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통합의 우선개혁대상은 법리부서, 신학교, 언론이다.

통합 교단의 정체성 상실...개혁 시급

기독공보 | 입력 : 2017/07/23 [21:17] | 조회수: 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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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통합교단의 명년 슬로건은 '거룩한 교회,다시 세상 속으로' 이다.  최기학 부총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마을회복이 슬로건?

 

이러한 한국교회 위기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경적인 교회의 본질을 상실한 것과 이 시대에 맞는 목회 패러다임 전환에 실패한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처한 교회의 본질 회복과 목회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총회주제위원회가 제102회 총회 주제로 '거룩한 교회, 다시 세상 속으로(요3:16~17, 창 12:3, 마9:35)'를 청원했고, 총회 임원회는 이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대안의 목회가 있다면 '마을목회(Village Ministry)'일 것이다.

폭력, 전쟁, 생태계의 파괴, 빈곤,공동체 해체의 위기 속에서 생명을 살리고 마을을 공동체로 회복시키는 마을목회가 이 시대에 절실한 것이다. 피조세계가 총체적 생명의 위기 속에서 신음할 때에도 교회는 개교회주의, 물질만능주의,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있었지만,이제는 돌이켜 지역사회 중심의 새로운 목회 패러다임으로 전환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이는 슬로건이 추상화된 것이다. 폭력, 전쟁, 생태계의 파괴, 빈곤,공동체 해체의 위기 속에서 생명을 살리고 마을을 공동체로 회복시키는 마을목회 는 교단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가와 세계차원에서도 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러므로 최기학 부총회장이 내건 슬로건은 총회임원부터 신학교수들까지 신학을 추상화, 사변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마을목회회복이 명년의 이슈라면 1년동안에 마을목회회복을 위하여 예산은 얼마나 내세웠을까? 마을목회회복을 하는데 예산이 전혀 없다면 이는 탁상공론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책임없는 명분과 슬로건에 그칠 것이다. 총회장은 할 수도 없는 것을 슬로건으로 내거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1년안에 국가나 세계가 아니라 교단이 할 수 있는 것들만 잘 하면 된다. 

 

통합교단의 우선개혁 대상은 법, 교수, 언론이다.  총대들도 앞으로 이러한 개혁과제를 실현할 사람을 부총회장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교단의 정체성을 세워야 한다. 법리부서는 이미 무질서화되었고, 교수들의 신학은 교단의 신학과 상관이 없이 사변화, 이교화 되었고, 한국기독공보는 사회성, 역사성, 신학성을 상실하여 교단홍보지로 전락하였다. 모두 공통적인 것은 교단정체성의 부재이다. 그러므로 현임원과 차기의 임원들은  마을회복보다 교단정체성회복에 주안점을 두고 법리부서, 교수들, 한국기독공보의 개혁을 화두로 삼아야 할 것이다.  장로교의 정체성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현 임원과 차기 임원들은 교단의 정체성 회복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법리부서의 개혁

 

총회기소위는 고소사건이 올라오면 닥치는 대로 기소하고 있다. 물론 기소위의 역할이지만 현행 재판국장과 헌법위원장까지 고소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다가 사람에 따라 기소의 형평성이 문제되고 이다. 최근 헌법위원장(고백인목사)이나 재판국장(김진욱목사)은 업무상의 일로 계속 직권남용으로 피소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김진욱목사와 고백인목사는 둘 중의 한 측에 유리한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는 위치이고, 혼자 결정한 것도 아닌데 위원장을 고소한다고 했다. 위원장뿐만아니라 해당국원들도 피소를 당하고 있는 상태 이다.

 

김진욱목사는 최근 서울장로교회와 원주제일교회건으로 강원노회측으로부터 고소를 당한 상태이다. 고백인목사도 계속 고소를 당하고 있다고 했다. 현행 헌법으로 재판국장과 헌법위원장에 대한 면책특권이 없는 상태에서 앞으로도 불리한 결정이 나오거나 패소한 측은 직권남용으로 고소할 가능성이 있어 이에 대한 대책이 시급한 상태이다. 

 

서울장로교회건과 관련 헌법위는 이종윤목사측에 유리하게 해석을 한 바 있고, 재판국은 반대측을 유리하게 판결하였다. 이렇게 서로 법리부서도 다른 해석과 결정을 하기 때문에 법리부서의 질서가 필요한 상태이다.  물론 사안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이해관계가 팽배한 상황에서 양측이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누구의 손을 들어주든지, 헌법위와 재판국은 한 쪽 편을 택해야 하기 때문에 늘 고소대상에 있다.    

