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유산답사기(구미편)

편집인 | 입력 : 2022/03/19 [14:27] | 조회수: 389

 

1. 구미의 지리적 여건

 

구미시는 대한민국 경상북도 서남부에 위치한 기초자치단체로서 대한민국 최대의 내륙 산업단지를 보유하고, 서울로부터 277km, 부산으로부터 167km 거리에 있으며, 면적은 615㎢로 경상북도 전체 면적의 3.2%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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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는 42만 명 이고, 선산읍, 고아읍, 산동읍을 비롯한 3읍, 5면, 17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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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미의 위치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과 전자공단으로 유명한 구미시는 경상북도의 서남부에 있으며 동남쪽에는 칠곡군, 서쪽에는 김천시, 북쪽에는 상주시, 동북쪽으로는 군위군과 의성군을 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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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미의 특성-도농복합형

 

신라 땅이었던 구미는 신라 초기에 일선군으로 불렀으나 진평왕 36년(서기 614) 일선주로 승격되었고, 경덕왕 16년(서기 757) 숭선군으로, 고려시대에 선주라 하였다.

 

조선 태종 13년(서기 1413)부터 선산군으로 지속하여 왔으며 1978년 2월 15일 선산군 구미읍이 구미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1995년 1월 1일 국내 최대 내륙첨단 공업 도시 구미시와 선진농업 지역인 선산군이 통합되어 도농복합형 구미시가 되었다.

 

구미공단은 1969년부터 구미국가산업단지(이하 구미산단)가 조성돼 산단이 5개나 된다. 울산, 창원에 이어 3번째로 큰 공단이다.

 

과거 구미는 선산군 중심의 농업이 산업의 주축이었으나, 1970년대 초 정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내륙 최대의 첨단 수출 산업단지를 보유한 도시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현재 구미에는 1~5공단까지 38㎢의 국가산업단지가 있고, 고아·해평·산동농공단지와 각지의 소규모 공장 등 총 3천2백여개 기업체에 9만여명의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

 

주요 생산품으로는 반도체, 휴대폰, LCD, 디스플레이 등을 비롯하여 미래 먹거리로 주목받고 있는 탄소소재, 광학 의료기기, 이차전지 등 첨단산업까지 분야를 확장하고 있다.

 

첨단 전자산업·정보통신산업을 위주로 1999년에는 전국 단일공단 최초로 수출 100억불을 돌파했고, 2005년에는 수출 300억불을 달성하며 현재는 전국 수출의 4.5%, 경북 수출의 63%를 차지하고 있다. 구미는 어느듯 가난의 땅이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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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산단(283만평)이 완공되어 전국 최대규모 산단이 되었다. 1973년에 조성이 완료된 1산단은 코오롱, 금강화섬, 동국합섬 등 대규모 섬유업체가 들어왔다.

 

그 후 금성(지금의 LG), 삼성, 대우 등 전자업종 대기업이 잇따라 왔다. 1982년 2산단이 완공되고 주요 수출품이 컬러TV로 바뀌면서 반도체와 통신기기 등 첨단산업이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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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는 경부고속도로와 최근 개발한 편리한 교통망, 풍부한 용지와 용수 등 양호한 입지여건으로 외국인 투자촉진지원조례 등 지원제도 마련 등을 기반으로 30여년 만에 수출 3,700배로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국내·외 어려운 경제여건에도 불구하고 구미공단의 역량강화와 미래 산업구조로의 재편을 위해 5G 테스트베드, 홀로그램 기술개발사업, 홈케어가전 혁신지원센터 등 ‘8대 신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구미시는 2019년에는 4단지 조성도 하였다.

 

 


이처럼 구미는 첨단 산업기지가 있는 개발형 도시이기도 하지만 선진 농업도 발전하여 도농간의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도시이기도 하다. 박전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였기때문에 공단이 발전한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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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재생에도 박차

 

구미시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 농촌 경제와 사회 활력을 높이기 위해 디지털 뉴딜-농정 틀 전환을 선언하고, ‘농촌 재생’ 추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도농복합도시인 구미시의 특성을 살려 빅데이터, ICT 기반 3세대 AI 농축산업으로의 변화를 꾀하고 있으며, 식량산업 5개년 종합계획을 토대로 식량작물의 적정 자급률을 제고하고 식량생산 다각화로 구미 농업 경쟁력을 높여 나가기 위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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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없는 수박을 대량 재배하는데도 성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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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미의 역사성

 

구미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정신문화의 산실로 낙동강 지역에 가야시대 고분군과 유적이 발굴되고 있어 역사적으로 고대문화가 발달했던 지역이다. 

