기나 왕관, 유리잔을 보았을 때 유대인들의 왕래가능성도 무시하지 못한다.

 

특히 하늘에 대한 승천신화는 하늘에 대한 역사적 사실로 바뀌는데 어렵지 않았고, 돌십자가는 1,300년 이후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기 위한 하나의 징조였다.

 

이처럼 승천신화와 돌십자가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었다. 구약의 모형이 그리스도를 예표하듯이 박혁거세의 승천신화와 돌십자가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예표하고 있었다.

 

예장통합교단에서는 경주출신 중 4명의 총회장이 나왔다. 그만큼 경주는 하늘을 추구하는 복음의 도시가 되었다.    

 

http://lawtimes.net/3904 (경주편)

 

http://lawtimes.net/3889 (고령편) 

 

http://lawtimes.net/3869 (포항편) 

 

http://lawtimes.net/3868  (영덕편)

 

http://lawtimes.net/3855 (칠곡편)

 

http://lawtimes.net/3849 (구미편)

 

http://www.lawtimes.net/3796 (대구1)

 

http://www.lawtimes.net/3797 (대구2)

 

http://www.lawtimes.net/3799 (대구 3)

   

http://lawtimes.net/3803 (영천)

 

http://lawtimes.net/2675 (영남1) 

 

http://www.lawtimes.net/2676(영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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