 

총회기소위는 완장을 채워주니 재판국원이고 헌법해석위원회이고 고소사건이 들어오면 닥치는 대로 기소하고 있어 현재로서 총회기소위를 제어할  방법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총회재판국에서 패소하면 반드시 재심재판국으로 가게 되어 있어 총회재판국은 권위가 없는 유명무실한 단체가 되어 버렸고, 판단을 해도 재심에서 뒤집히는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에 총회재판국의 권위는 이미 상실한 상태이다. 교단이 소송공화국으로 전락한 상태이기 때문에 법리부서의 개혁이 절실한 때 이다. 

 

법리부서장에 대해서는 봉사기간동안은 면책특권보장해야 하고, 총회기소위는 당회기소위, 노회기소위가 기각한 사건에 대해서만 기소를 할 필요성이 있을 때 기소명령을 내려야 한다. 너무 기소위의 직권을 남용하고 있다.  재심재판국은 폐지해야 하고, 재판국원들을 별도로 훈련시켜야 하고, 총회기소위에 대한 법은 지방검찰청, 고등검찰청, 대검찰청식으로 당회기소위, 노회기소위의 상급기관으로 존재해야 한다. 현재 총회기소위는 1심에 불과하다.

  

신학교의 개혁     

 

이외에 예장통합교단의 신학교 교수들의 학문성이 교단의 정체성을 벗어났기 때문에 심지어 천주교화, 이교화되고 있기 때문에 신학교의 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신학교는 목회자양성기관이다. 교수들의 신학을 펼치는 곳이 아니다. 교수들의 커리큘럼도 일치성이 있어야 한다.   

 

장신대 이사장 신정목사는 "신학교는 신학자를 만드는 기관이 아니라 한국교회를 섬기는 목회자, 세상을 변화시키는 목회자들을 기러내는 자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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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까지는 신학교가 교수들의 신학을 펼치고 전개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즉 교단의 신학보다 교수의 신학이 우선되었다. 분명히 교단은 천주교영성과 신학, 이단관련 강의, 사변화 철학화된 신학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교단의 신학은 사라지고 교수의 신학만 남았다. 신학이 교수들에 의해, 추상화, 사변화, 형이상학화, 가치화된 것이다. 신학이 현실성, 역동성, 상황성, 역사성, 사회성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보니 통합교단에서 걸출한 설교가 하나 안나오는 것이다. 천주교영성, 생태영성, 그림영성, 교리영성, 사변화된 영성, 인본화 된 영성이 태반인데 이러한 신학적인 상황에서 교단이 흠모하는 걸출한 스타하나 나오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학교는 교단개혁의 주체세력이 아니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집단으로서 그들의 신학이 개혁대상에 올랐다. 이미 교수들은 경건보다 학문을 먼저 앞세우고 있고, 학문을 사변화시키고, 교단의 신학학범위를 초월하여 교단이 아니라 교수가 원하는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책임지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성명서만 발표하면 자신들의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성명서도 지키지 않는다. 그냥 발표만 있을 뿐이다.

 

교수들은 성명서 발표하고 이면은 천주교신학, 통일교신학, 인본주의 신학, 사변화된 신학, 기득권신학, 추상화된 신학, 대형교회 위주신학, 이사회 눈치신학, 책임없는 성명서신학을 숨기고 있다. 교수들이 채택하려고 하는 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이며, 교단신앙고백에도 오래 전부터 들어있는 내용이다. 새로운 것이 없고 구체적인 것도 없고, 구태의연한 것을 성명서로 채택하는 것이다. 즉 기초적인 것을 갖고서 성명서신학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교수체면이 서니까 말이다. 다음의 내용은 삼척동자도 아는 내용들이다.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 정의, 환경, 평화에서 한 걸음도 못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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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도의 성명서 내용이라면 이미 교단신앙고백에 포함되어 있다.

 

제6부 21세기 대한예수교장로회신앙고백서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공산 동구권의 붕괴와 구 소비엩 연방체제의 해체 이후, 인류 공동체는 급격한 지구화(globalization)의 과정 속에 말려들고 있으며, 남북한은 화해와 교류의 급류를 타고 있다. 시장경제 원리(신자유주의)의 지구화와 기술과학의 지구화, 특히 지식정보화와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의 혁명 및 인간복제를 포함한 생명공학의 발달과 사이버세계의 확산으로, 북반구와 남반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삶의 질에 있어서 괴리와 소외와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나아가서 우리는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있고, 여기에 더하여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개인주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도적 신앙내용을 거부하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 그리고 사유화되고 감성적 경험을 중요시하는 다원화 종교와 같은 “후기 근대주의”(post-modernism)의 부정적인 가치들에 직면하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상과 같은 세계사적 도전과 이 시대의 징조들을 바로 읽고,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방향을 가늠해야 할 것이다. 선교 제2세기에 돌입하고 있으며, 한국 장로교 회가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하나를 지향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하면서 다른 장로교회들과의 일치 운동은 물론, 다른 교회들과도 일치 연합하는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 시대가 요구하는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정진해야 할 것이다