 

2020년 8월 12일부터 경상북도와 구미시는 문화재자료 제295호 주륵사폐탑의 학술정밀 발굴조사 용역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발굴조사는 주륵사폐탑의 원래 자리와 옥개석(지붕돌)을 비롯해 주륵사 폐탑의 지대석과 하층 기단 면석, 기타 석탑 관련 부재를 추가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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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라시대에 한반도에서는 처음으로 불교가 전해진 곳이고, 신라 최초의 절인 도리사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여기는 야은 길재가 공부한 곳이다. 도리사는 아도(阿道)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하여 있음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고 하였다.

 

  도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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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구미의 인물

 

 1) 야은 길재

 

조선시대에 와서는 성리학을 꽃 피운 지역으로써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등 학자와 사육신 하위지, 생육신 이맹전, 한말 의병대장 허위 등 숱한 우국지사를 배출하였다. 선산은 사림파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 있다고 할정도로 구미는 유학의 정신문화의 산실이다. 

 

특히 야은 길재는 구미사람으로서 이색·정몽주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으로 불린다. 그는 신라 최초의 절 도리사에서 글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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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재는 세상의 영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연구하였기때문에 그를 본받고 가르침을 얻으려는 학자가 줄을 이었다. 김숙자를 비롯하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이 그의 학맥을 이었다.

 

그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두 나라를 거친 성리학자로서 1387년 성균학정(成均學正)이 되었다가, 1388년에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성균박사(成均博士)를 지냈다.

 

조선이 건국된 뒤 1400년(정종 2)에 이방원이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하였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말하며 거절하였다. 정몽주처럼 끝까지 절개를 지킨 인물이다.

 

정몽주는 영천, 길재는 구미, 이색은 영덕 출신이다. 영남에는 이러한 충신들의 절개정신이 흐르고 있다. 

 

그래서 영남출신 중에 손양원, 주기철, 한상동처럼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기독교의 충신 순교자와 이상근, 이종성, 이상현, 정성구, 전성천 같은 학자들과, 이원영, 김광현, 이성헌, 김기수, 김진홍, 김삼환, 이광선 목사 같은 훌륭한 목회자를 많이 배출했다. 이들은 모두 성리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성리학이 기독교와 결합할 때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구미에서 훗날  선산부사 민백종(1712~1781)이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선 아래 은거한 야은 길재(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이 지역 유림들과 뜻을 모아 영조 44년(1768년)에 금오산 아래 채미정이라는 정자를 건립했다.

 

 

채미정 가는 길

 

  채미정

 

 

 2) 왕산 허위

 

이러한 길재의 성리학의 영향은 왕산 허위에까지 이어진다.  구미에가면 왕산 허위선생의 기념관이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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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許蔿)의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왕산(旺山)이다. 그는 왕산 허위라고 불리웠다. 허위는 1855년(철종 6) 4월 2일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의 선비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맏형 허훈에게 학문을 배웠다.

 

허훈은 실학자 성호 이익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허위 형제는 1895년 민비의 시해와 단발령 소식을 듣고 각각 의병에 가담했다. 가족이 모두 의병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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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허비

 