 

차라리 호신대 최광선교수처럼 생태영성을 채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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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한일장신대 백상훈교수처럼 그림영성을 채택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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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생태계의 문제는 선언만 한다고 해서 교수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추상적이고 무책임하고 구태의연한  성명서만 발표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차라리 생태영성, 세월호영성을 채택하겠다고 발표하는 게 나을 것이다. 이처럼 성명서신학은 신학의 사변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교수부터 희생하는 희생성명서 필요  

 

차라리 교수들 희생성명서를 발표하기를 바란다. 신학생들이나 목회자들은 파트타임도 얻기 어려운 상황에서 교수들은 대형교회에 출석하여 협력목사의 명목으로 이중의 사례비를 받고, 외부 설교와 강의, 인세 등으로 삼중의 돈을 벌여 한달에 500-1,000만원 이상의 수입을 올려 희생없는 행동인으로 전락했다. 그러면서 사변신학을 하는 교수들은 그들은 은퇴한 이후에도 사변연금이 아니라 현실연금을 받아 산 기득권의 사회에 살고 있다. 즉 신학은 사변화되었는데 돈은 현실화된 것이다. 죽은 신학의 사회에 살면서 산 기득권의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교단이 요구하는 신학을 하여 교단의 성장과 발전에 적극 공헌하는 교수들도 있지만 대부분 그들의 이론적 신학과 실천은 연결되기 어렵다. 실천과 연결되지 못하는 서구의 사변화 된 신학은 죽은 신학이다.

 

교단은 더 이상 교수들의 기득권을 두둔하거나 책임지지 않는 가치신학, 추상적 신학, 성명서 신학에 춤을 추지 말고 희생신학처럼 신학을 현실화시켜야 할 것이고, 교단은 그들의 추상화된, 사변신학을 견제해야 할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학생이 졸업을 하여 박사학위를 얻어도 강의자리 하나 안주면서 자신들은 기득권의 신학을 하고 있고, 제자들의 길도 열어주지 않으면서 보직을 차지하면서 이중, 삼중의 돈을 벌어들여 희생없는 신학을 하고 있다. 등록금만 수천만원 요구하면서 박사학위출신들은 시간강사 하나 얻기 어려운 것이 오늘의 직영신학교의 현실이다. 이러한 일부 교수들의 기득권적 적폐는 청산되어야 한다.  

 

최근 대전신학교도 연봉 1억 이상의 교수들이 학교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이사장, 총장까지 압박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H 교수는 이사회에 대항하다가 명예훼손당할 것을 우려, 조기은퇴하고 말았다. 학교는 죽어가는데 교수의 연봉은 올라가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최근 대전신학대학교 출신 중에 좋은 설교가 하나 없다. 이는 모든 신학대학교가 유사한 현상이다. 이찬수, 김양재, 소강석 목사같은 사람 하나 길러내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통합신학의 산실이다. 교수들은 대형교회만 들어가려고 하고 들어가면 우선 전임자와 금긋기부터 한다.    

 

그러므로 교단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죽은 신학의 사회에 살고있는 교수들에 대해 신학교육부는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신학교육부도 같이 관행에 젖어 관리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천주교신학, 통일교신학을 하는 교수들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게 현신학교육부의 주소이다. 죽은 총회의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교단과 학교의 총체적 적폐이다. 교수들 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총회 신학교육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신학교육부는 속히 교수들의 빅데이터를 만들어서 교단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그들의 연구물과 사역현장을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죽은 목회의 사회 

 

이제 협력목사로 있는 교수들은 일자리도 없는 다른 목회자들을 위하여 스스로 반납하고 희생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대형교회만 기웃거려 대형교회 담임목사 자리 나오면 김지철, 이수영, 주승종, 배요한 교수처럼 과감하게 하나님의 뜻이라며 교수직을 헌신짝 버리듯이 떠나지 말고, 차라리 남아있는 교수라도 미자립교회로 가서 봉사해서 교수로서의 책임감을 보여주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이중 세 사람의 교회에는 전임자가 설교 한번 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교수들은 미자립교회 목사들의 고통을 알고 자신들의 이론을 실천화하는데 노력해야 한다. 해방신학자 구스타보는 일하다 말고 농군복을 입고 미국에 강의를 하러왔다. 이것이 신학자의 삶이다. 학교강단이나 대형교회에만 머물면 기득권유지만 하는데 익숙하게 되고, 그들의 신학은 자신들은 준수하지 않고 학생들에게만 요구하는  lip theology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직영신학대 교수들에게는 기득권신학만 있고 희생의 신학이 없다.

 

이제 교수들은 사변의 신학, 기득권의 신학, 사대주의 신학, 모방신학, 인본주의 신학, 희생없는 신학, 책임지지 않는 성명서 신학, 전임자와 금긋기의 신학, 미국의 신학, 독일의 신학에서 벗어나 한국상황에 맞는 창조 신학, 희생신학, 기득권버리기 신학, 모범신학, 상황 신학을 만들어 내야 한다. 언제까지 이미 죽은 칼빈, 루터, 불트만, 몰트만, 바르트, 니버, 미국신학, 독일신학을 되뇌일 것인가? 

 

배부른 교수에게서 살아있는 신학은 나오지를 않는다. 교수가 배가 고파야 진정한 신학함이 나오는 것이다. 학교만 장악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단과 국가를 장악할 정도가 되어야 한다. 신학은 신학교 담넘어까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외국신학자인 몰트만의 사회적 삼위일체에 목을 매고 있다. 증거되지도 않고 증명하기도 어려운 추상적인 이슈를 갖고 시간과 돈을 낭비하면서 신학을 사변화시키고 있다. 신학은 신앙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신앙이 신학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경건과 학문이지, 학문과 경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몰트만 한 명  초청할 돈이 있으면 개척 교회하나 세우는 것이 나을 것이다. 

 

오늘날 예장통합 직영신학대학교 일부 교수들은 배가 너무 부르다 보니 교단의 신학하나 나오지를 않고 있고 서구의 신학만 이식시키고, 기득권주의, 종속주의, 형이상학주의, 사변주의, 사대주의 신학에 종속되어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90살된 몰트만을 외치고 있다. 차라리 이종성을 외치는 것이 낫지 않을까?

 

교수들은 한국의 정신과 영혼이 깃든 신학하나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독일학자의 정신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나이홀드 니버가 문화신학을 만들어 냈다. 통합교단은 교수들이 통전적 신학, 통합신학, 온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신학적 태도와 신학적 방법론, 신학의 위치만 정립하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상황과 현실, 사회성, 역사성을 반영한 구체적인 신학의 내용이 없다. 교단에 적합한 특수신학하나 만들지 못한다.  방법론만 계속 얘기할 뿐이다.  신학의 구태의연함이다. 그러다 보니 창조적인 신학이 없는 것이다.

 

설교학, 조직신학, 성서학은 이미 사변화되어 성서는 비평을 받아야 하는 하나의 책으로 전락한 지 오래 이다. 설교학, 조직신학, 성서학이 하나님의 능력이 없는 사변화된 학문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불행하게도 역동의 신학이 아니라 사변의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하면 성경공부, 기도회도 인도하기 어렵고, 축귀, 전도, 능력하나 행하기 어렵다.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설교하나 만들기 어려운 상태이다. 

 

대부분 졸업생들은 강남 대형교회에 가서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이다. 내평생 소원은 장신대 교수들처럼 강남이나 강북 대형교회에 가서 당회장하는 것이다. 교수들의 '기득권 전이'와 '이원화 신학'은 죽은 신학의 결과이다. 죽은 신학은 결국 또 다른 기득권찾기를 하였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것이 선지동산에서 가르치는 교수들로부터 나왔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산 신학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졸업 후 '일자리 찾기 신학', '대도시 중심신학', '경쟁신학'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신학교가 미달되니 무능한 학생들이 대거 들어오는 것이다. 죽은 신학의 사회에 살고있기 때문에 신학교가 미달되는 것이다.   

 

통합교단의 신학교에서 위대한 설교가 하나 길러내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요즈음 잘 나가는 김양재, 소강석, 이찬수 같은 사람들은 모두 타교단소속 이다. 예장통합교단은 여성안수가 오래 전부터 실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김양재목사 같은 걸출한 여목사 하나 나오지 못한다. 학문이 경건을 앞섰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위대한 설교가 하나 길러내지 못한다. 사실상 이재철목사 이후 좋은 설교가 한 명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나 잘 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교수들의 전임자 금긋기 신학 

 

대부분 장신대출신들은 개척보다는 기득권상속에 관심이 많다. 처음부터 죽은 신학을 배워서 그렇다. 그러면서 교단은 세습방지법을 만들었다. 자신들이 기득권을 세습하면 로맨스이고 아들이 기득권세습을 하면 불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을 물려받으면 전임자의 뒤통수를 치거나 금긋기신학을 하는 것이 현 통합교단의 현주소이다. 네 명의 교수들이 전임자와 금긋기를 하였다. 소망교회, 두레교회, 광성교회, 한교회, 신일교회는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창조성 있는 신학, 역동성 있는 신학, 고난의 신학의 맛을  보지 못하고 상속, 기득권의 신학, 전임자금긋기 신학, 당회원 눈치보기 신학의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교수들은 다메섹보다 가말리엘을 선택했다.                