허위는 이름 높은 학자 집안에 태어나서 중앙의 관제로 진출하여 평리원서리재판장(대법원장)까지 가지만 그는 자신의 안일보다 국가의 안일을 생각해서 벼슬을 버리고 의병투쟁이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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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전국에 공문을 띄워 4만 5천명이상 가담한 13도 창의군을 조직하여 빼앗긴 국권을 탈환하고자 서울 진공작전을 진두지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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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획을 세우고자 하였다.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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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 창의군 의병대장으로 일본 총독부를 공격하기 위해 의병을 이끌고 청량리를 거쳐 동대문으로 진격하였으나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에게 패퇴, 재공격을 하기위해 경기도 연천에서 훈련 중 1908년 5월에 체포되어 1908년 9월 27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구미사람이지만 경기도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던 중 일제경찰에 붙잡혀 서대문 감옥에서 55세로 순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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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어가면서도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나라의 국권을 찾지 못하고 내가 지금 이렇게 죽는 것이 불충하고 불효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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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의 가족들은 일본을 피해 러시아로 갔다. 거기서 그들은 다시 블라디 보스독에서 6000키로나 떨어진 중앙아시아 키르기스탄까지 가서 농사를 지으며 생명을 부지했다. 뿌리를 내리면서 소작농으로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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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집은 허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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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들이 한국으로 귀국해서 살았지만 결국 막노동을 하는 한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농사를 짓기 위해 키르기스탄으로 돌아갔다. 

 

 


 


독립군이나 의병장의 후손들은 어디서나 비참하게 살아갔다. 다행히 한국정부에서는 대한민국장이라는 서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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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구미. 선산의 동학혁명

 

구미와 선산읍은 경상도 북서부지역으로서 동학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진 곳이다. 경북지역에서의 동학농민 운동은 주로 6월달 이후 호남지역 동학의 2차 봉기 때 발생했다. 호남지역에서는 1월부터 시작해서 3월달에 활발하게 동학농민운동이 전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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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공사관도 1894년 5월에 보고한 내용에 의하면 "경상도에서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접경한 지방에 동학이 가장 많고 특히 선산, 상주, 유곡은 동학농민의 소굴"이라고 했다.

 

상주는 지금까지 동학교당이 세워졌을 정도이고, 구미 선산에도 동학기념비가 많이 세워졌다.

 

상주

 

선산 지역 동학유적지는 창도주 최제우가 과천까지 압송되었다가 대구 감영으로 돌아가는 도중 마지막으로 묵었다는 상림역원터, 선산읍성 공격을 위해 동학농민군이 모였던 곳, 선산읍성 전투지를 들 수 있다.

 

쌍암고택안에는 선산읍공격을 위해 동학군이 집결하기도 하였다. 고택은 일본군이 병참부로 사용하던 최열씨의 대표적인 사적지이다. 사랑채는 당시 일본 주둔병이 기거하고, 곡식창고는 무기고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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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동학농민군의 전쟁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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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읍성 낙담루에도 동학농민의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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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은 당시 선산읍성을 교두보로 삼아 일본군 병참부를 공격할 계획에 있었으나 일본군들이 신무기를 앞세워 사흘만에 일본군의 공격을 받은 동학농민군은 성에서 후퇴하면서 많은 희생자를 냈다. 

 

일본군과 관군에게 패한 동학군은 불불히 흩어지고 만다. 그러나 선산의 동학군은 당시 충경포의 편보언, 선산포의 신두문, 그리고 많은 양반출신들의 지도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다.

 

7. 구미의 교회설립

 

1) 상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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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상모교회는 1901년 3월 13일에 상모동 211번지에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들은 정인백의 사랑방에서 정인기, 정인명, 한규석, 한몽교, 김현례, 한신석, 한화석, 여성희, 신양월 등이 모여 첫예배를 드리면서 태동되었다. 자생적인 교회이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어려서 주일학교 때 상모교회를 다녔고, 어려서부터 웅변을 잘하여 칠곡 선산지구교회연합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1등을 독차지하였다. 그는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열심히 다녔고,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면서 거리상으로 떨어져 교회를 잘 나오지 못하였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신앙심을 져버리지 않고 자신이 출석했던 고향 마을 교회인 구미 상모교회의 건축을 위해 건축 헌금으로 100만원의 거액을 헌금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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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정권으로 인해 아내와 자신의 목숨까지도 잃고마는 불운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5.16 군사혁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을 경제적으로 끌어올리는데 괄목할만한 업적을 발휘하였다.

 

특히 516 정변 이후 군사정권이라고 존 케네디 대통령이 원조를 해주지 않자, 영락교회 한경직목사의 도움을 얻어 원조를 받는다. 이러한 것은 그가 어렸을 때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한경직목사와 친숙하게 지내 국가의 경제력 확보에 큰 도움을 얻었던 것이다.  