 

교수들에 대한 빅데이터 필요

 

일부 교수들은  장로교의 일치신학을 벗어나 천주교, 통일교, 민중신학, 근본주의 교리신학 등 초등학문을 선택하고 있다. 베드로와 바나바가 복음의 정체성에 벗어나듯이 일부 교수들의 신학이 교단의 신학의 정체성에 벗어난 상태이다. 그러므로 신학교 교수들의 개혁이 절실한 상태이다. 교수들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신학교육부가 전교수들의 박사학위 논문 한글요약 10 p 정도의 요약본, 최근 5년간 연구업적물, 해외논문기고물, 봉사하는 교회, 연봉, 직급 등에 대해서 데이타 베이스를 만들어 정보를 알고 있어야 한다. 

 

교수들은 산기득권의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창조적 신학, 역동적 신학, 교단적 신학, 상황적 신학, 한국적 신학두레신학, 머슴신학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고 서구의 신학만 계속 가르치고 되뇌이고, 모방하고 흉내내어 죽은 신학의 사회에 설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교단의 신학이 아니라 교수개인의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교단의 신학을 벗어난 교수들의 신학을 관리하지 않으면 교단은 망한다. 

 

한국기독공보의 개혁

 

마지막으로 교단의 언론으로서 역할을 해온 한국기독공보의 개혁이 절실한 상태이다. 일부 기자들은 이단감별사와 여의도를 홍보하고, 심지어 결혼과 빙모의 죽음까지 기사화하는 등 교단지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데다가 사회성과 역사성, 철학성, 장로교 정체성의 글이 거의 없고 탐사 기사, 비판기사, 견제기사, 개혁기사, 이정표기사 등도 없어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     © 기독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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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장창일과 같은 기자는 여의도기사를 쓰고 국민일보로 가는 등 기자들의 교단과 장로교의 정체성이 상실된 상태이다. http://www.lawnchurch.com/sub_read.html?uid=6225&section=sc50&section2=

 

그러므로 이사회는 기자들의 관리가 필요할 때이다. 대부분 지연관계로 인해 기자를 하거나 신학교출신인 사람들이 기자를 하는 사례가 많아 인문과학, 사회과학적 기사가 거의 나올 수 없는 상태이다.

 

그런데다가 사설이나 칼럼 등이 장로교단과 상관없는 글이 많아 사설과 칼럼도 대대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한국기독공보는 기자들을 더 보강하거나 교체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기자들로서는 교단이 요구하는 신문을 만들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러나 "한국기독공보는 한국교회를 향해 감시와 비판의 기능을 강화하고, 교회와 교회밖을 연결하는 소통의 장이 될 것이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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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국기독공보의 일부 기사를 보면 이단감별사와 여의도를 홍보하는데 앞장 서 왔다. 즉 일부 기사는 교단의 공보가 아니라 정윤석 공보(침례교출신), 최삼경 공보(합동출신), 조용기 공보(순복음출신)로서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한국기독공보는 교단공보지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다. 차기 사장이나 이사장은 한국기독공보를 개혁해야 한다. 조용기목사가 부인한테 학위를 받고, 최삼경의 장모가 별세하고, 정윤석이 결혼하는 것까지 기사화 하는 것이 한국기독공보의 정체성에 부합하는가?   

 

마을회복이 아니라 교단정체성 회복이 개혁 화두가 되어야

 

이상 교단은 법리부서, 신학교교수들, 한국기독공보의 개혁이 절실히 필요할 때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개혁의 대상은 대상은 법리부서, 교수들, 언론이다. 교단은 법리부서위원들의 교육관리, 신학교 교수들의 신학관리, 한국기독공보기자들의 기사관리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죽은 교단의 사회에서 산 교단의 사회로 갈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기득권과 사변을 추구하는 일부 교수들에 관한 것이고 장로교 정신과 봉사에 따라 수고하는 다수 교수들에 대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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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누가 썻는지 이기자 21/12/15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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