 

  2) 괴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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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평교회는 1902년에 구미지역에 세워진 상모교회와 역사가 맞먹는 전통이 있는 교회이다. 괴평교회는 부해리 선교사와 이재욱 조사로부터 복음을 받은 김영채, 김영규, 박치화 씨가 함께 김영채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됐다.

 

괴평교회는 일제 강점기동안에도 생명을 걸고 한번도 교회문을 닫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 교회원로장로로 있는 양재열 장로(99세)가 3·1운동에 가담했던 이임용씨를 은밀히 도운 죄목으로 일제에 의해 처형대상자로 선정됐다가 해방으로 극적으로 생명을 건지기도 한 유서있는 교회이다. 

 

3) 선산읍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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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읍교회는 원래는 노상동교회였다. 1904년 5월 15일 선산면 이문동 706번지의 대지 288평 초가 5간을 노재한을 비롯한 4명의 공동명의로 매입하여 부해리 선교사가 노상동교회를 설립하였다.

 

1914년 선교사 부해리가 본 교회를 사임하고 방혜법 선교사가 겸임하였다. 1919년 5월 노상동 111-6번지의 대지 89평 초가옥을 홍재두, 김명언, 노재한 3인의 명의로 한응규로부터 매입하여 1921년 초가 6간의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훗날 선산읍 교회로 명칭을 바꾼다.

 

  선산읍교회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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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구미와 박정희의 역성혁명

 

이처럼 100년 이상 되는 교회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인물이 나거나 그 지역이 복을 받게 된다. 한국사에 있어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의 밝은 면과 정치의 어두운 면이 있지만 한국의 경제를 한층 끌어올린 것은 자타가 공인할만하다. 

 

윤보선 체제에서 박정희로 역성혁명이 있을 때 사회는 변혁되었다. 윤씨의 왕조에서 박씨의 왕조로 이름이 바뀌었다.

 

박정권은 인권에는 어두운 면을 보였지만, 경제에는 밝은 면을 보여주었다. 박정희를 통해서 인권같이 민주주의성을 잃은 것도 많이 있지만 빵을 얻었다. 빵만이 아니라 빵을 만드는 방법과 빵을 만드는 제철기계 까지 얻게 되었다.

 

빵의 혁명

 

경제 5개년 계획과 새마을 운동,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을 만든 것은 당시 한국을 빈국에서 현재 G20 안에 들어오게끔 하는 빵의 혁명이었다. 우리에게는 역성혁명이 아니라 빵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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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초가집에서 태어났지만 국민들에게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하여 초가집에 살지 않도록 혁명을 하였다. 경제개발 5개년은 빵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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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빵을 준 것이 아니라 빵만드는 법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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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독의 아우토반을 시찰하고 세계 유례없이 2년 5개월만에 428키로의 경부고속도로를 착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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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시 새마을 운동을 시찰하며 다녔다.  새마을 운동은 덴마크의 그룬투비, 이스라엘의 키부츠 이상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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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들은 공장에서 희망을 갖고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들은 빵의 혁명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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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들은 열심히 노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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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생들은 기능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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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은 부엌부터 개량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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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처음으로 포니 자동차를 생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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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은 한국의 기적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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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국 한국이 항공모함을 만드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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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은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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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당시 한국의 세계 1인당 GDP는 92$ 이었다. 북한은 125$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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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새마을운동후 한국은 점점 바뀌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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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새마을 운동은 모범 사례로 국제 기구들이 선택을 하였다. 세계에까지 한국의 역량을 드러냈다. 사회각층에서 문화혁명, 체육혁명, 경제혁명이 발생했다. 새마을 운동이 아니라 선진국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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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은 조국 근대화를 충분히 가져왔다. 현재는 노인들이 기초연금을 받고 모두 의료서비스를 받아 의료비를 거의 내지 않는다. 하나의 의료보험카드만 있으면 한방, 치과, 양방 모두 커버가 된다. 세계 최대의 보험혜택이다. 조국은 근대화를 벗어나 현대화를 넘어서 선진국화가 되었다. 원전을 만드는 기술까지 보유하게 되었고, 조선제조는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갖고 있다. 중국과 일본을 앞섰다. 

 

반도체역시 여전히 세계최고를 누리고있다. 중국과 일본, 미국보다 더 앞섰다. 특히 구미전자공업은 전자공화국 일본을 앞섰다. 예술과 문화는 BTS가 빌보드 차트를 국내 인기가요처럼 1위를 차지하고 있고, 손흥민은 영국 프리미어를 누리고있다. 남북만 통일되면 한국은 초강대국이 될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평가가 나온다. 박정희의 역성혁명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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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정적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의 공적을 높이 사, 박정희 대통령 동상과 기념관을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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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을 통해 초가집은 사라졌다. 한국사회에 신화가 발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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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에서 어렸을 때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열심히 다녔던 한 지도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한국자체를 축복하셨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교회가 있는 곳에 하나님은 항시 인물을 주셨고, 그 인물들은 정치인이든지 스포츠인이든지 항시 국위선양을 하였다. 

 

구미의 역성혁명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세습왕조가 다른 가문으로 바뀌는 것을 말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왕조란 천명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 하였으니, 천명(命)이 바뀌는(革) 것이 곧 혁명이고, 대개의 경우 지도자의 가문이 바뀌기 때문에 새 왕조는 전 왕조와 다른 성(易姓)을 갖게 되어 역성혁명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

 

조선의 왕조는 이씨로 왕조가 바뀌었다. 한국의 현대사는 윤씨에서 박씨로 바뀌었다. 모두 군사정변이었지만 새로운 성씨가 탄생하였다. 성이 바뀐 사람이 정권을 잡는 것이 역성혁명이다.   

 

1960.4.19 혁명의 승리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되고, 4월 28일 부통령 이기붕 일가는 자살하고, 장면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당시 국무총리였던 허정이 6월 15일까지 두 달 동안 대통령권한대행을 하고, 의회는 윤보선을 4대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윤보선은 장면을 국무총리로 지명하면서 장면내각이 수립된다.

 

제2공화국은 1960. 6.15-1961.5.18까지 이다. 대한민국의 왕조는 이성계처럼 군사정변에 의하여 윤씨에서박씨로 바뀌게 된다. 현대판 역성혁명이었다. 그러나 왕조가 바뀌면서 왕조는 역성혁명이었지만 사회는 경제혁명이 발생했다. 교회를 통해서는 종교혁명이 발생하고 있었다. 한국사회에서만 가능한 군사정변을 통하여 한국사회는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교회는 보편역사속에 들어와 유교에서 기독교로 가는 종교의 역성혁명이 발생했다. 영적으로는 인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왕으로 모시는 종교의 역성혁명이 발생한다. 교회가 역성혁명의 주체가 될 때 국가나 사회는 변혁되는 것이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국가가 탄생된다.

 

새마을 운동은 그야말로 헌나라를 새나라로 바꾸는 현대판 역성혁명이다. 헌마을이 새마을로 명칭이 변경되어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하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빈국이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되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은 하나의 경제적 혁명이었다. 한강의 기적만이 아니라 낙동강, 영산강의 기적이었다.   

 

하나님의 역사는 왕조의 성을 바꾸면서 즉 역성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했다. 이성계의 역성혁명이 없었다면 세종대왕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는 무능한 장면정권을 변혁시켰다.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통해 부패한 불교나라를 유교나라로 세웠고, 박정희는 역성혁명을 통해 가난에 찌든 나라를  부자나라로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다. 한국의 역사는 왕조가 바뀔 때 새로운 세상이 찾아왔다. 한국의 종교도 유교나 불교에서 기독교로 명칭이 변경될 때, 사회는 변화되고 있었다. 병원이 설립되고, 학교가 세워졌다. 정신이 개조되었다.   

 

특히 한국사회자체가 예수그리스도로 새로운 왕이 등극할 때 한국은 점점 선진국으로 변해갔다. 구미는 농업지역이었는데 전자제품까지 수출하는 세계최대의 공업지역이 되었다. 이것이 구미의 역성혁명이었다.

 

http://lawtimes.net/3849 (구미편)

 

http://www.lawtimes.net/3796 (대구1)

 

http://www.lawtimes.net/3797 (대구2)

 

http://www.lawtimes.net/3799 (대구 3)

   

http://lawtimes.net/3803 (영천)

 

http://lawtimes.net/2675 (영남1) 

 

http://www.lawtimes.net/2676(영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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